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나라이자 신비가, 성자의 나라인 인도는 고대뿐 아니라 현대에 들어서도 간디, 타고르, 오르빈도, 라마나마하리쉬, 사이 바바 등 수많은 성자들을 배출해왔지만 그 중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고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차례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려진 출판물을 통해 그 이름이 친숙해진 현대 인도의 신비가를 두 명 꼽는다면 끄리쉬나무르띠와 오쇼 라즈니쉬일 것이다. 그 중 먼저 끄리쉬나무르띠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끄리쉬나무르띠의 생애
지두 끄리쉬나무르띠(Jiddu Krishnamurti)는 현대의 성자들 가운데서도 매우 특이한 삶을 살다간 사람이다. 1895년 남인도의 빈한한 바라문 가계에서 태어난 끄리쉬나무르띠는 12세경 신지학회(神知學會, Theosophical Society)에 속하면서 투시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리드비터에게 발견되었는데 이때 리드비터는 끄리쉬나무르띠에게서 특별한 오라(영적인 빛)를 보았다고 한다.
그때 신지학회는 불타나 예수, 끄리쉬나와 같은 인류를 구원할 큰 스승이 머지않아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인물을 찾던 차에 끄리쉬나무르띠를 발견하였고 당시 신지학회의 회장이었던 안니 베산트 여사는 12세의 끄리쉬나무르띠를 그의 동생과 더불어 양자로 입양했다. 그후 1911년엔 ‘동방의 별의 교단’을 세우고 끄리쉬나무르띠를 그 교단의 교주로 앉혔다. 아직 소년에 불과했던 끄리쉬나무르띠는 주위의 커다란 기대와 관심 속에서 옥스포드 유학을 비롯한 특별한 교육과 심리적 압박을 느낄 만큼의 과잉보호를 받으며 성장했다. 이 제2의 메시아, 인류의 구세주를 위해 네덜란드에 커다란 장원이 기증되었고, 호주의 시드니엔 미래에 그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강연장이 특별히 건설되었으며, 화려한 꽃들로 장식된 마차도 기증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최고의 영예와 물질적 안락, 수많은 추종자들의 공경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젊은 끄리쉬나무르띠의 마음은 만족되지 않았고, 외부의 강요로 자신이 떠맡고 있는 역할에 대한 회의가 점차 커져갔다. 드디어 1929년에 끄리쉬나무르띠는 제2의 예수로서의 그의 역할을 위해 조직된 ‘별의 교단’을 해체할 것을 선언하였고 동시에 그에게 기증된 모든 재산과 영예도 포기하였으며, 더불어 신지학회로부터도 탈퇴하였다. ‘별의 교단’의 해산을 선언할 때 행한 그의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리란 길없는 대지이다. 어떤 종교, 어떤 종파, 어떤 길에 의해서도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 무한하고 어떠한 조건도 없고, 어떠한 길에 의해서도 도달될 수 없는 진리를 조직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자유이며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는 그러한 존재이다. 부분도 상대적인 것도 아니며, 영원한 진리 자체이다. 그때문에 나는 나를 이해하는 사람들도 자유로운 존재이기를 바란다. 나에게 맹종하고, 언젠가는 종교나 종파가 되고 말 감옥을 만들려 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사람들이야말로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것이다….”
이후로 그는 모든 전통과 권위, 도그마와 조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독자적으로 진리를 추구하였고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수 많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메세지를 전달하고 청중의 마음을 일깨워주고 새로운 의식세계를 열어주고자 하였다. 그의 강의와 대화, 그리고 원고들은 수십권의 책으로 출간되었고 그의 사상에 관한 해석과 논문들도 상당수 출간되어 있다.
끄리쉬나무르띠의 사상
끄리쉬나무르띠는 한마디로 철저한 반항아였다. 전통과 권위, 도그마와 기성종교의 신념체계에 맹종하기를 철저히 거부하고 홀로 길없는 길을 죽는 날까지 걸었던 그는 진정한 의미의 구도자였고 선객(禪客)이었다. 어떠한 종류의 기성 종교에 의존하기를 거부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가르침과 유사한 종교가 있다면 불교라고 그 자신이 말했듯이, 그의 가르침은 선불교와 유사한 점이 많고, 구태여 비교하자면 소크라테스적인 자기탐구, 문답법과 ‘평상심이 곧 도’라고 말하는 조사선을 결합시킨 형태에 가깝다.
그는 무엇보다도 각성을 강조한다. 우리 대부분은 깨어있는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감수성이 마비된 둔한 의식상태에서 과거의 경험과 주입된 교육내용, 믿음, 도그마 등에 의해 조건지워지고 습관화 되어 반작용에 따라 기계적으로 표현하면 무병의 업력과 그것이 남긴 잠재적 습기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끄리쉬나무르띠에 따르면 삶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스승이고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기성의 신념이나 교리체계란, 과거의 사람들의 경험이 굳어진 낡은 개념들의 집합체로서 그것을 통해서는 결코 현재 이 순간의 생동하는 삶의 실상을 포착할 수 없다. 각성된 마음으로 삶을 직접 바라보고 직접 체험해 보지 않으면 삶이라는 진실을 획득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삶은 환경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단일한 과정의 두 측면이다. 안과 밖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기성종교가 바깥세계를 등지고 히말라야의 동굴이나 암자에 숨어서 내면의 세계만을 탐구하기를 권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우리의 마음이 곧 이 세계이다. 세계는 내 마음의 표상이다. 이 세계, 이 삶은 다채롭고 수수께끼와 같다. 그 안엔 한없는 슬픔과 고통, 비애가 있고 이기적 탐욕과 야심, 증오, 시기가 있는가하면 전쟁과 죽음, 가난, 불평 등… 등등이 함께 어울려 흘러가는 과정이다.
끄리쉬나무르띠는 이 삶의 사실을 편견이나 가치판단 없이, 선택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권한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예를 들면 분노가 일어날 때 우리는 분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대신 ‘나는 분노를 느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분노를 떠나서 ‘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가 먼저 있어서 그 ‘나’가 분노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고가 ‘나’라는 분리된 실체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허구적인 ‘나’는 전체를 있는 그대로 지각하는 대신 ‘나’를 확대시키고 만족시켜 주고 이익을 주는 것인가, 아닌가라는 가치판단에 따라 선택된 것만을 자기 중심적으로 지각하게 된다. 사고가 만들어 낸 ‘나’가 작용하는 방식의 바탕엔 과거와 기억이 놓여있다. 기억에 따르는 반작용이 반복될 때 습관이 형성되고 사고란 바로 과거와 그 속에 축적된 기억의 산물이다. 우리 마음은 기억과 습관에 의해 조건지워져 있기 때문에 삶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도록 편협하고 왜곡되고 둔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을 순간순간 신선하게 보고 느낄 수 있는 감수성과 각성이 마비된 채 과거의 기억에 바탕한 반작용(reaction)을 반복한다. 거기엔 새로운 배움이나 이해 대신 낡은 사고패턴에 따르는 고정된 반응 밖에 없다.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이것이 속박이고 윤회이다.
우리 마음은 갖가지 허구와 비본질적인 것들로 가득 짐지워지고 오염되어 있어 실재를 바로 볼 수도 없고 삶의 진실과 아름다움, 신비함도 느낄 수 없도록 속박되어 있다. 허구적인 ‘나’는 항상 안전의 위협을 느끼고 두려워하고 있으므로 권력이나 필요이상의 재물을 추구함으로써 안전을 찾고자 몸부림치며 혹은 스스로 진리를 추구하는 대신 기성의 종교가 제공하는 신념체계에 맹종함으로써 안전을 찾고자 한다.
끄리쉬나무르띠는 과거 즉 기억과 사고로 부터의 완전한 자유,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전통과 도그마와 습관과 조건화된 마음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거듭하여 역설하였다. 이것은 또한 불교가 목표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부터 벗어나 순간순간을 각성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무분별지의 의미이다.
끄리쉬나무르띠는 자신의 유일한 욕망은 사람들을 가두고 제한시키는 심리적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그들 안에 있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생명력이 기쁨과 사랑과 아름다움으로 표현되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마음이 기대고 있는 심리적 목발들을 제거함으로써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항하고 거부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기성의 종교나 정치적 권위는 우리가 자유롭고 독립적이 되기보다 순종적이고 양처럼 온순히 따르기를 바란다.
그러나 스스로 삶의 진실을 탐구하려는 의지를 버리고 두려움 때문에, 심리적 안전 때문에 권위나 외적인 규칙과 전통이나 도그마에 순응하는 것은 종교적인 마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끄리쉬나무르띠는 말한다. 그것은 오히려 마음을 조건화시키는 반종교적 마음이다. 종교적인 마음이란 민족이나 지방, 특정한 조직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간순간 새롭고 각성된 의식이며, 과거에 의해 제약되고 고립되고 타신조를 가진 집단과 갈등하고 충돌하는 마음이 아니다.
인류는 종교의 이름으로 가장 비종교적인 행위를 수없이 저질러 왔다. 우리가 보통 종교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결과이지 우리 자신의 직접적 체험이 아니다. 우리 마음이 기존의 신념과 주입된 도그마와 과거에 의한 조건화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때만이 진실을 경험하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지각할 수 있다. 혼란스럽고 비참할 때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권위나 독재자에게 귀의한다.
자기인식이 시작될 때 종교적 마음도 시작된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시작함이 곧 지혜의 시작이며 또한 명상의 시작이라고 끄리쉬나무르띠는 말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바라는 이상이나 관념으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사실로서의 자기가 중요한 것이다. 마치 과학자가 사실을 다루듯이 삶의 전체를 사실로서 자각하는 것이 종교적 탐구이다.
명상이란 자기인식의 과정이다. 의지적 노력으로 어느 한 관념이나 대상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축소시키는 것은 명상이 아니라 또 다른 조건화이고 제약이다.
끄리쉬나무르띠는 그의 목표인 모든 개인의 심리학적 자유와 진리에서 각성을 위해 특정한 수행방법을 권하지 않는다. 의지적 노력에 의해 만뜨라니 기도니 예배니 하는 의식을 반복하는 것은 진리를 깨우치게 하기보다 습관과 조건화를 강화시킬 뿐이라고 한다. 이런 점은 선에서 돈오점수가 아니라 돈오돈수와 상통하는 것같다.
끄리쉬나무르띠의 가르침은 석존의 가르침과 같이 그때 그때의 상황에서 그가 접하는 개개인의 문제를 함께 생각하고 대화하면서 그들의 마음이 살아있는 실재를 직접 체험하도록 돕는 것이었지 지금 여기에서의 삶과 괴리된 추상적인 철학이론이나 관념적인 사유체계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는 번뇌에 오염된 마음의 작용을 폭로하고 이해시킴으로써 마음이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돕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