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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1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20주)
“거룩함”을 향하여
출32:1~14; 빌4:1~9; 마22:1~14
요즘 우리가 출애굽기를 읽고 있는데요, 출애굽기를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출애굽기는 “출애굽 이야기”로 시작해서 “성막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뜻을 가집니다. 다시 말하면, 출애굽기는 파라오의 집을 짓는 히브리 노예들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집을 짓는 하나님 백성의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출애굽기는 출애굽 이야기인 전반부는 읽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내산 전승 단락”이 시작되는 19장부터는 읽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특히 25장부터 마지막 40장까지는 성막에 관한 법(성막법)이 나오는데, 성막을 이렇게 지으라는 지시와 성막을 그대로 지었다는 실행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이 부분으로 들어가면 사실 정독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따분합니다. 이 성막 지시와 실행 사이에 오늘 우리가 읽은 “금송아지 사건”이 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에 대해서는 우리가 몇 번 다루었지만, 오늘 한번 더 “금송아지 사건”을 다루겠습니다. 오늘은 특히 성막이 의미하는 “거룩성”의 관점에서 살펴볼까 합니다.
이집트의 노예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여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받지 못하고, 먼저 시내광야 있는 시내산 기슭에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며,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파라오의 집(파라오의 곡식저장 창고; 비돔과 라암셋)을 짓던 히브리 노예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거룩한 백성”, “스굴라”(보물)라고 불러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거룩한 백성”, “스굴라”라는 정체성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다고 바로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계명과 각종 규례, 곧 “율법”이 주어집니다. 훈련, 연습이 필요한 것이지요. 율법, 토라는 법적인 의미보다는 “길을 가리킴” 혹은 “가르침”이라는 “안내” 혹은 “보호”의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안내받는 안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안내서는 출애굽기를 뒤이은 레위기와 민수기10장 10절까지 이어집니다. 이 부분을 “시내산 전승단락”이라고 했는데, 이 부분은 율법서의 가운데 토막에 해당하면서, 우리가 쉽게 읽기 힘든 여러 계명과 규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율법(즉 하나님 백성 안내서) 안에서 도피하거나 떠돌지 않고 한 곳에 머무는 정주, 변화에 마음을 여는 정진, 말씀에 귀 기울이는 순명의 연습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내산에서 2년간의 머무름의 의미라고 했습니다.
저는 율법서 안에 있는 “시내산 전승단락”을 이런 비유로 정리해 봅니다. 젊은 남녀가 만나 선을 보고, 그 다음에 결혼예식을 통해 백년해로할 것을 약속하고, 그 다음 신혼방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죠. 그 신혼방에서 더 내밀한 사귐을 갖습니다. 부부는 점점 더 온전한 부부로 성장해 갑니다.
마찬가지로 먼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선을 봅니다(19장). 그 다음에 언약을 맺고(20~24장) 그 다음에 신혼방, 즉 성막을 짓습니다(이것이 출애굽기 후반부에 나오는 성막법이죠). 파라오의 창고를 짓던 노예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집(성막)을 짓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성막은 하나님과의 사귐의 장소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그곳에서의 구체적인 사귐의 규례들이 나옵니다. 이것이 레위기와 민수기 10장까지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의 장소로 지어진 성막은 3단계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막의 가장 바깥은 “성막 안뜰”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이곳은 60개의 기둥에 세마포 휘장이 둘러쳐진 곳인데,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성막 뜰에는 번제를 드리는 제단과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정결례를 행하는 물두멍이 있습니다. 그 안뜰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따로 천막 형태로 세워집니다. 성소는 제사장이 들어가는 곳으로 여기엔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떡을 올려놓는 진설병상과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진 금등잔(메노라), 그리고 향을 피우는 분향단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성소와는 구분되는 지성소라는 장소가 있습니다. 성막에서 가장 깊고 내밀한 곳으로, 대제사장만 1년에 한번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여기엔, 십계명 돌판이 보관되어 있는 언약궤가 있는데, 이 언약궤는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도 불립니다. 이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는 가장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러니까 성막은 성막 뜰에서부터 성소를 거쳐 지성소까지, 점점 더 거룩해지고 내밀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성소로 들어갈수록 거기 쓰이는 재료는 금과 같은 순수한 재료가 쓰입니다. 이런 성막의 구조는 바깥에서 가장 내밀한 안쪽으로(innermost), 피상적이고 주변적인 것에서 가장 깊은 중심으로 들어가는 구조입니다. 그러니까 성막 안뜰, 그리고 성소, 지성소 순으로 점점 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구조이고 따라서 점점 더 거룩한 장소로 들어가는 구조입니다.
여러분, 이런 성막구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성막의 구조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의 정신 상태를 진단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목요기도모임 때도 말했는데요, 융심리학자 이유경 교수는 현대인은 너무 의식에 의존하고 이성적이 되어 신성, 즉 거룩성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신화와 상징을 잃어버린 현대인이라고도 말하지요. 같은 말입니다.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가 말한 누미노제의 경험(누미노즘)이 빠진 종교생활을 말하지요. 루돌프 오토는 누미노즘을 “두렵고 떨리면서도 매혹적인 신비감”(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거룩성의 경험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종교 경험의 본질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이유경 교수는 현대인들은 이 누미노즘을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대부분들의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누미노제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가르쳐지고 개념화된 추상적인 신성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현대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실제적인 경험”은 잃어버리고 오히려 “신앙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신경증 상태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심화”냐, “신앙의 강화”냐 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미노제의 실제적 경험을 잃어버린 신앙은 “신앙의 심화”가 아닌 “신앙의 강화”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굉장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그의 예언 첫 대목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슬프다! 죄지은 민족, 허물이 많은 백성, 흉악한 종자, 타락한 자식들! 너희가 주님을 버렸구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겨서, 등을 돌리고 말았구나!”(사1:4) 여기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겨서, 등을 돌리고 말았구나”라는 말을 개역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라고 번역하지요. “만홀히 여긴다”는 말, 이 어려운 말은 히브리어로 <짜와르>란 단어인데, <짜와르>는 “낯설어지다” “상관이 없어지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사야는 “거룩성”(누미노제)을 경험한 예언자입니다. 이사야6장에 보면 그는 성전에서 부름을 받았는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천사들의 노래소래를 듣고 깨어납니다. 그리고는 “내가 죽겠구나,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 주님을 만나뵙다니.”라고 탄성을 지릅니다. 그 후에 그의 예언을 관통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체험입니다. 그는 그저 마음 없이 제물을 바치는 이스라엘을 향해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실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라고 하나님을 대변하여 외칩니다. 제물을 바치러 온 자들에게, 너희는 “성전 뜰만 밟을 뿐이다!”라고 일갈한 것은 바로 “거룩”과의 접촉은 없이 피상적인 신앙 상태에 머물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 내린 진단이었습니다.
융심리학에서도 무의식을 무시하면서 자신의 의식이 자기의 전부라고 생각할 때,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신경증에 대해서 말합니다. 무의식을 “만홀히 여길” 때, “상관이 없다고 여길” 때(짜와르), 그로 인해 오는 나쁜 결과가 있다는 것이지요. 빅터 플랭클은 <무의식의 신>이라는 책에서 이런 결과의 모습을 “복수하는 신”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무의식이 곧 하나님은 아니지만, 무의식 속에서,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의식을 넘어서서 더 깊은 곳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과 갖는 내밀한 만남과 사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우리는 너무 “의식”이라고 하는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차원에 머물고, 거룩의 차원, 초월적 차원, 숨겨진 차원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의식을 넘어선 무의식 혹은 초의식의 차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의식적인 차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하는 차원이 합하여 전체로서의 “나”가 된다는 것은 이제는 상식에 속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성에만 의존하지 않고 이성을 넘어선 우리의 거룩성, 우리의 지성소로 안내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고대 성막이 보여주는 내밀한(innermost) 자리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리는 종교적 헌신 속에서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가게 놓아두고(letting go), 더 깊은 침묵 속에, 오늘 빌립보서의 말로 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 속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의식 더 깊은 곳에서 말하는 그 소리에 귀를 귀 울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출애굽기의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께 계명을 받으러 시내산 위로 올라간 사이에 산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광란의 춤을 추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너희의 신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대로,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눈에 보이는 신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God-made”가 아닌 “self-made”로 만든 산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성막은, 앞에서도 본 대로, 매우 정교하고 오랜 시간이 걸리며 자발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질릴 정도로 세세한 성막의 규정들은 바로 이것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인간이 주도한 대체물이었던 금송아지는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집니다.
성막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내와 기다림, 순종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금송아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금을 녹여 거푸집에 부어 놓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나중에 금송아지를 만든 아론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그들이 금붙이를 가져왔기에, 내가 그것을 불에 넣었더니, 이 수송아지가 생겨났습니다.”(출32:24) 금송아지는 조급함과 즉각적인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자기중심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자기 욕망의 투사물로 만들어 놓은 상징입니다. 그래서 금송아지의 신은 그저 인간이 원하는 욕망을 충족하는 “마술적인 신”으로 전락합니다. 여기엔 어떤 “거룩함”도 “경외”도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진정 하나님일까요? 금송아지일까요? 우리도 하나님의 거룩함에 접촉하지 못하고, 그저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현대인의 정신에 따라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재단하고 조립하고 조종하고 더 나아가 나와 큰 상관없는 존재로 만홀히 여기고 있지는 않을까요? 과연 우리의 신앙은 너무 피상적이지 않을까요? 그 결과는 정주도 없고, 정진도 없고, 순명도 없고, 인내도 없고, 그저 내 맘대로, 내 기분대로, 내 컨디션에 따라, 내 편의대로,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아들의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어느 임금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잔치 준비를 다 마치고 임금은 종들을 불러 초대받은 사람을 불러 오라고 했지요. 그러나 초대받은 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저 다마 제 갈 길로 갔는데, 밭에 가고, 장사하러 가고, 심지어 보낸 종들을 붙잡아 모욕하고 죽였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밭을 샀는데 가서 보아야 하고,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걸 시험하려 가야하고, 장가를 들어 아내를 맞았기 때문에 못 가겠다는 핑계가 나옵니다.
오늘의 우리의 거룩성의 맥락에서 보면, 혼인잔치(큰 잔치)라는 “거룩함”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임금이 초대하는 혼인잔치는 우습게 치부되고, 그야말로 “만홀히 여겨집니다”. 나중에는 모든 사람이 초청되지만, 혼인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만큼은 그 자리에 올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혼인예복이란 거룩함을 거룩하게 대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그분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 벌벌 떨거나 죄책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넘어서 있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고, 그분을 경외하고 흠숭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예복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손발이 묶여 바깥 어두운 데로 내던져진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빅터 프랭클이 말했던 “복수하는 신”이 행하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피상적인 나의 목소리, 당장의 욕구대로 움직이려는 태도를 내려놓고, 당장의 집착과 혐오를 떠나서,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소리, 그리고 말씀을 깊이 묵상함으로서 올라오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이것을 “양심”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덕적 양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토머스 머튼은 이런 “양심”을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성령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기도의 전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편의적인 대체물로서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성막의 거룩함 속에서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며, 그분을 경외하고 훔숭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이 말한 말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이 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