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 교수님
김동권
신경숙의〈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라는 장편소설을 읽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윤 교수는 첫 강의 때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 시대에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윤 교수는 학생들에게 감명을 주는 강의를 많이 해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다. 특히 주인공 정윤의 대학생활과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윤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갑자기 정종 교수 생각이 났다. 1971년 대학 1학년 때 정종 교수는 한 학기 동안 철학개론을 가르쳤다. 원래 동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서 우리 대학에 외래교수로 나오고 계셨다. 첫 강의 때 “철학의 핵심은 고뇌와 결단이다”고 강조하시며 햄릿의 성격을 예로 들어 “고뇌만하고 결단이 없으면 그것은 우유부단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정종 교수는 당시 꿈 많은 대학 1학년인 우리에게 대학생활과 인생의 진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골에 대한 강의와 세기말 강의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있다. 특히 세기말 강의 때 “1999년 12월31일 학생들이 내 이름과 같은 술(정종)을 한 잔 따라 놓고 내 생각을 해줄 수 있겠는가?” 하신 말씀을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꼭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여러 번 이 말을 하였다.
실제로 세기말 자정에 나는 교수님과의 약속을 지킨 제자가 되었다. 그 당시 온 나라가 세기말과 뉴밀레니엄의 도래로 큰 혼란이 올 수도 있다며 정부도 비상 대책을 세우며 혼란스러웠다. 농협 계산지점장이던 나는 그날을 은근히 기다렸다. 당시 농협도 전산 장애 발생 등 비상사태에 대비해 전 직원이 사무실에 2개조로 대기하였다. 새벽 2시에 교대하기로 했다. 내가 속한 후반 조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3층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기다렸다.
나는 교수님과의 약속을 위해 미리 백화수복 한 병을 샀다. 그리고 20세기 마지막 순간(자정)에 동참한 직원들과 정종 한 잔씩 나누어 마시는 의식(?)을 치렀다. 교수님과의 29년 전 약속을 지키는 순간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교수님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 합동 강의실에서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쓰고 긴 백발을 휘날리며 열정적으로 강의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또 정종 교수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조강지처인 부인을 강의 나오기 1년 전에 하늘나라로 보냈다고 했다. 교수님 부인은 장마철에 마포에서 벼락이 치며 담이 무너졌는데, 마침 그곳의 길을 지나가다가 담에 깔려 돌아가셨다. 그때 신문에도 보도되었다고 하셨다. 대학교수가 되기 전에 고향인 전남 영광의 영광민립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실 때의 일이다. 첫 딸을 낳아 이름을 ‘어지루’라 짓고, 출생 신고를 하러 학교 소사를 면사무소에 보냈더니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는 것. 면 서기가 이름을 한자로 써오라며 신고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면사무소에 전화해서 호적법에 이름을 한자로 신고해야 한다는 조항이 어디 있느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나중에 받아주더란다. 어지루가 자라서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어느 날 시험지를 가져왔단다. 그런데 동그라미 세 개로 표시된 이름 쓰는 자리에 자리가 부족하여 ‘정어지’라고만 써왔단다. 그만‘루’자를 빼놓았던 것. 그래서 “네 이름도 빼놓고 쓰느냐?” 고 야단을 치셨단다. 그런데 둘째 딸은 시험지에 동그라미 하나를 더 그려서 ‘정나비나’라고 써와서 칭찬을 해주셨단다. 자라면서 보니 둘째가 배짱도 있고 성격이 쾌활하다고 하셨다. 요즘은 순 우리말 이름도 많지만, 교수님은 그 옛날 순 우리말로 자녀 이름을 지으신 선각자인 셈이다.
며칠 전 농협대학 9기 동기회 카톡 그룹채팅방에 정종 교수에 대한 글을 올렸더니 반응이 뜨거웠다. 박석주 동기는 ‘불교에 관한 말씀 중에서 염화시중의 미소와 가섭존자 이야기’가 기억난다고 글을 올렸다. 또 미국 뉴저지주 한인회장을 맡고 있는 유강훈 동기는 교수님과 학생들이 최희준의 〈하숙생〉을 합창하던 생각이 난다고 했다.“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라고 멀리 미국에서 글을 올렸다. 그 외에도 여러 친구들이 ‘정종 교수의 근황을 올려주어 무척 반가웠다’고 그룹채팅 방을 드나들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정종 교수를 찾아보았다. 교수님이 올해 100세시고 지난 12월31일이 생신이시며, 지금도 고향인 영광에서 독서와 집필에 열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교수님 박사학위 논문이 ‘공자 사상의 인간학적 연구’라는 점과 영광군립도서관에 보유 도서 1만권을 기증하셨다는 것도 알았다. 또 인터넷에 ‘95살 생일에 쓴 편지’가 올라와 있다. 그 편지 끝부분만 옮겨 본다.
나는 지금 95살이지만 건강하고 정신이 또렷합니다. 혹시 앞으로 10년이나 20년을 더 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어학 공부를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혹시 10년 후에라도 왜 95살 때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2009년 12월 31일 온버림 정종
편지를 보니 세기말 마지막 날에 정종 한 잔을 나눠 마시며 교수님을 생각해 달라던 말씀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교수님은 원래 1969년 도봉산 등산 중 미끄러져 조난을 당하여 왼쪽 눈을 실명하셨다. 그런 후에 오히려 한쪽 눈에서 오는 거리 감각을 극복하려고 등산을 계속했다. 한국과 일본의 유명하다는 산을 다 오르고, ‘산은 제2의 집이다’ 고 하며 한국 알피니스의 대부라 불린다. 지금은 오른쪽 눈마저 망막 박리로 거의 시력을 잃은 상태다. 그래도 가톨릭계의 도서관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카세트테이프로 듣는 독서 프로그램을 이용하신다. 300페이지 책이면 테이프 8개에 녹음되는데, 하루 10시간씩 듣는 독서를 하며 집필도 열정적으로 하신다. 정종 교수님이야말로 평생 교육을 몸소 실천하시는 분이다.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