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구백서른두 번째
회색은 우주의 근원점
1991년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내자 반정부 진영에서 그를 회색분자로 몰며 분개했습니다. 민주화운동으로 옥고까지 치른 그가 군사독재정권을 옹호하는 듯한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느냐는 항변인 셈입니다. 10년 후 작가 이문열이 좌파 시민단체를 비판하는 칼럼을 쓰자, 그의 책을 불태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소설가 박완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만류했다가 곤욕을 치렀습니다. 우린 오랜 세월 중용中庸이라든가 중도中道를 지키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념에 빠지면 이를 부정적으로 보아 회색분자라고 합니다. 줏대 없이 이리 붙고 저리 붙거나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흑백논리에 젖어 있기에 회색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중용中庸은 유교의 핵심 사상으로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이 상황에 맞는 적절한 도리를 실천하는 상태이고, 중도中道는 불교·도교 등에서 극단에서 벗어난 바른길을 가리키는 말인데 회색은 색깔이 분명하지 않다고 하여 부정적으로 매도합니다. 서양에서 회색을 매우 중시하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매우 독창적인 회화 언어로 사물의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의미를 전하려고 한 천재적인 추상화가 파울 클레 Paul Klee는 회색은 우주의 근원점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흑백처럼 분명한 색깔로 출발하는 게 아니라는 말로 들립니다. 회색은 검은색도 아니며 흰색도 아니고, 동시에 흰색이며 검은색입니다. 부정적 시각으로 보면 박쥐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좌우가 싸울 때 회색분자는 기회주의자로 지탄받지만, 그러나 모든 것이 통하고 융합하는 통합의 시대에 회색은 기회주의자의 빛이 아니라 창조주의자의 빛이 됩니다. 생각의 나래가 펼쳐지고 거기에 꿈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