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인 2019년 5월 20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앞으로 5년 동안 우크라이나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울지 않도록 모든 것을 다할 것"이라는 말로 취임사를 마쳤다. 취임사의 대부분은 돈바스 지역(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에서 '전쟁을 끝내겠다'는 약속으로 채워졌다.
안타깝게도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고, 우크라이나는 더 큰 전화(戰禍) 속에 빠졌다.
하지만 그는 임기 5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대통령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계속 90일씩 연장되는 계엄령 하에서 후임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전망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그는 전쟁이 종식(휴전이나 종전)될 때까지 물러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물론, 그 앞길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는 포로셴코 전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야권 세력이, 외부적으로는 러시아 등이 그의 기약없는 임기 연장에 계속 시비를 붙을 게 뻔하다. 전쟁을 끝낼 운명적인 문서의 서명은 법적 정당성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 해야 할 것이라는 푸틴 대통령의 중국 방문 결산 기자회견(5월 17일 중국 하얼빈)이 대표적이다. 푸틴 대통령은 "(대선을 치르지 못하면) 헌법재판소 심의를 통해서라도 젤렌스키 대통령의 합법성을 따져보는 게 맞다"고 훈수를 두기도 했다.
전쟁 중에도 대선을 치르고, 연임된 푸틴 대통령으로서는 임기가 끝난 젤렌스키 체제를 뒤흔드는 게 치열한 '지상 전투'에 못지 않는 '공격 전략'임에 분명하고, 우크라이나에게는 당당한 대응이 힘든 약점이다.
그나마 유엔과 유럽연합(EU) 등이 그를 계속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인정해주겠다니, 다행이다.
스테판 두자릭 유엔 대변인은 20일 기자회견에서 "유엔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우크라이나의 국가 원수로 인정할 것"이라며 "그는 유엔 사무총장이 우크라이나 지도자와 접촉시 상대하는 파트너"라고 말했다.
EU도 21일 피터 스타노 수석대변인(정확히는 외교안보 부문 대변인)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체가 젤렌스키를 자신들의 합법적인 대통령이라고 인정하고 있다"며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미국도 그의 임기 연장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임기 연장은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지뢰에 비유되곤 한다. 자칫 잘못하면 우크라이나 정치 체제 전반을 뒤흔들 수도 있다. 문제는 서로 상충되는 헌법 조항이다.
◇ 헌재의 유권 해석이 필요한 대통령 임기 연장
우크라이나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5년으로 하고, 임기 5년차 3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대선을 치르도록 규정하고 있다. 예외 규정도, 임기 연장에 관한 조항은 아예 두지 않았다. 그 취지는 불법적인 권력 찬탈, 혹은 (부당한) 권력 연장을 막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쿠데타 등으로 누군가가 권력을 잡더라도, 기존 대통령의 임기를 보장함으로써 권력 찬탈을 막고, 또 권력욕에 취한 어떤 대통령이 비상사태(계엄령)를 선포해 임기를 연장하는 불행한 일도 막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이 헌법에 보장된 5년 임기를 넘어서면, 즉 임기 종료 후에도 후임자가 결정되지 않으면, 국가원수의 유고(궐위) 상황이라고 보고, 대통령 권한을 최고라다(의회) 의장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것이 젤렌스키 대통령 반대파의 논리다.
그러나 이 주장은 '대통령은 후임자가 취임할 때까지 직무를 수행한다'는 헌법 108조와 상충된다. 반대파는 "헌법에는 계엄령 기간에 대통령 선거를 금지한다고 명시되어 있지 않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쟁을 핑계로 의도적으로 대선을 실시하지 않고, 임기를 '셀프 연장'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한다. 게엄령 하에서 실시 자체를 아예 금지한 총선과 대선은 다르다는 논리다.
우크라이나 의회/사진출처:НикВести
헌법은 계엄령 하에서는 총선을 치르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의원 임기는 새로 선출된 의원들에 의해 구성된 새 의회의 첫 회기 개회 시까지로 보장돼 있어, 자동으로 임기 연장이 가능하다. 지난해 10월로 예정됐던 총선이 계엄령으로 치러지지 못했고, 새 의회도 구성되지 않았다. 의원들의 원래 임기는 벌써 끝났지만, 일부 의원들만 자진 사임했을 뿐, 대부분은 계속 '의원 뱃지'를 달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 측은 '대통령은 새로 선출된 후임자가 취임할 때까지 권한을 행사한다'는 헌법 108조를 임기 연장의 근거로 내세운다. 푸틴 대통령이 헌법재판소 심의를 통해서라도 헌법상 배치(背馳)되는 해석상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지적한 이유다.
우크라이나 사법 시스템도 일단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대법원은 최근 대선 실시를 요구하는 야당의 제소를 받아들였다. 대법원이 어떤 결정을 내릴 지, 또 그 결정이 실제적 효력을 미칠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헌법 조항에 대한 해석 권한을 지닌 헌법재판소가 나서면 좋으련만, 대통령실은 혹시 불리한 판결이 나올 가능성을 우려해 임기 연장의 합헌 여부를 헌재에 질의하지도 않았다. 의회 다수당, 즉 집권 여당도 일체 움직이지 않고 있다. 대통령실과 여당은 대통령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것은 '러시아의 공작에 따른 행위'로 규정하는 식으로 야권의 공세에 대응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물러날 경우, 승계 0순위자인 루슬란 스테판추크 의회 의장도 22일 "젤렌스키 대통령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우크라이나의 적이거나 정치적 바보"라고 가세했다.
스테판추크 의회 의장/사진출처:rada.gov.ua
◇ 스위스 평화정상회의가 첫 고비?
임기를 연장해가고 있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최근 눈에 띄게 악화되고 있는 국내외 정세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0일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같은 추세를 전환하지 못할 경우, 우크라이나 안팎의 수많은 반대 세력들이 국가 권력을 바꾸려고 나설 것"으로 우려했다.
이르면 그 계기가 내달로 예정된 스위스 평화 정상회의가 될 수도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스위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6월 15, 16일 스위스 뵈르겐스톡에서 자신의 '평화 공식'을 논의할 첫 정상회의를 연다. 현재 흐름으로만 보면, 서방 진영 중심의 '반쪽짜리 정상회의'에 그칠 것이라는 불안감이 포착된다.
중국은 물론, '글로벌 사우스'(남반구 개발도상국)를 이끄는 브라질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정상회의 참가를 공식적으로 포기했고, 인도는 참가 의향을 밝혔지만, 모디 총리가 직접 스위스로 날아갈 지 여부는 미지수다. 바이든 미 대통령조차도 참가가 유동적이다.
모디 총리는 스위스 평화 정상회의에 대해 "인도는 세계 평화, 안보, 개발 의제를 진전시키는 모든 중요한 정상회담에 참여할 것"이라면서 "글로벌 사우스의 목소리를 대변해 '글로벌 담론'을 형성하고 인간 중심의 발전과 번영, 평화로운 세계의 비전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참가한다고 해도, 젤렌스키 대통령의 '평화 공식'을 지지할 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스위스 대통령(가운데)과 평화 정상회의 개최를 알리는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젤렌스키 대통령도 이같은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다.
우선 평화 정상회의에 대한 발언의 톤이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글로벌 의견 취합을 통해 러시아와의 평화 정착 방안을 공동 개발하기 위한 회의라고 주장했으나, 최근에는 러시아에 압력을 가하기 위한 회의라고 말을 바꿨다. 그는 20일 취임 5주년 기념 로이터 통신과의 회견에서 "가능한 한 많은 국가를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게 매우 중요하다"며 "그러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아닌, 세계 대다수의 국가들에게 회의 결과에 대해 답변을 내놓아야 할 것이며, 우리는 그렇게 주도권을 갖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초에 다루기도 했던 정상회의의 주제도 대폭 줄였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스위스 평화 정상회의의 취지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핵심 쟁점 3가지에 대해 공통된 입장을 만든 뒤, 그 결과를 러시아에 알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평화 공식'은 원래 10가지 쟁점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 만만한 것 3가지만 이번 정상회의에서 다루겠다는 뜻이다.
3가지는 △안전한 흑해(아조프해) 항해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의 귀환및 포로 교환 △자포로제 원전의 안전 확보로 전해졌다. 이번 회의에서 그는 △개발도상국 식량 공급을 명분으로 흑해 항구에 대한 러시아군의 공습 중단을 요구하고 △인도주의를 내세워 전쟁 중 러시아로 간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의 귀환과 포로 교환을 주장하며 △자포로제 원전의 안전 확보를 위해서라도 러시아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러시아에 압박을 가하는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반대할 정상회의 참가국은 있을 수 없다. 젤렌스키 '평화공식'의 핵심 조항이었던 러시아군 철수와 배상금 지불은 아예 입밖에도 꺼내지 않는 셈이다. 인도를 포함한 '글로벌 사우스' 대댜수가 이같이 예민한 쟁점에는 반대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러시아가 자포로제 원전에서 철수하거나, 흑해 항구 공습을 중단하고, 대규모 포로 교환에 나서는 것은 예상하기 어렵다. 인도주의 차원의 포로 교환만 해도, 러시아군에 붙잡힌 우크라이나 포로가 훨씬 더 많고, 우크라이나가 선별적으로 포로교환에 응하고 있다는 러시아측 반박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첫 평화 정상회의에서 자신의 '평화 공식'(실제로는 일부)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얻었다며 '외교적 승리'를 선언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눈 감고 아웅하는 격이다.
◇수세로 몰린 전황은 최대 악재
최전선에서 들려오는 우울한 전황 소식도 젤렌스키 대통령에게는 심리적 압박 요인이 되고 있다.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국가 국방안보회의 서기는 20일 "전선 상황이 매우 어렵다"며 "도네츠크와 자포로제 지역에서 작은 마을이라도 지키기 위해 우리는 힘든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러시아군은 동부와 남부 산업 도시의 주요 인프라 시설을 계속 파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21일 미 뉴욕 타임스(NYT)와 인터뷰에서 "전세를 되돌리기 위해서라도 러시아 본토 공격에 서방 첨단 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주는 게 필요하다"며 "(그럴 경우 우려되는) 푸틴(대통령)의 핵 공격 협박을 믿지 말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날 전술 핵무기 대비 훈련을 시작했다.
NYT는 미 백악관이 러시아 본토 공격에 미국 무기의 사용을 허락할 지 여부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다고 23일 전했지만, 확전을 우려하는 반발 여론도 무시못할 상황이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 공격 허가를 요구하는 미국의 에이태큼스 장거리 미사일/사진출처:록히드 마틴
그러다 보니, 전쟁 전망은 갈수록 암울하다.
올리가르히 출신으로 반푸틴 진영의 유력인사인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전 유코스(석유 회사) 대표는 "우크라이나와 서방은 이미 이 전쟁에서 패했다"며 "미국의 추가 지원을 고려하더라도, 러시아가 2.5 대 1 정도로 유리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런 추세가 계속될 경우, 하르코프는 연말까지, 남부 오데사는 2025년까지 점령될 것이며 2026년 중반이 되면 우크라이나는 게릴라전을 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루멘 라데프 불가리아 대통령도 "우크라이나의 승리는 불가능하다"며 "전쟁이 계속된다면 우크라이나는 인구학적으로 황폐화된 국가가 되고, 사회 인프라와 산업, 생산 시설 등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며, 이는 우크라이나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 극도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 러시아,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재앙인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정치적 노력을 촉구했다.
우크라이나 안팎의 불길한 전망은 결국 젤렌스키 대통령을 러시아와 재협상의 길로 몰아갈 수 있다. 그도 지난 18일 AFP 통신과의 회견에서 이를 인정했다. 다만,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지에 대해 우크라이나와 서방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고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정의로운 평화로 끝내기를 원하는데, 서방은 가능한 한 빨리 끝내기를 원한다”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임기 연장과 함께 안팎에서 밀려오는 거센 압박에 대한 그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