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면 이기는 전쟁'을 했던 '가이(지금의 야마나시현)의 호랑이' 다케다 신겐의 땅 고후에서의 아침을 맞았다.
신겐은 52세로 노부나가 도쿠가와 연합군과 싸우는 중 병사했다. 그는 본인의 죽음을 외부에 일체 알리지 말라고 했다. 그의 장례식은 결국 3년 뒤에 치러지게 된다.
신겐의 이른 죽음을 이곳 사람들은 안타깝게 생각한다. 다케다 신사로 가는 큰 도로명을 그의 이름으로 했다. 뿐만 아니라 상점 병원 약국 관청 등에도 그의 이름이 들어 있다. 이곳 사람들에게 진정한 영웅은 오직 한 사람 신겐이다.
고후역 앞 다케다 신겐의 동상
다케다 신사와 그의 묘소 그리고 근처에 있는 정실부인의 묘에도 들렀다. 측실도 수 없이 많았지만 역시 본부인 묘소만 번듯하게 만들어져 있다. 고후역 앞의 신겐의 동상을 사진에 담았다.
그래도 야마나시까지 왔는데 이곳 와인 맛은 보고 가야지. 역사 2층의 상점에서 구입한 일회용 컵 화이트 와인을 벤치에 앉아 홀짝거렸다. 이것도 여행의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후지역 네 정거장 전에 내려걸었다. 어떤 젊은이에게 길을 물었다. 자기가 시간이 있으니 직접 안내하겠다고 한다. 나이를 물으니 15살 중3이라고 해서 놀랬다. 조숙한 친구다.
그의 장래 희망을 물어보았다. "약대를 졸업하고 제약회사에 가거나 아니면 공무원이 되고 싶어요.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역에서 소개받은 게스트 하우스에 전화를 거니 주인이 직접 차를 가지고 달려왔다. 처음 있는 일이다. 젊은 주인이 서글서글한게 인상이 좋다. 마침 비도 내려 도움이 되었다.
이곳에는 유럽 친구들이 많이 투숙하고 있다. 산티아고를 다녀온 덕분에 그들이 낯설지 않다. 자연스럽게 콩글리시로 대화를 한다. 이것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성과다.
내가 있는 방에 베드가 8개 있는데 모두 서양 아가씨들이다. 하나 비어 있던 침대는 나중에 오토바이 여행을 한다는 일본인 중년 남자가 차지했다. 그는 나와 갑장이라 반가웠다. 고베에 산다고 했다.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는 30대 후반의 일본 여성이 명랑하다.
그녀도 집이 고베인데 이곳까지 아르바이트하러 왔다. 투숙객이 남겨 놓은 위스키를 마시며 갑장 친구 나카야마도 함께 밤늦도록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한 때 체중이 80킬로를 넘었는데 치열한 다이어트로 40킬로대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살이 쪘으면 싶은데 아무리 먹어도 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빵을 좋아해 전국의 소문난 빵집을 찾아 다닌다.
네덜란드 아가씨가 내일 9시 30분에 요가 공개 강습을 한다고 광고한다. 나도 국선도 수련을 하는 사람이라 흥미가 있었지만 다음날 아침 출발이 빨라 불참한다고 양해를 구했다.
아침에 숙소를 나서니 눈 쌓인 후지산 봉우리가 햇살 속에 선명하다. 마치 아이스콘 같다. 떠나는 내게 인사하겠다고 나카무라가 일찍 일어났다. 그가 후지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신후지역에서 신칸선을 타고 가다 오다와라역에서 내려 요코하마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 길이 옛날 에도로 가는 메인 도로인데 동해도라고 불렸다. 지금도 도로번호가 1번이다.
동해도길을 걸으며 우측으로 보이는 태평양 바다
오른쪽으로 태평양 바다가 보인다. 저 바다로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 군단이 나타나 일본인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페리는 일본의 개항을 요구하는 국서를 내밀었다.
격심한 내부 갈등과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결국 일본은 나라의 문을 활짝 열었다. 1867년 메이지 유신으로 사무라이가 사회 지도층으로 변신하며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요코하마까지는 거리가 멀어서 중간에 전철을 탔다. 요코하마역 관광안내센터에서 소개받은 게스트하우스는 세 정거장이나 떨어진 이시카와쬬역 인근에 있었다.
숙소를 찾아가는데 차이나 타운이 가까워서인지 중국사람들이 많다. 동네가 어둡고 우범지대 같다. 찾다가 지쳐서 마침 자전거로 순찰을 돌던 순경에게 길을 물었다.
지도를 보고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가방에서 두툼한 지도책를 꺼내 보더니 그가 웃는다.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그곳에 내가 애타게 찾던 게스트하우스의 작은 간판이 보였다.
체크인을 끝내고 건너편 6층 건물로 갔다. 복도 좌우로 많은 방을 만들어 놓았다. 마치 벌집 같다. 엘리베이터도 없다. 나는 3층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작은 방에 들어가니 이불 한 채가 달랑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마치 옛날 우리나라 여인숙 같다. 근처 한국 슈퍼에서 저녁과 아침거리를 사 왔다.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다. 이곳은 일본 속의 작은 중국이다.
아침에 역으로 가는 길에 술주정꾼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보인다. 꼭 시비를 걸어올 것만 같아 발걸음을 빨리 했다. 오늘은 가와사키역까지 전철로 가서 그곳에서부터 걸어서 도쿄에 입성한다.
전철을 기다리는데 건너편 홈에 초등학생들이 모여있다. 모두 8-9명인데 1학년으로 보이는 꼬마 2-3명이 섞여 있다.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아침의 상쾌한 날씨 속에 싱그럽다.
이제 갓 입학한 1학년 동생을 언니 형들이 보호하며 같이 통학을 하는 것이다. 아마 학교에서 그렇게 팀을 짜 준 모양이다. 1학년 꼬마를 전철로 통학시키는 부모가 대단하다.
전철 안을 둘러보니 초등학교 2, 3학년 정도만 되어도 혼자 다닌다. 아침에 출근하는 어른들 틈에 끼어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다. 치안이 안전하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독립적인 아이로 키우려는 부모들의 의지가 느껴진다.
가와사키에서 다리 하나 건너니 이미 도쿄다. 드디어 도쿄 입성이다. 먼 길을 걸어왔다. 지방과 수도에도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점인 니혼바시를 향해 걸었다.
긴자거리를 점령한 중국인 관광객들
긴자(은좌)에 들어섰다. 이런 복장으로 스틱을 짚으며 긴자를 걸을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긴자는 도쿄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우리 명동 같은 곳이다. 도쿄에 가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리는 곳이기도 하다.
1600년대 이곳에 은화를 주조하는 은좌를 설치했다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런데 일본 사람은 가물에 콩 나듯하고 중국 관광객들의 목소리만 들려온다. 교바시와 니혼바시로 들어가니 '아! 이곳이 일본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조용하다.
니혼바시에서 50대 후반 남자에게 길을 물었다. 그도 도쿄 사람이지만 이곳에는 자주 오지 않아 잘 모르겠다며 열심히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한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니 자기 부인이 한류팬인데 가끔 서울에도 간다고 했다.
금년 2월에 오픈했다는 아사쿠사의 게스트 하우스는 모든 것이 새로웠고 깨끗했다. 도쿄의 친구 준코가 고르고 골라서 평점이 가장 높은 곳이라며 예약한 곳이다.
요코하마의 슬럼가(?)의 숙소에 있다가 갑자기 대도시의 번화가로 나온 느낌이다. 내 옆 침대는 중국 상하이에서 온 아가씨인데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짧은 숏 팬티 바람으로 게스트 하우스 안을 활보하고 다닌다. 하기야 산티아고의 알베르게에서는 팬티와 브래지어 바람으로 왔다 갔다 하는 덩치 큰 서양 아가씨들도 보았다.
그녀는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스마트폰에서 영어로 번역한 문장을 보여 주었다. "서울에 하루 다녀왔어요. 스킨케어 관련 화장품을 많이 샀어요"라는 문장이었다.
저녁에 한국경제신문 도쿄 특파원 김동욱 기자를 만나 저녁식사를 하며 요즘 도쿄의 분위기를 들었다. 국내의 반일정서로 일본의 상황에 대한 팩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일관계를 정상화시키는 데는 대통령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국익을 기준으로 삼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지향해야 한다. 양국 정상이 가능한 자주 만나야 한다. 문 대통령이 전임 박근혜 대통령의 대일 외교를 답습하는 점이 아이러니다.
금년 6월 오사카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담에도 참석하여 아베 총리와도 만나기를 기대한다. 국제정치는 이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한일관계의 각종 현안은 고질병이다.
조급하게 풀려고 해서도 안 되고 그런다고 풀리는 문제도 아니다. 만지면 만질수록 커진다.
그냥 양국 정상이 만나서 웃으며 손을 잡는 모습만 보여줘도 훌륭한 한일 정상외교이다.
11월 일왕의 즉위를 하늘에 신고하는 행사 '다이조사이'에도 우리 대통령이 참석해주었으면 좋겠다. 일본 국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다시 없는 기회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일 셔틀 외교'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미래지향적 대일파트너십 공동선언 '등 좋은 교과서가 있다.
다음날 아침 평시 걸을 때와 같은 복장으로 숙소를 나섰다. 양국 간 과거사 문제의 핵심 현장인 야스쿠니 신사 앞을 지나 이번 즉위한 일왕의 거처 황궁 근처를 걸었다.
그리고 일본 경제의 중심지 경단련 회관 등 주요 기업들이 본사를 두고 있는 오테마치를 지나 유라쿠쵸역으로 걸어갔다. 다케자와 전 전무가 일한경제협회로 안내했다.
일한경제협회 식구들과 오찬
일한경제협회 일한산업기술협력재단의 임직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사진도 찍고 밥도 먹었다. 금년 5월 개최 예정이던 한일경제인 회의가 최근의 정치적인 갈등의 영향으로 가을로 연기된 바 있다.
"50년 동안 한 차례도 빠짐없이 열렸던 이 회의를 한 차례 연기한 것으로 일본 정부에 대한 체면치레는 했다. 가을에는 반드시 개최해 양국 민간경제계가 관계 개선에 앞장서 주기를 바란다"는 내 생각을 전했다.
고레나가 전무는 선배들의 관심과 협력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반드시 가을에는 회의가 개최되도록 하겠다며 같이 건배를 들었다.
식사 후 다케자와 전 전무와 차를 한 잔 나누었다. 일본 국민의 일왕에 대한 정서를 생각할 때 일전의 문 의장의 발언이 매우 부적절했으며 한일관계를 후퇴시켰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최근의 일본의 분위기를 '한국은 싫은데 한국인은 좋다'라고 표현했다. 역시 동경대 출신의 엘리트다운 적절한 표현이다. 한일관계에 대한 정치인의 발언은 언론에 의해 침소봉대되어 전해지며 그것이 국가 이미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저녁에는 1년 만에 준코를 만났다. 우리는 작년 산티아고 순례 도보 여행길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이곳이 산티아고가 아니어서 포옹은 자제하고 반가움의 악수만 나누었다.
그녀의 안내로 우에노에 있는 정 사장의 사무실로 갔다. 재일 한국인 여자 사업가인 그녀는 우에노 일대에 여러 개의 스포츠용품 매장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재일 한국인 사업가와 결혼하면서 일본에 온 지 50년이 되었다고 했다. 성공한 사업가답게 얼굴이 후덕하고 자신감에 넘친다.
사업에는 문외한이었던 그녀가 삼십여 년 전 남편이 별세한 후 엉겁결에 사업을 물려받았다. 오늘날은 그 규모가 7배나 커졌으며 일본 스포츠용품 업계에서 그녀는 이미 큰 손이 되었다.
그리고 한일 양국의 각종 스포츠 행사도 지원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한국수영연맹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으며 행사장에서 박태환 선수로부터 꽃다발도 받았다고 했다.
10여 년 전 정 사장에 대한 특집기사를 만드는 과정에서 준코는 그림을 담당했다. 당시 준코 등 몇몇 관여한 친구들이 정 사장과 친구가 되어 지금까지 친교를 이어오고 있다.
준코가 삽화를 그려 준 내 책《산티아고 순례자들》이 작년 11월 발간되었다. 한글을 모르는 그녀는 정 사장을 찾아가 자기에 관해 쓰인 부분의 번역을 부탁했었다.
정 사장도 내 책을 읽고 싶다는 말을 준코로부터 전해 듣고 책을 우송해주었다. 그녀는 지금 70대 중반인데 작년까지도 마라톤 풀코스를 뛰었다고 한다.
마라톤이 자기 체질에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준코는 이제 손녀와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걷도록 권유하고 있다. 그녀는 작년 영국 옥스퍼드 의대에 다니는 손녀와 함께 뉴욕 마라톤대회에 참가해서 완주했다.
정사장 준코의 친구들과 고깃집에서
정 사장이 내게 뭘 먹고 싶으냐고 물었다. 고기가 먹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직 이십여 일 남은 일정 에너지 보충이 필요했다. '조조엔'이라는 고깃집으로 갔다.
그녀가 코스요리를 주문했는데 맛도 있고 양도 푸짐했다. 이곳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곳이다. 체인점도 여러 개가 있는 도쿄에서는 유명한 식당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준코의 친구이자 정 사장과도 자주 만나는 가요코와 사토도 함께 했다. 즐거운 만찬이었다.
내일은 준코와 함께 오쿠타마산길을 걷는다. 가요코도 함께.
허남정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