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철살인의 시에 응축된 자존감. “절망은 희망처럼 허망하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의 말이다. 삶이란 희망과 절망의 롤러코스터다. 만약 절망이 허망한 것처럼 희망도 허망한 것이라면, 희망이 실체가 없는 것처럼 절망도 실체가 없다. 희망도 없고 절망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희망을 품지도 말고 절망할 필요도 없이 당당하고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길을 가면 된다.
여기 희망과 절망을 넘어 자신의 삶을 거침없이 살다간 조선 최초의 모더니스트가 있다. 이덕무. 사상적으로는 북학파, 문학적으로는 백탑파로 조선 최초로 청나라의 근대적 지식을 받아들였으며 성리학적 규범의 문장을 버리고 동심과 개성과 실험과 일상과 조선의 시를 썼다.
간혹 가난 때문에 병 얻으니
내 몸 돌보는 일 너무도 소홀하네
개미 섬돌에도 흰 쌀알 풍족하고
달팽이 벽에도 은 글씨 빛나네
약은 문하생 향해 구걸하고
죽은 아내 좇아 얻어먹네
병 얻어도 오히려 독서 열중하니
굳은 습관 일부러 고치기 어렵네
-<여름날 병들어 누워> 전문
담담함과 초탈함이 느껴지는 시다. 이덕무는 조선의 정경을 그대로 담아낸 ‘진경 시’, 어린아이의 천진함 같은 ‘동심의 글쓰기’, ‘기궤첨신’이라 평가받은 참신하고 통찰력 있는 수많은 시와 산문을 남겨 멀리 중국까지 이름을 떨쳤고 ‘한시 4대가’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묵은 찹쌀로 담근 술 맛있게 김 오르니
털모자 쓴 글방 선생 날마다 찾아오네
낫을 찬 꼴머슴은 갈대 베다 쉬고 있고
냇가의 수건 두른 여인 빨래하며 노래하네
서리 내린 들녘에는 벼 쪼아 먹는 기러기 쫓고
볕 쬐는 언덕에는 고양이 숨겨 국화를 지키네
타향의 사투리는 객지의 시름을 잊게 하니
깊고 깊은 흙담집에 누워서 듣네
-<천안 농가에서 쓰다> 전문
봄철의 물색 너무 화려하여
이 모두 동군의 조화로다.
못의 연잎, 버드나무 잎에도 푸르고
언덕의 살구꽃, 복사꽃도 붉어라
바다에 구름 걷히니 수평선에 해 솟아
강가 누각에 바람 살랑 불고 채색 노을 흩어진다.
따뜻한 공기 시절을 따라 불어오니
돌아가는 기러기 떼가 먼 하늘을 비껴난다
-<모춘(暮春)> 전문
“소시부터 문을 닫고 들어앉아 글을 읽을 적에는 사람들이 그 얼굴을 잊을 정도였으나. 해마다 화창한 봄날이 되면 문득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 먼데를 관망하고 시와 술을 즐기면서 이곳저곳 거의 날마다 탐방을 계속하며 말하기를, ‘일 년 중 가장 좋은 풍경이 모춘(暮春) 10여일에 불과하므로 이때는 헛되이 보낼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 활발하고 호매한 기상을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이덕무의 <아정유고>에 실려 있는 글이다.
과천 가는 길에
밭 사이 가을 풍물, 눈이 온통 즐겁고
완두는 가늘며 기다랗고 옥수수는 거칠고 굵네
아구새 서리 맞아 반질반질 빛이 나고
기러기 추위 피해 그림자 늘어뜨렸네
소나무 장승 무슨 벼슬 얻어 머리에 모자 썼나
돌부처 사내인데 입술 붉게 칠했구나
저녁노을 질 때 절뚝거리는 나귀 재촉하니
외양간 앞 남쪽 밭두렁이 바로 큰길이네
-<과천 가는 길> 전문
18세기 조선을 ‘진경시대’라고 부른다. 진경시대의 문화 예술을 장식한 양대 축은 진경산수화와 진경시문이었다. 진경산수화가 조선의 산천과 강호의 실경을 그림으로 묘사했다면 진경시문은 언어로 표현했다. 그래서 진경산수화와 진경시문은 마치 한 뿌리에서 나온 다른 가지처럼 닮았다. 더욱이 진경산수화를 그린 화가와 진경시문을 지은 시인은 마음을 함께하는 벗처럼 친밀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겸재 정선이다. 그렇다면 진경시문의 대가는 누구였을까?
먼저 겸재 정선의 절친인 사천 이병연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사천 이병연의 뒤를 이은 진경시문의 대가로는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 백탑파 시인이 있다. 이런 까닭에서일까? 이서구는 이덕무의 시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진경을 묘사하여 시어(詩語)가 기이하다.” 자기 주변의 일상을 소품문(에세이)으로 표현하는 데 뛰어났던 최고의 에세이스트 이덕무는, 또한 시적 언어를 통해 일상의 풍경을 묘사하는 데에도 탁월했던 최고의 시인이었다.
백탑파 시인 유금은 이덕무의 시를 훗날 청나라에 가져가서 반정균에게 “이덕무의 시는 평범한 길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최고의 비평을 받아왔다. 한때는 이덕무의 시가 중국의 옛 시를 닮지 않았다고 비방하고 비난했던 사람이 이덕무의 시야말로 참된 조선의 시라고 찬미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당시 이름 없는 시인에 불과했던 이덕무의 시를 청나라까지 가져가서 비평을 받으려고 했겠는가? 옛것에 익숙한 사람에게 새로운 것은 거부감과 반감을 일으키기 쉽다. 하지만 새로운 것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는 순간 거부감과 반감은 호감과 수용 그리고 환호로 바뀐다.
이덕무는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항상 꾸밈 없는 진솔한 시를 썼다. 이 때문에 이덕무의 시에는 자연 사물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진실하고 솔직한 감성, 기운, 마음, 뜻, 느낌, 생각들이 잘 담겨 있다. 생동하는 이덕무 시의 생명력은 다름 아닌 동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째, 이덕무는 일상의 시를 썼다. 이덕무는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각자 나름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특별한 곳에서 시를 찾지 않았다. 이덕무에게는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시의 소재요 주제였다. 특히 이덕무는 사람들이 별반 가치나 의미가 없다고 무심히 지나치는 주변의 하찮고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시적 언어로 포착하는 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달인이었다.
셋째, 이덕무는 개성적인 시를 썼다. 개성적인 시를 썼다는 말은 옛 사람을 답습하거나 흉내 내는 혹은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시를 쓰지 않고 자신의 색깔이 담긴 시를 썼다는 뜻이다. 이덕무는 아무리 잘 쓴 시라고 할지라도 옛사람과 다른 사람의 시를 닮거나 비슷한 시는 가짜 시요 죽은 시라고 말했다. 반대로 비록 거칠고 조잡하더라도 자신만의 감성, 기운, 뜻이 담긴 시는 진짜 시요 살아 있는 시라고 했다. 넷째 이덕무는 실험적인 시를 썼다. 옛사람의 시를 닮지 않은, 또한 다른 사람의 시와 비슷하지 않은 개성적인 시를 짓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덕무는 그 방법을 실험적인 시, 모험적인 시, 도전적인 시에서 찾았다. 실험과 모험과 도전이 없다면 어떻게 새로운 시가 나올 수 있겠는가? 창작이란 새로운 글을 쓴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답습, 모방, 흉내가 창작의 적이라면 실험, 모험, 도전은 창작의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실험과 모험과 도전이 없었다면 기궤첨신奇詭尖新한 이덕무의 시는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섯째 이덕무는 ‘조선의 시’를 썼다. 앞서 살펴본 동심의 시, 일상의 시, 개성적인 시, 실험적인 시의 미학이 집약된 이덕무의 시학(詩學)이 바로 ‘중국 사람의 시’와는 다른 ‘조선 사람의 시’라고 할 수 있다. 당대 사람들이 시의 전범이라고 숭상한 이백과 두보 등 중국의 시는 중국의 풍속과 풍경, 중국 사람의 감성과 기운 그리고 뜻과 생각이 담겨 있을 뿐이다. 이덕무는 자신은 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조선의 풍속과 풍경, 그리고 뜻과 생각이 담긴 시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조선 사람이 중국 사람을 닮으려고 하거나 비슷해지려고 하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이덕무와 김수영 두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방가르드 정신이다. 아방가르드 정신의 본질은 ‘혁신’이다. 혁신은 이전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상상하고, 실험하고, 도전하고, 모험하고, 개척하고, 생산하고, 창조한다. 혁신을 위해 필요한 조건은 ‘불온성’이다. 불온해야 낯익고 익숙한 것을 거부하고 부정할 수 있으며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불온함’이야말로 ‘살아 있음’의 증거다. 글이 불온하지 않다면 그 글은 죽은 글이요, 사람이 불온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이다. 이덕무의 시는 때론 짐짓 뒷짐을 지고, 때론 언 땅에 무를 자르듯 단호하게 내리는 눈처럼 우리의 정신을 일깨운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영·정조 시대에 활약한 조선 최고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가난한 서얼 출신으로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나 스스로의 힘으로 학문을 갈고닦았다. 흔히 ‘책만 읽는 바보(간서치看書癡)’로 잘 알려졌으나, 지독한 독서 편력만큼이나 시에 대한 열정과 문장 실력, 탐구 정신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대단했다. 조선의 정경을 그대로 담아낸 ‘진경 시’, 어린아이의 천진함 같은 ‘동심의 글쓰기’, ‘기궤첨신’이라 평가받은 참신하고 통찰력 있는 수많은 시와 산문을 남겨 멀리 중국까지 이름을 떨쳤고 한시 4가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1792년 개성적인 문체 유행을 금지하는 문체반정에 휘말렸음에도 사후 정조대왕의 지시로 국가적 차원에서 유고 전집 『아정유고雅亭遺稿』가 간행될 만큼 대문장가로 인정받았다. 당대 최고 지성인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유득공과 교류하면서 ‘위대한 백 년’이라 불리는 18세기 조선의 문예부흥을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