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이혼과 간음에 대한 예수의 말씀 p190~195
『유대 신학자 예수』브래드 H. 영 / 성광문화사
많은 해석가들이 이혼에 관한 복음서의 말씀을 대할 때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한다. 예수는 이혼을 허용하였는가?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혼한 후에 재혼은 금지되는가?
잘 알다시피 많은 기독교 교단들이 특정한 상황 하에서만 이혼이나 혼인 취소를 허용하고 있으며 이혼 후 재혼을 금지하고 있다. 이 문제는 수 세기 동안 논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초기 유대 사상에 대한 이해와 함께 예수의 말씀을 주의깊게 분석해보면 ‘예수는 이혼을 간음과 동등하게 보셨는가’ 라는 질문과 함께 한줄기 새로운 해석의 빛을 발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혼에 대한 성서 해석의 이슈로 크게 대두되어 잘 알려진 사례는 아마도 영국의 헨리 8세(1491-1547)와 아라곤의 캐더 린(Chatherine)에 관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 종교 개혁가와 카톨릭 신학자들,그리고 이와 관련된 다른 정치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어왔지만,만족할 만한 해결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한 국가적인 굵직한 일보다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우리 주변 일상 생활 속에서 많은 가족,친구,그리고 사랑하는 자들의 자녀들이 가정의 파탄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많은 목회자들은 사역을 하면서 이 문제에 부딪힌다. 가정의 붕괴는 이혼과 재혼에 대한 질문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얻고자 할 때 당시의 유대 자료들을 거의 참고 하지 않는다. 이 장에서 필자는 예수가 이혼,간음,그리고 재혼에 관하여 말한 복음서의 한 부분을 살펴보고(눅 16:18과 그 상응 구절),그 주제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줄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유대적 배경과 당시의 랍비 문헌들은 예수의 말씀의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공관복음의 상호 연관성을 연구할 때 누가복음은 자주 무시되기 때문에,많은 성경 해석기들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의 의미를 쉽게 간과하곤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초대 유대교 자료들을 토대로 하여 누가복음 16장 18절의 예수의 말씀을 고찰하려 한다. 누가복음 16장 18절의 문맥에 따르면,예수는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혼에 관해 연구하기 전에,결혼과 가정은 예수 당시에 여러 면에 있어서 유대주의의 가장 주요한 기반이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가정은 사랑과 친교의 장소였다. 남편과 아내,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은 한 가정을 이루었고,그들은 그곳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함께 기도하며 서로를 축복하였으며,이런 것들은 가정생활의 견고한 기초가 되었다. 당시의 유대적 신앙과 경건은 가정에서 평화를 누리도록 강조했다 (shalom bayit) ,그리고 결혼관계를 제정하신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성경은 이혼이 어떤 경우에서는 가능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신24:1-2),고대 근동 지방에서,여자는 가정이 파탄될 때 매우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원래 신명기 24장 1절에서 2절의 구약의 율법은 가정의 연합을 유지시키고 이혼을 방지하기 위한 말씀이었다. 복음서는 예수가 이혼당하는 아내의 위치를 좀더 힘 있게 하려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이혼”과 “간음”이라는 말이 종종 오해될 수 있는 본문인 누가복음 16장 18절의 예수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적지 않은 기독교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예수가 이혼과 간음을 동의어로 사용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것도 진리로부터 벗어나서는 안 된다. 유다 율법 에서 이혼과 결혼이 허용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예수는 이혼과 재혼에 관한 율법을 폐하신 것인가? 예수는 율법을 무너뜨리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그는 율법을 바르게 해석함으로써 분명한 기초 위에 율법을 세우기 위해 오셨다. 만약 예수께서 이혼을 금지하셨다면 그것은 신명기 24장 1절에서 2절의 토라의 구절을 폐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토라를 바르게 해석하기 원하셨던 것이지,그것을 파괴하려고 하신 것은 아니었다. 배우자가 이혼의 사건에서 어떻게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가정이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인가?
당시 유대교 선생들이 이혼을 반대했고,가정을 매우 신성시 여겼기 때문에 좀처럼 깨지지는 않았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했고,가정의 기초는 결국 천지 창조로까지 소급된다. 그 시대에는 중매결혼이 널리 퍼져 있었고,사람들은 주로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다.
잠언에서 우리는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19:14)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은 창 24장 50절에서 이삭과 리브가를 부부로 맺어주셨다.
그렇다고 예수가 이혼을 엄격히 금한 것은 아니었다.누가복음 16장 18절에서 우리는 특별한 상황을 다루는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이 구절로 인해 이혼을 간음과 동의어로 볼 수 있는가? 우리가 이 말씀의 유대적 배경을 이해한다면,그 의미는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미쉬나에서(Sotar 5.1) 우리는 간음한 연고로 이혼당한 여자가 그 정부와 결혼한 것을 금지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는 누가복음에서,재혼을 위한 이혼은 해도 좋다는 식의 성경 해석에 제동을 걸고 불법을 막으려 했는가? 흔히 있는 일이지만,더 젊고 매력적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젊어서 얻은 아내와 이혼하기 원하는 남자들에게 있어서 이혼이란 매우 편리하게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미쉬나가 간음한 여인을 예로 들었듯이 예수는 이와 유사한 경우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한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예수는 이런 특정한 경우를 들어서 말씀하고 계신 것 같다.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혼은 간음과 같은 것이다.
누가복음은 “이혼하다”와 “결혼하다”라는 두 동사를 모두 현재 시제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상응구인 마가복음 10장 11절에서는 이 두 동사가 가정법으로 묘사되었다.
이 두 동사를 히브리어로 본다면 두 행동이 연속적인 동작 관계에 있는 것으로 연결되어 있다 “kol basboleach et esbto veηose acberet noef,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아마도 영어로 아래와 같이 번역해서 읽는다면 그 말씀의 의미를 더 잘 살리게 될 것이다."Every one who divorces his wife (in order) to marry another commits adultery.(다른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그의 아내와 이혼하는 모든 사람은 간음하는 것이오)"이 새 번역은 예수의 말씀을 보다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18절 하반절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미쉬나의 글을 보면,한 남자가 재혼하기 위해서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간음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혼 자체는 간음이 아니다.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사람과 재혼하기 위해서 신성한 결혼 서약을 깨뜨리고 이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혼과 간음에 관한 예수의 이 말씀은 많은 문제들을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해준다. 먼저 예수는 구약 성경의 결혼,이혼,그리고 재혼에 관한 가르침을 폐기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다. 또한 그 가르침을 적용하는 데 제한을 두는 것도 원치 않았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아내와 이혼한다면,그것은 간음이다. 그러한 행동이 율법의 문자를 어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그것은 분명히 율법의 본래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아마도 대부분의 이혼의 경우는 직면한 문제들을 놓고 가정에서 의사소통을 해서 해결점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어느 한쪽이 다른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할 때 생기는 배신에 기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종류의 결혼 관계는 대부분 계속되어야 했다. 그러나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배신과 이혼으로 결혼 관계를 깨뜨렸다면,그는 이혼과 재혼에 관한 구약 성경의 율법을 악용한 것이 된다. 따라서 이것은 간음과 같은 것이다.
예수는 어떤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자기 아내와 이혼한다면,이것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자들도 결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엘르아살 (R Eleazar) 은 남자가 젊어서 얻은 아내와 이혼하면 제단도 눈물을 흘릴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b. Git. 90b). 이혼으로 끝날 많은 결혼들이 보호될 수 있다. 부부 간에 평화를 회복하는 것은 칭찬받을만한 일이다. 상처와 분노가 서로의 관계를 갈라놓으려 할 때 모든 가족 구성원들은 가족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를 이루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
예수의 한 말씀에 대한 위의 짧은 변론으로 이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을 풀 수는 없다. 그러나 유대문학의 이와 유사한 상응구절에 비추어 한 구절을 연구함으로써 결혼,이혼,그리고 재혼 등에 관한 모든 문제가 분명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예수는 결혼,이혼,그리고 재혼에 관한 구약의 율법을 폐기하신 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이라고 하는 신성한 경험 속에서,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토라의 적절한 해석이 필요했다.
이혼은 간음이 아니다. 이혼한 후 재혼하는 것도 간음이 아니다. 그러나 이혼은 간음을 범하는 데에 이용될 수 있다. 가정을 잘 세우고 이끌어 가려고 노력하는,연약한 두 남녀를 보호하기 위해 토라는 그러한 면으로 해석되어야만 했다.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 중에 어느 한 쪽이 새로운 파트너를 얻으려고 다른 한 쪽을 해치는 데 법 제도가 사용된다면,율법의 참 목적과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아무도 예수의 강력한 말씀의 능력을 약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새로운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율법을 악용하여 자기 아내와 이혼하는 것은 곧 간음과 같은 것이다.
유대인의 결혼과 이혼
1. 결혼할 수 있는 연령
결혼을 해도 되는 최소한의 연령에 대해서 모세의 율법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탈무드는 신부가 적어도 12세 하루, 신랑은 13세 하루가 되어야 한다고 서술해 주고 있다. 여자는 15~16세 남자는 여자보다 한, 두 살 위가 되면 결혼했던 것 같다. 탈무드시대에는 열여덟 살이 결혼 적령기로 꼽혔다(Ethics of the Father 5:21).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조혼이 흔했고 가난한 시기에는 젊은이들이 결혼 자금을 준비하느라 시기를 늦추었다.
2. 왜 이혼을 반대할까
유대교는 이혼에 찬성하지 않는다. 랍비들은 탈무드에서 결혼이 신성한 계약인 반면,이혼은 부정한 행위라고 말한다.
말라기서는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찌기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말 2:14)" 라고 하였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아내와 이혼하면 제단(하나님)도 눈물을 흘런다 (Sanhedrin 22a)" 는 기록도 이혼을 부정한 행위로 보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3. 왜 여자는 이혼을 제안할 수 없을까
신명기 24장 1절에는 남자가 아내와 이혼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과 이혼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이 구절을 근거로 남자는 여자에게 이혼을 제안할 수 있으며,아내의 동의가 없더라도 이혼이 성립된다는 율법이 생겨났다. 그러나 1000년 전에 존경받던 랍비 라베누(Rabbenu Gershom ben Yehuda,965-1028)는 아내의 동의 없이는 이혼할 수 없도록 율법을 바꾸었으며,유럽의 유대인 사회는 의무적으로 변경된 결정사항(takana)을 따르기로 했다. 후대의 유대교 종교법정은 마땅한 이유가 있을 경우 여자도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마땅한 이유란 남편이 부부관계를 거부하거나, 생활비를 충분히 주지 않거나, 아내에게 불성실하거나,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견딜 수 없는 병(나병 등)이 있는 경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