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어머니 마당》
출판기념회 인사말 / 野花今愛 김영배
오늘 《어머니의 마당》 출판기념회에 참여한 형제들과 친구들께 감사드립니다.
벚꽃 만발하고 벌 나비 춤출 때 함께 꽃구경 가자던 님은 여기 없습니다.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늘 《어머니의 마당》 주인공은 저의 어머니입니다. 제 어머니가 어찌 제 어머니만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어머니도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 가정마다 다 찾아갈 수 없어서 어머니를 보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실 주인공인 어머니께 한 번도 제대로 된 음식을 대접한 기억이 없습니다. 제 결혼식 하던 날, 1990년 2월 20일 화요일로 기억합니다. 돌아보면 참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자취방에 있다가 택시로 성내동에 있는 세영교회로 갔지요. 그때 주례는 김명혁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님께서 해주셨습니다.
어머니는 고향 학다리에서 동네 분들과 친지들을 대형관광버스로 모시고 오셨습니다. 가족과 친지들, 친구들과 성도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그때 여유가 없어서 제대로 친지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못 드리고 친구나 성도들하고 사진도 제대로 찍지 못했습니다.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입니다.
또한, 예식 후에 그 교회 지하식당에 음식을 준비하고 대접했는데, 우리는 신랑 신부를 위해 따로 정성으로 마련해둔 상도 먹지 못하고 그냥 학교 ACTS 동문의 요청, 곧 여기 있으면 서로 힘드니까 신랑 신부가 빨리 이곳을 벗어나 주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해서 그들의 안내를 따라 그들이 준비한 자가용을 타고 가까운 성남시 남한산성으로 갔습니다.
돌아보면 죄송하고 미안하지요. 하객들이 어떤 음식을 드셨는지, 국수를 끓인 것으로 아는데, 누가 비용을 냈는지, 고향에서 어머니께서 여러 음식을 해 오셨을 텐데, 저는 음식 준비하도록 돈을 조금도 드린 기억이 없습니다. 이래도 되는지 그때는 저도 가난했지만 제대로 챙겨서 물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때 형님들과 동생들이 그 대사를 치르는 데 힘을 합쳤을 텐데 그때는 고맙다는 말씀도 못 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인생은 한 번 왔다가는 길, 그 누가 막을 수 있으며 피할 수 있을까요. 오늘 이 자리, 평생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짧은 인생길 걸어온 나. 돌아보면, 낯설고 물선 객지 생활에 무슨 생일이 있고 축하하고 축하받을 일이 있었겠습니까?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청춘의 푸른 꿈을 태우던 시절, 쪼그려 자더라도 밤이슬만 피할 수 있다면 그곳은 저에게 궁궐이요, 다정한 어머니 품과도 같았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어머니, 전 언제나 제가 숨 쉬는 순간까지 곁에는 아니어도 언제나 달려가면 만날 수 있는 거리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백 리를 간들, 천릿길을 긴들 그 모습, 그 얼굴, 그 다정한 음성, 그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으리오.
어머니의 마당은 언제나 넓고 포근한 곳이었습니다. 정신없이 뛰놀다 어스름한 저녁, 아무 생각 없이 달려가면 어머니가 계시고, 마치 내가 주문해놓은 것처럼 따뜻한 밥과 국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진수성찬이지요. 그때는 어리석게도 어머니께 한 번도 감사하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냥 차려진 밥이 내 것처럼 먹었습니다. 어머니의 한없이 정성과 사랑으로 만들어진 밥상인 걸 몰랐습니다. 매번 먹는 어머니의 김치, 배추 김장김치, 깍두기, 동치미, 갓김치와 쌀 조금 섞은 보리밥, 어머니의 손만 닿으면 모두가 꿀맛으로 변했습니다. 어머니 계신 뜰에는 언제나 생명과 사랑이 풍성했습니다.
빚에 쪼들려 견디기 어려웠던 시절, 우리 형제들 모두 한두 개씩 커다란 사연이 없는 사람 없을 겁니다. 내가 객지 생활하며 배고파보니, 때를 넘기며 뱃가죽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들어보니 가난했던 시절 어머니의 손길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어머니는 한 번도 힘들다. 못 살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내 기억의 저장고에는 언제나 어느 때나 어떤 어려움에 씩씩한 대장부처럼 칠남매 자식들 앞에서 친히 비바람, 눈보라를 온몸으로 막아내셨습니다.
어린 자식들은 따뜻한 품에 안아 그 누구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고 지혜롭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치맛자락이 얼마나 넓고 포근하기에 우리 칠 남매, 6.25 전쟁의 위험과, 고달픈 보릿고개의 그 언덕 넘고도 남음이 있게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어떤 때에도 비굴하지 않고 구걸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삶을 살아내는 참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모습 참 대단했고 보기 좋았습니다. 그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셨기에 저와 형제들이 오늘 여기에 서 있습니다.
세월 강이 흐를수록 어찌 어머니의 그 은혜와 사랑이 커져만 갑니까? 적어도 어머니는 89세 일기로 돌아가실 때보다 10년은 더 사실 줄 알았습니다. 2016년 1월 2일 토요일 어머니께서 잠깐 안산 우리 집에 계실 때 동생 홍강이와 함께 물왕저수지 근처 식당에서 동지 팥죽을 대접한 일이 있습니다. 팥죽을 먹고 나서 식당 앞 정자에서 식당 커피를 함께 마신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사진을 찍어 놨지요. 내가 대학 다닐 때 입었던 운동복 상의를 입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때가 어머니와 함께 나눈 마지막 외식이 될 줄이야, 몰랐습니다. 그때 음식값을 내가 내려고 했는데 홍강이가 선수치고 말았지요.
옛사람들은 부모님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으니 일찍이 그렇게 노래했나 봅니다. ~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노래입니다.
<어버이 살아 실제 섬기기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닮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부모님 살아계실 때, 치아가 성성할 때, 대접하고, 다리에 힘 빠지기 전, 허리가 휘기 전에 어머니 모시고 여행이라도 한번 하고 싶었는데 못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2014년 9월 10일 목요일 휠체어에 어머니 모시고 대부도 해변식당에서 해물 국수 먹고 안산호수 공원에 와서 포도와 과일을 나눠 먹으며 정담 나눴던 때가 어머니 모시고 간 유일한 가족 여행입니다. 저는 못나게도 목회한답시고 세월만 보내다가 아쉽고 후회만 남는 자리에 지금도 서성이고 있습니다.
내가 뛰어놀던 어머니의 마당은 비바람이 불어도 들이치지 않았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춥지 않았고 따뜻했습니다. 꽁보리밥에 김치 깍두기여도 언제나 진수성찬이었지요.
어머니의 마당은 학교 운동장보다 넓었고 아무리 달려가도 넘어지지 않는 부른 잔디였습니다. 하늘에서 들으시겠지만, 어머니, 진심으로 그 사랑,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오늘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여기까지 오셔서 저의 다섯 번째 책 《어머니의 마당》 출간을 축하해 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책을 낸 것이 대단한 일도 성공한 일도 아니지만, 함께 축하하고 기뻐하는 자리에 꼭 어머니를 모시고 싶었습니다. 이 넓은 자리에 어머니가 함께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끝으로 시대의 정신을 따라 말하자면, 분단된 이 강토가 하나로 이어지길 바라고 이 수필과 시집을 통해 의와 평화와 희락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소원하며 가슴마다 창조주 하나님, 생명과 사랑의 하나님을 마음에 간직하고 가정마다 작은 사랑의 마당이 펼쳐지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사랑하는 우리 육 남매 형제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길이 되고, 남은 시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어머니 계신 저 천국을 소망하고 믿음으로 복된 삶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23년 5월 27일 토요일 김영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