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해년(1659, 효종10) 3월 11일에 희정당(煕政堂)에서 소대(召對)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제신(諸臣)들은 모두 나가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송시열)만 남아 있도록 하라.”
하였다. 제신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자, 상이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문을 활짝 열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너희들도 모두 멀리 물러가 있도록 하라.” 하였다. 그런 다음 상이 이르기를,
“경(卿)과 조용히 대화를 하고 싶어 여러 달을 기다렸지만 끝내 기회가 없었소. 그러므로 오늘은 마음먹고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오. 오늘은 나도 다행히 기운이 회복되었으니, 내 뜻을 다 말할 수 있을 것이오.” 하고는, 이어 탄식하며 이르기를,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의 대사를 말하자는 것이오. 저 오랑캐는 반드시 망하게 될 형편에 처해 있소. 예전의 칸[汗. 청나라 군주를 낮게 칭함]은 그 형제들이 매우 번성했었는데 지금은 점점 줄어들었으며, 예전의 칸은 인재가 매우 많았는데 지금은 모두 용렬하며, 예전의 칸은 오로지 무예와 전쟁만을 숭상했었는데 지금은 점점 무사(武事)를 폐하고 자못 중국의 일을 본받고 있소. 이것이 바로 경이 지난번 주자(朱子)의 말씀을 들어 말한바 ‘오랑캐가 중원(中原)의 인재를 얻어 중국의 제도를 배우면 점점 쇠약해진다.’는 것일 것이오. 지금의 칸이 비록 영웅이라고는 하나, 주색(酒色)에 깊이 빠져 있어 그 형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오. 오랑캐의 일은 내 익히 알고 있소. 신하들은 모두 내가 병사(兵事)를 다스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소. 그 이유는 천시(天時)와 인사(人事)의 좋은 기회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정예화된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저들이 예기치 못하였을 때에 곧장 관(關)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소. 아마 곧장 관으로 쳐들어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오. 저들은 무비(武備)를 힘쓰지 않아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의 천 리 길에 활을 잡고 말을 타는 자가 전혀 없으니, 우리가 쳐들어가면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할 수 있을 것이오. 또 하늘의 뜻을 헤아려 보건대, 우리나라의 세폐(歲幣.음력 10월에 중국에 보내던 공물)를 저들이 모두 요동과 심양에 쌓아 두고 있으니, 하늘의 뜻은 아마 다시 우리의 물건이 되게 하려는 것인 듯하오. 또 우리나라에서 잡혀간 수만 명의 포로가 그곳에 억류되어 있으니, 어찌 내응하는 자가 없겠소. 오늘날의 일은 과단성 있게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하여, 이에 응대하기를,
“전하의 뜻이 이와 같으시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 만대의 다행입니다. 그러나 제갈량(諸葛亮)도 능히 성공하지 못하고서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 세상사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만에 하나 차질이 있어 국가가 망하게 된다면 어찌하시렵니까?”
하니,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그것은 경이 나를 시험하는 말이오. 나는 내 능력이 충분히 이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 아니오. 다만 천리나 인심으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데, 어찌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 하여 스스로 포기하고 하지 않을 수 있겠소. 뜻이 진실로 굳게 정해지면 정성이 자연 돈독해지고, 정성이 돈독해지면 능력 또한 키울 수 있는 것이오. 이 때문에 항상 스스로 분발하고 있을 뿐이오. 더구나 하늘의 뜻이 이러하니, 나는 국가가 망하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하늘이 내게 부여해 준 자질이 그리 용렬하지 않은 데다가, 나로 하여금 일찍이 환란을 당하게 하여 나의 능하지 못한 면을 능하게 해 주었고, 나로 하여금 일찍이 궁마(弓馬)와 전진(戰陣)의 일을 익히게 하였으며, 나로 하여금 저들 속에 들어가 저들의 형세와 산천의 지리를 익히 알게 하였고, 나로 하여금 그곳에 오랫동안 있게(효종은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있었음) 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였소.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하늘이 나에게 이러한 시련을 겪게 한 뜻이우연하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소. 그러나 이 일을 함께할 수 있는 신하들이 없고 내 나이가 점점 많아져 세월만 자꾸 흐르니, 내 생애가 즐겁지 못하였소. 그러다 경이 올라온 뒤로 점점 생각이 좋아지게 되었으나, 경 또한 외로운 처지이니 매우 걱정이 되오. 경은 당론(黨論)을 하지 않으니, 저쪽이나 이쪽 모두가 도와주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나와 경은 뜻이 같고 생각이 일치되어 항상 골육의 형제와 같으니, 함께 호응해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오. 나는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10년을 기한으로 삼고 있는데, 앞으로 10년이면 내 나이 50세가 되오. 10년 안에 이 일을 이루지 못하면 나의 지기(志氣)가 점점 쇠하여 다시는 가망이 없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나도 경이 물러가기를 허락할 것이고, 그때엔 경이 물러가도 괜찮을 것이오.
세자(世子.현종을 말함)가 매우 총명하니, 아무리 부자간이라 해도 어찌 그 장단점을 알지 못하겠소. 그 아이의 성질이 온순하고 효성스러우며 또 견고한 마음이 있으니, 정녕 수문(守文)의 훌륭한 군주가 될 것이오. 그 아이는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병가(兵家)의 일을 알지 못하니, 그에게 어려운 일을 가지고 억지로 하기를 요구해서는 안 될 것이오. 아직 천연두도 겪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린아이처럼 보호하고 있소. 또 자주 병을 앓고 아직까지 자식이 없어 극히 염려하고 있소. 한편 생각해 보니, 그 아이는 나이가 어려 혈기가 정해지지 못하였으므로, 정력을 보전하고 아끼지 못해서 자식을 낳는 데 좋지 못할까 걱정이 되고, 또 학문에도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오. 이 때문에 나는 근자에 저곳에다가 인하여 손으로 경의각(敬義閣)을 가리켰다. 방 하나를 별도로 만들어 그 아이로 하여금 그곳에서 독서를 하게 하고, 근신(謹愼)한 노관(老官)을 뽑아 세자와 함께 기거하게 하였소.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지켜보면서 그 아이로 하여금 때때로 내전(內殿)에 들게 하고 있소.
부자간의 일은 남에게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지만 경은 골육의 형제와 같기 때문에 숨기지 않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오. 오늘날의 이 일은 아마도 나에게서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장차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 것이오. 세자의 훌륭한 덕(德)은 국가를 편안히 보존할 수는 있겠지만, 이처럼 지극히 어렵고 위태로운 일을 해내는 것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오. 또 내가 내전에 들어가는 날은 혈기가 손상될 뿐만 아니라, 지기(志氣) 또한 해이해져서 일을 처리하는 데에도 온당치 못한 점이 많아지오. 또 옛사람들이 요절(夭折)한 경우를 보면 대부분 여색과 관계가 있으니, 진실로 무일(無逸)의 경계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리하여 나는 주색을 끊고 경계하여 가까이하지 않은 결과, 이로 인하여 나는 늘 정신이 맑고 몸도 건강해졌으니, 어찌 앞으로 10년을 보장할 수 없겠소. 하늘이 나에게 10년의 기간을 허용해 준다면 성패와 상관없이 한번 거사해 볼 계획이니, 경은 은밀히 동지들과 의논해 보도록 하오. 내 소견으로는 송준길(宋浚吉)은 담당할 의사가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오?” 하여, 응대하기를,
“그런 뜻이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람은 기질이 약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유태(李惟泰)는 어떻소?” 하여, 응대하기를,
“이유태가 항상 말하기를 ‘주상께서 뜻을 굳게 정하신다면 모든 기무를 반드시 치밀하게 한 다음에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일을 하다가 사람이 죽더라도 우선 집 뒤에 장사 지내게 하는 식으로 다른 일까지 하여 백성을 동원하고 재정을 허비하는 등의 모든 일을 일체 중지하며 한결같이 백성을 기르고 양식을 풍족하게 하기를 힘써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그의 말이 이와 같다면 참으로 쓸 만한 사람이오. 내 생각에 허적(許積)은 굳세고 용감하여 일을 맡길 수 있겠으나, 다만 그 사람이 주색에 빠져 자못 행실이 좋지 않다고 하니, 매우 애석한 일이오. 내 일찍이 생각하기를, 나와 이 일을 함께할 수 있는 자는 오랑캐의 손에 죽은 집안의 자제들뿐이고 그 밖의 사람들은 어렵다고 여기고 있었소.
내가 만수전(萬壽殿)을 지을 적에 터 잡는 일을 핑계로 한곳에 가서 앉아 몇 명을 인견(引見)하고 이 일을 은밀히 말하여 시험해 보았는데, 모두 무관심하여 깊이 생각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처럼 통탄할 일이 어디 있겠소. 신하들이 모두 눈앞의 부귀만을 도모하여 이 일을 하면 국가가 망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을 말하면 모두 간담이 서늘해서 놀라는 것이니, 나 혼자서 부질없이 탄식할 뿐이오. 저들이 모두 제 자손들을 위한 계획만 세우고 나를 도우려 하지 않고 있소. 이 때문에 나도 결국 좋지 못한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 또 내가 따로 할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아녀(兒女)들을 위하여 집을 짓는 계획을 하였던 것이오. 대계(大計)가 진실로 정해진다면 아녀들의 집이 이미 완공되었더라도 헐어 버리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신이 일어나 진언(進言)하기를,
“예로부터 제왕들은 반드시 먼저 자신을 수양하고 가정을 다스린 뒤에야 법도와 기강을 세워 일에 두서가 있게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능히 혼잡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떨쳐 버리지 못하시니 지기(志氣)가 있는 선비들의 마음이 게을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으며, 뭇 신하들이 제 집안을 살찌우는 데에만 힘쓰는 것도 전하를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인조(仁祖) 때 윤황(尹煌)의 말에 ‘예로부터 윗사람이 선을 행하여 아랫사람들을 통솔하는 경우는 있어도, 아랫사람이 선하지 않은 일을 하는데 윗사람이 본받는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 말은 상당히 이치가 있는 말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심신(心身)을 깨끗이 하시어 잡다한 모든 일들을 일체 제거하시고, 마음과 생각에 한결같이 이 일만을 위주로 하신다면, 신하들도 어찌 감히 나라를 위해 제 몸을 바치려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지난번에, 제갈량(諸葛亮)이 우선 사관(史官)을 설치하지 않은 일과 주자(朱子)가 중원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사당을 세우려 하였던 일을 말씀드린 것은 뜻이 있어 그랬던 것입니다.” 하니,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옳소. 이제부터는 모든 일을 경과 더불어 은밀히 의논할 것이오, 그런데 은밀히 의논하기가 극히 어려우니, 내 서서히 그 방도를 생각해 보겠소. 이후에 과연 이 전교와 같이 은밀히 의논한 일이 있었다. 오늘날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이처럼 극심하오.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면 재변을 초래하게 되지만,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도 재변이 반드시 이르게 되는 것이오. 옛날 진 무제(晉武帝)는 창업을 한 다음, 전혀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때처럼 재앙과 이변이 자주 일어난 적이 없었던 것이오. 이것을 보면 가만히 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어도 하늘의 노여움을 사 재변을 초래함을 알 수 있소. 하물며 오늘날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으면 안 될 천지의 떳떳한 도리인데, 태연히 하지 않고 있으니, 하늘이 경계하여 재변을 내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오늘날 의논하는 자들은 모두 저 오랑캐에게 투항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감히 기운을 내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반드시 그럴 리가 없을 것이오. 저들은 우리나라가 보존되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이로운 점이 매우 많으니, 우리나라가 만일 망한다면 저들은 이익을 얻을 곳이 없어지게 될 것이오. 따라서 우리나라를 보존되게 하여 영원히 자기들의 이익으로 삼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쓸 것이오. 그러므로 저들이 때로 우리에게 공갈을 치는 것은 우리를 협박하여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려는 것이지, 실제로 그들 마음은 우리나라가 무사하기를 바라고 있소. 그런데 저들이 한마디 공갈을 치면 모두들 기운을 잃고 넋이 빠지고 마니, 매우 슬픈 일이오.
또 내가 하려고 하는 일과 아래에서 하려는 일이 있더라도 중간에서 대신들이 막으면 결국 할 수가 없게 되오. 지난번 포척(布尺)에 대한 정식(定式)을 내 경의 말을 듣고 즉시 내수사(內需司)에서 사용하는 베[布]부터 그 길이를 줄이라고 전교하였는데, 대신 이하 신료들이 시행하기 어렵다 하여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소. 이제부터는 반드시 경과 같이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모든 일을 상의하도록 하겠소. 나는 오래전부터 경에게 큰 임무를 맡기고 싶었지만 경을 꺼리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경에게 편치 못한 일이 될까 염려하였고, 또 경이 승진하고 나면 전선(銓選.인사행정)을 맡을 만한 자가 없으므로 지금까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이 항상 답답하오. 내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은 조만간 경에게 큰 임무를 맡기고 양전(兩銓.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가리킴)을 겸직하게 하려 하오. 다만 힘든 일을 많이 맡게 하는 것이 미안하고, 또 이와 같이 하면 경을 시기하는 자들이 더욱 많아지게 될 염려가 있기 때문에 마음속에만 두고 있을 뿐이오.” 하였다. 신이 일어나 응대하기를,
“신은 결코 그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전하께서 신을 너무 모르시는 것입니다. 신은 감히 전하의 위임을 감당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난번 전하께서 큰 뜻을 은밀히 보여 주셨을 적에, 신의 벗인 이유태(李惟泰)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과연 큰 뜻을 가지고 계시다면 비록 능력과 지혜가 없는 자라 할지라도 또한 분발해서 석호(石壕)의 아낙처럼 새벽밥 짓는 일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고 하였기 때문에, 신이 비록 매우 용렬하지만 감히 소지(召旨)를 받들어 온 것일 뿐입니다. 전하께서 큰 뜻을 가지고 계시고 또 신을 크게 쓰려고 하시는데, 신이 어찌 물러가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죽을 각오로 일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은 쓸 만한 재능이 없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신을 유악(帷幄.비밀스러운 일을 의논하는곳)에다 두시고 때때로 의심나는 일을 물으신다면 신이 어찌 어리석은 소견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뜻은 내 뜻과 다르오. 그러나 경은 오늘날 해야 할 일 중에서 무엇이 가장 급선무인지 한번 말해 주오.” 하여, 응대하기를,
“그것은 즉석에서 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평소에 배운 것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학설을 사람들은 진부하고 오활한 옛말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을 들으면 사람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비웃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필시 쓸데없는 말을 해서 후세 사람들을 속였을 리가 없습니다. 격물치지라는 것은 이 마음의 본체를 밝혀 사물의 이치에 대하여 막힘이 없고 모두 통달하여 모든 일을 마땅하게 처리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진실로 밝지 못하면 사물의 이치에 어둡고 막혀서 일을 처리할 적에 그 마땅함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비단 정치에 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인심이 사나워져 복종하지 않을 것이고, 심한 경우에는 윗사람을 능멸까지 하게 됩니다. 이와 같고서도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후세의 오활한 유자(儒者)들은 초목과 곤충의 이치를 살피는 것을 격물치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비록 격물치지의 한 가지 일이기는 하나, 초목이나 곤충의 이치만을 살피고 인륜에 대한 큰일을 먼저 살피지 않는다면 어찌 격물치지가 제대로 될 것이며, 또 그런 것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성상께서도 그것을 격물치지의 실상이라고 여기신다면 성인이 말씀한 격물치지가 오활하여 절실하지 않다고 생각하시어 노력하려고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옛날에 주자(朱子)는 ‘모든 일에 옳은 것을 찾는 것이 격물치지의 요지이다.’라고 말씀하였으니, 이 말씀을 깊이 체득해야 할 것입니다. 성의(誠意)의 학설에 이르러서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 바로 그 실제입니다. 군주가 안으로 자신의 마음과 몸에서부터 밖으로 사람을 쓰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성의 공부에 힘쓴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정심(正心)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본체를 담연(湛然)히 허명(虛明)하게 하여 치우치거나 분잡함이 없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의 본체는 격물치지를 하여 이미 밝아지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성의 공부를 하여 이미 판단이 섰다 하더라도 마음이 담연히 허명하지 못하면 외물에 쉽게 흔들려 어두워지게 됩니다. 이 때문에 도리어 제대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지 못하여 한쪽으로 치우치고 번잡하게 됨으로써 장차 못하는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격물ㆍ치지ㆍ성의를 하고 난 뒤에도 이 정심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한번 시험 삼아 이른 새벽 사물을 접하지 않아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을 때에, 그 마음의 대응이 어떠한가를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그때에 한 일은 반드시 이치에 합당한 것이 많고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적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매우 옳소. 나는 이른 새벽 이와 같음을 많이 체험하였는데, 한낮에 마음이 분잡하고 소란할 때 한 일과는 큰 차이가 있었소.” 하여, 응대하기를,
“격물치지를 하여 사리가 이미 통명해지고, 성의 공부를 하여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이 분별되며, 정심 공부를 하여 마음의 본체가 항상 태연해서 누(累)가 없게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모든 사물을 처리할 적에 올바른 이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격물ㆍ치지ㆍ성의ㆍ정심이라는 것이 과연 오활하여 실상이 없는 헛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지 않고 한갓 지혜와 혈기를 가지고 억지로 한다면 비록 우연히 이치에 합하는 일이 없지는 않겠지만, 뿌리 없는 나무와 같고 근원이 없는 물과 같아서 한 가지 일은 이치에 맞았다가도 한 가지 일은 이치에 맞지 않게 되며, 오늘은 잘하였다가도 내일은 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마음에도 항상 쾌하지 않은데 더구나 다른 사람들이 믿고 따르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참으로 옳소. 이것이 옛사람이 이른바 ‘청명(淸明)함이 몸에 있으면 지기(志氣)가 신명(神明)해진다.’는 것일 것이오, 내 비록 어둡고 어리석으나 때때로 이러한 의사가 실제로 있으니, 만일 이러한 의사가 중단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인들 할 수 없겠소. 그러나 이처럼 좋은 의사가 있을 경우는 극히 적구려.” 하여, 응대하기를,
“그렇기 때문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학문을 논할 적에 반드시 경(敬)을 위주로 하였던 것입니다. 공경하면 이 마음이 항상 보존되어 조금도 중단됨이 없고, 공경하지 않으면 마음이 분잡하고 어지러워져서 좋은 의사가 곧 쇠미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씀하기를 ‘한때의 의사가 능히 얼마 동안 지속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작은 일도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천하 국가의 일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늘 지극한 정성으로 나를 이끌어 주니, 내 감히 잊지 못할 것이오. 경 또한 스스로 모든 선(善)을 모으고 훌륭한 말을 할 것을 생각하여 함께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모해야 할 것이오. 경이 말한 이른 새벽에 대한 얘기가 가장 절실하오. 나도 여러 번 체험하였는데, 내 마음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 경우 우선 내버려 두었다가 한밤중이 되어 불평한 마음이 없어지기를 기다린 다음, 이른 새벽에 일어나 처리하면 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소. 이 때문에 맹자(孟子)의 말씀이 지론(至論)임을 알게 되었소.”
하여, 응대하기를, “성상께서 항상 이와 같이 힘쓰신다면, 어찌 학문이 고명한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마음에 크게 답답히 여기고 있는 것이 있는데, 지금 경에게 물어 결정해야 하겠소. 오늘날 큰 근심거리는 율곡(栗谷.이이)과 우계(牛溪.성혼) 양현(兩賢)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데 대한 논란보다 더 큰 것이 없소. 내 일찍이 양현을 존봉(尊奉)하는 쪽과 배척하는 쪽에 대하여 백방으로 미봉책을 써서 겨우 조용해졌으므로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이 논란이 갑자기 다시 일어나 풍파가 크게 일어 오랫동안 안정되지 못하고 있으니, 일에 해로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소. 경은 이 시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소?"하여, 응대하기를,”
“그것은 쉽사리 단정하여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양현을 종사하자는 주청은 온 나라가 함께하는 말로 지금 벌써 수십 년이 되었으니, 이것은 공론(公論)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몇몇 사람들만이 선대의 의논을 답습하여 이견(異見)을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양현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은 막중한 전례(典禮)이니, 경솔히 의논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괜찮지마는 양현을 무함하고 모욕하는 자들은 정녕 패역한 무리입니다. 양현의 도덕이 어떻다는 것은 논하지 않더라도 그분들은 선배의 장자(長者)이시니, 후생으로서 어찌 감히 이처럼 무함하고 모욕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정자(程子)의 제자 중에 선배의 단점을 논하는 자가 있으면 정자는 반드시 ‘너희들은 그 장점만을 배우면 된다.’고 책망하였으니, 아름답고 훌륭한 가르침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자들은 참으로 패역한 자들이니 어찌 잘잘못을 따질 것이 있겠소.” 하여, 응대하기를,
“그 자들과 일일이 잘잘못을 따질 것이 없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중에 간혹 그들의 부형으로서 그들을 제지하지는 않고 도리어 그들을 지지하는 자가 있으니 매우 가증스럽습니다. 양현의 도덕과 학문에 대해 신 또한 학식이 보잘것없으니,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상께서 그분들의 책을 읽고 그분들의 마음을 찾아 그분들의 행적을 논해 보신다면 문묘에 종사하는 것이 합당한지 부당한지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만약 분명히 알지도 못하고 독실히 신봉하지도 않으면서 남의 말만 들으신다면 아무리 숭장(崇奬)하는 은전을 지극히 하신다 할지라도 전하의 몸에는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니, 광해군(光海君)이 오현(五賢 즉 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ㆍ이언적ㆍ이황)을 제사한 경우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이에 대하여 별도로 소견이 있지만 외람된 것이라 감히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한번 말해 보라고 하여, 응대하기를,
“오현을 종사(從祀)한 것이 비록 온 나라가 함께 주청하여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중에 어찌 다시 참작해야 할 점이 없겠습니까. 이이(李珥)는 일찍이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만을 들어 문묘에 종사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신은 아마도 이 의논이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에 이이 같은 대현(大賢)이 다시 나왔으니, 이미 종사하고 있는 현인과 아직 종사하지 않은 현인을 정밀히 선별하여 후세의 비판이 없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한다면 일은 비록 지당하게 될지라도 의논은 더욱 분분해질 것이오.” 하여, 응대하기를,
“그러기 때문에 신이 이 일은 반드시 대현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시급한 것은 이 일이 아닌 듯한데, 조정의 신하들과 선비들이 모두 급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나는 매우 병통이라고 생각하오.” 하여, 응대하기를,
“양현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은 의논이 통일된 뒤에 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나, 선비들의 습관은 먼저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선현을 무함하고 모욕하는 자들은 상께서 깊이 미워하고 통렬히 끊으셔야 할 것이니, 급선무가 아니라고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소. 이후로 만일 선현을 무함하고 모욕하는 자가 있다면 내 마땅히 통렬히 배척하여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내가 밤낮으로 애써 생각하는 것은 오직 병력을 기르는 일이오, 경이 전에 말하기를 ‘병력을 기르는 일과 백성을 기르는 길은 반드시 서로 방해가 된다.’ 하였는데, 어떻게 하면 방해가 되지 않겠소?” 하여, 응대하기를,
“그것은 신의 말이 아니라, 바로 주자의 말씀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재력(財力)에 관계되는 것을 일체 함부로 쓰지 말고 모두 군수(軍需)로 돌리면 군수가 점차 넉넉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보오법(保伍法)을 시행하여 누락되는 민정(民丁)이 없게 한 다음, 세 사람마다 그중에서 장정 한 사람을 뽑아 병사로 삼아서 활 쏘기와 말 타기를 익히게 하고, 나머지 두 사람으로 하여금 베[布]를 내어 한 명의 병사를 양성하게 하여 오늘날 어영군(御營軍)의 규례와 같이 한다면, 이는 병사로써 병사를 양성하는 것이어서 농민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오법은 곧 ‘주례(周禮)’의 뜻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기강을 세운 뒤에라야 이 법을 시행할 수 있는데, 기강을 세우는 길은 전하께서 사심(私心)을 없애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법을 경과 더불어 서서히 강구하도록 하겠소.” 하였다. 내가 아뢰기를,
“소현세자의 빈(嬪.강씨) 옥사(獄事.별장에 유폐되어 사사됨) 때문에 지금까지 사람들의 마음이 불평해 하고 있는데, 상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늘 경과 그 일을 말해 보려고 했었는데 틈이 없어 하지 못했을 뿐이오, 강(姜)의 못된 짓을 어떻게 한 입으로 다 말할 수 있겠소.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하겠으니, 경은 한번 들어 보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비록 짐승들이라도 가지고 있는 법이오. 그런데 소현(昭顯)의 상사(喪事) 때에 대조(大朝)께서 애통해하시며 책망하시기를 ‘이는 잠자리(여색)를 조심하지 않은 소치이다.’ 하시자, 강은 즉시 발악하기를 ‘모월(某月) 이후로는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하였소. 그후 자식을 낳게 되자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말을 실증하기 위해 곧 자식을 죽이고 그 사실을 은닉하였소. 그의 성품이 이와 같으니, 그가 역모를 꾀한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하겠소. 또 역모를 꾀한 일은 궁내에서만 알고 있는 일이니, 밖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알고 있겠소. 그 일이 확연히 드러나 전혀 의심할 것이 없는데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원통한 일이라고 하고 있으니, 나는 실로 가슴이 아프오.” 하여, 응대하기를,
“그가 역모를 꾀한 일을 외간에서 참으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도 의심이 없지는 않습니다. 신은 일찍이 ‘흉한 것을 땅에 묻어 저주하고 독약을 넣은 것은 필시(必是) 그 사람의 소행일 것이다.’라고 한 선왕의 전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필시’라는 두 글자는 증거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억지로 단정하는 말이니, 분명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대역죄(大逆罪)라 하여 사람을 죽였는데도 사람들이 원통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리가 어찌 있겠습니까. 송 고종(宋高宗)이 ‘막수유(莫須有.두 가지를 모두 인정하는 애매모호한 태도)’라는 세 글자를 가지고 악비(岳飛)를 죽였기 때문에 천하에서 지금까지 원통한 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필시’라는 두 글자 때문에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놀라며 이르기를,
“그 점은 내 아직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 과연 경의 말과 같구려. 그러나 역모를 꾀한 일은 의심할 것이 없소.”
하여, 응대하기를,
“설령 강(姜)은 역모를 하였다 하더라도, 김홍욱(金弘郁)이 어찌 그녀가 역모를 꾀한 일을 알고서 그를 구제하려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김홍욱은 소견이 그와 같았을 뿐이었는데 전하께서 너무 급히 그를 죽이셨기 때문에 인심이 더욱 불평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법령을 정하여 만일 이 일을 감히 발설하는 자가 있으면 강과 같은 죄로 다스리겠다고 하였는데, 그가 어찌 감히 이 법을 무시하고 그 일을 말한단 말이오. 이 때문에 내가 그를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오.” 하여, 응대하기를,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비난하는 말을 하게 된 이유입니다. 강을 이미 대역으로 처벌하였으면 그만인데, 어찌 다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걱정하여 억지로 발설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 법을 만들어 사람들의 입을 막는단 말입니까. 이는 실로 내면에 부족함이 있는 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의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경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해 보니, 과연 그렇구려.” 하고, 또 이르기를,
“경은 말할 적마다 주자(朱子)를 칭하는데, 경은 몇 년 동안이나 주자의 글을 읽었기에 이처럼 잘 알고 있소?” 하여, 응대하기를,
“신은 어렸을 적부터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읽고 마음에 진실로 좋아하였으나, 마음과 힘이 강하지 못하여 아직도 다 읽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자의 말씀은 과연 하나하나 모두 행할 수 있는 것이오?” 하여, 응대하기를,
“옛 성인의 말씀에는 간혹 시대와 형편이 달라 시행할 수 없는 것도 있지만, 주자의 말씀은 시대와 형편이 지금과 매우 가깝고 또 주자가 만났던 시대상도 오늘날과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신은 그 말씀을 하나하나 모두 행할 수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시험 삼아 한가한 때에 봉사(封事)ㆍ주차(奏箚)ㆍ주의(奏議) 등의 글을 먼저 읽으시고, 그 다음에 《주자어류》 중에 요긴하고 절실한 말들을 보신다면 반드시 전하의 마음에 부합되는 바가 있으실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말한 대로 하도록 하겠소.” 하고, 이어 이르기를,
“오늘 경과 조용히 대화를 하게 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신료들의 시비(是非)와 진퇴(進退)에 관한 일에 대하여 별로 언급한 것이 없지만 밖의 사람들 중에는 반드시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많을 것이오.”
하여, 응대하기를, “혹 그런 자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측으로 여러 신하들을 의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음에도 다시 오늘처럼 대화를 해야 하겠지만, 은밀히 편지로 자세히 의논할 수 있는 방법을 경 또한 생각해 보도록 하시오. 그리고 오늘 대화한 내용은 비록 묻는 자가 있더라도 경이야 어찌 다른 사람들에게 누설하겠소.” 하여, 내가 웃으면서 사양하기를,
“전하께서 반드시 신이 전광(田光)처럼 하지 않을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런 분부를 내리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그것이 어찌 장자(長者)를 의심해서 하는 말이겠소. 성인(공자)도 일(전쟁)에 임해서 신중하게 처리하며 잘 도모하여 이룬다는 말씀을 하였소.” 하였다.
내가 밖으로 물러 나오니, 상이 직접 중관(中官)을 불러 다시 오라고 하였다. 12일에 추기(追記)한다.
천신(賤臣.송시열을 말함)이 기해년(1659, 효종10) 3월 12일에 전날 주상을 모시고 대화한 것을 기록해서 하나의 작은 책자를 만들었다. 그 다음달에 성상의 옥후(玉候)가 편찮으시더니 5월 4일에 끝내 승하하시었다. 하늘을 원망하여 부르짖었으나,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그 책을 가지고 산속으로 돌아와 단단히 싸서 깊숙이 보관하고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끝내 내놓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깊숙이 보관하여 백세 이후를 기약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지난해 한림(翰林) 이자휘(李子輝.이광직)가 은밀히 편지를 보내와 이 기록이 있는지의 여부를 묻고, 또 부탁하기를 ‘그 기록을 얻어 다른 책서(策書)에다 실을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그 편지를 받고 처음에는 마음속으로 의심하여 종일토록 골몰히 생각하였으나 그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마음속으로 혼자 생각하기를 ‘당시 하늘이 주상을 더 사시게 하여 그 지업(志業)을 마칠 수 있게 하였다면 이 기록은 굳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지금 이미 일이 끝나고 말았으니, 만약 그 당시 하셨던 말씀까지도 끝내 매몰되게 한다면 나의 죄는 또한 어떠하겠는가. 누설하지 말라고 정녕하게 분부하신 당일의 경계를 저버리는 일이기는 하나, 이 죄는 도리어 적은 것이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손수 봉함하여 사람을 보내어 부치려 하였는데, 그날 자휘의 부음(訃音)이 갑자기 도착하였다. 나는 자휘가 요절한 것을 애통해하고, 또 그의 훌륭한 뜻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함을 애처로이 여겨 슬퍼하는 마음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지난번 이도원(李道源)과 이공택(李公擇) 두 한림이 또 자휘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남의 구설수에 올라 엎드려 죄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어서 이로 인하여 죄가 가중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주저하고 선뜻 그들의 뜻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도원의 요청이 변함없이 계속되므로, 나는 또 스스로 생각하기를 ‘먼저 자휘에게는 허락을 해 놓고 이제 이 사람에게는 인색하게 하고 있으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마침내 김경능(金景能)을 통하여 이것을 부쳐 주는 것이다.
아, 성고(聖考)의 거룩하신 계획과 큰 뜻을 단지 짧은 시간에 전석(前席)에서 보여 주셨을 뿐 하나도 시행하지 못하셨으니, 저 푸른 하늘이여, 어찌 그리도 무심하단 말인가. 이 외로운 신하는 슬픔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아직 몸을 바쳐 국가에 봉사하지 못하고 있으니, 덕음(德音.임금의 말씀)을 생각할 적마다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다. 오늘 아침에 다시 예전에 봉함한 것을 점검해 보다 보니, 아련히 다시 문석(文石)에 올라 옥음(玉音)을 듣는 듯하였다. 다시 울음을 삼키며 그 봉함 외에 이 글을 써서 두 한림에게 고한다. 아, 이도원과 이공택은 나의 이러한 고충을 알아 이 기록을 역사에 모두 기재하도록 하고, 또 혹시라도 이것을 외인에게 누설하지 말고 그 원본을 적당한 사람을 통해 돌려준다면 매우 다행이겠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이 말하기를 ‘주상이 훌륭하신데도 그 덕이 알려지지 않는 것은 유사(有司)의 잘못이다.’ 하였다. 아, 이것이 장차 만세 이후에 전해질 것인가. 이도원과 이공택은 노력하도록 하라. 을사년(1665, 현종6) 7월 15일에 승하하신 성상을 부르짖던 천신은 절하고 올리면서 번거로워 감히 이름을 쓰지 못하니 죄송할 뿐이다.
그 뒤 11년이 지난 을묘년(1675, 숙종1) 5월 4일에 안동(安東) 김수증(金壽增)이 성천(成川)의 임소(任所)에서 의춘(宜春)의 유배지에 있는 나를 찾아왔다. 그는 문정공(文正公) 석실(石室.金尙憲)선생의 사손(嗣孫)인데, 내가 선생의 제자라고 하여 찾아온 것이다. 지난 일들을 말하면서 서로 탄식하고 눈물을 흘렸는데, 떠날 때에 나에게 말하기를 ‘당일의 악대설화를 남에게 보여 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런 일들을 우리 두 집안의 자제들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면 도리에 잘못된 일이다. 또한 나는 그것을 얻어 선조의 언행을 기록한 책 뒤에 실어서 한 책을 만들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사리에 마땅할 것이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기에,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이로 인하여 생각해 보니 ‘석실 선생이 평소에 자임(自任)하였던 것은 바로 성조(聖祖)가 뜻하였던 일이니, 그때에 하늘이 우리 선생에게 장수하게 하여 그 기회를 얻게 하였다면 성조의 간곡한 말씀은 반드시 석실 선생에게 하였을 것이요, 나에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지가 두 집안을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보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여 마침내 작은 책자에 기록하여 봉함해서 부쳐 주었다.
악대(幄對)라고 이름한 것은, 송 효종(宋孝宗)이 장위공(張魏公) 부자에게 정사를 위임하고서 남헌(南軒)을 유악(帷幄) 안으로 불러 토론할 적에 밖에 한 사람도 없었던 고사가 있으므로 지금 이 대화도 악대설화라고 명명한 것이다. 8월 모일(某日)에 봉산(蓬山)의 유배지에서 쓰다.
|
첫댓글 우암은 효종과의 대화를 영원히 비밀로 부치려했으나, 임금이 뜻을 이루지 못한데다 만약 그 당시의 이야기까지도 끝내 매몰되게 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자신의 죄로 생각했다. 효종은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다가 풀려나와 청에 대한 반감으로 북벌을 계획했지만 이 대화록에서 보는 바와같이 송시열은 효종의 북벌계획을 듣기만하고 오히려 덕치(德治)를 강조했으니 그를 북벌론자로 단정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