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음기사로 쓴 평전 2009/11/01 16:42 정운현
말년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어제(31일) 85세로 타계했다고 합니다.
그는 박정희 정권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 등을 지냈습니다.
세인들은 그를 두고 박 정권 시절 제2인자였다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어제 오늘 언론에서 그의 삶에 대한 다양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더군요.
역사적 평가를 떠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이니 그럴만은 합니다.
직장 따라 서울로 올라온 이후 저는 근 30년 째 독립문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250만원짜리 단칸방에 차린 저의 첫 보금자리는 서대문구 냉천동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일대가 헐리고 언덕배기를 밀어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습니다.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인근에 있던 감리교신학대학 운동장에 가서 놀기도 했는데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이 단순히 그냥 대학이 아니더군요.
<연합뉴스> 등 일부 언론의 이후락씨 부음기사 가운데 그의 경력사항을 보면,
“1946년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임관...”이라는 내용이 있는데요,
이는 엄격히 말하면 사실과 다릅니다.
즉, 군사영어학교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은 조선경비사관학교입니다.
미군정청이 통역요원과 임시 장교양성 목적으로 세운 군사영어학교의 당시 모습
그러면 군사영어학교(약칭 軍英)는 무엇일까요?
해방 후 일제가 물러가자 이 땅에 진주한 군대는 미군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영어를 쓰고 말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미군정은 ‘영어를 쓸 줄 아는 한국인 군인’이 시급히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세운 것이 바로 ‘군사영어학교’인데, 이는 교명(校名)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군사영어학교는 말하자면 미군정의 통역관 및 '임시 장교양성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군정은 해방 4개월 뒤인 1945년 12월 5일,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자리에 군사영어학교를 개교하였습니다.
초대 교장은 미군정청의 리스 소령이었구요, 부교장은 한국인 원용덕(元容德)이었습니다.
참고로 원용덕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졸업 후 만주군 군의장교를 지낸 자로,
나중에 그는 한국현대사에서 ‘정치군인의 원조’라는 오명을 쓰게 되죠.
군사영어학교의 초기 정원은 60명이었습니다.
이는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출신에게 각각 20명씩을 안배한 것이었는데요,
좌익계나 광복군 출신들은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 초기 기수들은 거의 없습니다.
반면 이후락처럼 일본군과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 대거 군영에 입교했는데요,
1945년 12월 5일 제1기 입교한 그는 이듬해 3월 23일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그는 불과 5개월 정도 군사교육을 받고 육군 장교가 된 것입니다.
현 육사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는 이 해 5월 1일 창설되었습니다.
현 육사의 전신으로, 1946년 5월 1일 개교한 조선경비사관학교 정문 모습
3공 시절 이후락씨의 역할, 위상에 대해서는 여기서 반복할 필요 없어 보입니다.
그는 박 정권의 최고 실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그의 역할 가운데 하나는 박정희의 ‘사상 감시자’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즉, 박정희는 남로당 가입 전력으로 군 방첩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는데요,
결국 군사재판에 회부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는 장군으로 진급하는 과정에서도 군 선후배들 여럿이 보증을 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졸지에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당시 박정희는 미국이 주목할만큼 군부 내의 유력 인사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권력자 박정희의 사상 전력이 걱정이 됐던 거죠.
미국은 박정희가 집권한 후에도 한동안 그의 사상을 의심하였다고 합니다.
군영 출신의 한 예비역 장성은 수 년 전 필자에게 이런 증언을 했습습니다.
“이후락은 미국이 보낸 박정희의 사상 감시자였다”
그 분의 얘기로는 박정희도 그런 사실을 알았을 것이 분명하며
아마 그런 선에서 박정희가 미국과 타협을 했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이후락씨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건 그의 ‘무거운 입’입니다.
물론 이 표현에는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면에 무게가 더 실려 있습니다.
만약 그가 고백, 참회하면서 증언한다면 경천동지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3공 시절의 각종 정치사건의 절반은 아마 그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 그가 ‘김대중 납치사건’을 지시했다는 문서가 미국서 발굴됐다는 보도가 있었죠.
그는 3공 시절의 수도 없이 많은 사건들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 그가 정보기관 책임자였다고는 하나 이런 처신이 꼭 바람직한 건지는 의문입니다)
1972년 5월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악수하는 이후락(왼쪽)
그의 부음이 전해진 지 채 하루도 안 돼 그의 직계가족들의 해외재산이 논란이군요.
그 액수 규모가 무려 5000만 달러라고 하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재미 블로거 안치용씨는 최근 효성그룹 회장 자녀들의 미국 내 재산을 폭로해 주목을 받았는데요,
안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이후락 씨 후손들 관련내용 일부를 인용해 보면,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인물은 이후락으로 그의 직계가족, 즉 자녀들의 미국 부동산 매입은 쉽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들은 김형욱과 한국의 재벌일가가 살고 있는 뉴저지주 알파인에 호화주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뉴욕 맨해튼의 대형빌딩, 퀸즈의 빌딩, 최근에는 뉴저지주 엣지워터의 대지와 주택을 구입하는 등 부동산 규모는 최소한 3천만 달러에서 5천만 달러에 달합니다
이후락의 가족 중 외동딸과 사위, 그리고 이미 작고한 둘째 아들과 생존한 며느리가
미국에서 살고 있으며 그의 큰 아들도 미국에서 부동산 소유 흔적이 나타납니다.”
박정희 정권 18년을 초기부터 거의 같이 했으니 긴 세월입니다.
그 때만 해도 지금처럼 투명하지도 않았고, 또 정보도 독점됐었으며,
여권 발급은 물론 해외여행조차 당국의 허가를 얻어야 하던 시절입니다.
어쩌면 그가 10. 26 후 은퇴한 이후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제부터라도 그의 삶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내려져야할 것입니다.
이후락씨의 빈소 영정사진
- 이 상 끝 -
첫댓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은 조선경비사관학교입니다.라고 하는군요.
그리고 이후락씨는 대권까지 생각하였지만 신군부에 날라가죠.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님 건강요.
새삼스럽게 옛날 생각이 떠오릅니다! 우리 조상 님들의 선산과 윗토땅을 헐값에 반 강제로 빼앗아 갔으며 또한 대일 청구권을 비롯하여 그 많은 돈을 떡주무르듯 했던 당시의 실세들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처절합니다! 당시에 본인은 초등학교를 졸업과 동시에 부친은 돌아가시고 배움의 길은 막히고 말았습니다만 누구 하나 도움을 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약육강식으로 일관하던 그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그 오욕의 역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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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빈님 건강요. 역사적이나 제 경험으로 자고로 "조국과 민족을 위한다"라고 주둥이 함부로 여는 사람(이완용등)들 치고 도둑놈 아닌 사람없고 양신(위징 등)및 충신들은 대체로 부귀를 탐하지 아니 하었으며, 매국노나 간신들은 부귀(출세, 권력등)를 탐하였습니다. 우리 주위에 무엇을(법과 정의, 회사와 사원, 단체 등) 위한다 라고 하는 사람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대체로 답이(진실인지 거짓인지)보입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정독 했습니다 건강하시고 존경 감사
님 건강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