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원 金日元(1880 ~ 1910)】 "일제기관 파괴, 군수품을 조달"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외남면(外南面)(현 남정면) 양성리(陽成里) 출신이다. 당시 일제 측 보고서에 따르면 31세로 1880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정환직(鄭煥直)이 이끄는 산남의병부대(山南義陣)에 들어가 경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가 산남의병부대를 창의하여 영천군(永川郡)을 비롯한 경주부(慶州府)·영일군(迎日郡)·청송군(靑松郡) 일대에서 활동하던 중, 1907년 9월 초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여러 장령(將領)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 후 1907년 10월 9일 아버지 정환직이 산남의진을 재편성하고 대장으로 추대된 뒤, 동년 10월 18일 북동대산(北東大山)으로 진영을 옮기고 청하(淸河)·영덕·청송 일원에서 군사와 군량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1907년 10월 29일 윤흥곤(尹興坤)·김수곡(金水谷)을 비롯한 의병 백 수십 명과 함께 총과 칼을 휴대하고 경북 흥해군(興海郡) 읍내에 들어가 우편취급소를 습격하여 소장 일본인 이치바라 타메타로(市原爲太郞)와 그 가족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보관하고 있던 300여 원과 군수품을 노획하고 근처에 있는 경무분파소·우편취급소 등 13동(棟)의 집을 방화·소각하였다.
1907년 11월 3일 경북 신령군(新寧郡) 읍내에 들어가 군청에서 총 백 수십 정을 탈취하고 경무분파소와 순검의 집을 소각하였다. 같은 달 4일경에는 경북 의흥군(義興郡)으로 들어가 경무분파소에서 총 수백 정을 탈취하고 분파소와 순검의 주택 3동을 소각하였다. 그 후 윤흥곤(尹興坤)·김수곡(金水谷) 등의 의병들과 함께 11월 15일경 흥해군(興海郡)으로 들어가 순사 1명과 순검을 총살하고 군수품을 모집한 뒤 군청을 비롯한 가옥을 불태웠다. 11월 16일경에는 청하로 들어가 순검의 옷 등 관급품과 주민들의 돈 100원을 군자금으로 갹출하였다.
1909년 12월 28일에도 동지들과 함께 총칼을 휴대하고 경북 의성군(義城郡) 점곡면(點谷面) 서변동(西邊洞)에 거주하는 김휘종(金輝鍾)에게 군수품을 징수하였으며, 그 날 밤 점곡면 월촌동(月村洞)에 거주하는 박동양(朴東陽)에게 군수품을 징발하였다. 이때 일본인 처단, 식민기구 습격 방화, 친일파 단죄, 군자금과 군수품 징수 등의 의병활동을 벌였다.
이 일로 1910년 7월 5일 붙잡혀 1910년 8월 22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동지 윤흥곤·김수곡 등과 함께 방화, 강도살인, 강도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교수형(絞刑)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그 해 9월 20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7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대구감옥에서 10월 31일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