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스포츠3기 김근희] 스포츠를 좋아하는 스포츠팬들이라면, 특히 축구를 좋아하는 축구팬들이라면 제 아무리 영어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더비(Derby)’라는 영어 단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더비란 경마 경주에서 영국의 한 귀족이 암ㆍ수컷의 혼합 레이스를‘그레이트 더비’라 불렀던 것에서부터 유래되어, 오늘날 라이벌 팀 간의 승부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대표팀 동지라도 더비에서 만나면 앙숙에 불과하다
이‘더비’라는 용어는 축구에서 특히 흔히 쓰이고 있는데,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만나게 될 레알 마드리드와AT 마드리드의‘마드리드 더비’,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잔류 경쟁을 펼치고 있는 선더랜드와 뉴캐슬의‘타인위어더비’, 마찬가지로 같은 리그에서4위 싸움을 하고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의‘맨체스터 더비’, K리그의 자존심 수원 삼성과 서울FC의 수도권 더비(슈퍼매치) 등 축구 경기에는 수많은 더비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수많은 더비 매치들 중에서도 역시 한국인들에게 가장 유명한 더비는 대한민국과 일본의 경기, 바로 한일전 일 것이다. 한일전은 지금까지 수차례 펼쳐지면서도 매번 치열한 명승부를 만들어냈는데, 영국의 저명한 매체인 가디언에서도 가장 치열한 국가대표 축구 더비5위에 한일전을 올려놓았을 만큼 이 경기는 마치 드라마처럼 매번 극적인 승부를 연출해 냈다.
이런 더비인 만큼 그 시작인 첫 경기에서부터 많은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냈는데, 필자는 다가오는5월22일‘2016 수원JS컵U-19 국제청소년축구대회’에서 있을 한ㆍ일전 승리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아시아의 대표적인 더비 한일전, 그 역사의 시작을 열었던, 1954년 일본에서 펼쳐진 최초의 한일전에 대해 담긴 이야기들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JS컵에서 펼쳐질 운명의 미니 한일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지10년도 채 되지 않았던, 1953년 중단된6ㆍ25전쟁이라는 동족상전의 비극이 채 아물기도 전인1954년3월 우리나라는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일본을 만나게 된다. 당시 아시아에 할당된 월드컵 티켓은 하나였고, 그 하나의 티켓을 위해 한국과 일본이 맞붙게 된 것이었다.
이 최초의 한일전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규정상 양국을 오가며 홈& 어웨이 방식으로 치러야 했는데 반일주의자였던 한국의 대통령 이승만은“절대 안 돼, 일장기가 대한민국 땅에서 펄럭이는 꼴을 볼 수는 없네. 경기를 포기하게. 일본에게 이긴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만약 이 땅에서 일본에 패한다면 우리 민족은 또 다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을 걸세.” 라는 말을 하며 일본이 우리나라에 와서 어웨이 경기를 치르는 것을 반대했다.
이렇게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로 일본과의 경기 자체를 아예 치루지 못할 위기를 맡게 된다. 하지만 당시 축구관계자들은 축구로 자존감이 떨어져있는 국민들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주장으로 그를 설득하게 된다. 당시6.25전쟁과 이승만 정권의 독재가 이어지며 사회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던, 1인당GNP가58달러에 불과한 세계 최빈국의 국민으로서 살고 있었던 한국 국민들을 축구로써 일으키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두 경기 모두 일본에서 경기를 치른다는 전제하에“일본에게 지면 현해탄(대한해협)에 몸을 던져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섬뜩한 허락(?)을 받게 된다.
이 아찔한 한 마디를 듣고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두 경기를 모두 일본인들이 가득 차 있는 경기장속에서 뛰어야하는 부담감을 안고, 열악한 장비를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1954년3월7일 일본 도쿄 메이지 신궁 외원 경기장에서 최초의 한일전을 펼치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제골은 일본의 몫이었다. 전반15분 만에 일본이 선제골을 넣자, 일본인 관중들은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에게 그랬듯, 경기장에 있는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역시 의지의 한국인이 아니었던가! 한국 국가대표팀은 선제골을 헌납한 후 무려5골이나 몰아넣으며 일차전을5대1로 승리하게 된다. 이 경기 결과는 경기장에서 직접 경기를 지켜보았던 한국인들, 라디오 중계를 통해 경기를 듣고 있었던 한국인에게는 엄청난 축구 경기 그 이상의 것이었다. 10여 년 전 식민지 시절에 일본에게 통치 받았던 우리가 드디어 극일(克日) 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비록 축구지만 처음으로 일본을 이김으로써 민족적 자긍심을 높여주었고, 일본에게 있는 열등감을 해소할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이렇게 대승을 거둔지 일주일이 지나던 날, 같은 장소에서 열린 한국과 일본은2차전에서 치르게 된다.한국은 일차전의 대패로 전의를 상실한 일본팀의 거친 플레이에도 불구하고, 2대2로 경기를 마무리 지으며 월드컵 진출을 확정짓는다.
이 날 일본팀은 한국팀의 김지성 선수의 치아를 다섯 개나 부러트리는 등 경기에서도 지고 매너에서도 진 완벽한 패배를 하게 되고 반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한국팀은 대한해협에 몸을 던질 일 없이 대한해협을 건너 한국으로 귀국해, 이승만 대통령과 국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게 된다.
최초의 한일전에서의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지면 대한해협에 몸을 던지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품은 국가대표 선수들이, 반일 감정에 똘똘 뭉쳐 축구만큼은 일본을 꼭 이기겠다는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목숨을 걸고 뛰었던 최초의 한일전. 전쟁의 여파로 제대로 된 훈련 없이,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치러졌던 최초의 한일전.
선수들은 이 한일전에서, 당시 일본과의 과거사적 측면에서 아픔을 가지고 있던 국민들에게 위안을 주고, 축구만큼은 우리가 일본을 앞선다는 자긍심과 주었다. 그리고 이런 정신을 이어 받아 현재까지도 성인 남자 대표팀 기준, 한국은 통산 한일전 전적77전40승23무14패로 일본에 압도적 우세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갖고 있는 최초의 한일전이 치러진지62년이 지난 지금, 아직까지도 축구에서만큼은 일본을 꼭 이겨야 한다는, 국민들의 바람과 의지는 계속 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국민들의 바람과 의지는 다가오는5월22일(일)에 펼쳐지는‘2016 수원JS컵U-19 국제청소년축구대회’에서의 한일전에서 다시 한번 승리라는 결과로 직결될 것이다. 5월22일 열릴 이번 한일전은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걸고 뛰었던 과거의 경기들을 생각하며 경기장에 찾아와 더 열정적으로, 경기장에 오지 못한다면TV를 통해서라도 더 열성적으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