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8/26) - 만달고비(중부 고비) 지역의 바가 가즈링 촐로
처음 떠나는 몽골 여행이 내게는 마치 오지 탐험 길에 오르는 것처럼 여겨져 내심 설레임과 두려움이 반반 섞여 있었다. 인천 공항에서 만난 여행 동반자들이 모두 낯익은 국제포교사 도반들이어서 일단 마음이 놓였다. 내 경험으로 여행의 성공(?) 여부는 어디를 가느냐에 못지않게 누구와 가느냐에 달려 있다.
인천을 떠나 3시간만에 울란바타르 공항에 내리니 일주일간 우리의 몽골 여행을 안내해 주실 바트보양 스님과 8인승 승합차를 운전해 주실 드무로 기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2백80킬로쯤 달려야 첫 행선지에 도착한다고 해서 몇 시간이 걸리느냐고 스님한테 물었더니 몽골에서는 어디 갈 때 거리는 말해도 시간을 말해서는 안 된다, 시간을 말하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속으로 미신이겠지만 우리와는 다른 문화권의 관습이니 존중해줘야겠다 싶어 그 후로는 아무리 먼 길을 가도 소요되는 시간이 얼마인지를 일체 묻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한국보다 면적은 7배나 크지만 인구는 350만에 불과하다는 몽골의 땅덩어리는 정말 엄청나게 컸다. 자동차를 타고 날마다 거의 온종일 달리면서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과 그림같이 푸른 하늘이 맞닿은 지평선을 바라보며 나는 몹시도 감격스러워, 그 가없는 하늘과 광활한 대지를 내 눈 속 깊이 박아두고 그 신선한 공기와 시원한 바람을 가슴을 활짝 열어 맞아들이고 싶었다. 사람도 차도 구경하기 어려운 포장도로를 달리기도 하고 드넓은 초원 위에 난 마차바퀴 자국 같이 난 길을 따라 달리기도 하다가 이따금 저 멀리서 소, 말, 양, 염소들이 평화롭게 떼지어 다니는 모습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일제히 탄성을 올렸다.
저녁 무렵에 닿은 곳은 만달고비(중부 고비) 지역의 바가 가즈링 촐로(돌이 많은 작은 산)라는 이름이 붙은 나지막한 산속이었다. 10년 전에 한국에 와서 몽골 사찰을 이끌고 계시는 바트 보양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몽골은 옛 소련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1930년대 후반에 사회주의의 종교 탄압을 받아 사찰들이 겨우 한 두 개만 남고 모조리 파괴되었고 스님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먼 곳으로 도피하거나 감옥에 가야 하는 대수난을 겪었다고 한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지만 3만명(?)의 스님들이 한꺼번에 불태워 죽임을 당했다는 골짜기를 내려다 보며 산에 오르자 스님들의 은신처이자 기도처였던 작은 암벽 동굴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잔혹한 역사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맑은 공기에 시원한 바람이 부는 산 위에서 바라보는 자연 풍경은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붉은 저녁 노을을 보며 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근처에 있는 여행자 캠프를 찾아 말로만 듣던 유목민 전통가옥 형태의 게르에서 첫날 밤을 지내게 됐는데, 전기 공급이 되지 않는 곳이라 낮에 축적한 태양광 발전으로 저녁8시부터 11시까지만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니 우리 도시 문명인들은 모두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이후 7박8일의 여정 동안 다섯 밤을 게르에서 숙박하기로 돼있는지라 나는 다소 차이는 있어도 대동소이한 게르의 불편함에 적응하느라고 안간힘을 썼다. 사막지대를 돌아다니니 물도 귀해 24시간 전기와 수도를 펑펑 쓰던 생활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비로소 실감하는 한편 나의 에너지 낭비 습관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는 법! 대신 우리는 게르 앞 풀밭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캄캄한 밤하늘에 총총 박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과 은하수를 바라보면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함과 행복감에 빠져들었다. 나의 몽골 여행 목표는 드넓은 초원을 시원하게 바라보는 것, 그리고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는 것, 딱 두 가지였는데 그 모든 것이 충족되었다. 그것도 백배 충족!
살면서 한번쯤은 문명화되지 않은 자연상태를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라. 대신 내 몸과 내 마음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문명의 업을 덜어내는 다소의 불편을 감수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