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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전서 1장 8-9절 은혜와 진리의 가치 16-영혼이 구원받음
여러분은 여러분이 제일 믿는 대상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든 것을 도와주는 가족들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녀들의 경우에는 부모가 제일 믿을 만합니다. 노인들이 경우는 자신의 자녀들이 믿음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20-30대의 남자들은 단연 친구로 꼽습니다. 친구들의 말이라면 거의 모든 것을 신뢰합니다. 하지만 청춘 남녀들은 자신의 애인을 최고의 믿음의 대상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지지하고 있는 정치가를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그들은 누군가가 자기들이 지지하는 사람들이 한 거짓말을 증명해도 그 신뢰를 버리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소속된 종교지도자들을 신처럼 믿고 받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있고 그런 믿음의 대상도 어느 정도 시간이 가면 바뀌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실망감 때문입니다. 자기가 신뢰했던 사람에게 실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상을 다른 사람으로 바꿉니다. 여러분이 지금 믿고 있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이런 믿음은 영혼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것은 사람을 믿음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바뀌는 경향이 있지만 종교적인 신념은 여간해서는 잘 바뀌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종교들이 있고 그들이 믿는 신들이 있습니다. 어떤 나라들은 이것이 너무나 심해서 많은 신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신들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자기가 믿는 신 외에도 어떤 신을 더 믿어야 하는 지 고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자기가 알지 못하는 신이 자신을 섬기지 않았다고 화를 낼 경우가 생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합니다. 이런 믿음도 역시 영혼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도행전에서도 보셨지만 아테네 같은 큰 도시에는 많은 우상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 가운데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글을 쓰고 아무 형상도 새겨놓지 않은 신까지도 섬기고 있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이 자기들을 위해 과거에 일하셨지만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를 섬기고는 있지만 그가 누군지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을 본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 저기 전도를 하다가 그 도시에 들어간 사도 바울은 그런 너희가 알지 못하지만 실제로 있는 신이 있는데 그 분은 바로 온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전하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이렇듯 나라마다 지역마다 섬기는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신들을 섬기면서 삽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너희가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타종교에도 종교적인 기적들이 있을까요?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귀신들 역시 말세가 되면 나름대로의 기적들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귀신들의 기적은 인간보다는 더 지혜롭고 더 큰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기적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기적은 결코 영혼 구원을 이루는 구원은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귀신을 믿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려고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한 귀신을 섬기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귀신은 육체적인 면을 해결해줌으로써 그들의 영혼을 볼모로 잡아 자기의 악을 위해 사용합니다. 하지만 귀신에게 쓰임받는 사람들 치고 자신이 귀신에 의해 쓰임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의 교주나 이단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은 옳다는 확신 아래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다른 것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들 교주를 마치 신처럼 대우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상실감 때문입니다.
인간의 상실감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데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상실감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로 대신해서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것들로는 상실감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귀신들이 자신들을 이 세상의 신으로 자처하고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것들을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거짓말로 속입니다. 그렇게 속아 넘어간 사람들이 귀신들이 약속한 것을 얻으려고 앞만 보고 따라갑니다. 그 결과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이 세상의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나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작은 이 세상에서부터 하지만 끝은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와 진리의 능력입니다. 은혜와 진리는 여러분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여러분들의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베드로전서 1장 8-9절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지금 베드로는 교회들에게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교회들에게 보낼 때는 예수님을 믿던 한 세대가 지났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도들이 죽거나 다른 먼 나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열두 사도들의 행적을 보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안드레는 그리스에서 엑스자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으로부터 목베임을 받아 죽었습니다. 모든 사도들 가운데 이 야고보의 순교가 제일 빨랐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 부르기아 지방에서 기둥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 지방으로 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창에 찔려 죽었다고 합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목베임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떠밀려 죽었습니다. 열심당원 시몬은 이집트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야고보 동생 유다는 페르시아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맛디아는 에디오피아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것은 유대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전한 사도들의 죽음에 대한 행적입니다. 그 당시 사도 요한은 살아 있었는데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들에 잡혀 온갖 고문을 다 당하였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를 밧모섬으로 유배를 시켰는데 거기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자술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떠난 많은 사도들에게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된 많은 교회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데는 성령과 진리가 절대적이었습니다. 영혼이 구원받을 믿음에는 성령과 진리가 절대적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를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이렇듯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받은 초대교회의 다음 세대교회들은 모두 예수님을 육신적으로는 만나지 못한 교회들로 이루어졌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지는 못했어도 구원받을 만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무엇보다 더 강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죽음을 넘어선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 기쁨에 대하여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듣기만 해도 보는 것 못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믿음에 대하여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만나셨던 도마에게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직접 보거나 아니면 만져봐야 믿겠다고 다른 제자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도마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손에 난 못자국과 옆구리에 난 창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확인한 도마는 말합니다.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십나다. “도마야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서신을 받는 교회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어도 믿었을 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들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셔서 중보하고 계심을 증거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뭘 봐야 믿지는 않으십니까?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비체험을 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예언하는 사람들이나 치유 사역을 한다는 사람들이나 귀신을 쫓는 다고 들썩이는 사람들을 쫓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믿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인다고 해서 바른 믿음의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을 마무리하시면서 하신 심판대 앞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의 상황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을 정도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보좌가 중앙에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오른 편과 왼편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왼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그러자 그들이 대답합니다.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자를 고치며 능력을 행하며, 선지자 노릇을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신비적인 역사를 주님의 이름으로 일으키는데 쓰임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 오늘날로 말하면 많은 능력의 종들이 예수님께 외면을 받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비적인 일을 행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불법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했던 수많은 표적들이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데는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신비적인 능력을 행하면서도 불법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에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마음에 두지 않고 오로지 능력을 행하고 보이는데 치중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영혼은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 심판대 앞에 서기까지 그들은 자신들이 주의 이름으로 많은 능력을 행했기 때문에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25장 마지막 부분에 가면 의인들과 악인들이 나뉘어서 있고 그 중앙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우편에 있는 자들을 양이라 칭하시고, 오른 편에 있는 자들을 염소라 칭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우편에 있는 자들을 칭찬하시고 좌편에 있는 자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양과 염소에 속한 사람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들이 만난 가난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행동 여부에 있었습니다.
양에 속한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34-36절을 보면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한 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예수님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실천했다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 말씀을 들은 의인들이 묻습니다. 37-39절입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영접했고 마시게 했고, 음식을 대접하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을 입혔다는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에 그런 일을 행했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그렇게 칭찬하시니까 예수님이 그것을 설명하십니다. 40절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사람들이 하찮게 보는 사람들을 이 의인들은 소중하게 여겼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도왔던 사람들이 모두 “내 형제”라고 말씀하고 아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섬김으로 전해지는 것임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믿음의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의 이런 선한 삶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와 진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우편에 있던 이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주신 은혜와 진리를 받고 그들의 삶이 온전히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편에 있던 염소에 속한 사람들은 많은 능력을 보였고 선지자 노릇을 했지만 그들은 불법을 행했습니다. 그들이 치료한 사람들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 능력을 행하면서도 진정한 사랑으로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능력을 나타내는 공적인 장소가 아닌 사적인 장소에서 만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은 외면했습니다. 그들을 돕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 4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그들은 저주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있을 곳은 생전에 그들이 찾았던 마귀와 그 사자들이 영원히 있게될 영원한 불에 들어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왜 영원한 불못으로 들어가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42-43절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들이 의인들과 다른 삶을 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이해가 안된다고 예수님께 항변합니다. 44절입니다.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45절입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사랑의 행동은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행동은 예수님께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결과를 예수님은 46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악인들의 영혼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의인들의 영혼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은혜와 진리를 여러분들이 받았다는 것은 삶으로 드러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영혼 구원을 이론화시켜서 이론적인 믿음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살아서 역사하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강조한 믿음의 결국은 영혼이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 다시 말해서 영생을 얻을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어떤 믿음이 영혼이 구원받을 그런 믿음일까요? 이것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1장 3-4절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듭나게 하신 믿음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을 거듭나게 하셔서 산 소망을 가지고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가지신 많은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여러분들로하여금 거듭나게 하신 원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구원받은 영혼으로써 썩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얻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영혼 구원을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받은 영혼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이 구원을 주신 사람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십니다. 5절입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렇다면 이런 믿음의 결국이 영혼구원인데 이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로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들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3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은혜은 완전한 구원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영화롭게 된다라고 합니다. 구원이 거듭나서 예수님과 동행하기 시작하는 은혜의 시작이라면 성화는 그리스도를 닮아 자라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어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생기는 구원의 연속성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영화입니다. 구원의 완성입니다.
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야 가능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함으로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허리를 동이고 있는지, 그리고 날마다 근신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둘째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1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구원받은 너희도 역시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진리로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 세상의 사람들과 다른 삶의 방식과 목적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삽니다, 그래서 거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라고 하십니다. 17절입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으라는 말씀입니다.
넷째로 영혼이 구원받은 사람은 교회 안의 성도들을 거짓없이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삶을 삽니다. 22절입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어떻게 이렇게 사랑하라고 합니까? 진리를 순종함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깨끗이 하려 거짓없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은혜와 진리는 여러분들을 구원하여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여려분 안에서 거룩한 삶을 가르쳐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형제자매인 다른 성도들을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은혜와 진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이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그 충만함으로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