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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빙허 현진건 또한 대구가 낳은 유명한 문학인 중의 1인으로서 그의 출생지는 대구부 명치정 2정목(현 중구 계산2동)의 속칭 '뽕나무골목'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출생지인 이 곳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따라 왔다가 귀화한 두사충 장군이 길쌈을 장려하기 위해 하사받은 땅에다 뽕나무를 많이 심어 '뽕나무골목'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일대의 가로상에는 약업사와 제탕원, 제환소 등의 각종 한방 관련 업소들이 즐비하여 약전골목 주도로와 연계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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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개벽지』에 단편소설 '희생자'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했고, 1921년 발표한 '빈처(貧妻)'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으며 '타락자(墮落者)', '운수 좋은 날', '불' 등을 발표함으로써 염상섭과 함께 사실주의를 개척한 작가가 되었고 김동인과 더불어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가 되었다.
전기의 작품 세계는 1920년대 우리나라 사회와 기본적 사회 단위인 가정 속에서 인간 관계를 다루면서 강한 현실인식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했고, 그 때의 제재는 주로 모순과 사회 부조리에 밀착했었다. 그리고 1930년대 후기에 와서는 그 이전 단편에서 보였던 강한 현실 인식에서 탈피하여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되었다. 이렇듯 그는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날리기도 했지만 동아일보 재직 시절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피검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이는 1936년 당시 올림픽에 출전했던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금메달 쾌거를 기록영화로 만드는 과정상 가슴의 일장기를 삭제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 사회부장직을 물러난 것인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이상화 시인이 별세하던 같은 날인 1943년 4월 25일 44세의 젊은 나이에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빙허는 그의 집이 약령시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자주 약전거리를 가로질러 수목이 울창한 동산의 오솔길을 거닐며 문학적 감수성과 소양을 키웠다고 한다. 지금도 약령시 인근의 동산에 신축한 제일교회 부근의 수목 속에는 당시 그가 거닐며 작품구상을 했다는 소위 '현진건로'가 있다고 한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술 권하는 사회', '할머니의 죽음', '지새는 안개', '까막잡기', 'B사감과 러브레터', '사립 정신병원장' 등 단편이 있고, '적도(赤道)', '무영탑(無影塔)',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의 장편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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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돈
서상돈은 민족 독립 운동가로 서울 출생이다.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에 귀의하였던 가문출신으로 그의 선대는 신유ㆍ기해박해시 강원도, 충청도, 경상북도 문경 및 상주 등지를 전전하다가, 1859년(철종 10) 대구에 정착하였다. 그는 1866년(고종 3) 병인박해 때 신앙문제로 문중에서 쫓겨난 이후, 1871년부터 대구에서 지물행상 및 포목상을 시작하였다. 1886년경에는 상당한 재벌로 부상하였으며, 이후 정부의 특명으로 경상도 시찰관에 임명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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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대구교회 Robert A. J 김보록 신부를 중심으로 교회발전에 힘썼으며, 시찰관에서 퇴임한 뒤에는 실업계의 중진으로 대구의 경제권을 좌우할 만큼의 갑부 반열에 들었다. 그 뒤 대구교구가 설립되자 이의 발전에 힘쓰는 한편, 성직자 돕기와 수녀 보호에 솔선수범 하였다. 1898년 준공된 한국식 십자형 성당의 건립과 이것이 소실된 후 1903년 축성한 대구대성당의 건립에 앞장섰다. 이것이 현재 계산성당의 원형이다. 1911년 6월 21일 대구교구가 새롭게 설립되어 안 주교가 부임하자, 서씨 일가에서 주교의 숙사와 임시사무소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서상돈은 자진하여 자기가 경영하던 앞고개 종묘원 만여 평을 무상으로 제공하여 교구관리소를 신축할 수 있는 넓은 부지를 제공하였다.
또한 서상돈은 부유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매년 봄·가을로 양곡 수백석을 내어 가난한 사람들은 도와 주었으며, 이를 통해 많은 신도들을 입교 시켰다. 그래서 그의 사랑채에는 항상 식객들이 수십명씩 모여들었으며, 그는 그들에게 용돈까지 주어가며 서로 만나 전교활동을 하였다. 한편 외세의 국권침탈에 맞서 이의 수호에 앞장선 독립협회의 주요 주도회원으로 활약하였는데, 독립협회 제4기 민중투정기에는 재무부과장 및 부장급의 일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07년 2월 16일 대구광문사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마친 뒤 광문사 부사장으로서 국채보상문제를 제의하였다.
즉 국채 1,300만환을 갚지 못하면 장차 토지라도 주어야 하므로,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석 달만 끊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보상하자면서 자신부터 8백 원을 내겠다고 하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회원들이 만장일치로 서상돈의 제의에 찬동하였는데, 사장 김광제는 당장 시작하자면서 석달 동안의 담뱃값 60전과 별도로 10원을 내자, 많은 사람들이 이를 따라 의연금으로 당장 2천여 원을 각출하였다.
그후 <국채 1,300만환 보상취지서>를 작성하고 전국에 발표함으로써 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하였다. 이런 국채보상운동은 《황성신문》ㆍ《대한매일신보》ㆍ《제국신문》등을 비롯한 민족언론기관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해 갔으나,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 통감부가 이 운동을 탄압하는 방법으로 대한매일신보사 내의 국채보상기성회 총무인 양기탁을 근거도 없이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했다가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을 비롯한 여러 방해들로 인하여 국채보상운동은 더 이상의 진전이 없이 점차 퇴조되었다. 그러나 그 자금은 후에 전개된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재정적 기초가 되었다.
이렇듯 카톨릭 신자로, 대구 상업계의 지도자로, 가난한 사람의 자부로 살아온 서상돈은 1913년 6월 30일 향년 63세로 사망하였다. 그의 부음을 접한 각계 각층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으며, 그를 모든 사람의 은인으로 추앙하였다. 자식으로는 일찍 죽은 장남과 병조, 병주, 병민 네 아들이 있었다. 특히 병조는 아버지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이어받아 유지하면서 각종 친일활동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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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수운 최제우는 1824년(조선 순조 24년) 경주군 현곡면 가정리에서 서자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수운 최제우가 17세 때인 1840년 부친이 별세하고 3년상을 치른 후 울산 고암동과 금강산 유점사, 천성산 내원암, 남원 선국사(은적암) 등을 오가며 많은 수양을 쌓았다. 특히 수운이 33세 때인 1856년에는 천성산 내원암에서 기도 중 한울님의 계시를 처음으로 받은 후 기절한 노파를 소생시켜 주는 등의 많은 기적을 이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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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때인 1859년(조선 철종 10년)에는 고향 경주로 귀환하여 '우매한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의 '제우'로 이름을 바꾸어 귀미산 용담정사에서 기도에 정진하였다. 이 때 수운은 한울님의 많은 게시를 받게 되는데,「천사문답」은 바로 이때의 게시록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수운은 드디어 천주의 강령정신을 바탕으로 외세배척을 통한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현세개혁 의지를 가지고 1861년 6월 전라도 일대를 중심으로 동학을 포덕하기 시작했다. 교세가 확장되어 1863년(철종14년)에는 신도수 3000명에 접소가 18개로 늘어났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수운이 사교를 만들어 민심을 어지럽힌다는 소위 '좌도난정' 죄목으로 그를 체포하여 참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1863년 11월 20일 경주에서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감영에 이감되었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철종 임금의 승하로 1864년 1월 6일 다시 대구감영으로 되돌아왔다.
수운이 41세 되던 1864년 3월 10일 드디어 그는 대구성 남문밖 형장에서 "등불이 물 위에 밝았으니 혐의할 틈없고, 기둥이 마른 것 같으나 힘은 남아 있도다"라는 최후진술을 남긴 채 순교하였다.
동학 교주 수운 최제우가 최후를 마친 대구 남문밖 형장은 당시 시험을 쳐 군사들을 뽑고 또 훈련시키던 도시청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는 당시 탄압받던 천주교 신자들도 다수 처형을 당하였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에서는 이 곳에다 '관덕정'이라는 순교기념관을 지어 당시 순교한 사람들의 넋을 봉안ㆍ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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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혜미나라 |
첫댓글 대구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발자취라도 남겨 주려는 도계님의 따뜻한 마음을 지나칠 수 없어 한 자 올리고 갑니다.
어의하여 도계를 뺏남 ㅉ ㅉ ㅉ
아차 실수! 도계님을 빠뜨렸네요.
대구 토박이 꽃사슴의 가슴이 뿌듯 합니다.
'대구의 찬가'가 있나요? 그걸 배경음으로 깔면 더 좋았겠죠?
오라버니와 언니들과 한마음입니다.
계성성당에 다녔겠네요?
네에...태어난후 3일날 계산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어요. 세레명도 세속이름도 주임신부님이 지어 주었다고 하더군요.
대구에 대한 걸 정말 많이 연구하셨네요. 자랑스럽습니다.
도계. 청수.한메.해안.......20세기의 혜성같은 친구들이 이 난을 메꿀 것입니다.
어! 우리 달성 서가가 대구 출신 명사들 중에 두 분이나 계셨네요. 자랑스럽습니다.
'대구'하면 '달성 서씨'/ 명문가문이랍니다.
자랑스런 분들을 소개해주어 여태 잊었던 그분들을 기리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