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32
11월2일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연중 제3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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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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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GXt7XBIC4K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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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죽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위령의 날은 먼저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사실 아직 이 땅 위에 남아있는 우리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먼저 떠난 이들은 남아있는 우리를 향해 무언의 외침을 건넵니다.
“오늘은 내 차례요, 내일은 네 차례!”
우리 역시 떠날 날들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으니, 이왕이면 좀 더 충만하게, 좀 더 열정적으로, 좀 더 기쁘게 이 세상을 살다 오라는 먼저 떠난 분들의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마치 불꽃놀이 불꽃처럼 순식간에 하루가 소진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도 그렇게 순식간에, 섬광처럼 다가오고 사라질 것입니다.
관건은 순간순간을 하릴없이, 영양가 없이 보낼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게 계획하고 구성해야겠습니다. 며칠 전부터 저는 자기 전에 작은 노트에 내일 꼭 처리해야 할 사소한 일들을 순서대로 메모합니다. 어떤 날은 한 페이지가 꽉 차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들이 엄청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더 알차게, 더 계획적으로, 더 충만하게 엮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 숱한 날들을 선물로 주시면서 바라시는 바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다가 당신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 인간적인 행복도 포함되겠지만, 궁극적으로 영적인 행복이요, 주님 안에서 행복입니다. 산상 수훈을 통해서 강조하시는 바로 그 행복입니다.
죽음은 사실 우리의 삶 속에 이미 스며들어있습니다. 또한 삶이란 것도 죽음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삶과 죽음은 항상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미 ‘작은 죽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일선에서의 물러남, 질병, 노화, 소외, 실패, 고독... 우리는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안에 실재하는 다양한 죽음의 요소들을 대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살아있으면서도 매일 작은 죽음을 체험합니다. 결국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또한 삶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순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삶은 시시각각 죽음으로부터 위협받고 있기에 더욱 소중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반대로 죽음이 없다면 끝도 없이 반복될 죄와 악습, 병고와 고독...도대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죽음이 있어 기나긴 한 인간의 생이 정리되고 완성되니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요. 아리송하지만 결국 죽음 안에 삶이 있고 삶 안에 죽음이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도달했을 때, 우리들의 지난 삶은 어떻게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절대로 우리가 보낸 세월의 양으로 평가받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관건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하루하루를 얼마나 충만하고 의미 있게 살았는가가 중요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고 말합니다.
참 삶은 의미있는 삶, 가치있는 삶, 깨어있는 삶, 현재에 충실한 삶, 주님의 생명력으로 가득한 삶, 결국 사랑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하루하루가 그저 하루 삼시 세끼 섭취하고 연명하는 데 만족한 삶이 아니라, 하루하루 의미있고 충만한 삶으로 엮어가는 것, 축복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비결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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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z4KdmEJDD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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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나도 정화된다>
연옥 영혼들을 기억하며 기도를 드리는 오늘은 우리도 그들과 같은 운명임을 자각하고 이 세상에서부터 연옥벌을 면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배가시킵니다. 연옥의 아주 짧은 고통도 이 세상에서 받아야 할 고통을 합친 것보다 크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배워야 할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내 자신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줄 모른다면 사랑에서 오는 참다운 위로를 얻어 누릴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매여있습니다. 하지만 천국에서도 주님께서 나를 버리라고 강요하실 수 없으십니다. ‘나’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세상에서부터 나를 버리기로 한 사람은 불완전할지라도 천국에 들어올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제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다른 초등학교에서 온 한 여자아이가 너무 예뻐서 청소하면서도 그 아이만 쳐다보았습니다. 용기 있는 친구가 그 여자아이와 사귀며 영화도 보고 왔다고 말할 때 그저 부럽기만 했습니다. 삼 년 동안 말 한 번 붙여보지 못하고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에 가면 더는 보지 못할 것 같아서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편지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에게만 써서 소문이 나면 안 될 것 같아서 여러 명의 여자아이에게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한 것이 창피해 죽을 지경입니다. 물론 누구에게도 답장이 오지 않았습니다.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는 것을 자기들끼리 정보교환을 한 모양입니다. ‘나’는 세상 것에 집착하면서 그것을 얻어내게 하지 못하는 ‘자존심’입니다. 그냥 사람을 지옥으로 향하게 만드는 뱀입니다.
대학에 가서는 한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화이트데이라고 해서 선물도 하고 나름대로 답장도 기다리는 설레는 시간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만남을 이어갔지만, 행복이 ‘1’이라면 나머지 ‘9’는 그 사람에 대한 서운함과 잃을 것과 같은 걱정으로 지냈습니다. 한 사람을 사귀는 행복을 느끼기는 했지만 ‘1’을 위해 ‘9’의 희생을 해야 하는 이상한 행복이었습니다. 그래도 여러 명에게 편지를 해서 한 통도 답장을 못 받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그런 고통스러운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신학교에 들어와서는 그 집착이 사라졌을까요? 왠지 방학이 기다려졌습니다. 신학교에 머무는 삶이 전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가을이 되면 가을을 탔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받는 고통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통은 남아 있었습니다. 집착이 바로 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연옥의 고통과 비슷하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집착을 완전히 끊고 죽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님도 우리 자유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끊음을 시작한 사람에게 정화의 시간을 줄 뿐입니다.
저도 신학교의 연옥 생활을 거치며 조금씩 사제가 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런 집착이 생기지 않아 참으로 자유롭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와 이 연옥의 삶을 살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의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정화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도와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기도해주셨고 아버지는 믿어주셨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크게 반대하셨습니다. 그러나 힘든 일을 나가셔야 함에도 밤새 한숨도 못 주무시고 새벽에 들어와 “네가 선택한 대로 해라.”라고 하시며 저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셨습니다. 부모님께서 바깥세상에서 믿어주시고 기도해주시는 것이 신학교에 있는 사람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어떤 신학생들은 부모님이 걱정되어 중도에 포기하고 신학교를 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힘을 주시는 분들 덕분으로 어떤 신학생들은 정화의 과정이 빠르게 끝납니다. 이것이 연옥 영혼을 위해 우리가 기도해주어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영화 ‘브루클린’(2015)도 이와 같은 내용입니다. 브루클린은 미국 이민이 유럽의 하나의 흐름이 될 당시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습니다. 에일리스는 어느 못된 상점 주인 밑에서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고 미래도 없이 힘겹게 삽니다. 신부님은 자신이 도와줄 테니 미국으로 건너오라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언니와 어머니를 두고 떠나는 것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차피 그들에게 짐만 되느니 희망의 땅 미국으로 건너가기로 합니다. 배를 탔을 때도, 미국에서 직장에 다닐 때도 모두 낯설고 고통스러워 어머니와 언니가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토니라는 미국인 남자가 다가옵니다. 토니는 배관공이었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일리스가 만난 첫 아이리시가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토니 때문에 왠지 미국 땅에서 버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니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언니는 에일리스가 미국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자신의 병을 숨기고 동생을 보내준 것이었습니다. 에일리스가 뒤늦게 언니 무덤이라도 가보기 위해 한 달 동안 떠나가려고 합니다. 토니는 자신과 결혼하고 가라고 합니다. 에일리스는 토니를 너무 사랑했기에 둘만 몰래 결혼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에일리스가 결혼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의 미국식 스타일에 빠져듭니다. 그 동네 금수저인 짐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타지에서의 고통스러운 삶에서 고향의 익숙함에 빠져버린 에일리스는 이제 짐을 좋아하며 토니의 편지도 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를 배 아파하던 이들에 의해 에일리스가 미국에서 결혼하고 왔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에일리스는 다시 눈을 뜹니다. 자신이 고향을 떠나가게 된 이유.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돈이 최고이고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동네였습니다. 에일리스는 자유의 땅으로 다시 떠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눈에 밟힙니다. 어머니는 에일리스의 마음을 알고 그녀를 놓아줍니다. 당신은 혼자 있어도 되니 행복을 찾아 떠나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에일리스는 이제 미국에 정착하려는 아이리시가 아닌 토니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완전한 아메리칸이 됩니다.
천국에 정착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천국에 살고 싶다가도 이 세상의 집착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갈팡질팡합니다. 이것이 지옥의 고통과 별반 다름없는 연옥의 고통입니다. 이때 에일리스에게 힘을 준 이들은 언니와 어머니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아이리시 에일리스가 완전한 아메리칸 에일리스가 되게 해 줍니다.
천국으로 떠나 정착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완전한 행복을 주기 위한 이 세상에서의 기도와 희생은 분명 헛되지 않고 함께 천국으로 향하는 참사랑의 실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아직 이 세상의 집착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여 지옥의 고통과 버금가는 고통을 겪고 있는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합시다.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는 것이 이미 내가 연옥의 정화과정을 통과하는 길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자아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연옥의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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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을 기억하며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리고, 아직 연옥에 남아있는 분들을 위해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날이다.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죽음을 생각하고 현재의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은 연옥이 어떤 곳인가를 한번 보겠다.
연옥은 끝이 있는 일시적인 정화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로서 누구나 결점은 있으며, 완전한 인간은 없다. 그래서 스스로 죄스런 인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하느님을 뵙는 순간 자기 자신 스스로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발전 가능성은 죽은 다음에는 없다. 그러므로 결점이 있는 부당한 인간으로서 완전하신 하느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조그마한 결점도 용납이 안 된다. 이같이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서 살아갔지만 인간적 약점 때문에 가지게 된 부족한 것과 결점을 기워 갚는 그것을 연옥이라고 한다. 이 연옥은 마지막 정화단계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죄스러운 결점이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통해서 정화되고 구원이 성취되는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연옥론(煉獄論)은 하느님의 성성(聖性), 정의, 자비를 명백히 보여주며, 인간을 절망과 윤리적인 경솔함으로부터 지켜주고, 더구나 죽은 사람도 도와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증하여 줌으로써 많은 위로와 도움을 주고 있다. 교회가 연옥에 대한 가르침을 정식으로 정의한 것은 리용 및 피렌제 공의회(1274년 및 1439년), 그레고리오 13세 및 우르바노 8세의 신경(信經),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여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이었다.
연옥에서의 영혼은 자신의 죄에 대해 정화를 받는다. 이 세상에서는 죄에 대한 보속을 선행이나 기도로써 대신할 수 있으나 연옥의 영혼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없고, 수동적인 형태로 하느님의 정의에 의해 내려진 벌의 고통을 견디는 것으로 정화와 속죄가 되는 상태이다. 이 영혼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고통을 즐겁게 수용함으로써 죄에 대한 유한적(有限的)인 벌의 보상을 하면 확실하게 정화되는 것이다.
연옥의 고통이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는 않다. 각자가 지은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된다. 그 다음 연옥 영혼은 하느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므로 고통으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그 고통의 기간이나 엄중함도 지상교회의 기도와 선업(善業), 즉 신자들의 기도에 의해 단축 또는 경감시켜줄 수 있다.
연옥의 영혼들을 도와줄 수 있고 그들의 고통을 경감 내지 단축 시켜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의 삶 속에서도 그 예를 들어 충분히 이해가 가고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빚을 다 갚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면, 그 자녀는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그 빚을 대신 갚으려 할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그 사람을 위해서 아직은 무엇을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대도(代禱)를 한다고 할 때, 즉 대신 고행(苦行)을 한다든지 대신 속죄(贖罪)의 선행을 하느님께 보여 드린다고 할 때 그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다.
그 영혼을 위해서, 그 영혼의 명예회복, 즉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기 위한 이 행위는 돌아가신 부모의 빚을 갚아서 그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드리는 것 이상으로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주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미사를 봉헌하며, 이 미사를 통해서 지상교회는 연옥의 영혼들과 통공을 나누고, 만일에 그 영혼이 정화되어 하늘 나라에 있다면, 그 기도의 은혜는 다른 영혼에게 베풀어지며, 천상에 있는 그 영혼은 아직도 이 지상에서 순례를 하고 있고, 많은 어려움과 박해 속에 있는 지상교회를 위해 기도해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또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나이다." 하고 고백하는 것이 아닌가? 연옥의 영혼은 그곳에서 자신의 죄를 다 보속한 후에는 하느님의 생명에 나아갈 것이며, 천국에서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되고, 그분의 신비에 잠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시적 정화의 장소인 연옥은 모든 영혼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감으로써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 영혼들을 위한 특별 기간(위령성월)도 마련하고 있지만, 그들이 하루 빨리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느님께 일치하도록 선행으로써, 기도로써, 미사를 통하여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항상 “모든 성인의 통공”을 기억하면서이다. 그들을 위한 기도나 선행은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본다면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한 기도이다. 이 미사 동안 우리가 사랑했고, 우리를 사랑했던 돌아가신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지들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자.
전대사에 대하여!
현재 한국 교회는 위령성월 중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열심한 마음으로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신자들은 날마다 한 번씩 연옥에 있는 이들에게만 양도될 수 있는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전대사를 얻기 위해서는 위의 조건 외에 고백과 영성체를 하고 교황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주님의 기도와 사도신경을 해야 합니다. 한 번 고백성사를 받음으로써 여러 번 전대사를 받을 수 있으나, 한 번 교황의 뜻대로 기도함으로써는 한 번만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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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희망>
‘위령의 날’의 정식 명칭이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날이 아니라,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분들이어서 기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있는 영혼들에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우리가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그 영혼들이 우리의 기도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연옥은 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보속을 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그들 대신에 보속을 하기도 합니다. (회개는 죄를 지은 사람이 해야 하지만, 보속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세를 믿고, 천국, 연옥, 지옥의 존재를 믿는 것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태 22,32) 하느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죽음이라는 것’에게 빼앗기는
무능한 분이 아니라, 자녀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3-14)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그런데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을 아무에게나 주시는 분이 아니라,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공정한 분’이십니다. 그 자격을 심사하는 일이 곧 ‘심판’입니다. 심판결과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천국으로 직행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직행할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으로 직행할 정도로 완벽하지도 않고, 지옥으로 직행할 정도로 악한 것도 아닌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연옥이 존재해야 합니다. (없는 연옥을 우리가 마음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를 믿기 때문에 당연히 연옥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지옥으로 직행할 정도로 악하지는 않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이고,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곳으로 직행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8-10) 이 말에는 연옥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 있는 사람들만의 주님이신 분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도 돌보시는 주님이시기도 합니다. 연옥 영혼들은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주님께서는 연옥 영혼들도 구원하려고 애를 쓰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기도문이 개정되기 전에 사도신경에 ‘고성소(古聖所)’ 라는 용어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저승’으로 바뀌었습니다.) ‘고성소’와 ‘연옥’은 뜻에서 약간 차이가 있긴 하지만, 주님께서 고성소에(저승에) 가셨다고 우리가 믿는 것은, 이미 죽은 사람들도 구원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천국, 연옥, 지옥을 ‘특정 장소’로 생각할 수도 있고,
‘사람들의 상태’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완전하고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곳이고, 동시에 그 완전하고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그 평화와 행복을 얻어 누리기를 희망하면서 천국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기도 하고, 그 평화와 행복을 미리 체험하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그 평화와 행복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연옥은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참고 견디면서 ‘구원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곳이기도 하고,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지상에서의 우리 인생은 연옥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살이가 고달프고 힘들고,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구원의 희망’이 있기 때문에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지옥은 완전한 절망만 있는 곳이고, 그런 상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지금 희망을 모두 잃어버리고 완전한 절망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옥에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복음 5장에 나오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의 경우에, 그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더 나빠지기만 하는”(마르 5,26) 상태였는데, 누군가가 예수님의 소문을 전해 주었고, 그 소문을 들은 뒤에는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르 5,27-28) (연옥은 바로 그런 곳이고, 그런 상태입니다. 고통 속에 있지만 희망이 있어서 참고 견딜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서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면서(마르 5,29.34) 천국을(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 못지않게 사는 동안에 천국을 체험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나 자신’이 천국을 체험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을 하고 있어야 연옥 영혼을 위해서 제대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절망에 빠져서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라면 남을 위해서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인은 어떤 힘든 일을 만나도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연옥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중요한 사랑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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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당에 큰 행사가 있으면 신문사의 주차장이 바빠집니다. 성당에 바자회가 있었고, 그날에도 많은 분들이 신문사의 주차장을 이용하였습니다. 차를 빼는 과정에서 추돌사고가 있었습니다. 다행이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주차하고 있던 차 2대가 피해를 입었고, 벽도 손상이 생겼습니다. 사고를 내신분도, 사고를 당한 분도 모두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고, 원만하게 해결 할 수 있었습니다. 보험을 들었기 때문에 차도 수리할 수 있었고, 벽도 고쳐 놓았습니다. 저도 예전에 운전을 하면서 실수로 버스의 범퍼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버스는 거의 피해가 없었지만 제 차는 앞부분이 밀려들어왔습니다. 보험사에 전화를 드렸고, 직원이 와서 해결 해 주었습니다. 제가 운전하고 가는데 트럭이 저의 범퍼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고의 위험이 있어도 안심하고 운전할 수 있는 것은 보험이라는 제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뉴욕에 살고 있지만 같은 교구의 신부님들이 사목하는 성당을 방문하곤 합니다. 서부의 타코마, 동부의 필라델피아와 워싱턴 DC, 중부의 달라스가 있습니다. 신부님들은 제게 미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잠자리도 마련해 줍니다. 서부에는 같은 교구의 사제는 없지만 명예기자와 서부지국장님이 있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타코마에서는 자연과 더불어 산행을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운동을 좋아하는 신부님과 함께 운동을 해서 좋습니다. 워싱턴 DC의 신부님은 이야기를 좋아해서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하니 그것도 좋습니다. 달라스의 신부님은 함께 영신수련을 했기 때문에 영신수련의 경험을 나누는 것도 좋습니다. 자동차의 운전이 보험이 있기에 안심할 수 있다면, 미국에서의 생활은 같은 교구의 사제들이 있어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의 운전에는 보험료가 필요합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신학교에서 살았던 추억과 인연이 있기에 즐거울 수 있습니다.
자동차에는 보험료가 있고, 미국 생활에서 잘 지낼 수 있는 것은 신학교에서의 추억과 인연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참된 행복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하셨습니다. 하늘나라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자리를 마련한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한 보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위한 우리의 삶과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보험료는 내지 않으면 보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추억과 우정은 신뢰가 깨지면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보험은 연체를 했어도, 신뢰가 깨졌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뉘우치고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 의탁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정성껏 기도를 하면 전대사가 주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의 기도가 연옥의 영혼들에게는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죽음은 살아 있음의 소중함을 일깨워 줍니다. 죽음은 현재의 순간에 충실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죽음은 고통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아픔도 끝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오늘 하루 감사할 일들이 있다면 무엇인지 적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다면 무엇이 있었는지 적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나 자신에게 미안했던 일들이 있었다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적어보면 좋겠습니다. 바쁜 일상 중에 무심코 지나가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잠시 여유를 가지고 뒤를 돌아보면 감사할 일, 고마운 일, 행복한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받는 것들이 많았는데 주는데 인색한 적도 많았습니다.
위령의 달에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화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자연히 하느님의 나라에 대하여 묵상하게 되므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여 성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이, 현재 우리들이 바라는 것들이 과연 영원한 삶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오히려 영원한 삶에 장애가 되는가! 묵상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를 합당하게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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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영원히 기다리시는 하느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교회가 위령성월에 초하루에는 모든 성인의 날을 지내고 이렛날에는 위령의 날을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지요.
전례력으로 마지막 달인 11월에는 우리가 자연스레 이 세상의 마지막, 곧 종말을 생각하고, 이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세상도 있음을 생각하며, 또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에로 간 분들도 생각게 되지요.
그런데 저 세상에로 간 분들 중에서 성인들에게서는 덕을 보고 그렇지 못한 영혼들에게는 우리가 기도를 해줘야 한다는 거지요. 이는 우리가 산 이들 중에서 잘 된 이들에게서는 덕을 보고 잘못된 이들에게는 위안과 격려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그래서 저는 올해 위령의 날에는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자살을 생각하거나 자살한 사람들을 생각해봅니다.
왜냐면 자살한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주변에서도 많이 듣고 언론을 통해서도 자살 현상의 심각성을 자주 듣기 때문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이들에 대해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고,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깊이 숙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러지 않지만 과거에 자살은 하느님께서 주시고 하느님께만 달려있는 생명권을 인간이 제 맘대로 끊어버리는 가장 큰 죄이기에 이런 죄를 범한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이런 사람을 위해서는 장례미사도 드려주지 않았었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의 단절이 하느님의 사랑마저 단절케 한다는 말인가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생명을 끊었다고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사랑을 거두시고, 그것도 영원히 거두신다는 말입니까?
우리 인간의 한 번의 결정과 행동이 영원을 결정하고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결정이 내세에서마저 어찌 할 수 없게끔, 다시 말해서 어떻게 돌이킬 수 없게끔 내세마저 결정짓는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통공의 교리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과 저 세상은 자살 한 번으로 완전히 단절되고 하느님의 뜻을 우리 인간이 어긴 것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단절케 한다는 말입니까? 하느님께서는 한 번 노여우시면 영원히 우리를 저버리신다는 말입니까?
그 반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불은 영원히 타오르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며, 그러므로 하느님은 영원히 기다리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큰 죄와 많은 죄를 짓고, 자살까지 하였어도 우리가 당신 사랑에로 돌아오기를 영원히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우리가 영원히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지옥이고, 얼마간 하느님 사랑 밖에 있다면 그것이 연옥이고 연옥의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영원히 기다리시는 하느님 사랑에로 돌아가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그러나 기도가 필요한 사람은 자살한 사람뿐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고 불행한 영혼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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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별지기 신부의 복음 묵상#
유튜브 듣기 : https://youtu.be/yoHCMIBvHgw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같은 복음으로 맞는 위령의 날 첫째 미사의 복음을 묵상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영혼들에 대해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 마치 장례미사에 영혼과 드리는 미사에서처럼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행복하여라!”
세상을 떠나는 이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 그리고 남은 사람들, 가족들과 교우들에게 전해야 할 말은 언제나 주님이 주신 이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라는 말씀은 살아있는 이들에게는 삶의 모습에 대한 가르침이 되고,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는 축복과 현실이 되는 새로운 삶에 주어지는 말씀이됩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 세상을 떠나면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대게 그 심판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곤 합니다. 심판자는 그 엄청난 극단의 세상을 가르는 만큼 무섭기만 한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심판은 우리의 삶의 모습에 대한 하느님의 생각을 알고 있는 한 두려워 할 것이 못됩니다. 지옥은 무섭고 싫지만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든 것을 이미 알려 주셨기에 우리는 죽어서 가는 곳이 하늘나라, 하느님 나라, 곧 천국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우리는 현실에서 지키기 어려워하던 이 모든 가치를 기쁨으로 누리는 영원한 삶을 살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우리는 영혼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하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이 기원과 기도는 그들이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직 하늘나라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하느님께서 가엾이 보시고 사랑으로 받아들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영혼들은 결코 불행하거나 불쌍한 이들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를 향하는 이들은 희망과 기쁨을 향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그들을 향해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에는 언제나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합니다. 매일의 미사에서 사제는 그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하는 식사 후 기도에도 그리고 수많은 기도 속 우리는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과 여전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중에도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늘과 연결된 사랑의 통로를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그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간 수많은 성인들은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축복을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오늘 위령의 날은 어제부터 이어온 모든 성인대축일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갔는지, 혹은 아직 들어가지 못했는지는 주님만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고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사람을 주눅들게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지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 외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수많은 이들이 하늘나라 성인의 길을 걷습니다. 그 길이 내 앞에 펼쳐질 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오늘을 기뻐하며 지내야 합니다. 행복하여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의 길을 걷는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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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죽음에 쫒기는 사람과 맞서는 사람>
11월은 10월의 문턱을 넘어 마지막 나무에 붙어 있는 잎과 과일을 내려놓고 동면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계절입니다. 자연의 한 부분인 사람도 세월이 지나 마무리를 생각해야 할 시간입니다. 자연과 더불어 생각하면서 지난날의 과와 공을 생각하면 좀 더 의미 있게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에 쫒기며 사는 사람은 죽지 않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써가며 사는데 급급한 사람이며, 죽음을 맞서 사는 사람은 자기 삶을 다스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가장 두려움을 주는 것이며, 죽음을 통해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지고 세상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집니다. 그러나 죽음 만큼 모든 사람에게 공편한 것도 없습니다. 권력자, 재력가, 높은 명예를 지니고 있어도 죽음앞에 무릎을 끓어야 합니다.
11월은 이미 죽은 이들을 통하여 자신의 죽음을 깊이 생각하고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게 살아야 하는지를 깊이 반성하고 죽음의 준비를 해야 할 시기입니다.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듯이 분명이 오는 계절을 준비하듯이 죽음을 준비하면서 삶의 가치를 드높여야 합니다. “반드시 죽는다. 얼마 살지 모른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살아있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고 살아 있는 시간 한시도 악에 물들지 않고 선으로 가득찬 행복한 삶을 살려면 사람을 섬기고 나누고 친교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죽음을 마주하고 사는 사람 '오늘 저녁이 나의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는 죽음은 죽음에 맞서는 사람이며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죽음을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에 쫒기지 않고 죽음에 맞서 앞으로 나가셨습니다. 우리도 죽음에 쫒기는 사람이 되지 않고 죽음에 맛서는 사람으로 살아갈 때 죽음에서 자유롭고 죽음 앞에 웃으며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주여! 죽음을 깊이 묵상 하면서 죽음 뒤에 참 생명을 기대하며 믿음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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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1)
단풍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인간은 유난히도 단풍의 아름다움에 대해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같습니다. 단풍은 꽃의 화려한 아름다움과는 사뭇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향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더 매료당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꽃의 아름다움에 취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그 어떤 매료당함입니다.
사실, 잎은 새싹일 때부터 단풍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이미 잎 속에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차차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입니다. 사실, 그 아름다움은 퇴색의 아름다움이요, 사라짐의 아름다움입니다. 곧 죽음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이미 새싹일 때부터 품어온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도 자신의 몸 안에 본래부터 살아있는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나는 사건이 됩니다. 이처럼, 죽음 한가운데 생명이 있고, 죽음 한가운데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니 죽음 없는 생명도, 죽음 없는 사랑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몸에 달고 다닙니다. 하루하루 죽으면서 삶을 살아갑니다. 새싹처럼, 내 몸 안에서 단풍을, 곧 죽음을 성숙시켜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질병과 죽음을 마치 원수처럼 여기며, 그것을 피하거나 극복하려고 애쓰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에게 병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에 미치면, 사실 죽음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병이 얼마나 은혜로운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죽지 않으려는 것은 단지 자신에 대한 애착일 뿐! 그러니 자신을 내려놓고 남을 위해 죽는 법을 배워야 새로운 삶이 펼쳐지게 됩니다.
남을 위한 죽음,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죽음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탄생처럼 신비롭습니다. 죽음은 인생의 신비를 알려줍니다. 아니, 죽음이 있기에 인생은 신비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동안에 죽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살아있으면서도 남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존재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죽음이 신비한 것은 죽음이 한 생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생명의 신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삶은 죽음의 또 다른 일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죽을 몸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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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 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어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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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5-30>
11월은 정녕 신비의 달입니다. 절로 죽음과 비움의 신비를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우리를 존재의 심연으로 이끌고 갑니다. 마른 풀 한 줄기를 침대로 삼아 내려앉은 서리에서도, 뒹구는 낙엽을 깨우며 소스라치게 부는 바람에서도, 우리는 그 죽음과 만남의 신비를 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을 보는 것이요, 이미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과의 만남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하나의 통로요, 만남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다가, 마침내 그 희망한 분과 만나는, 바로 그 일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묵상하는 것은 죽은 다음에 오는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생사가 갈라질 수 없게 펼쳐져 있는 삶의 세계를 성찰하기 위해서입니다. 곧 현재를 충실히 사는 것이요, 현재를 충실히 죽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죽음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지으며, 삶의 질이 죽음의 질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곧 웰 빙(well being)과 웰 다윙(well dying)은 같은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완성을 향한 삶이요, 죽음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파우스티나 성녀는 말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첫 순간이고 마지막 순간이며 유일한 순간이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단순히 모든 것이 끝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간다는 고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한 과정의 마감일 뿐, 결코 허무한 끝이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이 밀려오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안식을 주겠다는 이 벅찬 초대에서 우리는 참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참된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선사되고 베풀어지는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 구절에서도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얻을 것이다”의 원어의 뜻은 “찾다”, “발견하다”는 뜻이라 합니다. 곧 참된 “안식”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찾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 안에서 찾고 발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 안에서만이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예수님만이 참된 “안식”을 가지고 계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요한 14,6)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안식”, 그것은 그것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로로써 얻어진다기보다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요, 탐구함으로써 얻어진다기보다는 순명으로 얻어지는 것이요, 알음으로써 얻어진다기보다는 사랑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은 그분의 선물이요, 사랑이요, 자비요, 호의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안식은 참된 주인에게서 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주님을 찬미하며, 이미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기리며, 주님의 축복과 은총에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오늘 우리는 가족과 공동체 식구들뿐만 아니라, 특히 소외된 영혼들, 곧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들과 잊혀 진 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바쳐야 할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세상을 떠난 영혼들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과 무죄한 사람들의 죽음을 함께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살육 속에서 희생된 이들, 테러와 폭력의 희생자들, 고문과 억압으로 희생된 이들 등 이루 헤아릴 수없는 타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제도적 폭력의 물대포를 맞고 317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지난 10월 25일 세상을 떠난, 백종기 엠마누엘 형제님의 영혼을 위해서도 기억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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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평화를 빕니다♡
어제는 이 '지상교회'가 '천상교회'와 소통하는 날이었고, 오늘은 '연옥교회'와 소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죽은 모든 이들, 특히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연옥에서 해방되어 천국에 오르기를 기도합니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오를 수 없고, 산 이들의 기도와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이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합니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가장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우리의 '기도' 때라고 합니다. 특히 천상교회와 연옥교회와 지상교회가 함께 만나는 '미사' 때이고, 우리의 '식사' 때라고 합니다. '식사 후 기도' 때문에.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라는 식사 후 기도가 불쌍한 연옥 영혼을 구할 수 있는 큰 기도입니다. 그러니 '식사 후 기도'를 잘 바치도록 합시다!
우리는 죽은 다음 연옥에서 단련 받지 않고, 곧바로 모든 성인들이 기뻐 즐거워하고 있는 천상교회로 들어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오늘 제1독서가 전하고 있는 '욥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또 그것이 자신의 죄로 인한 '하느님의 벌이라는 친구들의 말에도, 끝까지 견디어 내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제2독서가 확인시켜주고 있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이 굳은 믿음과 기억 안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천상교회를 향해 나아가는 마음이 가난한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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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아마 기억되는 ‘죽은 이’가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특히 기억되는 분이 계시지요. 부모님이십니다. 작년에 어머니, 올해 아버지께서 하느님 나라에 가셨기에 더 많이 기억이 납니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이 위령의 날에 기억해야 할 분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연세가 많으셨으니 당연히 이런 날이 올 것이 분명한데도, 아직도 멀었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겪어야 할 ‘죽음’이라는 순간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휴가 때, 멋진 풍경이 펼쳐진 곳을 가게 되었습니다. 유명 관광지라서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친구와 함께 온 어떤 청년의 말이 들리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부모님 모시고 와야겠다. 여기 정말 좋다.” 이 말에 친구도 “맞아. 여기 정말 좋다. 나도 부모님 모시고 와야겠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둘의 말을 듣고서 눈물이 났습니다. 저에게는 모시고 올 부모님이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생전에 함께 여행도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보다 훨씬 더 좋은 하늘 나라에 계신다고 생각은 되지만, 그래도 허전한 마음입니다.
위령의 날,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면서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을 열심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모습도 반성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죽음’ 앞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이가 죽음 앞에 후회합니다. 자기 죽음 앞에서도 그렇고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도 후회합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어쩔 수 없이 만드는 후회이겠지만, 이 후회를 줄여나가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비결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비결을 오늘 복음에서 진복팔단에 담아서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후회를 줄여나가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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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동창 신부가 수술을 받았습니다. 인대 접합 수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위가 참 재미있습니다. 글쎄 손가락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인대가 끊어졌냐고 물으니, 손을 털다가 인대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너무 어이없었다면서, 이제는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으니 무조건 조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합니다.
동창 신부의 말을 듣다가 저 역시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맨 위의 계단에서부터 맨 아래 계단까지 엉덩이로만 내려왔던 며칠 전의 기억이 났습니다. 미끄럼 타듯이 위의 계단에서 맨 아래까지 엉덩방아를 찧은 것입니다.
그런데 엉덩이 살이 많아서인지 처음에만 아팠지, 별 이상이 없었습니다. 미끄러지면서 운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동창 신부의 말을 들으니 엄청나게 운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넘어지고서도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까요.
정말로 감사할 일이 아닌가요? 생각해 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감사할 일을 찾으면서 오늘도 기쁜 날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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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죽음을 두려워 마십시오.>
위령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언젠가 맞이할 죽음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이며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믿고 오늘을 이미 영원으로 알고 최선에 최선을 다해 살면 마침내 주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사주’를 믿었습니다. 청년시절에 한 번 위험한 고비를 넘길 것이라는 것과 얼굴이 곱상한 여인과 결혼할 것이라는 것도 용케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주에 의하면 그한테는 삼십 대에 재물의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믿고 어디 가서든 큰 소리를 쳤습니다.
‘두고 봐라. 내 나이 마흔을 넘기 전에 너희와 앉은 자리가 달라질 것이다.’ 서른 고개를 막 넘었을 때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어떤 사주를 지닌 사람인데 남의 밑에 가서 일을 한단 말이냐’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몇 년 후에는 친구가 동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웃으며 거절했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그런 시시한 장사를 할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렀습니다. 해외로 갈 기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는 돈복이 터지게 되어 있다구.’ 하면서 밑이 터지게 가난하게 살다가 그만 일찍 죽게 되었답니다.
그는 저승사자에게 항의했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한테는 재복이 예정돼 있었잖습니까?’ 그러자 저승사자가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대꾸했습니다. ‘우리는 기회만을 제공할 뿐이다. 직장 운 한 번, 장사 운 한 번, 무역 운 한 번, 이 세 번의 기회를 다 주었었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면서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할 기회가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욕심을 부리거나 요행을 바란다면 그 기회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편한 쉼이 아니라 자기 힘에 알맞으면서도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힘들고 어려운 모든 이에게 그 쉼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하시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은 하루의 생활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멍에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성 엘리지오는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주님이 정하신 때에 죽기를 원한다. 이는 죽음으로써 만이 하늘에 계신 그리운 아버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순간순간의 기회들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편히 쉬게 하신다.’고 약속하심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요, 희망입니다. “죽음은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성 안눈시아따).
우리는 부활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없이 부활은 있을 수 없으니 죽음은 부활의 문을 여는 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뜻대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할 수 있음을 기뻐하십시오. 오늘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면서도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사람들은 언짢은 죽음을 두려워하나 언짢은 삶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는 성 아우구스띠노의 말씀이 새롭습니다. 오늘 여기서부터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Hodie mihi, cras tibi)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오늘의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어느 인디언의 기도를 옮겨 봅니다.
해 지는 곳과 해 뜨는 곳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고, 잠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리저리 부는 바람이며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눈이며
무르익은 곡식을 비추는 햇빛이며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당신이 숨죽인 듯
고요한 아침에 깨면
나는 원을 그리며 포르르
날아오르는 말 없는 새이며
밤에 부드럽게 빛나는 별입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
죽지 않았으니까요.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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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단 하나의 소원所願>
-“잘 살다가 잘 죽는 것뿐입니다!”-
“부활의 희망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하시어
그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
윗 미사경문 말씀이 은혜롭고 위로가 됩니다. 파스카의 삶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듯이 죽음 역시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어제가 ‘모든 성인들(All Saints)’의 대축일이었다면 오늘은 ‘죽은 모든 이들(All Souls)’을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도 주님 안에서 살아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천상 성인들은 우리를 위해, 또 우리는 천상 성인들과 함께 부활의 희망중에 정화중인 죽은 모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미사신청하는 분들을 보면 생미사와 연미사가 반반입니다. 참으로 많은 분들이 죽은 친지들은 물론 불쌍하게 죽은 이들, 자살한 영혼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가련한 영혼들, 불쌍하게 버림 받은 영혼들, 불쌍한 낙태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연미사를 봉헌합니다. 연미사를 봉헌한다는 사실은 그처럼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삶을 진지하게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저 역시 32년전 사제서품식때 가족 사진을 책상앞에 놓고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합니다. 사진을 보면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세 형들이 지금도 주님 안에서 살아있는 듯 느껴집니다. 요셉 수도원 정주하기 만 33년 동안 얼마나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는지 모릅니다. 주변에서도 지인들이 하나 둘 계속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아무도 세월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 누구도 생자필멸生者必滅, 늙음과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하나?” 질문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그래서 자주 소원이나 좌우명, 유언이나 임종어, 묘비명을 생각하며 삶을 추스르게 됩니다. 임종을 담당하는 호스피스 관계자들의 말을 들으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지 않다 합니다. 거의 대부분 죽는 순간까지 살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합니다. 참으로 온전히 주님께 자기를 맡기고 선종의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드물다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또 제 소원은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죽는 그날까지 새벽마다 매일 강론을 쓰고, 산책하며 기도하고, 그리고 미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제 단 하나의 소원입니다.
매일 강론은 매일 미사준비입니다. 날마다의 매일 강론은 저에게 하루의 양식이자 하루 삶의 의미, 삶의 중심, 삶의 방향이 됩니다. 내 주님 사랑의 고백이고 운명이자 유언이요 위로와 치유의 구원이 됩니다. 미사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소원이 담겼는지요!
무엇보다 잘 살다가 잘 죽을 수 있는 첩경의 지름길은 날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갖고 갈 것은 주님과의 관계, 믿음의 관계, 희망의 관계, 사랑의 관계, 즉 신망애의 관계 하나뿐입니다. 관계의 준비 없이 지내다가 갑자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얼마나 혼란스럽고 당황스럽겠는지요! 그러니 날마다의 삶은 날마다의 죽음 준비인 것입니다.
참 좋고 깊은 관계의 손님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듯이 참 좋고 깊은 관계의 신자는 빈손으로 와도 하느님께는 반갑고 기쁠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하루, 몇 일, 몇 달, 몇 년 만으로 깊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평생 관계입니다. 과연 하루하루 날마다 깊어가는 주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인지요?
하루하루 날마다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깨달을 것입니다. 어제 읽은 김수환 추기경님의 어록중 일부를 나눕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의 묵상에 좋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하나, “여행이 즐거우려면 세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1.짐이 가벼워야 한다/2.동행자가 좋아야 한다/3.돌아갈 집이 있어야 한다.”
둘, “세상에는 없는 게 세 가지 있는 데, 1.정답이 없다/2.비밀이 없다/3.공짜가 없다.”
셋, “죽음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는 것 세 가지, 1.사람은 분명히 죽는다/2.나 혼자서 죽는다/3.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넷,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 세 가지 1.언제 죽을지 모른다/2.어디서 죽을지 모른다/3.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이래서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노력이 필수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그대로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날로 주님과 신망애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그대로 제1독서 지혜서의 의인의 이의 모범입니다. 주님과 신망애의 관계가 날로 깊어가는 의인들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며, 평화를 누리고 있다. 그들은 불사불멸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입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당신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풍요로운지요! 그러니 지혜서의 의인처럼 사는 것입니다. 또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와 일치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지 ‘찬미와 감사의 기도(마태 11,25-26)’를 통해, 또 절절한 ‘아버지와 하나됨의 고백(마태 11,27)’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해 하루하루 날마다 영원한 안식처 주님 안에 머물러 예수성심의 온유와 겸손의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 불편한 멍에는 주님 온유의 편한 멍에로, 내 무거운 짐은 주님 겸손의 가벼운 짐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잘 살다가 잘 죽는 길은 이길뿐이 없습니다. 자비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인생 광야 여정 중 무거운 짐을 지고 고단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초대하시며 당신 안식을 선물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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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의 희망을 현재형으로 확인시켜 주십니다.
"행복하여라."(마태 5,3.4.5.6.7.8.9.10)
어제 우리가 경축한 "모든 성인의 날"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떠난 모든 이를 기리는 "위령의 날" 첫째 미사의 복음 대목이 모두 행복 선언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이 각박하고 험한 세상살이 중 어디에서 "행복하라"는 주님 명령의 근거를 찾아야 할까요?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12)
여덟 개의 행복 선언이 "행복하여라 ... 할 것이다."로 반복되다가 마지막 말씀은 현재형으로 마무리됩니다. "행복하여라"도 아니고, "행복하게 될 것이다"도 아닌, "너희는 행복하다"는 단정적 표현이지요.
지금 이 자리에 나아오기 직전까지 삶의 악다구니 속에서 허덕이다 왔을 군중에게는 행복이 여전히 손에 잡히지도, 체험 영역으로 들어오지도 않았을 터인데, 행복하다고 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까지 하시니 어리둥절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자신감의 근거가 "말씀"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말씀이신 분의 입에서 "행복하여라"는 말씀이 선포되는 그 순간, 말씀은 이루어지니까요. 예수님 곁의 제자들과 무리를 이룬 군중들의 귀에 말씀은 단지 소리로만 흘러들어가지 않고, 그 말씀이 존재를 관통해 그 안에 심겨지고 새겨져 완성태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행복하여라"는 말씀이 행복하게 만듭니다.
제1독서에서는 고통 받는 의인의 전형인 욥의 비장한 고백이 들립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욥 19,25)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으로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 19,27)
이 말을 하는 욥의 심상에 귀를 기울입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행들을 영문도 모르는 채 속수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소중했던 가족과 재산, 건강, 친구마저 잃은 그가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죽기를 청하며 몸부림칠 때입니다.
욥에게 희망이 있다면 자신에게 엄청난 축복도 주셨고 또 처참한 재앙도 허락하시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존재하신다는, 어쩌면 존재하셔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욥은 당장 자신이 당하는 모진 고통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그분이 살아 계셔야 하며, 자신은 그분을 대면해야 합니다.
"기어이" (나를 이렇게 만든) 하느님을 뵙고야 말겠다는 욥은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버틸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어이!"라는 말에는 하느님을 향한 그의 절규와 항변의 강도가 새겨져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고통의 이유를 물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시기에 반드시 계셔야 하고, 당신도 피하시지 않고 기꺼이 그 자리를 지키십니다. 그분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가는 우리들을 상대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 위 그 자리에서 더 참혹한 몰골로 기다리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희망을 말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10)
죄인을 위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돌아가신 성자 예수님으로 인해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졌고, 우리는 고통 중에서도 희망과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는 희망에 묻어 있을지도 모를 세속적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떨쳐내려 "구원이 ... 더욱 분명합니다."라고 힘 주어 확신합니다.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이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먼 미래의 불확실한 if의 가정문이 아니라 현재형 단정문입니다. 욥처럼 현실의 벽이 만만치 않고 삶의 행로가 온통 뒤엉켜버린 상태에서 저 밑바닥 끝까지 내팽개쳐졌다 해도 우리가 하느님께 질문을 가지고 있고 그분을 기어이 뵙겠다는 결의와 열망을 놓지 않는다면 희망은 분명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주어진 생애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세상이 조장하고 유혹하는 그런 것들에 있지 않다는 걸 우리는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삶과 죽음에서 매번 확인하게 됩니다. 죽음으로 열리는 영원한 생명은 각자 고유한 삶의 밑그림을 가지고 저마다의 궤적을 지나는 중인 우리가 아프고 고되며 고통과 상처가 가득한 현실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희망하며 행복해야 할 이유입니다. 죽음에, 또 죽음 너머에 답이 있습니다.
구원의 희망은 우리가 확신하는 그대로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는 현재도 미래도, 이제와 또한 영원히 행복합니다. 현실의 무게를 넘어 기쁨과 행복을 선택하며,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 서로의 구원을 위해 나아갑시다.
+주님, 세상을 떠난 모든 이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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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4uaPBLLJe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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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 4)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다시 만나는
기억의 신비이다.
잡으려고
애쓰지만
그 어떤 것도
잡을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그러기에
구원을
갈망하는
우리들 인격이다.
인격은 사랑을
지향한다.
하느님 사랑이
생명의
창조이며
인격의
죽음이며
부활이다.
우리에게는
인격을
살리시는
하느님이
계신다.
죽음을
위로하시고
따뜻이
안아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예외없는
죽음은
우리 존재의
적나라한
본모습이다.
하느님 아니시면
어찌할 수 없는
가난한 실존이다.
삶을 부정하는
것은 죽음또한
부정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우리모두가
하느님께로
돌아 가야 할
생명의 질서이다.
생명은
하느님의
고유한
영역이다.
사랑을 느끼는
사랑의 시간이
생명이다.
생명은
십자가를 통해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죽음으로
십자가를
얻는 것이다.
십자가는
죽음처럼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을
끝까지 믿으셨다.
죽음이 있기에
구원이 있다.
기억하며
기도한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이
하느님의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사실은
우리모두가
하느님을 향해
오늘도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순서와 시간의
차이일 뿐이다.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며
다시금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되는
위령의 날이다.
맑고 행복한
죽음이란
끝없는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것이다.
지나가야 할
죽음의 여정이다.
우리를
받아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신다.
다시 함께 할
본향(本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기억과
기도 사이에
삶과 죽음
우리의
구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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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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