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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동무님
주 안에서 잘 지내시는지요.
이곳 한국은 3월 말에 이르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꽃샘추위로 불려지는 봄추위에 있어 기후가 쌀쌀했습니다만 어제 오늘은 많이 따뜻하여 봄날의 날씨를 보였으며, 아마도 이번 주말까지도 계속 지속될 듯 합니다.
님이 계신 영국은 어떤지요. 이곳 한국 보다는 그래도 기후가 따뜻할 것이라 여깁니다만, 그래도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님께서는 이번에 다음과 같이 질문해 주셨습니다.
“아가서 2:10 말씀의 뜻을 제대로 알고 싶습니다. 간혹 사람들이 말씀을 받았다는 말을 종종 들었었는데,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 무슨 뜻이고, 어떻게 말씀을 받은 것인지 아는지요.” 라고 질문하였습니다.
님의 이 질문을 대하면서 다음의 두 가지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아가서 2장 10절의 말씀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질문에서 아가서 2장 10절에 이르기까지 아가서에서 하시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곧 아가서에서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답변드리겠습니다.
또 하나는, “혹 사람들이 말씀을 받았다는 말을 종종 들었었는데,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 무슨 뜻이고, 어떻게 말씀을 받은 것인지 아는지요.” 라고 질문하신 것에 대해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님은 “아가서 2장 10절의 말씀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답변을 드립니다.
”
아가서 2장 10절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이 말씀이 주시고 있는 내용의 뜻은 내가 사랑하는 그분이 입을 열어서 내게 속삭이듯이 말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대여, 어서 일어나세요! 아름다운 나의 사람이여, 일어나서 나와 함께 갑시다!” 라고 말입니다.
아가서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님은 먼저 아가서가 어떤 설정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가서는 본서 1장 1절에서 밝혀주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솔로몬이 지은 노래입니다. ‘아가’란 책명은 “노래 중의 노래”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노래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성경이 ‘아가서’입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노래 중에 노래에 있은 것은, 창세기 1, 2장에서 흙으로 남자인 사람[아담]을 지으시고, 그 사람의 몸의 일부분으로 여자를 지어 아담에게로 나아오게 할 때 아담이 찬양한 노래인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라고 한 것을 소재로 하여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남녀 간의 사랑, 곧 신랑과 신부의 설정에 의해서, 아가서에 등장하는 두 인물인 혼인에 있는 술람미 여인과 이 여인이 사랑하는 님 - 이 님은 시골의 한 남자로서 포도원 농사를 지으며 양 떼를 거느린 농부요 목자일 것이다. - 과의 사랑을 솔로몬이 보면서 이것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 백성 간에 있는 사랑으로 묘사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아가서를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왕 간의 사랑의 노래로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혼인에 있어 신랑과 신부간의 관계에 있는 술람미 여인과 이 여인이 사랑하는 님 간에 있은 사랑을 솔로몬 왕이 보면서 그 두 사람 간을 사랑을 노래한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신랑과 신부 두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며. 하나님은 솔로몬 왕의 노래를 “노래 중의 노래”로, “노래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있게 하여서 솔로몬이 기록한 다른 성경과 함께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있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솔로몬 왕이 기록한 ‘아가서’에서 하고 있는 노래에 담겨 있는 ‘사랑의 말(언어)’을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 백성이 부르는 ‘세레나데’요 ‘아리아’가 되게 하십니다. 따라서 말입니다. 아가서에서의 신랑과 신부된 두 남녀의 애틋하고 각별하며 깊은 사랑을 보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 백성 간에 있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에서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새언약의 백성 된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입고 있는 사랑의 진정성을 아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아가서 2장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도록 합니다. 님은 아가서 2장에서 10절 한 절을 들었습니다만, 이 구절은 앞서의 1장 1절에서 2장 7절까지의 내용에 의해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아가서는 다음과 같은 여섯 단락의 문장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1) 1:1 / 머리말 (2) 1:2-2:7 / 첫 번째 단락 (3) 2:8-3:5 / 두 번째 단락 (4) 3:6-5:1 / 네 번째 단락 (5) 5:2-8:4 / 다섯 번째 단락 (6) 8:5-14 / 여섯 번째 단락입니다. 따라서 아가서 2장 10절은 아가서에서 세 번째 단락에 속해 있습니다.
아가서는 1장에서 신부 술람미 여인이 독백하는 노래로 시작되며, 신랑이 그 노래를 이어 받아 화답하는 형식으로 또한 노래합니다. 그리고 신랑의 노래는 다시 신부의 노래에 의해서 화답의 노래가 이어지구요. 이렇게 화답의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는 노래는 님이 제시한 2장 10절까지 이르러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즉, 신부의 노래(1:2-7), 신랑의 노래(1:8-11), 신부의 노래(1:12-14), 신랑의 노래(1:15), 신부의 노래(1:16-17; 2:1), 신랑의 노래(2:2), 신부의 노래(2:3-10)의 문장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부와 신랑 간에 주고받는 노래는 수려한 시적 문장을 통해서 서로 간에 깊은 사랑에 빠진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장에서 신부는 신랑을 맞이하는 기쁨에 있으면서 신랑은 자신에게 있어서 마치 임금과 같으며, 어서 그의 방으로 자신을 데려가 줄 것을 노래합니다. 그곳에 신랑이 있기 때문에 신랑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겠다고 합니다. 신랑에 대한 신부의 사랑은 포도주보다도 더 진한 향기입니다. 신부는 자신은 포도원을 지키느라 비록 햇빛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피부의 시골 신부이지만 솔로몬 성전의 휘장보다도 더욱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런 신부는 님이 양 치는 곳이 어디든지 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신부는 오직 신랑인 사랑하는 님에게로 온통 마음이 가 있습니다.
신부의 노래에 대하여 신랑은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신부에게 말합니다. 양 떼 발자국을 따라 오면 목자들이 쳐놓은 천막 그곳에 자신이 있을 거라구요. 그러니 어서 와서 자신의 곁 가까이에 있으면서 함께 염소를 길러보라고 노래합니다. 그렇게 신부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신랑입니다. 신랑은 신부를 위하여 사랑의 세레나데요 아리아를 부릅니다. 신랑이 사랑하는 신부는 마치 바로의 병거를 모는 암말과 같아서 두 볼에 흘러내린 머리칼은 윤기가 흐르며 아름답기가 그지없습니다. 구슬 목걸이로 단장한 신부의 목덜미는 너무나도 곱디 고와서 신랑은 자신에게 있는 금이란 금과 은이란 은은 몽땅 동원하여 녹여서 은장식이 아로 새긴 금목걸이로 만들어 신부의 목에 걸어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신랑과 침상에 함께 하는 신부는 신랑만한 또 다른 왕이 없습니다. 자신의 품에 안겨서 온 밤을 지새우는 신랑은 나드 향과 같고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꽃송이와 같아서 그 풍기는 향내가 온 방에 가득합니다. 신랑은 자신의 곁에 있는 신부의 눈에서 비둘기 눈동자 같이 사랑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사랑이 가득히 고인 눈으로 보며 어여쁘고 어여삐 여깁니다.
그러한 신랑을 향하여 신부는 신랑의 귀에 속삭입니다. “내 사랑 그대여, 정말 너무나도 멋져요. 나를 이렇게 황홀하게 하시는 그대 내 사랑이여, 푸른 풀밭은 우리의 침실이며, 은은한 향내가 나는 백향목은 우리집의 들보이고, 든든한 전나무는 우리 집 서까래예요.”
님이 질문한 아가서 2장 10절은 이렇게 신부가 신랑을 향하여, 그리고 신랑이 신부를 향하여 갖고 있는 마음인 사랑을 독백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노래를 주고 받는 것에서 신부의 노래의 한 소절로 있는 것입니다. 2장에 들어서서 신부의 이 노래에서는 샤론 들에 피어 있는 수선화요 골짜기 이곳저곳에서 보게 되는 백합화로 비유되어지는 신부에 대해 신랑은 가시덤불 속에서도 청초하게 피어 있으며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음을 보고 있으며(2:1-2), 신부는 신랑에게서 울창한 숲의 나무들 가운데 우뚝 솟은 사과나무처럼 뭇 남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늠름하여 믿음직스러움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기쁘고 사과 열매를 한 잎에 가득 문 것처럼 행복한 사랑의 향기를 느낍니다(2:3). 신부는 그러한 신랑에게 사랑에 빠져 마음의 병을 앓고 있음을 노래합니다. 신랑이 자신을 혼인잔치집으로 데려가 사랑스러워 못견뎌하는 눈길을 주며 바라봄에 신부의 마음은 마치 건포도를 먹고 힘을 얻는 듯 하며 맛있는 사과를 먹고 마음이 다 뿌듯함에 있는 듯이 흠뻑 빨려 들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간담이 다 녹아내리듯이 신부는 신랑에게 깊은 사랑의 병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한 신부는 신랑에 품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으며 암노루들과 들의 암사슴 그 무엇에 의해서도 깊은 사랑과 단 잠으로부터 방해를 받고 싶어하지 않습니다(2:4-7).
이러한 신부와 신랑 간의 사랑을 두 사람의 노래로 표현하여 솔로몬 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혼인에 있는 못 견디게 사랑하는 애정에서 있는 두 사람의 연합에 의한 한몸입니다. 이 연합에 의한 한몸 됨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여기에 그 어떤 것도 결코 방해가 될 수 없는, 그야 말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 2:3)이어서 “남자가 그 아내여 연합하여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었은즉”(창 2:24)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막 10:7)는 메시지가 강하게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한 이후 사람에게서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연합하는 결혼을 하여서 부부가 되고 가정을 꾸리더라도 결코 한몸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이는 사람에게서 일부일처가 아닌 일부다처(또는 일처다부)가 성행하며, 결혼하여서 부부가 되었을지라도 갈라서는 ‘이혼’과 다시 결혼하는 ‘재혼’이란 것이 있는 것에서, 그리고 부부로 있어도 서로를 지배하려는 욕망이 강하게 발휘되고 있으며 그 적대에 있는 것에서 그렇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며 살고 싶어 하지만 오히려 남편이 그러한 아내를 힘으로 지배하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창 3:16). 이는 말이죠.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너에게는 죄가 네 마음의 문 앞에 엎드려 도사리고 앉아 있다. 그 죄는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지 너를 집어 삼키고자 그 틈만 보고 있다. 그러니 너를 너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할 것이다.”(창 4:7) 라고 하신 말씀에서 보게 되는 타락한 사람에게 있는 부패한 죄의 본성에서 발휘되는 ‘죄의 힘’에 따른 것입니다. 사람이 결혼하여 비록 부부가 되지만, 이는 땅으로 불려지는 이 세상에 한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한 여자가 살아 생전에 계대결혼 제도에 의한 혼인수혼법을 따라서 일곱 명의 남편을 두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 일곱 명의 남자가 그들을 남편으로 두었던 한 여자의 남편이 아닙니다. 이는 일곱 남자와 결혼하였던 한 여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일곱 남자 그 누구의 아내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마 22:23-33). 그러니 말이죠. 남편이 한몸인 남편이 아니며, 아내가 한몸인 아내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한 이후의 남자와 여자인 사람은 결코 둘이 연합하여 한몸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있는 죄로 이것의 원리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회복은 결코 사람의 결혼으로서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결혼식에서의 설교에서는 마치 결혼을 함으로써 두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한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죠. 그러나 아닙니다. 두 사람이 연합하여 한몸을 이룸은 첫 번째 사람 아담 아래 있는 사람에게서는 있지를 않습니다. 이것의 회복은 두 번째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로소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인가 하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온 새로운 신랑으로서 자신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을 신부로 맞이함으로써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레 26:12, 계 21:3)를 언약 관계로 주시고, 이를 이루어가십니다. 아가서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 백성 간에 있게 되는, 하나님이 언약 백성의 하나님이 되시며, 언약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에서 첫 번째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서 보게 되는 두 사람이 연합하여 한몸이 될 것의 이해와 그 믿음을 두 번째 아담으로 오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있는 사랑에서 보게 하며, 그에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함에 있는 믿음에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며 아리아를 부르는 노래의 찬양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는 말이죠. 다시는 끊어질 수 없는 사랑, 다시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 사랑에 있습니다.
이러한 신부는 말입니다. 이제 아가서에서 세 번째 단락에 속하는 2장 8절에서 3장 5절에 이르러서 첫 부분에서 신부의 노래로 시작하는데, 사랑하는 님인 신랑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는 신부의 반응을 나타내는 노래를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어서 빨리 자신에게 오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신랑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산을 넘고, 언덕을 지나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 빠름이 마치 노루가 뛰는 것 같으며 어린 사슴이 뛰는 발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덧 다가와 담 밖에서 폴짝 폴짝 뛰며 자신을 찾아 어떻게 해서든지 보려고 창문을 들여다보며, 창살을 기웃거림과 같습니다. 신부는 거기서 들려오는 사랑하는 신랑이 자신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2:10)를 말입니다.
아가서 2장 8절에서 새로운 단락으로 시작되고 있는 신부의 노래에 있는 사랑하는 님인 신랑은 신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신의 마음에 있는 사랑을 마음껏 노래합니다. 신랑은 사랑하는 신부가 자신의 것임을 말하며 그 신부를 자기에게로 오게 합니다. 신랑은 밤이면 밤마다 신부를 향한 사랑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한 신랑은 마침내 신부를 맞이하고는 혹시나 놓칠세라 꼭 붙들고는 어머니가 자신을 낳으신 방으로 데려갑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신부는 사랑하는 신랑과 하나로 연합하여 한몸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둘이 연합하여 한몸이 될 수 있게 한 것은 둘 사이에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난지요! 사도 요한은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자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함에 있는 것인데(요일 4:2), 이를 통해서 말이죠.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졌다.”(요일 4:16, 17)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있게 된 사랑, 곧 하나님과 한몸 된 연합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을 믿는 자에게서 사랑의 실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사랑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목숨과 같이 사랑하는 상사병에 있게 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부 삼아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한몸으로 있게 하십니다. 이렇게 한몸된 신랑과 신부간에 있는 사랑이 어떻게 절절하게 말해지고 있는지를 아가서는 솔로몬 왕이 두 사람 간에 있는 사랑을 시와 노래로 부르는 것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님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드립니다.
님은 “간혹 사람들이 말씀을 받았다는 말을 종종 들었었는데,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 무슨 뜻이고, 어떻게 말씀을 받은 것인지 아는지요.” 라고 갖고 있는 궁금증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은 참으로 막막합니다.^^ 왜냐하면요. 말씀을 받았다는 이들이 말하고 있는 ‘말씀을 받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데, 그렇게 ‘말씀을 받았다.’는 것에서 이들이 말하는 ‘말씀’이라고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가 전혀 말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씀을 받았다.’는 말에서 보편적으로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진리를 염두에 두고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님이 들은 ‘사람들이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진리를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새겨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임을 전제로 하고서 답변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은 님도 인식하고 있는 것이겠습니다만,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신자, 곧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는 말이죠. 그리스도인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전해주시는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며, 이는 이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진리’에 대한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나아올 자가 없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님 자신을 이릅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진리는 생명에 이르는 구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고 있으며, 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길을 따름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을 맡은 자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복음]는 성경으로 기록되어서, 그래서 기록된 계시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에 주어지고 또한 맡겨졌습니다. 그러니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말하는 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복음]를 증거하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면서 다른 복음을 말하는 것에서 거짓 계시를 말하고 헛된 환상을 말하고 예언을 한다고 하고 방언을 한다고 하고 영서를 쓴다고 하고 하는 등 등의 따위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악한 영, 곧 마귀의 말을 받아 미혹하는 영이 하는 일을 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이들은 주님의 참된 영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말씀’을 받은 것이 아니고, 악한 영인 거짓된 영에 의해서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거짓말을 받는 것입니다.
가령 말이죠. 아가서를 설교하고, 이것의 이야기를 하면서, 앞에서 님의 질문에 대한 아가서를 설명을 드린 것에서 그가 말하는 말이 있지 않고, 아가서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또한 사기를 치는 말을 하는 것에 있는, 그래서 아가서를 가지고 인간의 지고한 사랑을 말하며, 그 사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인 부부가 갖는 사랑이 아가서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믿음의 형제간에 갖는 사랑이 어떻게 아름다워야 할 것인지를 이야기 하는 따위에서 말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설교나 이야기는 세상에서 ‘사랑학 개론’이란 것을 가지고서 강의하는 것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한갓 한쌍의 부부 간에, 두 남녀 간에 지고한 사랑을 이야기 해주는 것으로 아가서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님이 받는 것에 있겠는지요. 전혀 아닙니다. 이러한 것을 이야기 해주는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교회에 주어진 일이 없기 때문이죠.
님은 아가서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본의가 무엇인지를 보고 또한 알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님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에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님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는 진리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 말씀을 상기함에 있으며, 그 말씀이 지닌 의미를 되풀이 하여 생각하며, 그 말씀을 받듦에 있다면, 님은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받고 있는 자입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답변의 글을 마치겠습니다. 님이 알고자 하는 의도를 제대로 제가 이해하여서 답변을 드린 것이 되었는지요. 그러한 답변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혹, 그러하지를 못했을지라도 양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첫댓글 목사님 감사드립니다. 이 곳은 최근에 다시 추워져 눈이 내리기도 했지만, 어제부터 따스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