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거리를 좁혀라
아가 2:8-13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와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창조절 첫째 주일이다. 우리 교회는 9월부터 창조절로 지킨다. 창조절은 일 년 중 마지막 절기이다. 하나님의 달력은 모두 7개의 절기가 있다. 순서대로 말해보자.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그리고 창조절’이다.
창조절은 하늘의 기운이 변하는 시기이다. 올 여름 역대급 무더위를 겪었고, 또 최근 태풍의 위협과 수해로 불편을 치루었기에 다가 온 계절의 변화를 더욱 실감난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계절의 존재는 얼마나 큰 복인가? 24절기를 정한 선조들의 지혜는 이런 당연한 계절의 변화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계절이 자연스런 변화를 잃는다면 그 때는 위기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저마다 인생의 스텝이 있는데, 그 균형이 깨지거나 꼬이면 병들거나 흔들리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시 내가 발 딛고 있는 자연과 공존하는 만물들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가족과 이웃과 함께 공생하는 법, 사랑하는 법을 더 잘 익혀야 한다.
그것이 창조의 질서요, 창조적 삶의 지혜이다.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과 맞추며 살아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 사랑, 그 은혜, 그 자비, 그 손길을 느끼며 살아갈 때 진정한 기쁨과 평화가 있다.
창조절의 시간은 내 몸이 하나님의 질서를 기억하고, 내 마음과 기도로 다시 습관화하는 기회이다. 그런 부르심에 응답하는 여러분이길 바란다.
1)
아가(雅歌)는 사랑의 노래이다. 이 책은 두 젊은 연인의 사랑을 묘사한 시이다. 그 사랑은 계절의 변화와 함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봄을 스치는 바람과 함께 깊어 간다. 사랑은 얼마나 큰 설레임인가? 두 젊은이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믓하다.
그런데 경건한 책인 성경이 이런 성애적 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니 놀랍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부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30세가 되기 전에 아가를 읽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19금(禁)이 아닌, 30금(禁)인 셈이다.
그 이유는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가 서’를 읽으면 단지 남녀 간의 성적인 사랑의 노래로만 받아들일 위험성 때문이었다. 물론 성경은 인간의 성은 하나님의 창조이며, 인간의 삶을 더욱 온전하게 하신 하나님의 복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창조질서의 중요한 부분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아가에서 표현한 남녀 간의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의 관계로 이해하였다. 주님과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처럼 그렇게 고백하고, 선물을 준비하고, 축복하고, 감사로 가득하다.
아가는 하나님도 나를 이렇게 사랑하신다고 고백한다. 마치 상사병에 걸려 임을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기다리시고, 즐거워하신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최고의 명절인 유월절 제8일에 아가를 낭독한다.
한겨레신문 목요판에는 ‘esc’란 별지가 있다. 즐겁게 보는 이유는 우리 세대는 도무지 상상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의 관심사를 매주 담아내기 때문이다. 빠지지 않는 것이 연애상담이다. 어려서부터 짝짓기가 자연스러운 젊은이들이 남녀관계에서 무엇을 고민하는지 읽을 수 있다. 매주 다양한 사례를 상담하는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밀당’이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랑은 밀당이 기본이더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랑의 거리와 간격을 좁히느냐이다.
오늘 본문도 밀당의 한 장면이다. 앞부분(8-9)은 여자 목소리이고, 뒷부분(10-13)은 남자의 목소리이다. 먼저 여자는 멀리서 들려오는 남자의 인기척을 듣는다. 그 소리는 외침도, 함성도, 호소도 아니다. 다만 자연의 자취처럼 들린다.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8).
그리운 임은 너무나 기다렸기에 이젠 기척만으로도 알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분은 나를 만나기 위해 마치 바람처럼 빠르게 들판을 달리고, 작은 산을 넘어 오고 있다. 너무나 그리워하기에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와 발걸음은 거리가 멀어도 충분히 구별할 수 있다.
마침내 기다림이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어느덧 내게 가까이 와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9).
얼마 전 수요기도회에서 어느 집사님이 회중기도를 하는데, 기도 속에서 ‘아가’의 구절을 인용해서 신선하였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를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아 3:1-3).
우리 집사님은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님의 시선은 늘 우리를 향하고 계셔서 늦은 밤 침상에서도 거리에서도 또 사람들 사이에서도 우리를 그리워하며 찾아다니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은 때로는 자연의 섭리로 또 때로는 우리와 관계된 형제자매의 따뜻한 미소로 우리에게 증거하고 계십니다. 단 1초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시나 우린 늘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2)
초대교회 교부 암브로시우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 영혼의 자세를 이렇게 비유하였다. 그 모습은 ‘강가에 앉아 신랑을 기다리는 젊은 여인’과 같다. 눈앞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이 가득한 존재이다.
아가는 내 삶의 현장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의 감미로움과 하나님을 사모하는 인간의 심경을 절절하게 나타낸다. 하나님은 가까이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나를 인도하시려고 어느새 내 곁에 계신다.
이렇듯 내 사랑하는 분은 간절한 사랑으로 찾아온다. 그 음성은 내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 소리는 평화를 가져오고, 사람의 마음을 각성시키고 순종하게 한다. 그 음성은 충동적이 않다. 오히려 고요히 우리를 설득하신다.
그 분은 나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10, 13)라고 불러주신다. 나를 사랑스레 불러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하시며, 당신과 ‘함께 가자’고 손을 내미시는 분이다. 우리를 부르시고, 동행 길에 초대하신다.
그러나 인간의 불신과 두려움은 하나님과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종종 미풍을 태풍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우리 곁에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데 여전히 아득한 거리감을 느끼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 거리를 좁혀야 이해를 하고, 거리를 좁혀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다. 그런데 거리를 좁히기가 쉽지 않다. 그 거리는 좁히기 위해 하나님이 나를 찾아와 주신다.
마치 사랑하는 임처럼 산을 넘어 들판을 지나 빠른 바람처럼 내 삶의 터전으로 방문하신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간절히 부르시고, 나를 기뻐하신다. 주님은 언제나 나를 반기시는 분이다.
성경의 거리를 보자. 내가 죄 때문에 하나님과 멀리 거리를 둘 때 그 거리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사 55:9).
그런데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기 전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과 거리는 ‘돌 던질 만큼 거리’(눅 22:41)였다.
그런데 기도하기 시작하면 즉시 함께 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 거리는 물리적으로는 멀게 느껴지지만, 언제나 가까이 계신다. 예수님은 마치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달려 나오시는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비유하신다(눅 15:20).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다. 이미 나와 함께 하시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내 심리적인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초대에 기꺼이 응해야 한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10, 13).
3)
사랑은 언제나 새로운 계절이다. 하나님은 내 인생에서 새로운 계절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친밀한 연인처럼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다. 사실 인생의 계절을 잘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내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신앙은 지식이 아니다. 신앙의 요체는 변화다. 곧 신앙은 사랑으로 표현되는 변화된 삶이다. 복음은 그것을 믿는 사람의 삶과 만나 가슴을 울릴 때, 삶을 바꿀 때, 기쁜 소식이 된다.
우리 인생에도 새로운 계절이 온다. 계절이 바뀌는 이유는? ‘설레라’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삶은 새로운 절기를 맞는다.
내게 찾아온 사랑은 나에게 무어라고 말하는가?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10, 13).
일어나 함께 간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오던 자리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삶의 자리를 떠나 자기와 동행하자고 한다. 사랑은 내 삶의 중심을 바꾸는 것이다. 사랑을 하면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그 사랑 때문에 일어나서 떠날 수 있다. 십자가와 부활신앙을 지녔다면 그러한 모험도 감수할 수 있다.
이번에 스위스 취리히한인사랑교회 40주년 행사에 초청을 받아 독일과 스위스를 방문한다. 40년 전 스위스 땅에 한인들이 모여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니 놀랍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내게 40년의 의미를 곰곰이 따져보았다. 이번 기회에 알게 된 것은 올해 내가 소명을 받은 지 40년이란 사실이었다. 1978년 8월에 나는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지난 40년 나는 얼마나 많이 밀당을 하였는가! 과연 나는 하나님과 거리를 좁히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나도 깊이 묵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라기는 여러분도 하나님의 사랑을 늘 기억하고, 기뻐하며,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