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처럼 장맛비가 반가운 해도 드물 것 같다. 온통 말라버린 논밭과 저수지에 물이 고이는 소리가 이토록 좋을 수가 없다. ‘마른 물에 물 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제일 보기 좋다’는 옛사람들의 말씀이 실감날 정도다. 주룩주룩 비 쏟아지는 날, 점심 메뉴로 수제비와 칼국수 사이에서 방황하실 분들 여럿 계실 게다. 기왕이면 파삭파삭한 부침개 한 장 곁들여서. 굳이 비 오는 날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밥 대신에 빵·라면·국수·과자를 즐긴다. 우리 국민 한 사람이 지난해 평균적으로 먹은 국수는 9.7kg. 파스타를 제외한 면류 소비량에서 일본과 중국을 가볍게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한 것이다. 하지만 온 국민의 지극한 밀가루 사랑과 달리 국내 밀 자급률은 1%대에서 정체되어 있는 상태다. 매일 한 끼씩 밀가루 음식을 들더라도 우리밀을 먹는 경우는 석달에 한번 정도에 불과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밀가루 소비 증가가 식량자급률 저하로 직결되는 악순환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생산?소비 어려움 가득…자급률 1%대 맴맴
우리밀 생산 기반은 해방 직후부터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중 한국전쟁 이후 무상 도입된 미국산 ‘악수표 밀가루’의 여파가 가장 컸지만, 분식 장려 정책, 밀 수입 자유화(1982년), 밀 수매 중단(1984년) 등이 이어지며 재배마저 중단될 위기에 직면했다. 1970년만 해도 15.9%였던 자급률이 20년 후인 1990년 0.05%까지 추락한 것이다. 조선시대까지도 밀가루를 곡물 가루 중 으뜸으로 여기며 ‘진가루’ 혹은 ‘진말(眞末)’로 대접했고, 일제시대에도 재배가 활발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위상이다. ▲ 우리밀 살리기 운동으로 판매되고 있는 상품 1991년부터 전개된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통해 근근이 명맥을 이어오던 우리밀은 2008년 세계 곡물가격 폭등 이후 가치를 재조명 받으면서 2011년 재배면적이 1만3044ha까지 확대됐다. 그러나 생산량 급증은 소비로 연결되지 못했다. 그 결과 재고 누적으로 2013?2014년에는 생산면적 또한 7000ha대까지 감소했다. 우리밀농협 등 안정된 판로가 점차 확보되고 소비층이 꾸준히 확대되면서 올해는 지난해보다 40% 늘어난 1만67ha로 회복됐지만, 당초 ‘2015년 자급률 10% 달성’을 내걸었던 정부의 목표와는 큰 차이를 보였다. 결국 정부도 2020년 재배면적 25만5000ha, 자급률 5.1%로 목표치를 수정한 상태다.
이렇듯 우리밀을 둘러싼 여건은 여러모로 녹록치 않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가격과 품질이다. 수입 밀가루의 2~3배나 되는 높은 가격에 소비자들은 선택을 망설이곤 한다. 재배여건과 기후조건 때문에 품질 향상도 쉽지 않다. 밀에는 글루텐이란 단백질 성분이 들어있는데, 글루텐 함량에 따라 크게 강력분(빵용), 중력분(국수?수제비 등), 박력분(과자?케이크 등)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우리밀은 선선하고 다습한 세계 밀 주산지에 비해 고품질 강력분을 생산해내기 어렵다. 더욱이 밀 생산이 벼와 2모작이 가능한 전남·전북·경남 등 남부 지방에서 대부분 이뤄지고 있다. 중부지방으로의 재배지역 확대가 시급하지만, 기후 여건상 논에서 이모작이 어려운 까닭에 문제가 있다. 용도별 품종 개발과 함께 품종별 건조·저장·가공체계 확립이 시급하다. 현재 국내에서 개발된 35개 밀 품종 가운데 주로 재배되는 것은 <금강밀> <조품밀> <조경밀> 등 세 종류에 치중돼 있다. 다목적용 <금강밀>이 70%, <조품밀>이 20%를 차지하는 가운데 단백질 함량이 높은 제빵용 <조경밀> 재배가 최근 10% 수준까지 증가했다. 그러나 품종별 특성을 반영한 저장?건조?유통시설이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최근 10여년 사이에 여러모로 우리밀 제품이 다양해졌지만, 원료인 밀 품종에 대한 관심은 아직도 적은 게 사실입니다. 품종별로 건조?저장용 사일로를 따로 갖추면 품질등급·용도 등을 차별화해 제품의 품질을 높일 수 있어요. 시설부족 때문이겠지만, 수매한 밀 모두를 한데 섞어버리는 일이 잦아 안타깝습니다.” 친환경 농식품 전문 상품기획자인 김진영 여행자의 식탁 대표의 쓴소리다. 그럼에도 우리밀을 기르고 먹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쌀에 이은 ‘제 2의 식량’인 밀 자급률 제고는 식량안보를 높이는 길이다. 99%에 가까운 밀을 수입해 먹는 현실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의심해볼 일이다. 밀 재배의 경제?환경적 이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겨울철 농가 소득을 높이는 것은 물론, 농촌 경관을 지키고 국토 환경보전에도 이바지한다. 쌀이나 보리에 비해 저농약 재배가 안전성이 높으며, 유기·무농약 우리밀 생산도 수월한 편이다. ▲ 우리밀로 만든 상품이 판매되고 있는 판매대 우리밀 매력, 알고보면 무궁무진
수년간의 침체를 딛고 최근 우리밀 산업은 꾸준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꾸준한 품질개선과 함께 우리밀을 아끼고 꾸준히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난 결과이다. 우리밀 제품의 대표격인 밀가루만 보더라도 통밀?백밀가루 외에도 강력·중력·박력 밀가루와 제면·제빵 등 용도별 밀가루도 시판되고 있다. 특히 대형 식품기업인 SPC그룹은 자체 제분업체인 ‘밀다원’을 운영하며 제빵용 밀인 <조경밀>을 원료로 다양한 제빵·제과용 밀가루를 생산하고 있다. 아이쿱생협도 오는 8월부터 우리밀 글루텐 생산을 시작하며 우리밀 밀가루 품질향상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된다. 가공제품 시장도 빠르게 세분화되고 있다. 튀김가루·부침가루·호떡믹스 등의 프리믹스, 빵·과자·스낵류, 라면·냉면·소면 등 국수류, 냉동만두·피자, 시리얼 등 다양한 상품이 개발되었다. 생협·㈜우리밀·농협 등 기존 생산업체 외에도 CJ제일제당?삼양사 등 대형 기업과 중소 식품기업의 참여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금정산성막걸리·한산소곡주 등의 전통주도 우리밀로 만든 누룩을 활용해 술맛을 높이고 있다. 흥미롭게도 최근에는 인기 TV 프로그램인 <삼시세끼>도 포털사이트 ‘다음’을 통한 소셜펀딩을 통해 우리밀 장칼국수 제품 개발에 나서며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우리밀 음식도 진화한다
우리밀 음식 가운데 가장 크게 품질이 개선된 제품은 빵·과자류이다. 빵 소비가 늘고, 가정에서의 빵 굽기(홈베이킹)가 활발해지면서 우리밀 빵?과자 등의 제조방법(레시피)이 개발된 데 힘입은 바 크다. ▲ 우리밀 발효종빵을 만드는 경기도 양평의 <곽지원빵공방> 빵집 한 예로 경기 양평군 양수리에 있는 ‘곽지원 빵공방’에서는 우리밀 중력분을 천연발효종을 이용해 부풀린 바게뜨를 비롯한 프랑스식 빵을 맛볼 수 있다. 부드럽고 쫄깃한 속과 바삭한 겉껍질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한 입 베어물면 ‘과연 이 빵이 우리밀빵인가’ 싶어 탄성을 지르게 된다. 장인정신이 살아있는 고급 제과점이 아니더라도 우리밀로 만든 소박한 빵을 접할 수 있는 알찬 가게들도 곳곳에 있다. ▲ 서울 종로구의 우리밀로 만든 빵을 파는 <광화문빵집>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광화문빵집’을 운영하는 김종우 대표(50)는 “향이 구수하다, 수입 밀가루 음식에 비해 소화가 잘 된다는 이유 등으로 우리밀빵을 찾는 단골들이 많은데, 쿠키?케이크 등도 인기가 높다”고 귀띔한다. ▲ 우리밀로 수타우동을 만드는 서울 서대문구의 한 <가타쯔무리> 우동전문점 국수류 또한 진화를 거듭해 잔치국수?칼국수?수제비는 물론 쫄깃함이 생명인 일본식 우동을 우리밀로 만드는 곳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의 ‘가타쯔무리(달팽이)’ 도 최근 인기 높은 우리밀 음식점 중 하나. 탄력이 아주 강한 편은 아니지만, 탱탱하면서도 입안에서 부드럽게 넘어가는 굵은 면발이 일품이다. “일본 우동가게들 중에는 일본산 밀가루 혹은 일본산을 호주산과 혼합해 면을 뽑는 곳들이 제법 있습니다. 우리밀로 우동을 만들어도 일본밀과 품질이 비슷해서 큰 불편은 없어요. 다만 용도가 다양한 용도의 밀가루가 많이 시판되면 좋겠습니다.” 사누키 우동으로 유명한 일본 카가와 현에서 우동 만들기를 배운 모리시타 요헤이(森下陽平) 대표의 우리밀에 대한 평가다. 우리밀을 원료로 활용하는 전국의 음식점?제과점을 알고 싶다면 우리밀 살리기 운동본부(www.woorimil.or.kr) 홈페이지를 통해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수입밀에 비해 쫄깃함이 덜하지만, 소비자의 건강을 위해 품질이 우수한 국내산 농축산물을 최대한 활용하는 업소들이 많으니 믿고 찾아가볼 만하다. 높은 원가부담에도 가격이 합리적인 곳들도 많다. ▲ 우리밀 통밀가루를 쓰는 한 칼국수 전문점 서울 광장동 <우리통밀촌> 집에서도 맛있는 우리밀 칼국수?수제비를 즐길 수 있다. 밀가루와 물을 꾹꾹 누르듯이 천천히 반죽한 다음 냉장고에서 짧게는 30~40분, 길게는 1시간 이상 숙성하면 더욱 쫄깃한 반죽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밀 부침가루를 이용하면 바삭한 부침개도 완성! 우리 땅에서 난 우리밀가루로 만든 가게들은 너무나 맛있는 곳들이 많았다. 그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우리밀은 맛없고 비싸다’는 선입관을 잠시만 걷어내면 더욱 건강하고 맛좋은 우리밀 음식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출처: 새농이의 농축산식품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새농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