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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글 >
친구를 위한 기도
글 : 박 인희 (가수)
주여,
쓸데없이 남의 얘기하지 않게 하소서.
친구의 아픔을 붕대로 싸매어 주지는 못할망정
잘 모르면서도 아는 척
남에게까지 옮기지 않게 하여 주소서.
어디론가 훌훌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면서도 속으론 철철 피를 흘리는 사람,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사람,
차마 울 수도 없는 사람,
모든 것을 잊고 싶어 하는 사람,
사람에겐 그 어느 누구에게도 가슴 속 얘기 털어내 놓지 못하는 사람,
가엾은 사람, 어디 하나 성한데 없이 찢기운 상처에
저마다 두 팔 벌려 위로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는...
말에서 뿜어 나오는 독으로 남을 찌르지 않게 하소서.
움츠리고 기죽어 행여 남이 알까 두려워 떨고 있는 친구의 아픈 심장에
한 번 더 화살을 당기지 않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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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영적지도신부 훈화 >
서로를 위한 기도
글 : 윤 클레멘트 (양호) 신부님
<전주교구 소속 지도 신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지고 말해지는 아름다운 전통 가운데 하나가 ‘서로를 위한 기도’의 말씀들일 것입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 기도 합니다 ... 기도를 부탁 합니다 ... 기도 안에서 뵙겠습니다...”
이렇듯 기도의 말씀들은 우리 그리스도인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우리는 첫 번째 성서말씀인 야고서에서 기도에 관한 말씀들을 들었습니다.
“고통 겪는 사람은 기도 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은 찬양 하십시오... 앓는 사람은 원로들이 기도하고 기름을 바르십시오...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 하십시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야고버 5, 13-16 참조)
사도 야고보는 기도의 아름다움을, 기도의 효과를, 기도의 은총을, 기도의 신학을 잘 알고 계셨던 분으로 생각됩니다.
서로를 위한 기도와 기도의 기쁨에 대하여 참으로 아름답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통 중에 기도하고, 즐거움에는 찬양하며, 앓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 ” 고...
어느 절친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어느 날 서로 내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기도를 하느님은 더 잘 들어주시는가에 것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들을 하느님은 거의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마침내 자신이 꿈꾸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한편 다른 친구의 기도를 하느님은 들어주시지 않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자신의 인생이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거의 실패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번째 친구는 자신의 역경과 고난에서도 항상 행복한 얼굴을 간직했습니다.
마침내 두 친구는 인생이 다 끝난 다음 하느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생애를 하느님께 평가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평가가 세상에서의 기준과는 다른 듯했습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기도를 다 들어주신 첫 번째 친구가 아니고, 당신이 거의 기도를 안 들어주신 듯했던 두 번째 친구에게 하느님은 최고의 평점을 주셨습니다.
의아하게 여기는 첫 번째 친구에게 하느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너의 기도만으로 내가 너에게 너의 꿈들이 이루어지게 했던 것은 아니란다. 네 친구의 기도가 너의 꿈을 돕곤 했었단다.
너의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기도하곤 했지.
“하느님, 저의 기도는 제 친구의 기도를 들어주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기도입니다. 저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
오늘의 복음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 같은 이들의 것입니다 ...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마르코 10, 14-16)
어린이의 특징은 단순, 순수, 신뢰, 겸손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 인간 자신들이 어떤 위치, 신원, 부유함, 연령, 인종, 학식, 소유를 가졌다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하느님 앞에 어린이와 같습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 인간 자신의 어떠한 것들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것이니...”
우리 모두는 피조물이고 하느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들입니다. 하느님은 어린이와 같은 마음과 영혼으로 당신께 의탁하고 청하는 이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모두는 언제나 용기를 잃지 않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시련과 고난의 때에 기도하고, 기쁨과 감사의 때에는 찬송하며, 더욱이나 병고에 지치고 힘든 이들을 찾아가고 기도해주어야 함을 오늘의 말씀이 더욱 우리를 일깨워 줍니다.
서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주고 기도의 말씀을 건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인 것을, 오늘도 감사하며 이처럼 새로운 하루를 힘 있게 시작합니다.
- 신부님의 ‘순례자의 노래’ 中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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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18주일
2020. 8. 2
마태오 14, 13 ~ 21
♠ 복음 공부 : 오천 명을 먹이시다.
들어가기 전 : 네 복음서에 다 나오는 기적사화로 이 단락은 예수님의 피신과 군중들의 뒤 따름, 예수님이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외면하시지 않고 측은이 여기시는 분으로 병자들을 치유하고 군중을 먹이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은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즉 제자들이(오늘의 우리들) 예수님 권능의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 13~14절 :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과민 반응하는 헤로데의 영지를 벗어나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잠시 피신하신다. 이 소식을 “들은” 아마 가파르나움과 갈릴레아 호수 주변에서 많은 군중이 육로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나선 듯 하다. 이 강조는 마태오 복음에서만 나타나며, 측은지심에서 병자들을 치유하신다.
* 15~21절 : 제자들은 배고픈 군중을 보고 “제 각기 음식을 사 먹도록 마을로 보내자”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신다. 딱딱한 빵 다섯 개와 소금에 절여 말린 생선 두 마리는 제자 세 사람이 먹기에도 모자라는 양이다. 이 양식을 “가져오너라”하신다. 19절에서 예수님의 동작은 유다인의 평범한 식사예절에 해당한다. 남은 음식을 모으는 것도 마찬가지다. 마태오만이 배불리 먹은 남자들만의 숫자를 밝히고, 여자와 어린이를 언급한 것은 가족적인 식사 분위기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 복음 요약 : 이 단락에 대한 해석은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찬의 전례와 연결하여 해석하였다. 그러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기적을 베푸시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점과 적은 양일지라도 나누면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나눔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또한 수 천 명을 먹이셨다는 것은 미사의 풍요로움을 가리키는 상징이기도 하다.
♠ 대화 방향 :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두 사람의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오천 명분을 혼자 먹는 사람과, 다른 하나는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전자를 잘사는 사람이라고들 하지만, 후자는 하느님을 먹이는 즉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 속에 담겨져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살다가 보면 오천 명을 먹이는 것은 고사하고 남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어려운 때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측은한 마음은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는 공감이며, 예수님이 보여주신 공감적인 사랑만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고, 우리들의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갈증과 허기는 하느님의 사랑 이외는 그 어느 것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의 허기와 갈증을 헤아리시고 생명의 잔칫상에 초대한 그 삶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허기진 우리를 배불리 먹이신 엄청난 기적과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도 가난한 형제들의 허기와 갈증을 헤아려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인간관계에 그들을 초대해야 할 것입니다.
♠ 참고 문헌 : ▪ 여정 마태오 복음서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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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19주일
2020. 8. 9
마태오 14, 22 ~ 33
♠ 복음 공부 : “ 용기를 내어라. 나다. ”
들어가면서 :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이론으로 출발하지 않고 예수님으로 인한 체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오늘 복음에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비명을 지르면서 두려워했던 제자들은 초인간적인 예수님의 신적인 면모를 보았고 그 체험을 전승에 담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물에 빠진 베드로의 이야기는 오직 마태오에만 나타나므로 특히 주목해야 한다.
* 22~27절 : 예수님은 제자들을 배에 태워 떠나보내고 산으로 올라가셨다. 산은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로 선호된다(신명기33.2). 제자들이 탄배는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을 떨어져 있었으므로 1-2km남짓 될 것이다. 때마침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배가 위태롭게 되자, 새벽은 하느님이 도우시는 시간이다(이사17.14).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다. 제자들은 그 광경을 보고 두려움을 느낀다. 이는 하느님이나 신적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보이는 공통 현상이다. 이때 그들에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 마라”(27절)는 (탈출3.14 : 신명32.39) 예수님의 자기 현시다. “ego eimi (나는 ...입니다)” 라고 당신 정체를 밝히시며, 그들을 안심시키신다.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드러내는 이 장면에서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다다를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때 제자들이 체험에 의해 그들 인식이 변화되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 29~33절 : 처음으로 제자들 그룹에서 베드로가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주님이십니까?“ 라는 베드로의 질문은 ”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알려주셨기에 비로소 우리는 아는 것이다. ”살려달라“는 베드로의 외침은 구원을 청하는 진지한 기도다. 즉시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구해주시며, 그의 약한 믿음을 나무라신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치고 제자들은 그분께 절을 한다. 33절에 나타난 제자들의 신앙고백(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이십니다”)에 베드로도 참여하고 있다(16.16).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임종 앞에서 백인대장이 했던 고백(27.54)이기도 하다.
♠ 복음 요약 및 대화 방향
- 제자들이 경험했던 종교적 구원 경험에 이르렀을 때, 우리도 오늘날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나다” 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면서 지금도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그분, 그분을 우리가 직접 체험했을 때 우리는 생활에서 오는 두려움과 온갖 풍파 속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굳센 믿음을 간직할 수 있으며, 그것은 결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닐 것이다. 이 역사적 사건 뒤에는 교회가 있다. 배는 교회를 상징한다. 베드로를 머리로 하여 교회의 싹을 띄우며, 교회는 폭풍을 거슬러 싸워야 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교회의 구성원은 각 개인에게 관계되는 일이다. 개인 각자의 위치에서 내외적으로 반대를 받고, 버림받고, 피로하고, 우울할 수도 있다. 베드로처럼 의심을 갖거나 믿음이 약한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대부분 베드로와 같은 수준에서 산다. 그러나 예수님을 제대로 알면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걷는 용기도 생길 수 있고, 진정한 용기는 예수님을 제대로 체험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기도하지만, 기도하다 보면 용기가 생긴다. 용기를 내는 자에게 예수님은 손을 내미신다.
♠ 참고 문헌 : ▪ 연중19주일 복음 ( 강영옥 / 제399호 1990. 8. 8 ) ▪ 복음해설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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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20주일
2020. 8. 16
마태오 15, 21 ~ 28
♠ 복음 공부
* 22절 :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라는 말은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청인데, 그 여자의 딸이 실제로 어떤 상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진짜로 마귀가 들린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중병에 걸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소리 질렀다.' 라는 말은 그 여자의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 24절 :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이라는 말을 좁은 뜻으로만 생각하면 이 말은 유대인들을 뜻하지만,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구절의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의 은총은 하느님을 믿고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하느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느냐? 먼저 하느님을 믿어라.' 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겉으로만 보면, 냉정한 거절이지만 사실은 그 여자의 믿음을 끌어올리기 위한 시험(시련)입니다.
* 26절 : '빵'은 하느님의 구원, 또는 하느님의 은총을 뜻합니다.
(여기서 자녀들과 강아지들을 좁은 뜻으로만 생각해서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해석하면 하느님의 은총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는 줄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넓은 뜻으로 생각해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과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너의 믿음은 지금 강아지 수준이니 자녀들의 빵을 먹으려면 먼저 자녀들 수준의 믿음을 갖도록 하여라.' 라는 뜻이 됩니다.)
만일에 그 여자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거나 덜 간절했다면 예수님 말씀에 기분 나빠하면서 그냥 돌아갔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시험(시련)이 되는 것입니다.
* 27절 : (여자의 말에는 자녀들이든 강아지들이든 간에 모두 다 주인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즉 아직 불완전하긴 하지만, 하느님은 온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버린 겸손함, 끈질김, 간절함 등이 바로 기도할 때 필요한 자세입니다.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하고, 거절당하는 것처럼 생각되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 28절 : 복음서를 보면, 병자나 병자 가족의 믿음과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자비심으로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 단순히 그 여자의 간절함만 보셨다면 믿음과 상관없이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 여자에게 까다로운 시험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여자를 참된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그 여자가 청하지 않은 은총도 주시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도 은총입니다. 그 여자의 믿음도 예수님께서 주신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처음에는 딸이 낫기만을 바라고 왔지만, 돌아갈 때에는 딸이 낫게 되는 은총도 받았고, 참된 믿음을 갖게 되는 은총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실 믿음을 갖게 된 은총이 더 큰 은총입니다.
♠ 대화 방향
① 지금 성서형제회의 회원으로서 우리의 활동과 세례를 받은 우리의 믿음에는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요?
② 나는 성서형제회 공동체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가? 혹시나 다른 이유를 들어서 네 이웃의 누구 때문이라면서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을 다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③ 만일 지금 나의 모습을 보신다면 주님은 나를 이 여인네의 믿음으로 여기실까?
④ 만일 신앙의 일로 공동체 내에서나 밖에서나 다툼이나 오해가 있다면 나는 어느 편에 속해야 할까, 내 마음을 들여다 봅시다...
♠ 참고 문헌 : ▪ 마태오복음 해설 ( 송영진 모세 신부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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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21주일
2020. 8. 23
마태오 16, 13 ~ 20
♠ 복음 공부
* 고백, 주님의 질문이 일반적인 질문에서 구체적인 질문이 될 때 베드로는 복음에서 신앙의 고백을 합니다. 처음으로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오 복음 16, 13) 이 “조사”의 결과는 예수님께서 예언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고 나서 스승님께서는 결정적인 질문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이때에 베드로가 홀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메시아, 살아 있는 하느님, 우리 생명의 주인 예수님을 안다는 것,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특별히 목자들인 우리들에게 이 중요한 질문을 하십니다. 그것은 결정적인 질문입니다. 그것은 어정쩡한 질문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이 우리의 삶 전체를 활동시키기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질문은 삶에 대한 대답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항목을 아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분께서는 우리를 똑바로 보시면서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나는 누구이냐?”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아직 네 삶의 주인이냐, 네 마음의 갈망이냐, 네 희망의 이유이냐, 너의 실패하지 않는 믿음의 원천이냐?” 베드로와 함께 우리도 오늘 예수님의 제자와 사도들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 삶의 선택을 다시 새롭게 합니다. 우리가 또한 예수님의 첫 번째 질문에서 그분의 두 번째 질문으로 나아가게 해 주시기를, 말뿐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과 우리 자신의 삶 안에서 “그분의 것”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말뿐인 그리스도인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 봅시다. 말뿐인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와 세상에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이야기하고 계속 나아가는 사도들은 자신의 마음 안에서 그분 예수님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으로 예수님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단순히 의견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정쩡하게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불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그저 “발헤엄”을 치거나 쉬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고 날마다 새롭게 자기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들의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베드로와 바오로가 한 것처럼 합니다.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릅니다 – 가는 길의 그저 일부분이 아니라, 그 바로 끝까지 말입니다. 그들은 또한 우리 자신의 길이 아니라, 그분의 길을 따라 그분을 따릅니다. 그분의 길은 새 생명의 길이고 기쁨과 부활의 길입니다. 그것은 또한 십자가와 박해를 통과해 지나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 복음 요약 : 사도의 삶, 그것은 고백에서 비롯되어 흘러나오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게 되는데, 그것은 끊임없는 기도의 삶입니다. 기도는 희망을 키우고 충실함을 높이는데 필요한 물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느끼게 해 주고 기도는 우리가 그 보답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빛을 가져오기 때문에 어둠의 때에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떠밀어 줍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를 지탱해 주고 우리가 역경을 이겨내게 도와주는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교회는 보호받으며 주님의 보살핌을 받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삶을 주님께 의탁하며 사랑하시는 그분의 보살핌에 맡깁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고 지탱해 주는 힘이자 강인함이고 영적인 죽음으로 이끄는 자기만족과 고립의 치료제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생명의 영이 숨 쉬지 않습니다. 기도 없이 우리를 포로로 붙들고 있는 내면의 감옥은 열릴 수 없습니다. 복된 사도들께서 우리가 그분들과 같은 마음을, 지쳤지만 기도 때문에 평화로운 마음을 얻게 해 주시기를 끊임없이 구하고 두드리고 중재하고 주님께 맡겨야 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과 상황의 무게에 눌려 있기 때문에 지쳐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평화롭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위로와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기도의 스승을 두어야 하는 일은 얼마나 시급한지요. 하지만 우리가 기도의 남자와 여자, 즉 삶 전체가 기도가 되는 남자와 여자가 되려면 더욱 그러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고백하는 사랑에 진실하시며 그분께서는 시련의 때에 우리 곁에 서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도의 여정에 동행하며 그분께서는 사랑하는 성서형제회 형제 여러분과 같은 일을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서형제들이여, 여러분들은 피를 흘림으로서 믿음을 고백했던 사도들의 사랑 안에 여기에 모여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팔리움을 받은 사랑하는 사제들 여러분과 가까이 계실 것입니다.
♠ 대화 방향 : ① 예수님은 실제로 어떤 분이며, 나에게는 어떤 분이신지 생각해 봅시다.
② 교황님의 교도권은 베드로 사도의 교도권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 교도권에 순종하는가? 아니면 교회에 대한 애정 없이 하느님과 직접 거래하려고 하지 않는지 생각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마태오복음 18, 13~20 은 지난 성베드로 성바오로 사도 축일 때 복음과 일치한다. 이번 복음공부는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이 복음을 주제로 하신 강론을 보고 묵상해보았다. 교황님께서 “오늘의 전례는 우리에게 사도의 삶에서 핵심이 되는 세 가지 단어를 제시해 줍니다. 고백, 박해 그리고 기도입니다” 에서 박해 부분을 삭제하였다. 나머지부분은 똑같으며,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묵상되도록 ‘교황님께서 사랑하는 주교들이여’ 부분을 ‘성서형제회 형제’ 로 바꿔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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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22주일
2020. 8. 30
마태오 16, 21 ~ 27
♠ 복음 공부
들어가면서 - 베드로가 예수님의 정체를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했으니(16절), 이제 어떤 의미의 그리스도인지 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공관복음에는 세 차례 수난예고를 실어 (16,21-23, 마르8,31-33. 17,22-23, 마르9,30-32. 20,17-19, 마르10,32-34) 그리스도는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임을 강조한다.
* 21-23절 : 수난과 부활을 첫 예고 - “그때부터” 는 새로운 단계를 시작할 때 사용하는 마태오의 전형구로 여기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의 시작으로 베드로의 고백을 받은 후, 비로소 당신이 걸어야 할 그리스도의 길(수난의 길)을 예고하신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에 가시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되살아나다” 등의 4개의 부정사구가 걸린다. 예루살렘에 가시어 고난을 받는다는 내용은 둘째 수난예고는 없지만, 세 차례에 걸친 수난예고에 모두 나오는 핵심 전승이다. 예수님의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펄쩍 뛴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시랑을 나타내는 베드로다운 인간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자 예수님은 돌아서서“사탄”이라 하시며 베드로를 크게 꾸짖으신다. 돌아서야만 했는데 이것은 베드로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 깨서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게 만드는 그런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제자일지라도 단호하게 끊어야 할 십자가의 길이었다. 사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심은 초대교회에서부터 핵심적으로 선포된 우리 신앙의 핵심 주제다.
* 24-27절 : 예수님을 따르는 길 - 여기서 제자들은 열 두 사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즉 ‘온 삶’으로 예수님과 일치하면서 그분이 가신 길을 뒤따라가기 위해 자아를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신다. 십자가를 지는 행위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제시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행위를 현재형으로 제시함으로써 십자가를 지는 행위를 반복으로 수행하면서 현재에도 따르고 있어야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목숨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무리 부요하다 해도 그것으로 생명을 얻지 못하고, 하느님께 의탁해야 영생도 지금의 삶도 보장받을 수 있다.
♠ 복음 요약 : 하느님의 길과 인간의 길 (자아실현의 길)
열매를 맺기 전에는 사뭇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자아실현을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실현을 소홀하게 여기다 보니 자기만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이에 따라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하는 것이 문제다. 부모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않으면 필요 없다는 듯 보인다. 신앙도 각자의 판단에 따라 판단한다. 무시무시한 세상과 가치를 향해 예수님은 외치신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이 불운한 희생자가 아니라 갈등 안에 답이 있다. 인간의 길을 통해 하느님의 길이 실현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숙고하도록 이끈다.
나의 목적지는?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내가 삶의 주인공으로서 의미를 찾고 고통스러운 길에 압도되지 않는 자세야 말로 예수님과 일치하려고 노력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신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 뒤를 따르겠다는 것이며,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고통 저 넘어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희망하면서 예수님의 길에 방해가 되는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사도 바오로의 외침처럼 인간의 길을 통해 하느님의 길로 나아가는 자기실현을 말씀하고 계신다.
♠ 대화 방향 : ① 나는 자기를 사랑하고 하는가? 그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
② 나는 살아가면서 고통을 적대시했는가 아니면 받아들일 마음으로 생활했는가를 성찰하고 나누어 보세요.
♠ 참고 문헌 : ▪ 마태오 복음 주해 (이우식 지음 / 바오로딸, 한남성서연구소 공동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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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묵상자료 기고 >
너의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 루카 복음 21장 5 ~ 19절 >
장 도미니코 사비오 (철호)
광주 F·B 회원
찬미 예수님 !
안녕하십니까, 성서형제회 형제 자매님들... !
이 부분 읽으면 두려움이 생기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깁시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이 얼마나 든든한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우리 옆에 계시는 한 그 어떤 것도 우리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열리는 ‘국제줄기세포 학술대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대한항공 직항이 비싸서 폴란드 비행기를 타고 바르샤바를 경유하여 16시간 만에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특허기술을 가지고 있는 나라 이스라엘, 실리콘밸리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실리콘 밸리가 있는 나라,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사막을 옥토로 만든 나라 이스라엘, 탈무드의 교육으로 유명한 나라 이스라엘의 입구 벤 구리온공항 온 벽에 삼성 갤럭시노트10을 선전하는 전광판이 공항 온 벽을 둘러싸고 있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자원하나 제대로 나지 않는 한국에서 기술력으로 핸드폰을 만들어 외국과 경쟁하고 있는 삼성이 있어서 흐뭇합니다.
자원하나 나지 않는 우리나라 기업이 국제무대에서 전 세계기업을 상대로 경쟁을 하고 있을 때 삼류정치판인 한국 내에서 얼마나 답답할까를 생각했습니다.
이상하게도 벤 구리온 공항에 도착해서 전철을 타고 미리 예약을 해놓은 예루살렘 살레시오 수녀원 숙소로 가는데 전혀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텔아비브 센트랄 역에서 택시를 타고 수녀원 부근에서 내려서 시간을 보니 현지 시간으로 밤 9시입니다.
핸드폰 구글 지도로 수녀원을 검색하다가 주변을 지나가는 유대인에게 물었더니 “네가 서 있는 집, 그 집이 바로 살레시오수녀원이다.” 라고 말을 합니다.
벨을 눌렀습니다. 나이 많으신 수녀님이 누구냐고 물어 보시길래, 한국에서 온 도미니꼬사비오입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근데 곧바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문을 열고 들어 오세요.” 들어 갔더니 한국 수녀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리고 수녀님이 방을 안내해주시고, 아침식사는 6시 반부터 수녀원 식당에서 식사가 시작된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미사는 7시 스페인어로 진행된다고 합니다.
첫날 밤을 지내고 아침 미사를 하러 성당에 가니, 수녀님들 5분이 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신부님 두 분이 미사를 하는데 거룩한 미사였습니다.
숙소 부근에서 버스를 타고 성모님 무덤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성모님 무덤 성당은 아르메니아에서 관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성모님을 둘러 싼 열두 사도들 성화가 있었으며, 성모님을 모신 자리로 고개를 숙여서 들어 가서 성모님 무덤 앞에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곳을 나와서 조금 걸어 가니 겟세마니 동산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밤새 피땀을 흘리시고 기도하신 그 겟세마니동산은 오래된 나무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온 나라를 위한 기념성당이 있었습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 가서 예수님이 기도하셨을 때 당시의 겟세마니 동산의 흙이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작은형제회 신부님들이 관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 가는데 버스 안에서 저를 보고 전통적인 유대인 복장을 한 유대인이 자리를 양보해줍니다.
저는 처음엔 왜 그들은 모자를 쓸까 생각해 보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구약성경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머리를 가리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겸손의 표현입니다.
예루살렘 거리는 예상과는 달리 평온하였습니다.
유대인들과 무슬림인들, 성지 순례 중인 가톨릭 신자들, 관광객들 평온합니다.
다음날인 오늘은 토요일입니다.
이곳은 금요일 저녁 3시 이후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안식일입니다.
따라서 버스도 다니지 않고 모든 유대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는 문을 닫습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그들이 종교는 다르지만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에는 무슬림이 운영하는 가게는 오픈을 합니다.
아침 식사만 제공하는 수녀원에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무슬림이 운영하는 식당을 갔습니다.
케밥을 시켜서 먹었는데 야채와 고기가 들어 있는 샌드위치였습니다.
유대인들 식당이나 가게와는 다르게 무슬림 식당이나 가게는 신용카드는 받지 않고 오로지 이스라엘 화폐인 세겔만 받습니다.
성경에도 나오는 세겔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버스가 다니지 않기에 숙소에서 걸어서 가까운 예수님 무덤 성당을 보러 갔습니다.
토요일이지만 그곳에는 수많은 순례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온 단체 순례자들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시신을 모셨다는 돌판 위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누는데 구시가지 안에 위치한 예수님 무덤 성당을 가는데 길 바닥은 벽돌로 된 이스라엘 시대부터 만들어진 길인데, 얼마나 많은 순례자들이 중세 때부터 다녀갔는지 길바닥이 미끄러울 정도로 반들반들하여 걸음을 조심하였습니다.
돌아 오는 길에 주님과 성모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곳에 불러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숨 쉬고 성모님이 함께 다니셨던, 그리고 지금도 저희와 함께 해 주시는 이곳 예루살렘에 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는 금요일에 한국에 도착합니다.
아나스타시아 선생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은총의 한 주간이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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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기고 >
F․B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면서... - 제 13 부 -
안산 원곡본당 F・B / 권 토마 (순)
< 주님을 느끼면서... >
+ 찬미 예수님
1990년대 어느 날 서울교구 말씀봉사자들이 부천에 있는 성신여대(지금 가톨릭대학 성신교정).
1박2일 피정 첫 날 저녁, 공동참회 후 고백시간을 가졌다,
그때의 느낌을 고백해 본다.
아내가 운전해서 나는 그곳까지 갈 수가 있었다.
마침 피정의 집 입구에 홍인식마티아 신부님이 나와계셨다,
아내를 소개하며 인사를 드렸더니만, 신부님은 아내에게 “형제님을 가정으로 돌려 드릴테니, 본당에서 열심히 하도록 해주세요.” 라고 하셨다.
그 이후로 시흥동 본당에서 청년성서모임 봉사를 하였고, 그런 연유로 본당에서 청소년사목위원도 하게 되었다.
피정 중에 늦은 밤, 경당에는 어둠이 드리우지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지나온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주님 앞에 드러내놓고 있다.
참회시간이 정리 되면 조용히 일어서서 바닥에 촛불이 깔린 동선에 따라 복도를 지나 고해소에 다다르게 된다.
다른 고해소와 달리 방 안에는 사제와 마주 보게 되지만, 그리 낯설지도 부끄럽지도 않다.
마치 주님과 대화하듯이 조용히 나직하게 읊조린다.
사제의 보속 내용을 들은 후에 야외로 나오게 되고, 야간 높은 언덕 바깥에는 저녁 불빛이 여기 저기 비춰지고,
조금 이후에는 하늘의 별빛이 초롱거림을 알게 된다.
조금씩 사람들이 작은 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오는데, 잠시 이후에 모든 이들이 나오게 되며,
누구랄 것 없이 어떤 이 선창에 의해서 교송이 시작된다
되돌이노래라서 끝임없이 반복되며 주님을 찬미한다.
‘들어라 이스라엘아.’라는 노래가 묘하게 하늘을 향하게 퍼져나간다.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에 퍼져나가듯이 말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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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I 재정 회계 보고 >
♠ 2020년 6월 입출금 내역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많든 적든 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