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12~17)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에 미혹된 자들이 있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 성도를 미혹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
거대한 우상이 장악하던 버가모였음에도
버가모 교회는 믿음을 지켜나갔다.
그렇지만 버가모 교회에도 일부 문제는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그리스도인이 자유를 오용하여 방종의 기회로 삼는 일이었다.
사실 자유를 추구하려는 이유 중에 하나는
율법이나 법 숭상주의가 빌미를 제공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법 숭상주의의 반대급부로 나온 일일 것이다.
보통 세상에서 대립하는 두 가지 가치는
사실 두 가지 모두 필요한 것인데,
문제는 항상 균형과 적절한 크기, 영향력에 있다는 생각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서 작은 쪽이 그 부당성을 주장할 때 생기는 갈등과 문제이다.
큰 쪽은 자신들이 권력을 오용하고 있음, 겸손하지 못함,
물리적 욕망을 추구하는 죄를 범하고 있다.
반대로 작은 쪽은 자신들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정상으로 회복시키려는 몸짓까지는 좋으나
격한 감정이 되어 큰 쪽을 파괴하는데까지 나아가면
그런 행동의 어느 순간부터는 또 다른 죄악이 된다.
존재는 언제나 존중과 긍휼, 즉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존재가 일으키는 죄된 사안에 대해서는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
항상 쉽지 않은 일이다.
대응이 잘못되면 존재를 사랑하지 못해 시나브로 '파괴'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징계에 감정이 포함되어 과도한 물리적 행사를 한다든지 하는 일들이
그런 것이다.
징계도 근본적으로는 사랑을 실현시키는 일이다.
비정상적 사안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한 자극이기 때문이다.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변함 없고, 징계도 사랑의 일환이라면
징계를 행할 때 겉으로는 엄정하지만 속으로는 가슴 아파야 한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준을
최후까지 고수해야 한다. -제임스 스나이더.
오늘의 명언에서도 끝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준을 고수하라고 한다.
오늘 교훈에 적용한다면,
실존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죄와 비뚤어진 행태를 처리할 때에도
끝까지 존재에 대한 사랑을 훼손시키지 않는 일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엄정하게 징계하지만, 언제나 그를 사랑하고 긍휼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래서 징계의 목적이 잘못을 했으니 고통을 당해라애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징계를 통해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게 하는 것.
"하나님! 감사합니다.
집을 떠나 천안의 학교에 와 있는데
지난 밤 따뜻하고 비교적 편한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자반 2학기가 종료됩니다.
특이하게 보일만한 많은 저의 언어로 말미암아
크고 작은 상처를 영혼들에게 입히지 않았나 걱정됩니다.
오늘은 욕심을 버리고 겸손하게 -그러나 짧게- 소회를 고백하는
시간이 되게 해 주십시오.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상처를 덜게 하는 시간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정환이가 보조적 항암의 마지막을 끝내고 회복 중에 있습니다.
다른 이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묵묵히 고통을 감당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에게 힘을 주시고 위로해 주실 줄 믿습니다.
지금의 고통과 위기의 시간이 오히려 은혜의 시간이 되는
기막힌 역전의 기적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소영이가 기운이 없습니다. 기운과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적절한 대처방법이나 치료방법에 대한 지혜를 허락하소서.
주신 축복의 자녀들에게 한 없는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제가 되게 해 주시고
이제 결혼의 서약을 하는 수연이,
그리고 소망이와 미래를 약속한 지현이에게
건강과 좋은 마음을 허락해 주소서.
은준이 질풍노도와 같은 사춘기 시절인데,
하나님의 진리가 그의 가치관으로 자리잡게 해 주십시오.
제자반원과 목장 식구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각자의 절실한 기도제목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간구를 들어 주시옵소서.
건강과 관계, 물질적 문제와 자녀문제 등을 해결해 주시옵소서.
길갈의 지체들,
옳바른 하나님의 뜻을 잘 받아서
맡겨진 지역과 일들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게 해 주십시오.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