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부모인들 아니 그렇겠느냐만,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아이 둘이 있다. 두 아이 모두 미국에서 지낸다. 바다 건너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까닭이다. 큰아이는 이태 전 짝지와 이미 가족을 이뤄 잘 살고 있다. 작은 아이는 지난 연말, 낙향하여 지역살이 중인 이곳 포구의 작은 성당에서 가톨릭 예법에 따른 혼배(관면)를 올렸다. 다음 달 4월, 미국에서 속세의 예식을 치른다. 두 아이 공히 자신들의 삶을 자신들의 의지대로 소신껏 꾸려가고 있다. 우리 부부는 어미아비로서의 책무를 나름 무사히 완수(?)했노라 자평하고 있다. 무탈하게 성장하여 꿋꿋하게 생을 개척해 가는 아이들이 대견하고 고맙기만 하다.
지난주엔 마눌과 함께 둘째 혼례식 때 입을 옷을 장만했다. 마눌은 안사돈들끼리 입을 한복을 오로지 자신의 감각만으로 색깔과 디자인, 소재 등 일체를 결정하고는 한복집에 맡겼었다. 마눌 것은 분홍색, 사돈 것은 푸른색 계열로 선택했더랬다. 원하는 한복을 제대로 마련할 수 없는 미국 현지 사정을 감안한 마눌의 자연스럽고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완성된 것을 보고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눈치다. 마눌은 이를 사진으로 찍어 둘째에게 보내거는 안사돈(시어머니)께도 잘 전달해 드리라고 당부했다. 둘째는 이내 시어머니의 회신을 대신 보내왔다. 감사하다고. 한복이 '폭싹' 예쁘다고. ‘알흠다운‘ 사돈지간이다.
친정 엄니(좌)&시엄니 한복
2025년 3월(봄), <폭. 속>에 대한 세간의 뜨거운 관심이 식을 줄을 모른다. 소셜미디어 세상에서는 정치의 계절(탄핵)을 몰아낼 정도로 화제성이 압도적이다. 곳곳의 안타까운 산불 소식도 그닥 오래가지 않는 듯하다. 지난 주말 새롭게 올라온 3막 4개 에피소드도 마찬가지다. 한방에 정주행 했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내게는 이 중 제11화 <내 사랑 내 곁에>가 단연 눈에 들어온다. '영범'의 어머니 '윤부용'(강명주 분)이 금명의 가족과 왕짜증나는 갈등을 유발한다. 쌍욕이 튀어나올만한 싸가지 없는 시어미 역을 어쩌면 저리도 잘 펼쳐내는지. 한복집에서 오애순이 입을 한복 색깔을 고르는 중에 보이는 영범母의 작태(?)는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분홍은 촌스럽다며 사돈 될 애순에게 팥죽색을 고르라고 ‘명령’한다.
"아니, 저런 저... 저런 못된 여편네가!"
드라마를 보며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나도 별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버럭 한지거리 튀어나왔다.
예비 시엄니 윤부용(강명주).
금명(아이유)에게 제대로 된 집(가진자)에서 자란 아이가 꼬인 데도 없다고 대놓고 말하는 장면.
영범母 윤부용의 늙어가는 모습이 절묘한 시간 오버랩핑으로 이어지는데 드라마 속 칠십 중반은 좋이 넘었을 윤부용은 중년이 된 아들 영범에게 절규하듯 날카롭게 원망을 쏟아낸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나를 어떻게 이렇게... 너는 내 인생이야!"
사람의 성정은 제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마음을 바꾸고 변화하기란 그만큼 어려운 법이다. 작가와 감독은 윤부용을 그런 캐릭터로 그려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 속, 보석같이 빛나는 조연 그룹에 이름 하나 더 얹는다. 강. 명. 주.*1)
그리스도교의 '회개'는 흔히 '죄를 뉘우친다'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영어로는 Repentance. 그리스어 원어로는 '메타노이어'라고 한단다. 메타(~넘어, 변화)와 노이어(마음, 생각)의 합성어. '죄를 뉘우친다' 보다는 '마음을 달리 먹는다', '생각을 전환하다'라는 의미다. 죄를 멀리하고 하늘의 이치로 돌아서는 내적 변화를 꾀하는 것을 이른다 하겠다. 따라서 회개보다는 '회심(回心)'이 원어의 뜻에 더 가깝다.
한자어 이력서(履歷書)의 '이력'은 신발(이)이 거쳐온(력) 자욱을 뜻한다. 영어로는 Resume. 프랑스어에서 유래되었고 라틴어 Resumere를 어원으로 한다. Resumere는 '다시 잡다', '다시 시작하다'라는 뜻이라고. 과거를 깨끗이 정리하고 새로 시작한다라는 의미를 지닌다고도 볼 수 있겠다. 언어의 묘미란.
성경의 '탈출기(Exodus)'에는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스스로 있는 나(I am Who am)'인 불꽃 야훼*2) 하느님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탈출기 3,1-15) 이때 야훼는 모세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면서 '네가 서 있는 곳은 신성한 땅(holly ground)이니 네 발에서 신(sandal)을 벗어라'라고 명한다.
'신을 벗어라'
어제 미사에서 이기섭(요셉) 신부는 '이력서'의 뜻을 설명한 후 '신을 벗어라'라는 야훼의 명령을 '네 이력을 지우고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어라'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회개'의 원어인 메타노이어의 뜻풀이와 함께. 신박하구나.
미사 속의 예수는 복음에서 포도나무 밭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라는 주인과 1년 동안 거름을 주며 잘 가꾸어 보겠다, 베어내더라도 1년 후에 결과를 보고 베어내게 해 달라는 재배인의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회심하기까지는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뜻일진대, 요셉 신부는 이를 ‘(건강한)관계의 회복‘으로 규정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의 죄는 크다.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노력이 필요하고 성령으로 그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그 열매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다.(갈라티아 5,22)
<폭. 속>의 윤부용의 끝은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하다.
덧.
1) 배우 강명주(가톨릭 세례명: 효주아녜스)가 궁금하여 서치를 하다 알게 된 슬픈 사연. <폭. 속> 개봉 직전인 지난 2월, 지병인 유방암으로 선종, 작고했다. <폭. 속>이 유작이 된 셈이다. 배우자(박윤희)와 딸(박세영)도 모두 배우인 연기자 가족이다. 남편인 박윤희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강명주와 함께 판사로 출연했다. 부부가 같은 작품에서 모두 판사 역을 맡은 기록을 갖고 있다. 고퀄 연기자 한 명을 잃었다. 고인의 안식과 명복을 빈다.
영정 속의 강명주
2) 감히 하느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던 당시 유대인들에게 신(God)이 자신의 이름을 '야훼(YHWH, 히브리어에는 모음이 없다.)'라고 일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영어로 '야훼'는 LORD로 표현한다. 모두 대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