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의 어진(御眞)과 진전(眞殿)


어진(御眞)은 왕의 초상화를 뜻한다. 어진 말고도 진용(眞容)·진(眞)·진영 (眞影)·수용(睢容)·성용(聖容)·영자(影子)·영정(影幀)·어용(御容)·왕상(王像)·어영(御影) 이라는 단어들로 불리었다가 1713년(숙종 39년) 숙종어진을 그릴 당시 어용도사도감도제조(御容圖寫都監都提調)였던 이이명의 건의에 따라 ‘어진’이라는 명칭으로 통일하였다.
어진은 삼국시대 이후로 꾸준히 그려왔다. 어진은 특히 조선시대때 많이 그려졌는데, 현재는 거의 다 소실되었다. 어진을 그릴 때에는 궁의 최고 화가 또는 화가들이 모여서 왕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렸는데, 털 하나 하나까지 표현해놨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어진만 전해진다. 태조 왕건의 어진이 한 점 전해지기는 하나, 복식이 고려 초기의 복식과 다르므로 후기에 그려진 상상화로 추측되고 있다. 원래 고려시대 때 어진은 상당수 남아있었으나 조선 세종 때 대부분 불태우거나 묻어버렸다.
태조 왕건과 혜종 어진의 경우 그들의 묘 곁에 뭍었고, 고려 왕들의 어진 18점이 발견되자 마진의 정갈한 땅에 묻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의 어진
어진의 제작 과정
어진의 제작 방법은 도사, 모사, 추사 등의 그림의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도사는 왕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렸고 모사는 원본을 밑에 받치고 그려냈고, 추사는 생존시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다.
조선의 초상화는 주로 배채법이라는 기법을 사용했다. 그림을 그리는 천이나 종이 뒷면에 물감을 발라 색이 은은하게 비쳐나오도록 한 기법이다.
현존하는 조선의 어진
현재 남아있는 어진은 태조, 원종, 영조 2점, 순조, 문조,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 등이다. 이 중 영조의 어린 시절을 그린 연잉군의 어진만 도사본이고, 나머지는 원본을 베껴서 그린 그림이다. 원래는 세조, 숙종, 정조 등의 어진도 더 있었으나, 1954년 12월 10일 임시로 부산으로 옮겨뒀을 때 화재로 인해 대부분 불에 타 없어지고 현존하는 어진만 남은 것이다. 한편 현존하는 어진 중에서도 문조의 어진은 얼굴 부분 대부분이 불에 타 버렸다.
어진은 사진도 찍을 수 없게 하였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어진의 사진은 대부분 현대에 찍은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한국 전쟁 이전의 어진 사진은 태조가 젊을 때 그린 어진을 사진으로, 한 일본 순사가 함흥에서 찍었다고 전해진다.
2016년 11월에는 세조 어진을 모사했던 이당 김은호의 유작들이 경매에 나왔는데, 이 중 세조 어진의 초본도 함께 출품되었다.
임진왜란과 어진
임진왜란 당시에도 조선 전기의 어진은 상당수 남아있었다. 선조처럼 어진을 그리기 거부한 일부 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남아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궁궐이 모두 불타면서 얼굴만 간신히 남은 문종의 어진과 불길속에 뛰어들어서 구해낸 세조의 어진, 그리고 태조의 어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선원보략에 등장한 일부 어진과, 선원보략 및 다른 책을 보고 1926년에 하응달이 모사한 어진들도 있으나 대강의 형태만이 묘사되어 있어 정밀성이 떨어진다. 세조어진의 경우에는 김은호가 궁궐에서 모사한 것과 선원보의 세조어진 간의 수염과 얼굴길이 등이 차이가 존재한다.
1974년 윤탁연의 집안에서 소장하던 조선 선조의 어진을 공개했다. 윤탁연은 형조판서와 호조판서, 함경도관찰사를 지낸 인물로, 임진왜란 초기에 누군가 그린 전립(戰笠)과 군복 차림의 조선 선조의 어진을 입수, 집안에 소장하고 있었다.
한국전쟁과 어진
6.25 전쟁때 전국의 어진을 모아 부산의 광복동의 약품 보관 창고인 관재청에 보관을 하였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1년 뒤인 1954년 12월 26일 아침 6시 20분 경, 부산 광복동에서 전기공사청부업을 경영하고 있는 정수홍의 집에서 식모로 일하고 있는 안순자가 마룻바닥에 촛불을 켜놓고 그대로 잠들었는데, 그 촛불이 주위에 인화되어 불길은 삽시간에 퍼졌고 용두산 일대를 전소시켰다. 이 일로 국보 3,400여 점이 불에 타 재로 변했다. 간신히 반쪽만 불에 탄 영조의 연잉군시절, 노년기, 철종, 익종의 어진만 구할 수 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어진들도 모두 불타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 지정 및 보존
왕들의 어진들은 국보 및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태조의 어진은 1987년 12월 26일 보물 931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6월 29일 국보 제317호로 승격되었으며, 전주 경기전에서 보관 중이다. 영조의 노년기 어진은 보물 932호로, 영조의 어린 시절을 그린 연잉군의 어진은 보물 1491호로, 철종 어진은 보물 1492호로 각각 지정되었으며, 모두 국립 고궁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진전(眞殿)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 향사하는 처소를 말한다.
진전에 관한 기록은 이미 『삼국사기』 궁예조의 ‘부석사신라왕상(浮石寺新羅王像)’이라든지 『창암집』의 ‘원주경순왕영전(原州敬順王影殿)’ 등에서 단편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전이 제도화되어 처음 나타나는 것은 고려시대이다. 이 시대의 진전 체제를 개괄해 보면 대략 2가지 방식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역대군왕의 초상을 봉안하기 위한 진전이었다. 도성 내의 경령전(景靈殿) 설치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또 하나는 도처(개성 부근)에 각 왕마다 원찰(願刹)을 두고 이곳에다가 왕 및 후비의 진영을 봉안하기 위한 진전을 부설하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고려시대 진전 설립의 구체적인 방식은 대체로 중국 송나라 때의 진전 체제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경령전은 송대에 경령궁(景靈宮)을 설치하여 왕 및 후비의 진영을 봉안하였던 제도를 본뜬 것으로 여겨진다.
차이점이 있다면 고려는 제후(諸侯)의 나라로 자처하였기 때문에 『예기』 왕제편에 보이는 제후왕묘 이소이목여태조지묘이오(諸侯王廟 二昭二穆與太祖之廟而五)에 준하여 경령전 내에 5실을 두고 받들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태조는 백세불천(百世不遷)이지만 그 밖의 4실은 순환식으로 역대군왕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원찰의 형식 역시 송대의 신어전(神御殿) 실시와 유사한 성격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진전 제도는 대체로 송대의 것을 모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단지 규모의 대소에서 빚어지는 차이와 함께 고려시대 전반에 팽배하였던 숭불관념으로 인하여 선왕수용(先王睟容)은 사원부설영전에서 봉안되었다. 송대의 신어전처럼 도관(道觀)이나 별궁(別宮)에서의 진영 봉안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차이점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진전의 존재 및 그 의미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시대의 진전 체제는 한편에서는 국조(國祖)인 태조의 수용만을 받드는 진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열조(列朝)의 수용을 받드는 진전을 설치하였다.
태조진전은 서울의 문소전(文昭殿)을 비롯하여 외방 5처, 즉 경주집경전(集慶殿), 전주경기전(慶基殿), 평양영숭전(永崇殿), 개성목청전(穆淸殿), 영흥 준원전(濬源殿)을 두었다.
이곳들은 모두 태조와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태조진전 분립 방식은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원묘를 경사(京師) 및 군국(郡國)에 분립하였던 제도를 본뜬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 내에는 선원전(璿源殿)을 두어 선왕선후의 진영을 함께 봉안하였다. 이 밖에 세조진영은 세조가 죽은 뒤 양주 정릉(正陵) 곁 봉선사(奉先寺) 동쪽에 봉선전(奉先殿)을 짓고 여기에 봉안함으로써 고려시대 진전 제도의 유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전 체제 운영의 틀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크게 와해되었다. 난을 거친 뒤에 전우(殿宇)로는 개성의 목청전, 양주의 봉선전, 평양의 영숭전, 경주의 집경전 그리고 서울의 선원전이 폐기되었다.
영정으로는 목청전의 태조영정과 선원전의 열성어전이 모두 산일되었다. 따라서 임진왜란 후에는 영정의 이모, 수보 및 새로운 진전의 설치가 요구되었다. 여기서 남별전(南別殿)주 01)이 등장하게 되고 강화에 새로운 집경전·영숭전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병자정축란이 일어나고 다시 진전 체제는 혼란을 겪게 된다. 이후 진전에서 받드는 영정은 준원전·경기전의 태조영정과 남별전에서 받들게 된 세조 및 원종영정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위축되어 버린 진전 체제로 인한 자각에서 숙종 연간에는 남별전을 증건하여 영희전이라 개칭하고 새로이 장녕전과 만녕전을 설치하여 숙종과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숙종이 죽은 뒤에는 창덕궁에 새로이 열성어진을 받드는 선원전을 설치하여 결국 영희전과 함께 각기 열성조어진(列聖朝御眞)을 받들게 되었다.
영·정조시대에는 어진도사 작업이 활발하여(영조 12본, 정조 7본), 이로써 선원전·영희전·장녕전·만녕전 같은 기존 진전만이 아니라 새로운 봉안 처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다른 용도로 사용하였던 당(堂)이나 궁(宮)에 어진을 봉안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즉, 태령전·육상궁·창의궁·경모궁·현륭원·경우궁·규장각 등이 그것이다.
그 뒤 고종 연간에 이르러 종친부 내에 천한전(天漢殿)을 세우고 철종어진을 일시 봉안하였다. 그러나 진전 체제의 변모를 가져온 선원전 실화(失火) 사건이 1900년에 발생한다.
이 불로 받들던 7조어진이 소실되며, 바로 증건 및 이모 사업을 벌이게 된다. 이 때에 태조어진을 1본 더 이모한다. 그리고 임진왜란으로 폐기되었던 목청전을 증건하여 이곳에 봉안하게 된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의 끝 무렵에는 진전은 열성어진봉안처로서의 선원전·영희전 및 태조진전으로서의 준원전·경기전·목청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밖에 소규모의 봉안처가 있었다. 그러나 6·25사변을 거치면서 많이 소실되고, 현재는 남한에 경기전만이, 전주에 소재하여 있다.
진전이란 원래 단순히 어진을 봉안하는 처소로서 선조를 위한 효사추모(孝思追慕)의 전례에 기인하여 생겼다. 그러나 그 의의는 비단 이것만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한 왕조의 진전은 그 왕조의 조종(祖宗)의 영구함을 꾀한 형식적 위엄과 질서 잡힌 체제를 통하여 국가라는 보다 큰 존재를 의식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하나의 사회적 제도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