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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밖에 있던 배매산성의 가치
비록 해발고도는 121m에 불과하지만 이 산에 오르면 남쪽의 만경강과 그 주변의 평원뿐 아니라 전주시 일대까지 훤하게 조망할 수 있다. 1990년대 후반 이 일대에 대규모 공단이 들어서고, 이 공단에 물을 공급하는 배수지가 배매산에 들어서게 된다. 주변이 모두 평야지대이므로, 높은 곳에서 물을 공급해야 하는 배수지의 최적지로는 배매산뿐인 셈이다. 이 배수지공사의 일환으로 지난 2000년 한 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다.
당시 발굴조사를 통해 배매산에 한성도읍기 무렵 축조된 대규모 건물지와 저장시설, 목책열 등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배수지공사가 끝난 후 이 지역은 상수원보호를 위해 철저하게 격리되었고, 배매산성은 또다시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2017년 (재)전라문화유산연구원은 배매산성의 가치를 파악하고 2000년 발굴조사에서 미진했던 산성의 조사를 위해 문화재청과 한국매장문화재협회가 지원하는 비지정매장문화재 발굴조사의 일환으로 발굴조사에 착수하게 된다.
발굴조사 전 측량조사를 통해 배매산성의 성곽이 산 정상부와 8부 능선일대에 축조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배매산성의 성곽은 경사가 가장 급한 북쪽 구릉부는 산의 정상부와 경사면이 만나는 지점에, 서쪽사면과 동쪽사면 일대에는 산의 8~9부 능선을 따라 축성되었다. 성곽 내부는 공간도 매우 협소하고, 식수를 얻을 우물이나 계곡도 존재하지 않았다.
베일 벗은 배매산성
발굴조사 결과 배매산성은 흙과 잡석으로 단단하게 축성한 토축산성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성곽은 성곽이 축성될 지점의 자연지형을 대규모로 절토하고 그 위에 단단한 점토와 잡석을 이용해 층층이 쌓아 올려 완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곽은 지점에 따라 축성기법을 달리하며 축성하였다. 성의 안쪽은 잘게 부순 쇄석으로 비교적 엉성하게 수평 성토한 반면 성 바깥쪽은 점토를 주 성토재로 활용하여 매우 단단하고 치밀하게 축조하였다.
조사단은 이러한 축성방법이 성 안쪽과 바깥쪽의 공간활용도가 달랐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하였다. 즉 성 안쪽은 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는 병사들의 생활공간을 조성하기 위한 평탄지 조성이, 성 바깥쪽은 방어를 위한 토루의 축조가 주목적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성곽은 크게 4차에 걸친 공정을 거쳐 완성되었는데, 이는 성곽이 치밀한 설계 아래 축성되었음을 알려준다. 특히 성의 중심부는 직경 25cm 내외의 나무기둥을 1m 간격으로 촘촘히 세우고, 점토를 켜켜이 쌓아 올린 판축기법을 사용하였다.
그동안 전라북도 백제유적에서 판축기법이 사용된 사례는 익산 미륵사지, 왕궁리 유적, 제석사지 등 백제왕도와 관련된 유적뿐이었는데, 전북지역에서 처음으로 토성에서 판축기법이 사용되었음을 밝힌 셈이다. 이와 같은 발굴조사 결과 배매산성은 축성기법과 출토유물 등을 고려했을 때 호남지역 최초로 한성도읍기에 축성된 백제산성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배매산성의 축조 의미
배매산의 바로 남쪽 평야지대에는 완주 수계리 신포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완주 삼봉지구 택지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2016년 발굴조사를 통해 약 200기에 가까운 마한계 분구묘와 백제토광묘가 분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배매산성과 가까운 완주군 용진읍의 상운리에는 호남 최대의 마한계 분구묘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완주 상운리유적은 묘제는 마한계 분구묘이지만 유물은 백제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따라서 배매산성과 그 주변에는 산성이 축조되기 전인 5세기 초반~중반 경 무덤에 백제유물을 부장하던 친백제계 세력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배매산성은 백제 중앙집단이 산성 축조 이전부터 유대관계를 맺고 있던 지역을 기반으로 축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그동안 배매산성을 백제 중앙세력의 전북지역 진출과 연관 짓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산성은 주민들을 동원해서 축성해야 하므로 대규모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는 통치체제가 완성되어야 한다. 즉 산성의 존재는 산성 축조 이전에 지역을 통치하는 정치집단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배매산성과 가까운 완주군 용진읍에는 구억리산성이라는 또 다른 한성도읍기 백제산성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배매산성의 축조는 백제 중앙세력의 전북지역 진출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직접적인 통치제도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글. 박영민(전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