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충무로 누벨 바그’ 윤여정
“조영남 만나 인생 끝냈기에 배우로 부활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불과 두 세 작품으로 평생 영화배우가 되는 이들이 있다. 제임스 딘이 그랬고 이 여자 윤여정이 그렇다. 1971년 ‘화녀’로 영화계에 데뷔한 이래 지난해 ‘바람난 가족’으로 18년 만에 컴백하기까지 그녀가 주연한 영화는 다섯 손가락을 간신히 헤아린다. 그러나 ‘화녀’를 본 관객들이라면 잊을 수 없으리라. 섹스를 생각할 때마다 두 손 두 발을 뒤틀고, 음흉한 눈길로 남의 집 침실을 엿보던 가정부 명자를.
김기영 감독의 진정한 페르소나로 불리는 윤여정은 스크린에서 지독히도 강렬한 이미지의 팜므 파탈로 출발했다. 물론 그녀의 팜므 파탈은 순한국형이어서, 스스로 주체가 되기 위해 남성들을 살인의 골짜기로 밀어넣는 서양형과 달리 결혼 제도 바깥에서 정실부인이 되려는 욕망으로 가득 찬 요부였다. 1960년대 막 신흥계급으로 떠올랐던 중산층에 대한 동경과 한국인 특유의 정실부인 콤플렉스가 결합된 이 역할로 그녀는 신인으로는 전무후무하게 대종상과 청룡상, 시체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그녀는 1970년대 초반, 문희 윤정희 남정임의 트로이카 시대가 저물 무렵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여배우였다.
순진하면서도 명민한 그녀의 얼굴은 신화가 되기에는 ‘1인치’ 모자랐으나 그 자긍심이나 연기력은 여타 여배우들보다 ‘1인치’ 높은 잣대를 지니고 있었다. 어쩌면 청바지 차림으로 윤형주 이장희 조영남과 어울려 카페 ‘쎄시봉’을 드나들던 당대의 ‘문화 지식인’인 그녀가 부박한 영화판을 등지고 더 부박한 미국 생활을 택했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후 13년, ‘1960년대의 김희선’에서 사랑과 이국생활 모두에 진력이 나버린 중년부인으로 변해 갑자기 나타난 윤여정은 전설과 현실이 부정교합된 브라운관의 틈바구니에서 기어올라와 다시금 안방을 무혈점령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김수현의 배우로 기억되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윤여정은 노희경의 배우이기도 하고 인정옥의 배우이기도 하며, 무엇을 해도 윤여정 그 자체인 그런 배우다. ‘사랑이 뭐길래’에서 속사포처럼 한 무더기의 대사를 집어삼키며 팔팔 뛰어도, ‘내가 사는 이유’에서 인생이 아프다고 울부짖는 주인공에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만 피며 위로할 때도, 그녀는 삶의 질긴 열정과 텅 빈 허망함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그런 배우였다. 연기의 밀물과 썰물을 동시에 가르며, ‘여배우의 주름살은 삶이 주는 훈장’이라는 명언을 입증하며, 그 충만한 에너지와 자의식으로, 신경질적이면서도 바늘 끝에 서 있는 듯한 섬세함과 부드러움으로, 그녀는 대한민국의 중견 탤런트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배우임을 줄기차게 예증하고 있다.
내가 그녀를 인터뷰 한 날도 그녀는 변함없이 TV 드라마를 찍은 후였다. 30여년 전 긴 생머리에 청바지를 입은 처녀였던 그녀는 아직도 청바지를 입고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았다.
아르바이트 삼아 시작한 탤런트
-저는 두 가지 면에서는 윤여정씨를 존경합니다. 첫 번째는 당시로는 드물게 자의식이 있는 여배우상을 보여줬다는 거고, 또 하나는 어쨌든 10년 넘게 일을 안 하실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일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하고, 또 그 일을 다시 시작했을 때 멋지게 재기한 점.
“다른 배우는 자의식이 없나요 뭐. (웃음) 한국에 돌아올 때는 저도 고민 많이 했어요. 가정적으로도 실패했고, 잘 안 돼서 돌아간다는 것도 우습고.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내가 연기자로 다시 설 수 없었을 거예요. 그 무렵에는 단역이래도 나오라는 대로 다 나갔어요. 돈이 급했으니까요. ‘애들을 벌어 먹여야 되는데, 깍지 끼고 평생을 살자고 맹세했던 사람한테도 당했는데, 돈 주고 나오라는 곳을 내가 왜 안 가나’ 그런 마음이었어요.
결혼하자마자 연기를 그만뒀던 것도 그래요. 내가 배우가 된 동기가 사실 참 불순했어요.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거든요. 내가 이화여고를 나왔는데 명문대에 못 들어갔어요. 웃기는 얘기지만 그때는 그러고 나면 동창들 사이에서건 집에서건 낙오자 취급을 받던 때였어요. 후기로 대학을 갔는데 엄마한테 등록금 달라기가 너무 미안한 거예요. 그래서 아르바이트 삼아 나가기 시작한 게 텔레비전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얘기 막 해도 되는 건가. (웃음) 그래서 늙는다는 게 참 좋아요. 내가 마흔만 됐어도 이런 얘기 안 했을 텐데 요즘은 뭐든 다 얘기해요.”
-원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그만둘 수 있었다….
“사람이 그런 거예요. 우습지만 그때 나는 배우가 된 동기가 불순하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어요. 원래 배우가 될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 됐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우리 때만 해도 여배우가 뜨면 ‘선데이서울’에 수영복을 입고 사진을 찍어야 했어요. 하지만 난 그걸 한번도 안 했어요. 돈을 아무리 많이 준대도 못 하겠더라고요. 여기를 빨리 떠나야 된다는 생각뿐이었죠. 그 수단이 결혼이었어요. 행복하게 결혼했기 때문에 일에는 아무 미련이 없었어요.”
(계속)
다른 아르바이트도 많은데 왜 하필 탤런트였어요?
“그 무렵에는 TV 탤런트라는 게 신종 직업이었어요. 어린 마음에 서울대 나온 이순재, 이낙훈 선생님이 탤런트 하는 걸 보며 ‘저걸 하면 조금 덜 창피하지 않을까’했어요. 내 딴에는 많이 고민해서 짜낸 아이디어였다니까요.”
윤여정이 데뷔한 1960년대 후반, 여배우들은 결혼을 선택했고 그들을 대체할 만한 스타는 나오지 않았다. 바야흐로 절대강자가 없는 춘추전국시대. 이 시기 영화계의 스타 부재는 영화산업의 불황과 검열이라는 시대적 족쇄 탓도 있었지만 영화의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한 TV라는 대중매체도 무시할 수 없는 원인이었다. 여배우들 입장에서는 노출에 대한 부담감이 적고 스튜디오라는 편안한 공간에서 연기할 수 있는 TV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윤여정이 등장한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는 새로운 시기였다. 1930~40년대 전옥 같은 여배우들이 악극단 출신이었다면 1950~ 60년대의 김지미 등은 전 세대와는 달리 정규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윤여정은 TV 탤런트인 동시에 영화배우로도 연기를 펼친 첫 케이스였다. 이전까지 TV에서 출발한 여배우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1970년대 초반에 등장한 배우 중 김영애, 박원숙, 이효춘, 김자옥 등은 이후 모두 TV와 영화를 겸업하거나 TV 탤런트로 안착한 케이스들이다. 그 중에서도 윤여정은 특히 톡 쏘는 말투와 일상적인 이미지를 통해 여성 스타도 탈신비화할 수 있다는 것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보여준 첫 케이스였다. 돌이켜보면 그녀가 국내 최초의 오란씨 모델이었다는 점도, 산업화의 물결이 TV를 통해 각 가정에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1970년대 초반, 그녀의 탈신비화된 이미지가 산업적으로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지를 증거하는 것이리라.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윤여정씨가 신화적인 미모를 가진 여배우는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건 그렇죠. 그 때문에 내가 김기영 감독하고 얼마나 싸웠는데요. 김 감독님이 여성지에다 ‘윤여정, 모든 사람들한테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용기를 준 인물’이라는 글을 썼어요. 내가 전화를 걸었죠. ‘감독님 전데요’ ‘왜 또?’ ‘여원에다 그런 말을 했다면서요? 그럴 수 있어요?’ ‘그것 봐, 사람들이 벌써 미스윤한테 동정을 하잖아. 나를 욕하고. 그러면 미스 윤이 이긴 거야. 내가 일부러 그렇게 한 거라니까.’ 그러데요. 그 사람 참 괴짜죠?”
-저는 윤여정씨가 ‘신화적인 미모를 갖지 않은 여배우’의 선두에 서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엔 오히려 지나치게 뛰어난 미모가 방해가 되잖아요. 문소리씨만 해도 빼어난 미모 대신 연기력과 지적인 능력으로 배우의 길을 개척하고 있고요. 남자 배우로는 1970년대 하재영씨와 80년대의 안성기씨, 여배우로는 윤여정씨가 그런 현상의 선봉에 선 게 아니었나 합니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듣고 보니 그럴 듯하네요. 그 시절엔 여배우들이 참 예뻤죠. 누가 저보고 그랬대요. ‘한국의 누벨 바그’라고. (웃음) 제가 1966년 대학 1학년 때 탤런트 시험을 봤는데, 수험생 대부분은 잘생겼거나 예쁜 사람들이었어요. 그런 와중에도 제가 뽑힐 수 있었던 건 굉장히 달랐기 때문이었다더군요. 시험장에서 실기를 하는데 제 대사가 무척 빨랐다죠. 연출자들이 앉아서 ‘원래 저렇게 해야 맞는 건데’ 하는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지금도 계속해서 TV와 영화를 오가며 연기를 하고 있는데, 차이라면 뭐가 있을까요?
“흔히 텔레비전 작가들은 영화가 망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요. 배우 쓸 만하면 다 영화 하러 간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나라도 영화 한다.’ 영화는 굉장히 많은 시간과 여유를 배우한테 주잖아요. TV는 절대 그럴 수 없죠. 그냥 찍어내야 돼요. ‘바람난 가족’ 찍을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내가 스탠바이를 하고 있는데 문소리가 안 오는 거야. 왜 안 오나 하고 봤더니, 자전거 타다 내리는 장면이라 숨차게 하려고 뛰고 있다는 거예요. 그걸 보고 내가 굉장히 놀랐어요. TV에서는 숨찬 장면이라고 하면 무조건 숨찬 척해야 돼요, 사실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인데도. 배우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죠.”
‘3분의 앤’
-영화 얘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1972년 작품인 ‘화녀’로 데뷔했는데, 이 첫 영화로 윤여정씨는 시체스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탔습니다. 참 대단한 일이었죠. 20년 전 인터뷰를 찾아보니 ‘뭔지도 잘 모르는데 자다가 소식을 들었다’고 그러셨더군요.
당시 신흥 영화제였던 스페인의 시체스 영화제는 지금은 전세계 공포영화제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상으로 성장했다. 윤여정의 수상은 국제영화제 수상경력이 일천했던 당시의 한국 영화계로서는 커다란 경사이자 화제가 아닐 수 없었다.
(계속)
“그 상패는 제작사인 우진필름 대표였던 정진우 감독이 갖고 있어요. 나한테는 보여주기만 하더라고요.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왜 대표가 갖고 있는지 참 이상하죠? (웃음)
그 영화가 끝나고 나서 몹시 시끄러웠어요. 신인배우가 대종상 주연상을 받았잖아요. 발칵 뒤집어졌죠. 다음날부터 영화배우협회에서 반환을 하라고 난리가 났어요. 내가 협회에 등록이 안 돼 있다는 거였죠.
청룡상을 받을 때도 에피소드가 많았어요. 시상식이 시민회관에서 열렸는데 김기영 감독님이 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잊어먹고 시상식 날 오후에 조영남씨랑 ‘천일의 앤’을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누가 손전등을 비추면서 나오라는 거예요. 너무 놀랐죠. 덕분에 조영남씨는 두고두고 ‘천일의 앤이 3분의 앤이 됐다’고 놀렸고요.
나가봤더니 잘 알고 지내던 신문기자였어요. 그가 대뜸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하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빨리 미장원 가서 머리를 하라느니, 잡지 표지를 찍어야 한다느니 하는 거예요. 속으로 ‘조영남하고 스캔들이 나서 그러나 보다’ 하고 있는데, 내가 영화제 상을 타게 됐다고 귀띔해주더라고요. 그 기자가 청룡상을 주관하는 신문사 소속이었으니 믿을 만 했죠. 당연히 신인상을 받나보다 했어요.
부랴부랴 머리를 하고는 시민회관으로 달려갔는데, 신인상 후보에서 내 이름을 안 부르는 거에요. 혹 조연상인가 기다렸는데 거기도 없어요. ‘큰일났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어디 있나’ 쩔쩔 매고 있는데 여우주연상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거에요. 거의 기절할 뻔했죠.
나중에 뒷이야기를 듣고 나서 상이라는 게 참 운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요즘도 상에는 뒷말이 많지만 당시에는 심각했어요. 심사 따로, 상 따로였으니까. 그 해에 청룡상 주최신문사 사장이 갑자기 ‘시상자 결정이 너무 썩었다고 들었다. 무조건 심사결과대로 하라’고 그랬다죠, 아마. 덕분에 탤런트 출신 초짜가 주연상을 탈 수 있었구요. 그런 옛이야기가 있답니다.” (웃음)
운명적인 감독, 김기영
- ‘화녀’는 어떻게 찍게 된 건가요. 김기영 감독이 먼저 제안했던 거겠죠?
“내가 스튜디오에서 녹화를 하는데 어떤 아저씨하고 아주머니가 와서 쳐다봐요. 처음에는 몰랐어.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하루는 그 사람이 날 보자고 그래요. 자기가 김기영 감독이라며 ‘화녀’ 대본을 주더라고요.”
윤여정씨가 말하는 ‘어떤 아주머니’는 김기영 감독의 부인인 김유광씨다. 치과의사였던 그녀는 김 감독의 평생 제작자였고 동반자였다. 덩치 큰 남편에 비해 자그마했던 이 여인을 김 감독은 늘 존경하고 어려워했다고 한다. 이들 부부의 연은 김기영 감독이 부산 영화제에서 ‘재발견’되고 베를린 영화제 회고전을 앞두고 있던 1998년, 자택이던 혜화동 한옥에서의 화재로 인해 한 날 한 시에 나란히 이승을 떠나는 기연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이미 다른 영화를 찍고 있었어요. 그런데 ‘화녀’ 대본을 보니 찍고 있는 영화와는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외국 영화 같고. 찍고 있던 영화 필름값을 물어주고 ‘화녀’를 하기로 했죠. 그랬더니 김 감독님이 조건이 있대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한 달 동안 하루에 한 시간씩 자기랑 만나야 된대요. 이상한 사람이다 싶었죠.
어쨌든 우리 집에서도 만나고 김 감독 집에서도 만나고 커피숍이나 극장에도 갔어요. 사실 나는 재미없었죠. 중년 남자랑 매일 한 시간씩 뭘 하겠어요. 그래서 일주일쯤 지난 뒤에 윤형주, 이장희 같은 친구들한테 시켰죠. ‘잠시 있다 우리집 문을 두들기고 수영 가자고 해라….’ 다방에서 만날 때도 누구를 미리 오게 해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하고 그랬어요. (웃음)
김 감독이 왜 그랬는지는 나중에 촬영 들어가서야 알았어요. 촬영을 준비하다 보면 막힐 때가 있는데, 그러면 김 감독이 그러는 거예요. ‘그때 나하고 미스 윤하고 어디서 뭐 할 때 그때 웃었던 바로 그 웃음 있잖아, 그렇게 웃어봐.’ ‘화녀’ 첫 부분에 보면 제가 아주 이상하게 웃거든요. 그런 표정이 그렇게 나온 거예요. 한 달 동안 나를 만나면서 김감독은 연구한 거죠. 내 손짓이며 발짓 같은 거, 다리를 어떻게 하는지, 앉을 때는 어떻게 앉는지 다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그제서야 ‘그냥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 좀 특별한 사람인가 보다’ 생각했죠.
영화 계약할 때 또 하나 이상한 조건이 있었어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연애를 하면 안 된다는 거였죠. 처음에 그 얘길 듣고는 ‘이 감독 정말 변태구만’ 그랬었는데, 그것도 다 이유가 있었어요. 여배우가 연애를 하면 영화에 집중이 안 돼서 영화를 망친다는 거죠. 그 직전에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는 영화를 찍었는데, 여배우가 연애를 하는 바람에 영화가 망했다는 거예요.”
사디즘, 집착, 카리스마
-그러고 나서 몇 년 만에 재기작으로 고른 영화가 본인 작품이었던 ‘하녀’의 리메이크작인 ‘화녀’였군요. 혹시 오리지널인 ‘하녀’와 비교된다는 부담감은 없었나요.
“별로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여배우가 참 매력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얼굴이다, 그런 생각만 했어요. 김 감독님에게 만날 저 사람 어떻게 됐냐고 물었죠.”
윤여정씨의 회고에 따르면 1969년작 ‘하녀’의 주연배우였던 이은심은 이후 그 영화의 조감독이었던 이성구 감독과 결혼했다가 출산한 아이가 죽은 뒤 브라질로 건너갔다고 한다. 1941년에 태어난 이은심은 일본 나고야 출생으로, 채 열 편도 되지 않는 영화에 출연하고 사라져간 1960년대 초반의 여배우다. 데뷔작이었던 ‘조춘’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그녀의 강렬하고 퇴폐적인 체취는 ‘하녀’의 히로인으로 오래오래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