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꿈 이해
오랫동안 꿈은 우리의 내면과 환경, 그리고 특히 미래에 대해 통찰을 주는 수단으로 인식되어 왔다. 가령 돼지꿈을 꾸고 나면 로또 복권을 사기 일쑤이다. 어떤 꿈은 태몽(胎夢)이라면서 흥분하기도 한다. 또한 꿈을 잘못 사게 되면 외려 불행이 찾아온다고도 한다. 가령 영화 '도둑들'을 보면, 예니콜(전지현)의 꿈을 돈 주고 산 씹던껌(김해숙)은 사고로 죽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꿈의 내용에 신경을 쓰는 것은 미래를 알고 싶은 인식론적 의지라기보다는 생존에 집착하는 우리의 욕망과 두려움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꿈은 위험 경고나 대박 징조 안내의 도구로서 이해되어 왔다(결국 우리의 현세적 삶을 행복하게 유지하려는 것이다). 도마뱀의 뇌(후두엽)와 연결된, 우리의 원초적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다.
뉴에이지 진영이 루시드 드림(Lucid Dream, 自覺夢, 註-1)을 새롭게 주목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 따른 것이다. 자각몽은 자신이 꿈속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상태이다. 이게 관심을 모으는 이유는 꿈속(과 나아가 현실)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영혼의 내적 성장을 말하지만, 실상 자아의 욕망 추구를 보여 주고 있다.
기독교의 꿈 이해
그러나 꿈 자체는 얼마든지 영적 차원을 위해 유용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이에 대해 잘 보여 주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수단으로서의 꿈에 대해서 말이다. 가령 하갈, 아비멜렉, 야곱, 라반, 요셉, 바로, 느부갓네살 등은 꿈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또한 요셉과 다니엘은 해몽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준다.
요셉과 다니엘의 꿈 풀이를 잘못 이해하면, 신령한 해몽가를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한데 이들이 바로와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게 된 이유는 하갈, 아비멜렉, 라반의 경우와 달리 난해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권력자들의 꿈을 풀어 주어 요셉과 다니엘을 인정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해몽은 우리를 위한 모범이 될 수가 없다.
초대교회 역시 꿈을 가볍게 취급하지 않았다. 예언이나 환상 등과 더불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필요한 매개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교회가 제도화 과정에 진입하면서, 이러한 접근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로 정통 교회사 안에서 꿈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이는 비단 꿈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 은사 전반에 대한 입장이었다)
어떻게 꿈을 읽을 수 있는가?
꿈은 분명 우리에게 유용한 것이나,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잘 모른다. 심지어 꿈이 어떻게 우리에게 유용한지조차도 잘 모른다. 또한 어떻게 읽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배운 바가 없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꿈 해석의 원리(이는 결국 꿈이 우리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와 연결된다)와 이를 따라 제시되는 제대로 된 방법이다.
꿈해몽집에는 그러한 합리적인 해석의 원리가 결여되어 있다. 신령한 해몽가들은 인간 내면의 공백을 파고드는 영혼의 사냥꾼에 불과하다. 이렇게 상식적으로 어딘가 이상하고, 영적으로도 불건전한 자료나 사람을 찾기보다는 인간 심리에 대한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낫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손길에 우리 자신을 내맡길 수 있다.
최근에 나온 어느 젊은 정신분석학자의 꿈 일기인 <내 무의식의 방>은 그런 면에서 훌륭한 매뉴얼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자기만의 방>을 상기시키는 제목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이 책은 2004년 11월에서 2005년 10월까지와 2013년 3월에서 2014년 6월까지의 꿈 일기가 주종을 이룬다. 각 꿈마다 내용-질문-배경-분석-종합의 순서로 다루고 있다.
<내 무의식의 방>은 꿈일기의 앞부분에서 꿈 분석의 원리와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 뒷부분에서는 책과 영화 등의 예술작품이나 저자 자신의 경험에서 소재를 찾아서 가공하여 꿈 분석의 가상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니까 앞에서 꿈을 읽는 방법을 소개하고, 뒤에서 그 실제 사례를 제시하는 방식이다. 다면적이고 총체적으로 해몽법을 보여 주는 셈이다.
프로이트와 융을 통해서 꿈을 읽다
저자 김서영 교수(광운대학교)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으로 학위를 취득하고, 뒤이어 융의 분석심리학을 공부했다. 그러니까 융 연구는 일종의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 교수 자격) 취득 과정이었던 셈이다(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은 그녀의 박사 학위 전공이고, 융의 분석심리학은 심화 과정 전공인 셈이다). 동시에 그녀의 자아 성찰과 화해의 과정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력을 따라 저자는 (무의식을 파악하기 위한 매개가 되는) 꿈의 독법으로 프로이트와 융을 동시에 활용한다. 책에 등장하는 모든 꿈들을 그녀는 정신분석(프로이트)과 분석심리학(융)을 통해 분석하고 다시 종합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신의 예정을 강조하는 칼뱅과 인간의 결단을 주목하는 아르미니우스를 하나로 묶었다는 말과 비슷하게 기괴하게 들린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 안에는 우리의 삶에 연원한 표상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무의식의 진실은 꿈과 실수, 농담, 실착 등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꿈작업'이라 부르는) 꿈의 왜곡을 통해 무의식의 표상들이 나타난다. 무의식은 결코 왜곡 없이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의 의식)는 무의식과 대화함에 있어서 밀(고)당(김)을 피할 수가 없다.
반면 융에게 있어서 무의식은 왜곡될 수 없는 영역이며, 나아가 "인류의 기억이 온전히 보존된 신화적 영역으로 이성과 합리성 너머에 존재"(33쪽)한다. 무의식은 꿈을 통해 의식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의식의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마음의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여기에 귀를 기울일 때까지 무의식은 계속 꿈을 통해 말을 건넬 것이다.
우리의 머리로는 칼뱅과 아르미니우스를 함께 붙잡기가 어렵지만, 우리의 가슴으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공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꿈과 무의식의 관계나, 무의식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도 프로이트와 융의 전망은 각기 우리 삶을 들여다보는 좋은 도구로 공존할 수가 있다. 저자 자신이 이에 대한 좋은 사례이다.
왜 꿈을 읽어야 하는가?
<내 무의식의 방>의 맨 앞부분에 있는 "들어가는 글-기능형 인간의 고백"은 김서영 교수의 자전적 기록이다(책에 수록된 글은 무려 네 번째 버전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그녀는 우리가 왜 꿈의 분석에 대해 배워야 하는지를 자신의 삶을 통해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 자신의 참된 '행복에로의 초대'가 그 목적이다.
프로이트식의 무의식과의 대화나 융식의 무의식에의 경청은 결국 모호한 현실 속에서 확실한 지침이나 안내를 확보하려는 열망의 표현이다. 비기독교인들이 신점이나 사주를 보러 용한 점쟁이를 찾아다니고, 기독교인들이 예언을 받으러 신령한 예언자를 찾아다니는 것도 이러한 열망에 기인한다. 하지만 들여야 하는 대가는 큰 반면, 거두게 되는 결실은 초라하다.
반면 꿈의 해석은 들이는 노력(지속성과 정직성)만 분명하다면, 매우 풍성한 소출을 기대할 수 있다. 무엇보다 꿈 해석을 통해 자기 인격의 온전한 통합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래 예지, 즉 위험 회피나 길운(吉運) 포착 등과 같은 기능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예지몽은 당장 성경에도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꿈의 기능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꿈은 우리 자신에 대해 알려 준다. 자기 자신과 온전하게 통합하기 위해서는 꿈에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 그게 굳이 꿈인 것일까? 이는 꿈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무의식에 가장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경로이기 때문이다. 김서영 교수가 <내 무의식의 방>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도 꿈의 분석을 통해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자는 것이다.
행복을 찾아나서는 여정
<내 무의식의 방>이 보여 주는 것은 저자 김서영 교수가 자신의 참된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자기 발견과 용납, 그리고 성장의 진솔한 기록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자신의 꿈을 읽는 과정을 통해 변화되는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꿈 분석을 통해 저는 기능형 인간에서 욕망형 인간으로 변할 수 있었습니다."(12쪽)
다시 말해서 <내 무의식의 방>은 일종의 정신분석학적 간증문이다. 그녀는 자기의 과거인 옛사람을 기능형 인간이라 명명하며, 현재인 새사람을 욕망형 인간으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서 기능형 인간에 지배되던 과거를 물리치고, 욕망형 인간으로 생활하게 되는 현재로 거듭나게 된 과정을 담아 놓은 세속적인 회심기(回心記)가 바로 <내 무의식의 방>인 셈이다.
한데 저자 김서영 교수가 자신의 참된 욕망을 찾아가는, 세속적 구원 서사가 한국교회 안에 결여된 어떤 측면을 날카롭게 건드리고 있다. 한국교회는 교인들의 행복에 대한 기준을 타율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무속적 기복신앙과 교리적 엄숙주의가 교인들이 자신의 참된 욕망을 발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내면의 문제도 그렇다, 註-2).
육체적 차원에서의 세속적 성공이나 지성적 차원에서의 교리적 순수에 대한 집착 속에서 정작 자기 영혼의 참된 욕망을 잃어버리게 마련이다. 요새 유행하는 비전을 교회에서 활용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세속적인 성공의 기준으로부터 멀지 않다. 사실상 고지론적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다. 엄마와 목사님의 목소리가 우리 영혼의 갈망을 압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참된 욕망은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심어 주신 것이다. 이것은 각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개인적 차원으로는 실존적 행복을 누리고, 사회적 차원으로는 유기적 조화가 일어난다. 물론 이것은 많은 부연 설명을 필요로 하는 논의이다. 우선은 독자 분들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언지를 생각해 보자는 제안만으로도 충분할 게다.
결론 삼아 말한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의 언어인 꿈을 읽는 법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이것은 꾸준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관찰한 꿈을 꼼꼼하게 읽어 가기 위해서 무의식의 탐험가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이 지혜롭다. <내 무의식의 방>은 바로 이렇게 꿈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만나려는 분들에게 최고의 지침서이다.
註-1. 혹시 자각몽에 대해 알고 싶다면, 다음 책들(특히 라버지와 웨거너의 책들)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루시드 드림: 성공하는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꿈꾸기>(스티븐 라버지, 북센스, 2008); <자각몽, 꿈 속에서 꿈을 깨다>(로버트 웨거너, 정신세계사, 2010); <자각몽, 또다른 현실의 문>(카를로스 카스타네다, 정신세계사, 2011). 그리고 다음 두 권은 절판되었으나 구할 수 있다면 역시 읽어 볼 만할 것이다. 이 중 린포체의 책은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데, 티베트 불교는 뉴에이저들이 선호하는 종교 전통이다. <꿈: 내가 원하는대로 꾸기>(스티븐 라버지, 인디고블루, 2003);
<게으른 사람을 위한 잠과 꿈의 명상>(텐진 완걀 린포체, 정신세계사, 2003). 뉴에이지 영성의 단면을 잘 보여 주는 수련법으로서의 자각몽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다룰 계획을 가지고 있다.
註-2. 여러 신자들의 신학(神學)을 보면, 의식적 차원과 무의식적 차원 사이에 분열이 있다. 의식의 신과 무의식의 신이 싸우는 형국이다. 가령 입으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말하나, 몸으로는 정죄하는 신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신앙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현실 생활에서 신앙적 괴리가 발생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이 또한 무의식으로부터의 전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머리에 지식을 집어넣는 전통적인 성경 공부로는 해결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이원석 / 작가, 문화연구자, <뉴스앤조이> 편집위원. 한국 교회와 사회의 본질이 교양의 부재에 있다고 보기에 교양 사회의 구축을 사명으로 생각하며 집필과 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거대한 사기극>·<인문학으로 자기 계발서 읽기>·<공부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