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는 제대로 쓰겠습니다.
임진대전 이전 조선을 조사한 자료와 조선지도가 구마모토성에 남아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이 조선 전역에 스파이를 침투시켜 조사한 자료로 약 1천2백만석 정도로 고쿠다카를 할당했다고 합니다.
경상도 280만석, 전라도 227만석, 충청도 97만석, 경기도 72만석, 강원도 40만석, 황해도 77만석, 평안도 196만석, 함경도 202만석 입니다. (물론 과장이 심한 수치입니다. 그러나 당시, 분명히 할당은 이렇게 했습니다.) 일본의 경우, 1591년 주나곤이던 도요토미 히데나가(히데요시의 의붓동생으로 도요토미가의 대들보였던 천재관료)가 죽기 직전에 완료한 총 고쿠다카 조사량이 1801만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도쿠가와 가문은 관동 8주(히타치 제외, 아와 포함) 255만석, 우에스기 가문 아이즈령과 사도섬을 합쳐서 120만석, 모리가문 서국 11개국을 포함 총 112만석 입니다.
좀 더 세부적으로 보면, 시나노국 51만석, 사가미 30만석, 가이국 22만석, 에치고 40만석, 히젠 35만석 정도로 나옵니다.
고쿠다카 계산시 1석을 인구 1인이 1석씩의 쌀과 보리 생산량 (실제로는 80kg 짜리 2석)에 맞먹는다고 계산하고 1만석 다이묘는 1만인을 지배한다고 가정하고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수치는 이와 맞지 않아서 당시, 일본 인구가 1200만. 조선인구는 600-700만 정도로 보면 타당하다고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 정도를 보고 군사 동원력을 기준으로 해서 일본이 1만석당 250의 군인을 동원한다고 치면 45만의 병력동원이 가능하고 조선의 경우 일본식으로 하면 30만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물론 실제로 일본은 33만을 당시 상비군으로 보유하고 있었고, 조선의 경우 15만 정도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진대전과 그 후 50년간의 격동기를 거친 후 1664년 일본은 다시 국세조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합니다. 이 때는 1635년경의 무가제법도니 참근교대제가 정착된지 30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재조사로 약 2700만석으로 고쿠다카가 50%증가합니다. 인구도 당시 1.6배 이상 증가 약 2000만까지 증가합니다. (당시 프랑스 인구가 2000만으로 유럽 전체 인구의 1/5) 반면 조선의 경우, 혹심한 전쟁피해를 입는 바람에 인구가 300만까지 감소했다가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경종 4년에는 780만까지 증가합니다. 이 때 조선의 경우, 대충 100-120만결까지 농토복구가 완료됩니다. (숙종조 원년 기준) 두 나라의 생산력을 비교할 시. 일본의 경우 총 5400만석(2700만석 x 2)이고 조선의 경우 3000만-3600만석 입니다. 농업생산력을 비교한다면야 조선과 일본의 비가 1.8 : 1-1.4 정도가 됩니다.
하지만 근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농업생산력도 되지만 상업생산력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1660년부터 1662년까지 조선은 3년 연속 흉년에 극심한 전염병피해를 입었습니다. 하멜표류기에 나오는 33인 중 11인이 이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사망합니다. (실제로 이 당시 실록을 보면 거의 처참합니다.) 이 때문에 조선의 상업생산력은 1651년 허가된 사채(광물의 사적인 채굴 허가)로 모처럼 부흥하다가 크게 한 풀 꺾이게 되고 숙종 후기 상평통보의 대량발행과 은의 유입기까지 줄곧 정체하게 됩니다. 반면 당시 일본은 미쓰이그룹이 창설되었습니다. (1673년 시조인 미쓰이가 에치고야라는 일본 최초의 정찰제 직물점을 냅니다) 그리고 낭인들 중 상당수가 직인이 되면서 무사도 정신을 장인계에 크게 불어넣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본제가 세계제일이라는 관념의 시초가 바로 여기에 시작됩니다. 흔히 말하길 이시다 바이몬의 세키몬 학파가 일본인들의 노동지향에 불을 붙였다고들 하지만, 최근에는 17세기부터 이미 그 기초가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과 조선의 상업자본력을 비교해야 할 거 같습니다. 조선을 기준으로 보면 한양의 공인이나 경상의 경우, 관허상인적 성격이 있기 때문에 예외로 치고, 일단 개성의 송상이나 동래 내상, 평양 유상, 의주의 만상등이 있었는데 이들이 다루는 총 거래량이 은으로 치면 1년에 한 수만냥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즉 아직도 상업자본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일본의 경우, 참근교대제와 잦은 막부의 자금공출령 때문에 화폐흐름이 조선보다는 훨씬 원활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아들인 히데요리가 오사카 번 다이묘 (65만석)이 될 때 남긴 자본금이 약 24만냥이었습니다. 이거 때문에 한동안 막부가 소진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17세기 후반만 해도 각종 거대상인단이 나타납니다. 특히 오사카의 거상들은 평균 약 10만냥 단위의 거래량을 자랑했고, 이 시기부터는 벌써 각 번에 자금을 대여했다가 지불정지때문에 파산하는 거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1년에 일본에서 나돌아 다니는 자본금이 조선의 최소한 10배 이상을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광물생산량에서도 일본은 조선을 압도했습니다. 사도금광만 하더라도 1년에 1천매 약 1만냥의 금을 생산했는데 이 정도 물량은 1년에 300kg정도라고 합니다. 게다가 아키타 번의 구리도 1년에 100만냥 이상을 생산했을 정도이고 은의 경우, 17세기 내내 세계 최대의 은산국으로 알려질 정도로 20만 톤이나 생산해 냈습니다. 반면 조선의 경우, 조공 부담도 있기 때문에 사채라 해도 최대한 억제했고 심지어 구리의 경우는 아예 일본에서 일부러 사다 쓸 정도였습니다. ( 이 때문에 전황에 쉽게 대처하지 못합니다.) 조선 세종조에 단천에서 1년에 은을 1천냥 정도 캤는데 조선 후기에는 이보다는 몇 배는 많이 캤지만 일본의 물량 앞에는 거의 세발의 피 수준입니다.
1629년 서구가 일본산 구리 때문에 엄청난 파장을 겪은 사건이 있습니다. 당시 동인도회사의 자회사가 일본산 수출용 구리를 히라도 상관에서 전량 매입하는 바람에 당시 스웨덴산 구리가격이 절반 이하로 떨어져서 유럽에서 한동안 스웨덴의 구리외교가 도저히 힘을 쓰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또한 전에 쓴 하멜표류기 물목이 당시 일본에서는 30만냥으로 계산하여 조선에 통고했습니다. 당시 동양제국 어디를 가도 한 번에 30만냥을 처리할 만한 항구는 나가사키 뿐이었습니다. (중국은 아예 해금정책문제로 개항자체를 하지 않음) 아무리 1년에 남만선이나 화란선이 1-7척밖에 기항하지 못했더라도 이 정도면 일본의 경제규모가 국토크기나 인구규모에 비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많은 자료를 가지고 쓰고 싶지만 너무 많이 쓰면 골치 아파서 이 정도로 경제적인 분야에서 일본의 근대화 역량을 보았습니다.
첫댓글 일본의 인구에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1600년경 일본의 인구가 1200만명이라는 것도 꽤 오래전의 주장이며 요즘에는 이것보다도 더 적어서 1000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수치는 '에도시대 일본은 근대화를 이루는 과정이었다'라는 우익계열의 책에서도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에 꽤 신빙성이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됩니다. 1600년의 인구가 1000만명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오히려 에도시대의 인구급증을 근대화의 움직임으로까지 근거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에 참고가 될 것입니다.
당시 조선의 인구를 보면 예전과는 달리 1000만명이 넘어선 것으로 추정하지 않는지요? 좋게 말하면 '보수적인 학자들'조차도 조선의 인구에 관한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의 인구에 관해서 1000만명이 넘어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1400만명까지 보고 있기도 하지만 현재 보편적으로는 1200만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의 인구에 관해서 선입견이 많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일본은 전통적으로 인구가 많았던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인구가 급증한 것은 에도시대의 일이며, 그 이전까지 일본의 인구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한다면 조선보다 인구가 더 적었으며 인구밀도로 따지면 더욱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위에서 경제의 발달과 근대화의 관계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에도시대 근대화라는 것의 주장은 '에도시대에 근대화의 움직임이 있었고, 서구열강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자체적으로 산업혁명을 일으켰을 것이다'입니다. 단순히 경제의 발달과 산업혁명이라는 것의 차이를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애초부터 근대화라는 발상 자체가 1453년 비잔틴제국이 멸망한 이후부터 르네상스 시절에서 시작해서 근대화가 유럽에서 있었다..라는 가정 하에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고대-중세-근대'라는 도식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대-중세-근대'라는 것은 성립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서구의 학자들이 근대화라는 개념을 영국이 아닌 '유럽의 근대화'라는 것처럼 설명해서 유럽의 발달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다보니까 이러한 잘못된 개념이 발생되었는데 기본적으로 산업혁명은 유럽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닌 영국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근대화를 일으킨 영국은 고대가 없었습니다. 영국이라는 땅에서 고대가 있었지 앵글로색슨족이 영국에 거주하면서 고대제국을 건설하지 않았습니다. '고대-중세-근대'라는 도식은 여기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일본의 경우 역사학계에서 아직도 '고대-중세-근대'라는 도식에 맞춰서 역사를 설명하는데 그러한 설명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산업혁명이나 근대화라는 것은 여러 나라의 교류로 인해서 발생하는 종합적인 반응이지 혼자만의 자체적인 발전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산업혁명은 지구상에 단 하나의 국가에서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산업혁명도 영국이라는 나라의 역사가 진행된 동안 주변의 나라와 교류를 하면서 발생한 것이지 혼자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을 일본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과거의 도식에서 맞춘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에도시대의 경제가 발달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문화가 발달했다'라는 식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근대화가 진행되었다'라는 것은 전제 자체에 잘못을 발생시킵니다. 유럽에서 산업혁명을 일으켰다는 발상에서 잘못 출발했기 때문에 산업혁명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일어나지도 않았던 시대부터 있었던 네델란드와의 교류가 마치 '산업혁명 이후의 유럽사회와 교류했던 흔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송나라가 아무리 경제가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산업혁명을 일으키진 못했습니다. 지폐를 사용했던 몽골제국도 산업혁명을 일으키지 못했죠. 기존의 역사학계에서 말하는 근대화가 산업혁명이라는 것은 과거에 존재했던 국가간의 소득에 관한 차이를 너무 확대추정한 이유도 있습니다. 아무리 송나라가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송나라의 국민소득이 아프리카의 부족보다 그다지 높지는 않았습니다. 산업혁명이라는 것은 그러한 소득의 차이를 급격하게 벌려놓았던 것이기 때문에 반대로 생각하면 그 이전에는 차이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것은 경제학에서 과거의 소득을 추정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정리를 하겠습니다. 첫째, 위의 일본 인구와 조선 인구에 관한 수치는 정정이 필요하다(이것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니 없어도 됩니다) 둘째,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도 고대는 없고, 근대화도 여러 나라와의 교류로 인한 종합적으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독자근대화'라는 이론은 전혀 논의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셋째, 1800년경까지(비서구권은 전통시대까지) 각 나라의 국민소득은 별로 차이가 없으며 이것의 차이는 산업혁명의 결과로 인한 것이다.
넷째, 근대화를 설명하면서 근대화 이전 조선과 일본의 생활수준 차이는 많았다고 설정하는 것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결과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다섯째, '일본의 독자근대화'라는 것은 '영국의 독자근대화'에서 출발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것이(영국의 독자근대화) 부정되는 이 시점에서 '일본의 독자근대화'를 주장하는 것은 부모가 이미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말도 안되는 것이다. 마지막, '근대화의 자체발생'이라는 것은 다른 학문에서는 소멸된 이론인데 역사학계에서만 유독 고집하는 시대역행성 이론이다'
dsagd 님 댓글이 너무 길어서 읽고 파악하는데 조금 불편합니다. 차라리 본문처럼 답글로 수고스럽지만 정리해 주시면 보다 내용 파악이 용이하고 또한 다른 분들의 짧은 댓글의 여유가 있을듯 합니다만...^^*
원칙에도 댓글이 3개 이상 될 시에는 답변 형식으로 해야 한다고 되어 있으니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소호금천씨님 말씀대로 dsagd 님 댓글을 답글 형식으로 정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