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의 동쪽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어원적 의미의 인문(人文)이 인간적 삶의 무늬라면, 그 무늬는 어떤 경계들이 만드는 무늬이다.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 이전과 이후 등을 가르는 경계. 또는 예술, 역사, 철학, 종교 등을 나누는 선.
그런 선들이 모여 인문의 세계를 이룬다.
그러므로 사유한다는 것, 인문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경계와 씨름한다는 것과 같다.
어떤 정해진 한계 안에 머물러 있는 사유는 아직 인문적 사유가 아니다. 경계를 설정하거나 다시 설정해야 할 때,
경계를 재배치하거나 넘어서야 할 때 인문적 사유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인문적 사유가 부딪히는 최대의 경계는?
이는 각자 서 있는 영역, 시대, 상황마다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다.
예술가, 철학자, 종교인은 저마다 다른 경계를 숭배한다.
한때 기적을 가져온 탈주선이라 할망정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예속의 선으로 굳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역동적인 변화 속에 놓일수록 역사적 현실은 기존 삶의 무늬를 흩뜨려놓는다는 사실이다.
가령 가속화되고 있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인간과 기계,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다시 그릴 과제를 제기한다.
자본주의가 심화됨에 따라 국가, 계급, 인종 등을 가르던 경계들이 점점 뒤엉키거나 무력해지고 있다.
세계화 시대란 기존의 현실을 규정하던 수많은 구별의 선들이 자본과 테크놀로지의 보편성 안에서 추상화되는 시대
이다.
이때 추상화된다는 것은 소멸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롭게 그려지기 위해 보류 상태에 놓인다는 것뿐이다.
모든 경계가 사라진 문화, 모든 구별이 제거된 문화란 생각할 수 없다.
문화는 인문의 세계, 무늬의 세계, 어떤 경계들에 의해 조형되는 세계이다.
세계화가 어떤 추상화라면, 그 추상화는 새로운 조형화를 외치는 백색의 아우성을 낳는다.
어떤 엉클어짐, 유례를 찾기 힘든 엉클어짐에서 비롯되는 아우성.
이 소리 없는 아우성은 오늘의 인문학에 대하여 위기이자 또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어떤 침묵이, 무엇인가 거부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침묵이 인문학의 과거와 미래를 가르고 있다.
1.
나는 최근 우리말로 번역된 피어시그의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가치에 대한 탐구》를 이런 문맥에서 언급하고
싶다.
1974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래 23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최대 600만 권이 팔린 책. 소설이면서 동시에 철학서인 이 책의
경이적인 성공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출간 이후 30년이 훨씬 지난 이 오래된 책이 아직도 매력을 잃지 않는 이유는?
그것은 무엇보다 어떤 아득한 이념을 일상적인 경험의 사례들 속에서 포착할 수 있게 만드는 놀라운 서사의 전략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평범한 독자가 드디어 손에 쥐고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그 이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현대 문화의 기본 문양을 처음부터 다시 그릴 가능성과 관련된 이념일 것이다.
선과 모터사이클은 이 소설에서 서양적 인문의 세계를 구획하는 여러 가지 경계선의 양편을 상징한다.
먼저 모터사이클은 과학적 실증주의, 로고스, 논리, 이성, 이론, 진리 등을 가리킨다.
반면 선은 종교적 신비주의, 뮈토스, 직관, 감성, 미학, 선(善) 등을 지시한다.
하지만 선과 모터사이클은 궁극적으로 동양적 사유와 서양적 사유를 각각 대표한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대립. 이것이 이 책에서 극복의 대상으로서 가시화되는 마지막 문제이다.
저자는 동서의 분계선으로 향하기 위해 먼저 서양적 사유를 특징짓는 다양한 이항대립의 짝들을 정거장처럼 머물다
지나간다.
이 희대의 베스트셀러는 미국의 소도시들, 그 사이로 펼쳐진 광활한 자연을 통과하는 어떤 모터사이클 여행담이다.
하지만 이 여행담은 모터사이클이 멈추는 곳마다 어떤 회상과 야외 강연으로 이어지고,
그때마다 자연적 지형 위에 구축된 인문적 지형에 대한 탐사로 뒤바뀐다.
지형의 탐사는 지도를 남기고 거기에는 어떤 등고선과 산맥, 어떤 물줄기와 평야가 나타난다.
피어시그는 서양적 인문의 지형을 구조화하는 두 개의 거대한 산맥을 먼저 표시한다.
그리고 거기에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라는 이름을 붙인다.
고전주의는 사물의 배후에 놓인 본질적 형상이나 법칙을 추구하는 태도이다.
반면 낭만주의는 어떤 질적 탁월성이나 미적 조화를 추구한다.
고전주의가 이성적 합리성을 옹호한다면, 낭만주의는 감성적 직관이나 창조적 개방성을 중시한다.
객관적 실재를 숭배하는 것이 고전주의라면, 낭만주의는 인격적 변화나 해탈에 이르고자 한다.
창조, 사랑, 마음의 평화는 낭만주의의 가치 목록이다.
고전주의자가 모터사이클을 설계한다면, 낭만주의자는 선적 명상을 수행 중이다.
현대 학문이 노정하는 위험한 경향으로 C. P. 스노우는 ‘두 문화’의 불화를 지적한 바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괴리가 점차 깊어져 더 이상 건널 수 없는 심연으로 분리된 두 문화.
피어시그는 단지 학문의 차원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대립하는 두 문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라는 두
문화를 가리킨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에서 20세기 후반의 미국에 이르는 역사를 이 두 가지 거대한 흐름이 상호 갈등해 온 과정으로
풀이한다.
이런 설명은 서양의 문화적 질병에 대한 진단으로 이어진다.
그 질병은 그 두 흐름이 마침내 빠져든 상호 몰이해, 반감, 적대시에 있다. 그런 적대시를 넘어 어떤 화해와 통합으로
가는 제3의 길은 없는가?
피어시그의 작품은 이런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는 자전적 형식의 철학적 소설이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통과한 요즘의 독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어본 가락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미국에서는 적어도 1970년대 말부터, 우리나라는 1980년대 말부터 광풍처럼 휘몰아쳤던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순히
탈근대의 지향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것의 출발점은 오히려 서양적 사유 전체의 역사적 유래와 논리적 구조를 해체, 극복하고자 하는 탈서양의 지향에
있다.
이 사조의 이론적 초석에 해당하는 철학자들, 가령 니체와 하이데거, 또는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과 같은 철학자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협소한 범주에 가두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은 기존의 서양적 인문의 지형도 전체를 뒤바꿀 가능성과 씨름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동일한 전선을 형성한다.
21세기의 시대정신은 20세기 말에 형성된 이 강렬한 전선에 의해 압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당시 막 태어나던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낳은 사상사적 계보와 무관하게, 이 계보에 속하는 철학자들에 빚지지 않으면서 저자
자신의 고유한 경험과 사색을 통해 도래하고 있는 시대정신을 평이한 언어로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정신이란 해결되기를 요구하는 문제, 한 시대의 흐름을 규정하는 최대의 문제를 말한다.
내용상 그 문제는 서양적 사유의 정체성과 관련된 마지막 테두리를 다시 그리는 데 있다.
그런데 이 문제와 씨름하는 대부분의 철학은 서양적 사유의 경계를 두 가지 방향에서 추적한다.
탈근대의 방향과 탈서양의 방향이 그것이다.
먼저 탈근대 방향의 경계. 이 책의 용어법을 따르자면 그것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이 근대문화 속에 만드는
무늬이다.
여기서 문제는 고전주의의 패권적 우위와 낭만주의의 일방적 소외에 따른 불균형에 있다.
탈근대 논쟁은 계몽주의 시대 이래 더욱 심화, 고착되어온 이런 불균형 관계를 비판하고 두 세계관 사이의 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할 필요성에서 비롯된다.
다른 한편 탈서양 방향의 경계. 그것은 동양과 서양의 대립이 일으키는 무늬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이란 말로 집약되는 동양에 대한 편견과 그 편견과 맞물려 맺힌 서양적 인문의
이미지에 있다.
서양적 사유는 열등한 형태의 동양적 이미지를 조성하고 그 대척점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이상화해 왔다.
탈서양 논쟁은 그렇게 이상화된 이미지가 마치 지평선 너머로 지고 있는 해처럼 일정한 주기의 끝에 도달했다는
의식에서 시작되었다.
탈근대의 방향에서 그려지는 경계. 그것은 서양적 인문의 내면을 조직하면서 그 바깥을 형성한다.
그것은 안에서 시작되어 바깥으로 확장되는 무늬이다.
반면 탈서양의 방향으로 그려지는 경계는 서양적 인문의 바깥을 형성하면서 그 내면을 구조화한다.
그것은 바깥에서 시작하여 안쪽으로 이르는 분절화의 무늬이다.
이 두 가지 무늬, 그 무늬를 조직하는 리듬은 서로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탈근대의 지향이면서 탈서양의 지향이고, 탈서양의 운동인 동시에 탈근대의 운동이다.
이런 순환은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도 똑같이 일어난다.
여기서 선과 모터사이클의 대립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을 상징하는가 하면 동시에 동양과 서양의 대립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관계를 수정하는 작업은 동양과 서양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작업에서 완성된다.
2.
포스트모더니즘 이전, 그리고 피어시그의 책 이전에 서양의 합리주의 문화를 부정하는 대대적인 흐름이 있었다.
그것이 1960년대 미국의 물질적 풍요에 냉소를 보내던 비트족과 히피족이다.
하지만 주류 문화에 대한 이들의 거부는 맹목적인 성격이 강했다.
어떤 대책 없는 부정은 기존의 경계를 보류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하는 효과만을 가져올 뿐이다.
피어시그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일면적 부정의 오류를 명확히 의식하고 있다.
이들은 탈근대를 지향하되 근대성을 무조건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근대성의 뿌리로 파고 들어가 탈근대의 가능성을 추구한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탈서양을 가리키되 서양이 지닌 자기갱생의 힘 안에서 탈서양의 길을 모색한다.
서양의 역사가 잘못 가고 있다면, 이제 문제는 서양의 문화적 잠재력 안에서 자기혁신의 가능성을 찾는 데 있다.
이런 변증법적 성격은 어떤 위대한 화해에 이르고자 하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훨씬 강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부제가 말하는 것처럼 서양의 이성 중심주의가 망각해 온 가치, 저자가 질(質)이라
부르는 낭만주의적 가치, 그러나 동양의 종교 속에는 아직도 살아 있다고 간주되는 그런 가치에 대한 탐구이다.
이 탐구의 과정은 그 가치가 현실 속에 살아 있던 서양의 과거(호메로스 시대), 그 가치를 옹호하고 전파하던 위대한
선구자(소피스트), 그 가치의 몰락과 배제의 국면 뒤에 숨은 권력관계(소크라테스, 플라톤의 등장) 등에 대한 회상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매력은 이런 계보학적 분석을 모터사이클 분해와 함께 끌고 간다는 데 있다.
모터사이클을 분해하면 과학과 기술의 힘이 나온다.
과학과 기술을 분석하면 이성적 사고의 특성과 한계가 나타난다.
모터사이클을 수리하는 정비사에게서는 예술적 경지에 오른 장인 정신을 찾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일상의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분석하면 마음의 평화에 이르는 길까지 나온다.
마음의 평화에 이르는 길.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낭만주의적 질에 이르는 길 자체와 다르지 않다.
선(禪)에 이르는 길은 기계 안에, 모터사이클 안에 있다.
“신성한 부처님은 산 위에서나 연꽃잎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주 편안하게 디지털 컴퓨터의 회로 안에,
그리고 모터사이클의 변속기 안에 정좌하고 있다.”(47쪽)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 그것이 부처님이다.
저자가 탐구하는 가치, 그 낭만주의적 질이란 것은 그런 부처님을 만나게 해주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질이 선물하는 것은 부처님과의 만남으로 그치지 않는다.
질은 또한 어떤 무한한 예술적 창조성을 촉발하고 시적 탁월성에 가득한 어떤 조화를 허락한다.
이때 탁월성이란 말할 수 없는 것, 예(긍정)와 아니오(부정)로 답할 수 없는 것, 따라서 정의할 수 없는 것,
그러나 숭고한 질서를 약속하는 어떤 것이다.
어떤 불가능자로서의 질. 그런 질은 이 책에서 《도덕경》의 도(道)나 선불교의 무(無)로 암시되는 사태와 동일시
된다.
그러므로 모터사이클을 분석하면 서양 정신의 핵심만을 추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거기서 동양 정신의 정수까지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모터사이클 분석에서 이어지는 두 길, 서양 정신의 길과 동양 정신의 길을 가르는 분기점은 어디에?
모터사이클 여행자는 어디서부터 서양적 인문에서 벗어나 동양적 인문 속에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그 경계는 정확히 주체(사람)와 객체(모터사이클)를 분리하는 거리가 소멸하는 지점에 있다.
그 변곡점 이전까지의 여정은 고전주의적 사이클 속에 갇혀 있다.
여기서 얻는 것은 과학기술 문명의 이기이고 잃는 것은 마음의 평정이다.
마음의 평정은 그 변곡점을 지나 성립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에서만 향유될 수 있다.
충만한 고요는 그 임계점에서 시작되는 낭만주의적 사이클의 선물이다.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 사라지는 이 사이클에서 나타나는 것은 시적 창조성이며 그것의 상관항인 질적 가치이다.
질적 가치에 의해 추동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적 사이클은 선으로 대표되는 동양적 지혜의 세계로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하나의 동일한 모터사이클을 타고 그 두 사이클을 모두 통과할 수 있을까?
과학기술 문명의 이기와 시적 창조성, 나아가 선적인 지혜를 어느 하나 놓치는 일 없이 모두 누리는 그런 모터사이클
관리술, 그런 테크놀로지 관리술, 합리주의를 낭만주의적 질과 동양적 깨달음 속에서 완성할 그런 이성의 관리술은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문제의 핵심은 고전주의를 구조화하는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넘어서는 데 있다.
주객일체의 상태로 가는 길.
그것이 낭만주의적 질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부처님을 만나는 길, 그리고 동양적 사유와 화해하는 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이 저자가 자신 있게 제시하는 개인적 차원의 어떤 태도 변화나 명상의 기술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이는 그야말로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주객의 분리와 대립을 극복하는 과제, 이를 통해 서양적 사유의 근본적 변혁과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제를 가장 첨예하게 제기했던 것은 독일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 횔덜린이었다.
횔덜린이 어떤 책의 양쪽 날개에 남긴 두 쪽 분량의 〈판단과 존재〉에 따르면, 이성적 판단(Urteilen)은 존재의
근원적 분할(Ur-teilen)을 가져오는 어떤 폭력이다. 하지만 이 존재론적 폭력은 양가적이다.
먼저 판단이 일으키는 분할의 선은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가져온다.
그 주객 대립의 구도는 사물이 현상하는 개방성의 공간이다.
반면 그 공간은 동시에 존재의 원래 상태를 파괴, 왜곡하는 은폐의 공간이다.
따라서 판단이 전개될수록 의식은 시원의 존재로부터 소외된다.
건드리는 사물마다 황금으로 바꾸는 미다스의 손은 축복인가 하면 저주였다.
마찬가지로 합리적 질서를 열어놓는 판단은 과학기술 문명의 이기를 선사하되 필연적으로 어떤 존재론적 파국을
수반한다.
따라서 어떻게 판단이 초래하는 존재론적 재난을 이겨낼 것인가?
어떻게 판단 이전의 존재론적 통일성, 주객 분리 이전의 단순함으로 돌아갈 것인가?
독일 관념론이라 통칭되는 셸링과 헤겔의 철학은 횔덜린이 제기한 이런 물음에 대한 서로 다른 해법에 불과하다.
탈근대의 전환점이라 평가되는 니체의 철학과 하이데거의 존재사유, 그 뒤로 이어지는 데리다, 들뢰즈의 철학도
역시 유사한 위상에 있다.
피어시그의 작품은 낭만주의적 질을 추구하고 이를 통해 서양적 사유의 새로운 시작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이런
계열의 철학적 전통과 닿아 있다.
이 작품은 서양적 사유의 자기변형이라는 과제와 씨름해온 눈부신 전통의 유산을 대중이 서 있는 일상의 차원,
모터사이클 관리의 차원으로 옮기고 있다.
이것은 그 어떤 시인이나 철학자도 이루지 못한 위대한 성취이다.
그러나 그 업적은 어떤 상실의 대가일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서 원래의 문제가 거느리던 수많은 역설이나 아포리아
들은 자기계발적인 극기 기술의 차원으로 해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3.
마지막으로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한국의 성벽”(220, 516, 526쪽 등)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남보다 이른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 화학실험실에서 고투하다 우울증에 빠져 정신병원에 끌려갔다.
이후 대학에서 이공계 학생들을 위한 작문 강의와 병행하여 서양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대학의 보수화된 분위기와 불화를 빚어 인도로 떠나 동양철학을 공부한 후 이 책을 썼다.
이런 복잡한 이력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정신병원에서 나와 다시 대학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군대에 입대하여
한국에서 근무하던 시절이다.
이때 그는 어느 바닷가에 있던 성벽을 보면서 그의 인생 전체를 뒤바꿀 영감에 휩싸였다.
바로 거기서 자신이 평생 설명해야 할 그 무엇을 본 것이다.
낭만주의적 질, 도(道), 선(禪), 무(無), 장인에 의해 물질 속에 구현되는 침묵 등과 같이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용어들은 그 한국의 성벽이 주던 영감을 번역하는 여러 가지 다른 말들에 불과하다.
저자에게 한국의 성벽은 어떤 위대한 기념비, 서양에서 망각되어 가는,
그러나 동양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어떤 위대한 가치의 기념비로서 경험되었다.
이 책의 부제가 ‘가치의 탐구’라면, 그 탐구는 한국의 성벽에 구현된 가치 또는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는 한국의 성벽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의 전통적 건축물, 그리고 거기서 실현된 한국적 가치에 대해 이보다 더 큰 찬사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소설에서 한국적인 것은 동양적인 것 일반 속으로 희석된다.
한국 문화의 독특한 성격은 여기서 중국 문화와 인도 문화의 차이 또는 불가와 도가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서양적 사유의 자기갱생이나 자기극복의 가능성을 묻는 위치에서는 이런 추상성은 대수롭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동양적 사유가 그 자체로 탐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동양적 사유는 서양적 사유의 타자이되 이 타자는 어떤 거울의 역할에 머물러 있다.
어떤 거울인가?
그것은 서양적 사유가 어쩌다 잃어버린, 그러나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하기 위해서 되찾아야 할 어떤 분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한국의 성벽이 동양적 인문의 세계 전체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등장할 때,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서양적 사유의 문법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동양 문화의 패권을 다투던 사유, 가령 중국적 사유의 문법과 구별되는
그런 한국적 사유의 문법은 찾을 수 없는가?
왜냐하면 그 성벽은 분명 서양적이 아닌 것처럼 중국적인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성벽은 동서 주류 문화의 주변부에서 어렵게 연명해 온 가치, 그 주변부의 열악한 환경에 편안하게 거주하는
사유, 그러나 동서 중심부의 문법으로는 옮기기 어려운 어떤 특이한 논리의 기념비가 될 수는 없을까?(은둔의 철학자
박동환의3표론이 지닌 의미는 이런 물음의 가능성을 천착하는 데 있다.)
1950년대의 한국을 경험했던 저자에게 이런 물음의 생략을 결코 질책할 수는 없다.
당시에는 한국이 서구인의 눈에 있으나 마나 한 나라에 가까웠다.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가 거의 명목상으로만 존재했다.
서양철학에 대해 동양의 문화적 구별이 추상적으로 존재하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세상이
되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서양의 역사와 고립되었던 시절은 지나갔다.
동아시아 인문의 변화는 세계의 인문적 지형에, 또 세계 인문의 변화는 이 지역의 인문적 지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시대, 세계화의 시대, 게다가 동아시아 중심의 세계질서 재편이 예견되기까지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 시대에 이르러 기존의 모든 탈근대 및 탈서양의 담론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경제학적 차원에서 동양이 서양에 종속되어 있거나 분리되어 있다는 암묵적 전제, 따라서 동양적
인문에 의해 서양적 인문이 결정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상황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탈근대 및 탈서양의 담론에서 동쪽은 어떤 유례없는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날 미래의 땅이지만,
그 대륙의 주인공은 여전히 서양적 로고스나 뮈토스의 후예로 설정된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점점 더 이와는 다른 종류의 설정이 필요한 지점으로 굴러가고 있다.
철학의 동쪽이 이제 더 이상 과거처럼 어떤 주인 없는 땅처럼 표상될 수 없는 이 지점에서 인문적 사유에게 요구되는
궁극적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 동양적 사유와 서양적 사유가 동등한 자격에서 서로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 그런 가능성 안에서 상호
교차, 변형, 순화될 가능성, 그리고 마침내 자본과 테크놀로지에 버금가는 보편적 인문의 무늬를 직조할 가능성에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은 기존의 탈근대 및 탈서양의 담론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속하는
책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연출된 영화적 가능성, 다시 말해서 하나의 모터사이클로 동양적 인문의 사이클과
서양적 인문의 사이클을 단숨에 질주할 가능성은 여전히 미래 인문학의 이상으로 남을 것이다.
특히 동서고금의 사상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한반도의 독자에게 저자가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한국의 성벽은 그런
아득한 이상으로 향한 다짐의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김상환 / 서울대 철학과 교수. 연세대 철학과 졸업. 프랑스 파리 소르본 대학 철학박사(1991).
저서로 《해체론 시대의 철학》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등과
역서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 있다.
‘오늘의 사상의 흐름: 현대 철학사를 보는 몇 가지 관점’
‘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강연의 핵심은 우리시대의 고전읽기다.
고전은 동서고금의 문제적 저작이므로, 이를 새롭게 명명하고 읽어내기 위해서는 이들 고전의 토대를 면밀히 응시할
필요가 있다.
시즌2 강연이 개별 강연에 앞서‘고전 개론’으로 여섯 개의 강연을 배치한 것도 이와 관련된다.
이슬람 문명, 오늘의 사상의 흐름, 그리고 문화 연구와 문학 연구 등의 개론은 새로운 고전의 탄생과 현대적 접근을
위한 전략적 배치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강연 주요 내용이다.
“어떤 이들은 박동환 교수를 사제(私製) 철학자라 부른다.
그의 철학이 동서양의 지배적인 철학들을 모방하거나 수선하며 수용해온 우리 철학계의 풍토에서 일탈해 있기 때문
이다. ... 한국인으로서 그가 지닌 체질이 동서의 지배적 세계관과 사고방식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
박 교수는 그들의 철학을 추종하며 연마해도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한국 사람들의 [관점과] 삶의 양식 속에서,
오히려 보다 보편적인 철학의 바탕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그의 철학이 지니는 특수성은 역설적으로 철학의 보편성을 실현하기 위한 토대이다.”
- 최세만(충북대 철학과), 「3표의 철학,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에서
“서양철학이든 중국철학이든 지금까지의 철학은 ‘도시의 철학’이며 인문주의 또는 자기중심주의 철학이다. ...
두 철학은 인간의 절대타자에 대한 의존성을 지양하고 개체로서든 집체로서든 인간을 자립적인 주체로서 정립하려
했다.
주체란 그렇게 허구적인 자립성 속에서 이해된 자기였던 것이다.
박동환은 그런 주체를 해체하려 한다.
그리고 나를 다시 원시적인, 아니 시원적인 의존성 앞에 마주 세우려 한다.
이것이 박동환이 언제나 타자성 속에 함몰돼 왔던 우리 겨레의 존재역사를 읽어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비로소 우리도 철학할 수 있게 됐다.”
-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비주체성의 역설」에서
“‘3표론’과 ‘x의 존재론’을 두 축으로 하는 박동환의 철학은 한글로 쓰인 최초의 완결된 철학적 담론이라 할 수 있다.
3표론은 동서 사상사 해체론이고 x의 존재론은 소멸에 의해 중심화된 체계에 도달한다.
모든 위대한 철학이 그런 것처럼 박동환의 철학은 어떤 먼 곳의 발견이자 어떤 먼 곳으로부터의 복귀이다.
그곳은 동서 인문의 차이가 사라지는 역사의 원점, 인간적인 척도가 모두 깨어지는 존재론적 영점(零點)에 해당한다.
그곳은 정신의 태양이 떠오르면서 망각된 원시의 장소라는 점에서, 그리고 반만 년의 수난 끝에 다시 새벽을 알리는
어떤 초월론적 장소라는 점에서 동쪽이라 불릴 수 있다.
박동환의 철학은 박동하는 동쪽의 철학이다.”
-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X의 존재론' 발표한 박동환 연세대 명예교수
올해 여든한 살의 철학자가 자신의 저술을 취합한 철학선집을 냈다.
1980년대부터 거의 10년에 한 번꼴로 펴낸 4권의 책을 엮은 것이었다.
이에 대해'한글로 쓰인 최초의 완결된 철학 담론'이라는 헌사가 나왔다.
'인간의 척도'를 넘어서'우주의 척도'를 탐구하는 철학자라는 찬사도 있었다.
신작인'χ의 존재론'에 대해서 한국 인문학도의 필독서라는 평도 나왔다.
주인공은 박동환 연세대 명예교수. 미국 남일리노이주립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72~2001년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당시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 사이에선'졸업 전 한 번은 도전해볼 만한 넘사벽 강의'라는 평판이 자자했다고 한다.
칸트 철학으로 시작해 미국 사회철학을 전공했지만 플라톤부터 사르트르까지, 노장사상과 명나라 말의 이탁오까지 동서
철학을 넘나드는 해박함이 그 첫 이유였다.
여기에 카프카의 문학과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진화생물학, 양자역학과 천체물리학까지 넘나드는 박학다식함으로 일종의'지의 향연'을 만끽하게 해줬기 때문. 이는 이번 전집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런 박람강기를 자랑한 지식인 내지 철학자가 이 땅에 어디 한둘이었는가.
그럼에도'한국산 철학의 탄생'이라는 찬사까지 듣는 이가 과연 있었던가.
우리 지성사에서 자랑할 만한 사상가를 떠올려보자.
통일신라시대의 원효, 조선시대의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다산 정약용, 수운 최제우…. 모두 빼어난 사상가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그 사상이 원류(源流)가 아니라 아류(亞流)라는 한계에 부딪힌다.
아무리 빼어나다 해도 원효는 중국 불교의 아류, 퇴계와 율곡, 다산은 중국 유학의 아류다.
수운의 동학사상은 동서 사상의 융합을 꾀했다는 점에서 독창성과는 거리가 있다.
당시 동아시아에선 동도서기(東道西器), 중체서용(中體西用), 화혼양재(和魂洋才)로 요약되는 동서 사상 융합이 대유행
이었다.
20세기 철학가 중에는 서울대 철학과 교수였던 박종홍을 떠올린 분도 있겠지만 미국 프래그머티즘과 조선 실학을 뭉뚱
그린 사상을 독창적이라 부르기엔 민망하다.
게다가 그의 사상에는 박정희의'한국적 민주주의'가 어른거리지 않던가.
그래서 2008년 서울에서 세계철학대회를 준비할 때 한국철학계가 내놓은 대안이 다석 유영모와 씨 함석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역시 기독교 사상에 동아시아 사상을 접목했다는 점에서 수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박동환에 대한 찬사는 결국 원효, 퇴계, 율곡, 다산, 수운, 다석, 씨도 못해낸 것을 그가 성취했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정 그러면 얼굴이라도 뵙고 싶다고 졸랐다.
"방법을 모색해보겠다"고 하더니 "4월 초 선생님이 사시는 김포의 음식점에서 철학 전공 제자들과 조촐한 토론회가 열릴
예정인데 거기 참석해 귀동냥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책 읽고 열심히 공부 안 할 거면 얼씬도 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χ의 존재론'을 정독하면서 다른 선집은 개론을 파악하는 정도로 훑었다.
약속한 날짜에 참석자들의 사정으로 모임이 무산됐으니 후일을 기약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낙담했지만 책 읽을 시간을 번 셈이라 여겼다.
그의 책은 얼핏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떠올리게 한다.
본문은 번호를 붙여가며 짤막한 단락으로 구성돼 있고 내용도 체험적 진리를 압축적으로 전하는 아포리즘 성격이 강하다. 담백한 문장이되 심오한 내공이 느껴졌다.
이는 각주 격으로 본문 뒤에 붙인 풀이말(해설문)과 따온말(인용문)에서 뚜렷이 확인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고전뿐 아니라 현대 언어학 심리학 자연과학 텍스트가 무수히 인용되면서 자신만의 시각으로 해석해
낸다.
읽으면 읽을수록 감탄할 부분이 많았고 궁금한 부분도 많아졌다.
정확히 2주 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토론회가 열렸다.
기자까지 8명이 참석한 조촐한 저녁 모임이었다.
직접 만나본 박 교수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지닌 작고 깡마른 체구의 노인이었다.
베레모를 눌러써 감춘 벗겨진 머리, 시력 보호를 위해 살짝 색이 들어간 알이 큰 안경, 살짝 기른 구레나룻, 가늘고 긴
손가락. 멀리서 봐도 예민해 보이는 예술가의 풍모다.
하지만 처음 보는 기자의 등장에 살짝 긴장하면서도 반갑게 맞아줬다.
저녁식사를 겸한 토론회는 4시간 넘게 진행됐다.
주로'χ의 존재론'에 대한 질문과 답이 오갔다.
살짝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화기애애했다.
박 교수는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 자신의 저술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과 질문에 귀를 기울였다.
그날의 주인공임에도 맨 가장자리에 앉은 채 말하기보다는 듣고자 했다.
자신의 취지에서 크게 벗어난 지점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설명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개별적 해석에 대해선 "해석은
자유"라며 오히려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전체적으론'χ의 존재론'에서 "이 세상은 나에게 거의 언제나 소속하기 어려운 낯선 곳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제각기 그 나름의 독선과 일방성을 가지고 나의 학습과 적응을 강요했다"고 토로하던 상처받기 쉬운 영혼의 체취가 느껴졌다.
하지만 χ의 존재론이 그동안 배우고 공부했던 주류철학에 대한 최종 결론이라면서 두 팔로 χ자를 만들어 보일 때는 학자
로서 결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전자의 모습에서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한 마리 개에 불과하였다.
앞에 있는 개가 자기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같이 따라서 짖었던 것이다"는 이탁오의 자조를 고스란히 자신에게 적용하는
선비의 염치를 보았다.
후자의 모습에선 "이 나라에서 철학자라 불릴 만한 분들은 오로지 외래의 언어와 사상의 전통을 모범으로 수행하며 아랫
사람들을 다스리거나 길들이는 일에 종사하는 데 그쳤다"고 일갈하는 선승의 면모가 엿보였다.
긴 시간 얼굴을 맞대고 즉문즉답을 펼친 시험을 통과해서일까. "질문 내용을 e메일로 보내주면 성심껏 답해주겠다"는
허락을 받았다.
"저도 50대 초반까지 학회 임원도 맡고 대외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그게 제 몸에 어울리지 않는 옷이란 걸 깨닫고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지금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고 밤부터 아침 시간을 이용해 책 읽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낮에는 오후
늦게까지 잠을 자는 통에 사람들을 거의 못 만납니다.
그것 때문에'뱀파이어'니'은둔자'니 하고 놀려대듯 말하는 게 와전됐을 뿐입니다."
핵심 기준은 언어다.
언어가 사상의 내용을 규정한다고 봐서다.
독일의 니체와 영국의 러셀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두 사람은 주어(임자말·subject)가 술어(풀이말)를 규정하는, 그래서 주술일치를 요구하는 인도유럽어의 특징에서 주체
(subject)와 실체(substance)를 중시하는 서양철학과 인도철학이 탄생했음을 공통으로 지적했다.
니체는 임자말과 풀이말을 일치시키지 않아도 되는 언어권에선 세상을 전혀 다르게 들여다볼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이를 동서양의 문명사와 철학사에 투영시키며 새롭게 구성한 것이 삼표론이다.
여기서 표(表)는 고대 중국에서 자연수리와 인문도덕 공통의 척도를 지칭한 용어에서 따왔다.
언어적 척도(표)에 따라 철학의 내용이 다르게 구성됨을 함의한다.
1표의 철학 핵심은 동일화의 논리다.
문장의 서두에 반드시 등장하는 임자말에 나머지 풀이말이 맞춰지듯 진리로 상정된 것에 맞춰 부합하지 않는 것은 버리고 부합하는 것만 택하는 논리다.
여기서 보편주의를 강조하고, 모순을 제거하기 위한 치열한 논쟁의 문화를 낳았다.
박 교수는 이를'동일보존 및 모순배제 법칙에 의한 정체쟁의(正體爭議)의 체계'로 규정한다.
하나의 정의(正)로운 체계를 모색하고 이를 보편질서로 확립하기 위해 시시비비를 투철히 가리는 쟁론 지향의 철학체계를 뜻한다.
반면 2표의 철학의 핵심은 반구(反求)의 논리다.
이는 한자어가 문장의 위치와 문맥에 따라 의미와 품사가 정해지는 원리에 대해 박 교수가 이름 붙인 것이다.
반구는'중용'에 나오는'반구제기신(反求諸其身·문제의 원인을 돌이켜 그 자신에게서 찾는다)'에서 따온 것이다.
반구의 논리는 개체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집체(集體)주의를 형성했고, 사회적 대립을 싸움 없이 조화롭게 해소하려는
부쟁(不爭)의 문화를 낳았다.
박 교수는 이를'반구화해(反求和諧)와 상반상성(相反相成·모순관계가 서로를 완성시켜준다)의한 집체부쟁(集體不爭)의
체계'라 설파한다.
그렇다면 3표의 철학의 정체는 뭘까.
가장 쉬운 대답은 1표도 아니고 2표도 아닌 철학이다.
그 둘을 철저히 부정하고 지양하는 철학이다.
이는 박동환 선집의 구성에서도 확인된다.
1권인'서양의 논리 동양의 마음'(1987)이 1표 철학에 대한 회의의 발로라면 2권인'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1993)는
2표 철학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다.
그리고'안티호모에렉투스'에서'3표의 철학'으로 이름 붙여진 새로운 철학의 모색에 나선 것이다.
박 교수는 "1표와 2표의 철학이 모두 대략 6000년 전쯤 시작된 고대 도시문명의 산물"이라고 분석했다.
고대 도시문명에선 신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가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 관계에 투사되면서 절대 권력자가 탄생한다.
이때 폐쇄된 도시공간에서 이 절대 권력을 합리화하는 한편 사회정치적 모순과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두 갈래 사유방식
이 탄생했다.
주술관계의 일치를 추구하는 1표는 임자말의 자리에 권력자를 위치시키면서 보편성의 이름으로 모순과 차이를 제거하는
사유방식을 택했다.
주변 단어와 관계망에 의거해 의미와 지위를 획득하는 2표는 대립과 모순을 용인하면서도'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
는 집체질서의 내면화를 강제하는 사유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 대안이 될 3표의 철학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다만 첨가복합어를 쓰는 언어권(한국어를 쓰는 우랄알타이어계 포함)에서 나오리라는 기대가 담겼을 뿐이다.
왜 그럴까.
첨가복합어는 굴절어와 달리 임자말이 생략된다.
또 고립어와 달리 임자말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풀이말이 먼저고 임자말은 나중에 따라붙는 식이다.
이런 언어권의 사유방식에선 주체가 아니라 사태 자체가 중요하다.
인공의 도시성벽 저 너머에서 압도적 힘으로 도래하는 미지의 것(진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도시문명 밖'야생의 사유'에 가깝다.
이런 야생의 사유는'해답의 논리'가 아니라'물음의 논리'에 입각한다고 박 교수는 주장한다.
문명의 사유는 폐쇄적인 도시문명 내부의 문제 해결을 위해 완성된 해답을 추구한다.
동일성의 논리(1표)나 반구의 논리(2표)도 결국 그렇게 해답을 찾는 논리다.
반면 "야생의 사유는'인간의 척도'로서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미지의 것에 대한 원시적이고 원초적 질문을 던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중심적 철학을 뛰어넘을 것을 주장한'안티호모에렉투스'가 발표되고 15년 만인 올해'χ의 존재론'이 발표
됐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가능성으로만 제시됐던 3표의 철학이 χ의 존재론으로 완성됐다고 생각했다.
기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체성을 대표하는 임자말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유동성을 대표하는 풀이말들이 사태 판단의 주축을 이루는 계통에
소속하는 사람들에게는, χ의 존재론 또는 그에 따르는 자아 개념이나 세계관을 포용할 수 있는 토대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χ의 존재론' 141쪽)
"한국말에서 많은 경우에 생략해도 괜찮은 임자말 자리에 상정되어 있는 존재 χ는, 그 자신에게 매겨지는 무한 변이가
가능한 마디들의 조합 곧 풀이말 χ에 의해 묘사된다."(같은 책 346~347쪽)
하지만 박 교수는 e메일 인터뷰를 통해 "χ의 존재론은 3표의 철학이 아니다"고 못 박았다.
"3표의 세계관에서 χ의 존재론으로 발전하면서 조금씩'언어결정론'으로 비칠 수 있는 부분을 경계할 필요를 감지하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3표의 세계관이나 χ의 존재론을 제시하기 위하여 반드시 한국말본이 소속하는 언어계통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3표의 철학은 χ의 존재론으로 비약하는 데 필요한 발판이나 사다리 정도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결과 χ의 존재론은'인간의 척도'에 맞춰진 일상언어로서 제2언어가 아니라'우주의 척도'를 따르는 제1언어에
입각한 철학으로 탄생하게 된다.
3표의 철학이 제2언어에 입각한 철학이라면 χ의 존재론은 제1언어에 입각한 철학으로 차별화되는 것이다.
장자는 말했다.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고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를 잊으라(得魚忘筌 得兎忘蹄).
이제 3표론은 잊고 χ의 존재론에만 집중해보자.
먼저 χ는 무엇을 말하는가.
서양철학사를 배울 때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아니다.
탈레스나 파르메니데스도 아니다. 고르기아스다.
서양철학사의 불멸의 화두가 된 그의 3불가론 때문이다.
첫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존재한다 해도 알 수가 없다.
셋째, 안다 해도 그걸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없다.
이는 각각 존재론(형이상학), 인식론, 언어론으로 진화해가는 서양철학사의 흐름과도 맞물려 있다.
χ는 이 모두를 아우르는 미지의 존재다.
분명 존재하지만 알 수가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그 무엇.
그래서 χ는 철학의 선각들이 말한 그 모두가 될 수도 있다.
노자의 도(道), 파르메니데스의 일자(一者), 플라톤의 이데아, 칸트의 물자체(物自體)….
하지만 이들 개념이 "미지의 영토에 조용히 머물러 있다"면 박동환의 χ는 "현상계 또는 현재라는 삶과 운명의 격전
지대로 뛰어나와 종횡무진으로 움직인다"는 차별성을 지닌다.
그래서 박동환의 χ는 그런 자의적, 상대적 이름이나 개념으로 수렴되거나 환원되기를 거부한다.
이렇게 말하면 노자가 말한'도를 도라고 말하면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可道)를 또 다른 기호로 담아낸 것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χ의 존재론은 χ라는 하나의 기호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기호와 연관관계를 통해 수십억 년의 우주적 시간과 공간의
원리를 담아낸다.
바로 ¬χ와 Χ()다.
χ는 박동환의 표현에 따르면 "영원의 흐름을 타고 항상 현재 안에 침묵으로써 움직이는 기억으로 들어와 있고,
다시 불확실한 미래에 참여하는 존재로서 내재하며, 동시에 자신을 지양하며 초월하는 운명의 메신저"다.
이를 인간의 척도로 이해하기 쉽게 기자가 바꿔 말한다면 "130억 년 전 우주가 탄생할 때 생긴 원자를 통해,
또 수백만 년에 걸쳐 이어져온 유전정보가 기록된 DNA를 통해 내 몸에 새겨져 있지만 내 자신은 알지 못하는 그 무엇
이자 미래의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발현하게 될지도 모를 그 무엇"이다.
Χ()는 Χ(χ&¬χ)를 생략한 표현이다.
여기서 Χ는 개체적 독립변수 χ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저항 불가능한 힘으로 χ를 강제할 수 있는 초월적 독립변수를
뜻한다.
따라서 ¬χ가 χ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내재적 몸부림이라면 Χ()는 χ와 ¬χ의 외부에서 쳐들어와 χ와 ¬χ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초월적 작용을 뜻한다.
한계격파 또는 한계초월이라고 표현된다. Χ()의 극명한 예로는 화산폭발과 지진, 소행성 충돌에 의한 대멸종,
돌연변이, 대제국의 침공이 있다.
누구도 면할 수 없는 죽음도 이에 속한다.
χ의 존재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개체생명의 일생을 요약하는 관계식으로 표출된다.
영원의 한 단위 기억체계인 χ로 시작해서 그 스스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상상의 파격으로서 ¬χ를 모색하다가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초월적 힘 Χ()에 압도된 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는 생명체가 출현해 모든 가능한 파격의 변이를 연출하다가 멸종에 이르는 과정에도 적용될 수 있다.
빅뱅이라는 격파의 경험 Χ()에서 그 영원의 기억의 일단을 간직한 χ가 탄생하고, 상상의 파격 ¬χ로 다채로운 전개가
펼쳐지는 우주론에도 적용가능하다.
도가도상가도(道可道常可道)의 경지가 펼쳐지는 셈이다.
저항의 χ, 예수의 χ
철학은 크게 존재론-인식론-실천론의 3가지 범주로 구별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χ의 존재론에는 존재론적 차원과 인식론적 차원이 교차한다.
그렇다면 실천론은 어디에 있을까.
χ의 존재론에서 χ가 미미해 보이는 것들, 가에로 밀려난 것들을 통해 출현한다는 점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미미하게 보이는 것들, 무시해도 괜찮을 만한 것들, 아니면 버거워서 외면해버린 것들, 그래서 가에로 밀려난 미지의
것들이 불변의 토대라는 실체 또는 주체라는 자아의 안과 밖에서 뜻밖의 반전과 파국의 계기를 일으키며 운명과
우주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왜 그러한가.
어떻게든 χ를 포획해 통제가능하고 예측가능하게 만들고자하는 기성 철학의 시도가 패권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우주적 척도를 따르는 미지의 것(the unknown)을 사냥해 인간적 척도를 따르는 기지의 것(the known)으로 길들이려다
보니 어느 순간 반전과 파국이 도래하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그 누구도 영원으로부터 비롯하는 유일 고유한 존재 χ를 임의로 정의하거나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원리가 도출된다.
박 교수는 이를'삼켜도 삼키는 자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로 풀어낸다.
어린 살모사가 제 몸 크기에 버금가는 지네를 삼켰다가 그 지네에 의해 내장이 모두 먹히면서 오히려 먹이가 되어
버리듯 χ가 다른 χ를 규정하거나 통제하려는 것이 큰 화를 부른다는 설명이다.
이는 허먼 멜빌의 소설'모비 딕'과 극적으로 공명한다.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게 유희와 파격을 즐기는 미지의 흰 고래 모비 딕을 사냥하려다 결국 모비 딕에 의해 격파되고
마는 피쿼드 호의 비극적 운명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목도하고 증언하는 이가'신으로부터 버려져 가에로 밀려난 자'를 뜻하는 이슈마엘이라는 점도.
χ라는 기호에 담긴 부정과 저항의 메시지는 반평생에 걸쳐 공부한 기성 철학이란 것이 결국 패권의 철학에 불과하더
라는 박 교수의 비판과 궤를 같이한다.
"사람들은 두 손을 χ모양으로 교차해서'아니다' 또는'거부'의 의사를 나타내기도 한다.
χ의 모양은 서로 부정하는 두 가지가 한 점에서 만나고 있음을 그리고 있다.
말하자면 이미 실현되어 있는 어떤 것을 대체하는 새로운 대안을 χ의 모양으로써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기자가 보기에 χ에는 한 가지 중요한 함의가 하나 더 숨어 있다.
기독교적 통찰에 대한 긍정의 메시지다.
박 교수는 책에서 그 어떤 철학서보다도 기독교 성경의'전도서'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또 한계격파 또는 한계초월의 개념을 설명할 때 카를 바르트의 신학을 즐겨 인용한다.
박 교수는 이에 대해 "세상에서 말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온건한 예수주의자로서 나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고 답
했다.
크리스마스를 요즘도'X mas'로 표기하듯 알파벳 X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 기호이기도 하다.
권재현의 심중일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