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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로써 세우지 않는다는 뜻으로, 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지, 문자나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不 : 아니 불(一/3)
立 : 설 립(立/0)
文 : 글월 문(文/0)
字 : 글자 자(子/0)
(유의어)
교외별전(敎外別傳)
심심상인(心心相印)
염화미소(拈華微笑)
염화시중(拈華示衆)
이심전심(以心傳心)
문자(文字)에 의하여 교(敎)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심전심(以心傳心)과 함께 선종(禪宗)의 처지를 나타내는 표어이다.
오도(悟道)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므로, 따로 언어(言語), 문자(文字)를 세워 말하지 않는 데 참 뜻이 있다고 한다. 이 말은 이심전심과 함께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 경에 걸쳐 중국의 선종(禪宗)에서 성립된 말로 추정된다.
고등학교 때 국어시간에 배우는 경우가 많고, 시험 문제에도 단골로 출제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어사전의 뜻풀이를 보면 문자나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라고 되어 있는데, 틀린 풀이는 아니지만 정확하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불립문자의 문자는 일반적인 문자나 말을 뜻하기 보다는, 불경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자는 문자 그대로 문자, 그러니까 말이 아니라 글로 기록되어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 즉 불경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좋다.
여하튼, 불립문자라는 말을 대할 때 무척 조심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불립문자는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그러니까 문자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뜻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문자를 세우지 말라고 했다면 팔만대장경의 그 무수한 문자는 또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불립문자는 어디까지나 문자에만 의지하지 말라 또는 문자에만 머무르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문자를 세우지 말라, 문자에 의지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에게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문자의 미로 속을 신물이 나게 돌아다녀 보지 않으면 안되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불경에는 부처의 가르침이 담겨져 있다. 때문에 부처의 가르침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수 천년이 지난 지금의 사람들이 깨닫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문자, 그러니까 불경을 공부하는 것은 필수불가결의 사항일 것이다. 오히려 가능한 한 열심히 제대로 불경을 공부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 한계도 분명하다. 불경 공부만으로, 그러니까 문자를 통해서만이 부처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고 더 나아가 부처가 될 수도 있다면, 명문 S대 합격생들이야말로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역시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체험이다. 불경의 그 무수한 문자들이 하루하루 부대끼며 울고 웃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기뻐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과 만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도로아미타불이 아니겠는가!
기독교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말씀만이 아니라 사랑, 그러니까 성경에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하느님의 가르침만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
이 경우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폄하하는 뜻이 전혀 없음은 물론이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이루는 셈이라고나 할까.
가르침을 전하거나 가르침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누구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대부분 말이나 글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대부분 그렇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가르치는 사람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것들이 아니다.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그저 책에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사항을 학생들보다 먼저, 많이 배웠다는 죄(?)로, 기록되어 있는 사항을 정리하여 전달하는 정도에 머무르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문자를 매개로 전달할 수 없는 것, 그러니까 몸소 모범을 보이는 것이리라.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들의 가치를 폄하해서는 곤란하다.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사람이 사는데 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문자에만, 불경에만 의지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문자, 불경만으로 성불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불립문자는 '말이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는 뜻에 가깝다.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 가깝다.
요컨대 섣불리 불립(不立)을 말하기 전에, 제대로 입(立) 해보았는지 돌이켜 볼 일이다. 문자로 적혀 있는 가르침을 익히는데 게으르기만 한 자신의 허물을 '불립문자'라는 편한 말 한 마디로 가리고자 하는 경우는 또 그 얼마나 많은지...
禪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언어로서, 禪은 문자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는 깨달음의 경지는 문자로서는 다 표현할 수 없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어휘 하나만 놓고 본다면 앞과 같은 뜻이지만 이와 관련된 전체의 문장을 놓고 본다면 禪은 경전 외에 별도로 전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말은 그 뜻이 와전되어 ‘문자를 도외시하라’ ‘경전을 보지 말라’ ‘책을 읽지 말라’는 말로 둔갑해 버렸다. 언어는 때론 원뜻과는 달리 그 시대 사람들의 편의에 의해 변질되기도 한다. 언어는 그 시대상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는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그러니까 문자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뜻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문자를 세우지 말라고 했다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그 무수한 문자는 또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불립문자는 어디까지나 ‘문자에 만 의지하지 말라’ 또는 ‘문자에 만 머무르지 말라’는 의미이다.
교가(敎家)의 사람들이 경론의 문자와 교설만을 주로 하고 불교의 참 정신은 잃고 있다고 보고, 선가(禪家)에서는 참된 불법으로서의 정법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라 하고, 체험을 중요시하여 불립문자, 교외별전(敎外別傳) 또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선종(禪宗)을 중국에 전한 달마(達磨)에서 이미 나타났었다. 그러나 특별히 강조되었던 것은 당나라 때로서 선종(禪宗) 제6조 혜능(慧能) 아래의 남종선(南宗禪)에서 였다. 흔히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말과 함께 쓰인다.
불립문자란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보편적 명제의 형태로 정언을 세우지 않는다는 입장의 표방이며, 따라서 경전의 문구에 대해서는 형식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운 태도를 취한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경전의 가르침과는 별도로 특수하게 전수된 것이 있음을 말하며, 경전에 절대적 가치나 의의를 부여하지 않는 입장의 표방이다.
교종(敎宗)이 경론의 문자나 교설만을 위주로 공부함으로써 불교의 참정신을 잃고 있다고 보아, 선종(禪宗)에서는 부처의 진정한 진리로서의 정법은 단순히 어구나 문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라는 체험을 중시하여 불립문자. 교외별전을 주장했다.
이 정신은 중국 선종(禪宗)의 개조인 보리달마에게도 보이지만, 제6조 혜능(慧能)으로부터 번성한 남종선(南宗禪)에서 특히 강조되었다.
한편 이 정신의 경전적 근거는 능가경(楞伽經)에서 발견된다. 여기서는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천명하고 있다. 문자에 따라 의미를 해석하지 말라. 진실은 자구에 묶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주시하는 사람처럼 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손가락으로 뭔가를 가리키자, 그 사람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상을 보지 않고 오로지 손가락 끝만 응시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또한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라는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의미를 무시하고 문자 그대로의 번역으로 이루어진 그 손가락 끝에 집착한 채 인생을 마감하는 어리석은 속물이나 어린애와 같아서, 결코 보다 깊은 의미에 이르지 못한다.
또 부처는 성도 이후 입멸할 때까지 한 마디도 說하지 않았다고 하는 입능가경(入楞伽經) 권5의 언급도 불립문자의 근거로서 주목된다.
능가경(楞伽經)의 3종 한역본 중에서도 선종(禪宗)과 관계가 깊은 것은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번역의 4권본 능가경인데, 여기서 ‘부처의 말씀은 마음이다’라고 說하는 것과 같은 경문(經文)도 불립문자(不立文字)로 표방되는 선종(禪宗)의 정신과 상통(相通)한다.
그러나 전설적(傳說的)으로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전통(傳統)을 염화시중(拈華示衆)이라는 일화(逸話)에서 찾기도 한다. 어느 설법(說法) 자리에서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연꽃 한 송이를 들고 침묵(沈黙)하고 있을 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으나, 십대제자(十代弟子)의 한 사람인 가섭(迦葉)만이 그 뜻을 알고 미소(微笑)지었다.
그래서 석가모니(釋迦牟尼)는 가섭(迦葉)에게 자신이 죽은 이후 정법(正法)을 후대(後代)에 전하도록 부탁했다. 어느 날 역시 십대제자인 아난(阿難)이 부처가 전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가섭(迦葉)은“가서 깃대를 내려라”라고 답했다. 사원(寺院)밖에 깃대를 내리라는 말은 언설(言說)을 집어치우라는 뜻이다. 이런 전설(傳說)에 유래(由來)하여 선종(禪宗)에서는 가섭(迦葉)을 인도로부터의 초대(初代) 조사(祖師)로 간주한다. 이렇게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중국(中國)의 선(禪:남종선)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가르침을 전하는 사제(師弟) 관계를 중시(重視)하게 되었다.
한국(韓國)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정신은 신라(新羅) 하대 최치원(崔致遠)과 지선(智詵) 등의 언급(言及)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당시 교종(敎宗)을 습관존신지법(習觀存神之法)이라고 비판(批判)하면서 교종(敎宗)의 한계(限界)로 관념화(觀念化).미신화(迷信化).세속화(世俗化).체제지향(體制指向) 등을 들었다.
따라서 이들은 각 개인의 지성(知性)을 중시하고 구체적(具體的)인 실천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과 함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며 선종(禪宗)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고려(高麗) 중기 이후 대가들의 유명한 언행(言行)을 공안(公案) 또는 화두(話頭)로 삼아 수행하는 간화선(看話禪)이 유행하게 되어, 오히려 언어나 문자에 얽매이는 듯한 역설적(逆說的) 현상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공안(公案)의 취의(取義)도 언어·문자의 허구(虛構)를 깨뜨리는 데에 있고 보면, 선종(禪宗)이 표방한 불립문자(不立文字)는 언어·문자의 가치를 전면적(全面的)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집착(執着)을 타파(打破)하는 것이었다.
불립문자(不立文子)는 이심전심(以心傳心)과 더불어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전반경에 중국의 선종(禪宗)에서 만들어진 말로 추정(推定)한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말 그대로 풀어 보면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뜻이다. 문자가 건축물(建築物)도 아닌데, 세우지 말라니 불교(佛敎)라는 문맥(門脈) 안에서 살펴 본다면 불립문자(不立文字)안의 문자는 단순한 말이 아닌 불경(佛經)을 가리킨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말만 놓고 본다면 불립문자(不立文字)란 바로 부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지 말라.(세우지 말라)라는 불경(佛經)스러운 뜻이다.
불교(佛敎)에 처음 입문(入門)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사람이 부처님과 같은 강인한 정신력과 세상의 만물을 꿰뚫어 보는 혜안(慧眼)을 가지지 않았다면, 이 사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불경(佛經) 읽기다. 즉, 알아야 면장(面長)을 한다는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문자를 통해서 어느 정도 수행의 경지에 도달하면, 더 이상 문자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따라서 이 때가 바로 문자를 버려야 하는 순간이다. 즉,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순간인 것이다.
이런 배움과 깨달음의 순환(循環)은 불교(佛敎)라는 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言語)의 집 속에 사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학습(學習) 사이클이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불립문자(不立文字)가 뜻하는 바는 문자의 무용론(無用論)이 아니다. 즉,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문자, 불경에 통달(通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순간이 달리는 행위라면, 달리기 위해서 걷는 방법을 먼저 배워야 하듯이, 걷는 방법인 불경에 통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울러서 불립문자(不立文字)는 문자에 매몰(埋沒)되는 일을 경계(警戒)하라는 의미(意味)도 담는다.
문자(文字)는 깨달음이 아니다. 언어(言語)는 존재가 아니다. 문자는 일종의 깨달음과 존재를 나타내는 허상(虛像)이다. 물론 존재와 깨달음에 다가가기 위해서 문자가 필요하지만, 진정한 본질에 다가서기 위해서 문자가 장애물(障碍物)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를 앞세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비유(比喩)컨대 선(禪)의 본질(本質)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생명의 맞닿음이다. 그것은 불필요(不必要)하다는 것이 아니라, 글과 말에는 한계(限界)가 있으며, 그것만으로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다른 무엇이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선(禪)에 관한 책(冊)들이 많이 씌어지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느 불교학자(佛敎學者)는 역설적(逆說的)으로‘불립문자(不立文字)가 무엇인지 설명(說明)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글자가 동원(動員)되고 있다'고 했다.’일리가 있는 말이다.
어느 노선사(老禪師)는 이렇게 말했다. “설명을 듣거나 의미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본질을 먼저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나서 그 의(義)를 생각해야 한다.”
글자를 글자로만 읽으면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중생(衆生)이 본래 부처이며, 만물에 부처님의 생명이 깃을여 있다는 실유불성(悉有佛性)의 참된 의미를 파악한 뒤에 언어나 문자에 접해야 정확하게 이해(理解)할 수 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두고 어느 선사(禪師)는 “하늘이 어찌 무심할 수 있겠는가. 네 계절이 바뀌며 운행하는 사이에 만물은 생겨난다”고 전제하면서, “소리도 기(氣)도 없이 언제나 천지(天地)는 글자 없는 경전(經典)을 펴쳐 보인다”고 읊고 있다.
이에 덧붙여 그는 “석가(釋迦)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인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천지간(天地間)의 진리(眞理)가 바로 이것이라면서 마음의 눈을 열고 보라”고 권(勸)하고 있다.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진실(眞實)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꽃이 빨갛고 잎사귀가 푸른 것 그대로가 진실이므로 따로이 말할 필요가 없다. 새도 꽃도 바위나 풀도 존재(存在)하는 그대로 우리 앞에 현현(顯現)한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이 그들과 접하게 되면 자연히 시(詩)가 되고 노래가 되고 그림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시(詩)나 노래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꽃이나 새가 우리 마음속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내어 꽃과 새를 표현(表現)하게 된다.
사람의 말이란 그 자체(自體)로 본질적(本質的)인 존재가 아니기에 있는 그대로의 존재 형상을 그대로 표현해 낼 수 없다.
꽃은 말없이 피어난다. 그 말없음 속에서 인간(人間)은 뭔가를 느낀다. 그야말로 유마경(維摩經)에서 진리(眞理)를 앞에 두고 묵연히 앉은 유마거사(維摩居士)의 경지를 경리롭게 바라보면서 ‘침묵(沈黙)이 우레와 같다’고 고백(告白)하는 뭇 보살(菩薩)들처럼 말이다.
침묵(沈黙)이야말로 우레와 같은 거대한 음성(音聲)이라는 말은 위대한 가르침이다. 침묵(沈黙)이란 말이 없음이 아니라 진실 그 자체의 소리지만, 음계(音階)가 다르므로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이다. 이 경험에 투철해야 비로소 무언(無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한 수행자(修行者)가 산 속의 선사(禪師)를 찾아와서 선(禪)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선사(禪師)는 대답하기 전에 먼저 물었다. “자네가 이곳에 올 때 골짜기에서 개울을 건넜지?” 수행자가 “네, 건넜습니다.”
선사가 “그 개울의 물소리가 들렸나?” 수행자가 “네, 들렸습니다.” 선사가 “그럼, 그 개울물 소리가 들린 곳에서 선에 들어가게.” 개물물 소리를 듣는 것이 선(禪)의 첫걸음이다.
도원선사(道元禪師)는 법화경(法華經)을 읽고는 이렇게 읊었다. 봉우리의 색깔이며 개울물 소리 모두가 부처님의 목소리와 모습(模襲)이어라.
주위(周圍)에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을 인도하는 진리의 목소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선(禪)에서 얘기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이해하는 생활(生活)태도(態度)이다.
백은선사(白隱禪師)가 ‘한 손의 소리를 들으라’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한 손에서 소리가 날 리가 없다고 말하지 말고 가만히 들어보라. 반드시 한 손에서 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소리없는 소리를 들어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부적절(不適切), 부당한 일을 부당지사(不當之事),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부정부패(不正腐敗), 그 수를 알지 못한다는 부지기수(不知其數),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한다는 부달시변(不達時變) 등에 쓰인다.
▶️ 立(설 립/입, 자리 위)은 ❶상형문자로 사람이 대지 위에 서 있는 모습을 본 뜬 글자이다. 나중에 사람에 국한하지 않고 '서다', '세우다'의 뜻으로 쓴다. ❷상형문자로 立자는 '서다'나 '똑바로 서다', '임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立자의 갑골문을 보면 大(큰 대)자 아래로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이것은 땅 위에 서 있는 사람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立자는 '서다'나 '똑바로 서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지만, 땅을 딛고 당당히 서 있다는 의미에서 개인의 존재감이나 사물의 위치가 바로 세워져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다만 상용한자에서 立자가 부수로 쓰인 글자들은 대부분이 노예와 관련된 글자인 辛(매울 신)자가 생략된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에 주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立(립, 위)은 ①서다, 멈추어 서다 ②똑바로 서다 ③확고(確固)히 서다 ④이루어지다 ⑤정해지다 ⑥전해지다 ⑦임(臨)하다 ⑧즉위하다 ⑨존재하다 ⑩출사(出仕)하다 ⑪나타나다 ⑫세우다 ⑬곧, 즉시 ⑭낟알(껍질을 벗기지 아니한 곡식의 알) ⑮닢(납작한 물건을 세는 단위) ⑯리터(ℓ)의 약호(略號) ⑰바로 그리고 ⓐ자리(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펼 전(展), 세울 건(建), 필 발(發), 세울 수(竪), 일어날 기(起), 일 흥(興)이다. 용례로는 처하여 있는 사정이나 형편을 입장(立場), 법률 또는 법규를 제정함을 입법(立法), 어떤 사물이나 견해나 조건을 등에 근거를 두어 그 입장에 섬을 입각(立脚), 서서 타거나 구경하는 자리를 입석(立席), 사회에 나아가서 자기의 기반을 확립하여 출세함을 입신(立身), 식물이 생육하는 일정한 장소의 환경을 입지(立地), 나라를 세움을 입국(立國), 안건을 정하는 것 또는 그 안건을 입안(立案), 증인으로 서거나 세움을 입증(立證), 뜻을 세움을 입지(立志), 현장에 나가 지켜봄을 입회(立會), 어떤 원인으로 어느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길이 막히거나 끊어지거나 하여 그곳을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고립(孤立), 남의 힘을 입지 않고 홀로 섬을 독립(獨立), 시설이나 법인 등 공적인 기관을 만듦을 설립(設立), 마주 대하여 섬을 대립(對立), 확실히 정하거나 굳게 세움을 확립(確立), 스스로의 힘으로 생계를 유지함을 자립(自立), 생존하여 자립함을 존립(存立), 나라에서 세움을 국립(國立), 일어나서 섬을 기립(起立), 받들어서 임금의 자리 따위에 모시어 세움을 옹립(擁立), 절이나 탑 동상 따위를 세우거나 이룩함을 건립(建立), 바닷가나 강가를 메워서 뭍을 만드는 일을 매립(埋立),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함을 중립(中立), 서서 잠깐 이야기하는 사이의 뜻으로 잠깐 동안을 일컫는 말을 입담간(立談間),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출세하여 이름을 세상에 드날림 또는 후세에 이름을 떨쳐 부모를 영광되게 해 드리는 것을 이르는 말을 입신양명(立身揚名), 입춘을 맞이하여 길운을 기원하는 글을 일컫는 말을 입춘대길(立春大吉), 성공하여 세상에 이름이 드날림을 일컫는 말을 입신출세(立身出世), 그 자리에서 참수하여 무리의 본보기로 경계함을 일컫는 말을 입참이순(立斬以徇), 중립을 취하여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중립불의(中立不倚), 오래 서 있어도 의용을 갖추어 자세를 흐트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입불실용(立不失容), 송곳 하나 세울 만한 땅이라는 뜻으로 얼마 안 되는 땅을 이르는 말이나 매우 좁아서 조금도 여유가 없음을 일컫는 말을 입추지지(立錐之地) 등에 쓰인다.
▶️ 文(글월 문)은 ❶상형문자로 攵(문)의 본자(本字)이다. 사람 몸에 ×모양이나 心(심)자 꼴의 문신(文身)을 한 모양이다. 살갗에 바늘로 찔러 먹물이나 물감 등으로 글씨나 그림이나 무늬를 들이는 것을 문신이라 하고, 형벌로서 하는 수도 있지만 축하(祝賀)하는 표로도 하였다. 나중에 '무늬', '글자', '학문', '문화' 따위의 뜻에 쓰였다. ❷상형문자로 文자는 '글'이나 '문장'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文자는 양팔을 크게 벌린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文자의 갑골문을 보면 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의 가슴에 어떠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몸에 새긴 '문신'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文자의 본래 의미는 '몸에 새기다'였다. 그러나 文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문서'나 '서적'과 같이 글을 새겨 넣은 것과 관련된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文자가 이렇게 글자나 서적과 관계된 뜻으로 쓰이게 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糸(실 사)자를 더한 紋(무늬 문)자가 '무늬'라는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文자는 부수로 지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상용한자에서는 관련된 글자가 없다. 그래서 文(문)은 (1)문장(文章) (2)무(武)에 대하여 학문, 학예, 문학, 예술 등을 이르는 말 (3)어떤 명사 아래에 쓰이어 문서, 문장(글)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4)신발의 치수의 단위 (5)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글월, 문장(文章) ②어구(語句; 말의 마디나 구절), 글 ③글자 ④문서(文書) ⑤서적(書籍), 책 ⑥문체(文體)의 한 가지 ⑦채색(彩色), 빛깔 ⑧무늬 ⑨학문(學問)이나 예술(藝術) ⑩법도(法道), 예의(禮義) ⑪조리(條理) ⑫현상(現狀) ⑬산문(散文) ⑭결, 나뭇결 ⑮얼룩, 반점(半點) ⑯돈의 한 가지, 그 돈의 개수를 나타내는 말 ⑰신발의 치수의 단위 ⑱아름다운 외관(外觀) ⑲주문왕의 약칭(略稱) ⑳빛나다, 화려하다 ㉑아름답다, 선미(鮮美)하다 ㉒몸에 새기다 ㉓꾸미다 ㉔입묵(入墨)하다, 자자(刺字)하다 ㉕어지러워지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책 책(冊), 글 서(書), 글 장(章), 문서 적(籍),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호반 무(武), 말씀 언(言)이다. 용례로는 생각이나 느낌이나 사상 등을 글로 표현한 것을 문장(文章), 글자나 숫자 따위로 일정한 뜻을 나타낸 것을 문서(文書), 공적인 성격을 띤 문서나 서류를 문건(文件), 좋은 글을 가려서 뽑음을 문선(文選), 옛날의 제도나 문물을 아는 데에 증거로 되는 기록이나 서적을 문헌(文獻), 글의 성분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문맥(文脈), 글의 구절을 문구(文句), 글을 짜고 꾸미는 법칙을 문법(文法), 글을 볼 줄도 쓸 줄도 모름을 문맹(文盲), 살갗을 바늘로 찔러 먹물이나 다른 물색을 넣음 또는 그렇게 만든 몸을 문신(文身), 한 사람의 시문을 모아서 엮은 책을 문집(文集), 서재에 꼭 있어야 할 네 벗 즉 종이와 붓과 벼루와 먹을 일컫는 말을 문방사우(文房四友), 전문식과 무략을 다 갖추고 있음을 이르는 말을 문무겸전(文武兼全), 문화의 모든 산물이 서로 오고 감을 일컫는 말을 문물교류(文物交流), 남의 글이나 저술을 베껴 마치 제가 지은 것처럼 써먹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문필도적(文筆盜賊), 허물도 꾸미고 잘못도 꾸민다는 뜻으로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뉘우침도 없이 숨길 뿐 아니라 도리어 외면하고 도리어 잘난 체함을 일컫는 말을 문과식비(文過飾非), 까막눈인 사람들을 가르쳐 글 모르는 이가 없도록 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문맹퇴치(文盲退治), 문장이 썩 잘 되어서 한 점도 가필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아름다움을 이르는 말을 문불가점(文不加點), 문도 번거롭고 예도 번거롭다는 뜻으로 규칙이나 예절이나 절차 따위가 번거롭고 까다로움을 일컫는 말을 번문욕례(繁文縟禮), 가난한 사람은 농사 짓느라고 여가가 없어 다만 삼동에 학문을 닦는다는 뜻으로 자기를 겸손히 이르는 말을 삼동문사(三冬文史), 유교를 어지럽히는 도적이라는 뜻으로 교리에 어긋나는 언동으로 유교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사문난적(斯文亂賊), 어떤 일을 시작하기는 쉬우나 이룬 것을 지키기는 어렵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창업수문(創業守文), 용과 같이 위엄 있는 모양을 하고 있으나 실은 물고기라는 뜻으로 옳은 듯하나 실제는 그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어질용문(魚質龍文) 등에 쓰인다.
▶️ 字(글자 자)는 ❶형성문자로 갓머리(宀; 집, 집 안)部와 뜻을 나타내는 동시에 음(音)을 나타내는 아들자(子; 어린 아이)部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한 집안에 자손이 붇는 일을 말한다. 옛날에는 글자를 名(명) 또는 文(문)이라 알컫다가 진(秦) 나라의 시황제(始皇帝) 때 쯤부터 문자(文字)라는 말이 생겼다. 字(자)는 文(문자)과 文(문)이 합(合)하여 마치 사람의 가족이 붇듯이 계속하여 생기는 글자라는 뜻이다. 나중에는 글자 전부를 字(자)라 일컬었다. ❷회의문자로 字자는 '글자'나 '문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字자는 宀(집 면)자와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宀자는 지붕을 그린 것이기에 집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이렇게 집을 뜻하는 宀자에 子자가 결합한 字자는 '집에서 아이를 기른다'는 뜻으로 만들어졌었다. 字자에 아직도 '기르다'나 '양육하다'는 뜻이 남아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진시황 때부터 字자를 '글자'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문자(文字)'와 관련된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字(자)는 (1)글자 (2)글자의 뜻으로, 그 수효(數爻)를 나타내는 말 (3)사람의 이름을 소중히 여겨 본 이름 외에 부르기 위하여 짓는 이름 흔히 장가든 뒤에 본이름 대신으로 부름 등의 뜻으로 ①글자, 문자(文字) ②자(字: 이름에 준하는 것) ③암컷 ④기르다, 양육하다 ⑤낳다 ⑥사랑하다 ⑦정혼(定婚)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글자의 음을 자음(字音), 활자를 부어 만드는 원형을 자형(字形), 표의 문자에서 글자의 뜻을 자의(字義), 많은 한자를 모아 낱낱이 그 뜻을 풀어놓은 책을 자전(字典), 글자와 글귀를 자구(字句), 글자의 근본 원리를 자학(字學), 글자의 새김을 자훈(字訓), 글자가 구성된 근원을 자원(字源), 영화에서 표제나 배역이나 설명 따위를 글자로 나타낸 것을 자막(字幕), 글자를 쓰는 법칙을 자격(字格), 글자와 글자 사이를 자간(字間), 글자의 모양을 자체(字體), 글자의 수효를 자수(字數), 활자의 대소를 나타내는 번호를 자호(字號), 수지 결산에서 지출이 수입보다 많은 일을 적자(赤字), 중국어를 표기하는 문자를 한자(漢字), 수를 나타내는 글자를 숫자(數字), 같은 문자를 동자(同字), 세간에서 두루 쓰이는 문자로서 정식의 자체가 아닌 한자를 속자(俗字),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옛 글자를 고자(古字), 한문 글자의 획수가 많은 것을 쉽게 줄여서 쓰는 글자를 약자(略字), 잘못 쓰이고 있는 글자를 와자(譌字), 둘 이상의 글자를 모아서 만든 글자를 합자(合字), 낱자를 늘어놓은 차례를 자모순(字母順), 수령을 달리 일컫는 말을 자목지임(字牧之任), 글자를 아는 것이 오히려 근심이 된다는 뜻으로 알기는 알아도 똑바로 잘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지식이 오히려 걱정거리가 됨을 이르는 말을 식자우환(識字憂患), 한 글자도 알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일자무식(一字無識), 발음은 같으나 글자가 다름 또는 그 글자를 일컫는 말을 동음이자(同音異字), 한 글자의 값어치가 천금이다는 뜻으로 지극히 가치 있는 문장을 말함 또는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과 맥이 통함을 일컫는 말을 일자천금(一字千金), 큰 글자로 뚜렷이 드러나게 쓰다라는 뜻으로 누구나 알게 크게 여론화함을 이르는 말을 대자특서(大字特書), 미인의 고운 눈썹을 비유 형용하는 말을 팔자춘산(八字春山), 글씨를 쓰다가 그릇 쓰거나 글자를 빠뜨리고 씀 또는 그러한 글자를 일컫는 말을 오서낙자(誤書落字), 주견이 없이 남의 말을 좇아 이리저리 함을 이르는 말을 녹비왈자(鹿皮曰字), 글씨에 능한 사람은 정신을 들이지 아니하고 붓을 던져도 글씨가 잘 된다는 말을 투필성자(投筆成字), 한 글자를 가르친 스승이라는 뜻으로 시나 문장의 한 글자를 바로잡아 주어 명문이 되게 해준 사람을 존경해 이르는 말을 일자지사(一字之師), 팔자에 의해 운명적으로 겪는 바를 일컫는 말을 팔자소관(八字所關)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