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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Sigmund Freud, 1858~1939)의 정신분석 이론은 근대 철학이 인간의 이성과 의식 능력에 대해 크게 강조하고 중요시했던 흐름에 큰 문제를 제기했다. 서양 근대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이성 능력과 의식의 세계가 바로 인간이 문명을 만들어낸 큰 힘이 된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과연 서양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대로 세계의 변화와 발전을 이루어나갈 수 있는 지식을 체계화하는 인간의 이성을 과신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없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현대 철학은 이러한 문제제기와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구하는 데 많은 부분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의 도움을 받는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 이성 능력이 스스로 파악하는 의식 세계보다 무의식의 세계에 주의를 기울인다. 인간의 의식의 세계가 빙산의 일각이라면 물 밑의 빙산의 본체에 해당하는 거대한 덩어리가 무의식의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 무의식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의식의 세계가 인간이 문명을 만들 때 사용한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발견하는 힘이라면 무의식의 세계는 여전히 충동과 파괴의 욕구가 지배적인 무질서한 곳이다. 문명은 이렇게 인간의 정신세계 내에 여전히 존재하는 무의식을 압박하고 억압해서 문명 세계의 법규에 순응하도록 길들인다. 마치 이 모습은 야생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이는 과정과 유사하다. 프로이트는 이에 대해 문명 속에서 과연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제대로 알고 스스로를 억압하는 일이 없도록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잘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 오늘날 행복론은 프로이트로부터 유래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프로이트 정신 분석론은 한편으로는 문명을 떠나 살 수 없는 우리들을 불편하게도 하지만 그럼에도 진정한 나 자신을 이해하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준다. 미래를 위해 오늘의 나를 지나치게 높은 기준의 원칙으로 통제하지 말자!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은 그의 말년의 저작에 속한다. 그래서 그가 오랫동안 연구해온 정신분석학의 핵심이 잘 정리되어 있다. 특히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프로이트는 종교가 인간이 욕망을 통제하고 문명에 적응하며 교화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해주었다고 본다. 물론 어린 아기의 자기 보존 본능만으로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면 사회는 무질서하고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곳이 될 것이다. 일정 정도의 사회화와 문명사회 법규의 학습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화와 학습의 과정을 제대로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고 신경증이란 그런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종교가 사람들의 마음에 존재하는 황폐함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다한다면 그 나름의 의의가 있겠지만 오히려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행복한 삶을 강압적으로 방해한다면 그 본모습을 제대로 통찰해봐야 하지 않을까?
(참고로 『문명 속의 불만』의 국내 번역은 열린책들에서 나온 김석희 선생님의 번역본과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에서 나온 성해영 선생님의 번역본이 있다. 여기서는 성해영 선생님의 번역을 중심으로 봤고 김석희 선생님의 번역도 많이 참고했다.)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의 시작 부분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지는 가치평가 기준은 삶의 참된 가치를 과소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다른 가치 기준에서 소수의 사람들만이 가지는 놀라운 사람들에 대한 가치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소망 충동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친구를 자처하는 누군가가(이에 대해 프로이트는 이후의 추가된 각주에서 이 사람이 프랑스의 작가 로맹 롤랑이라고 밝힌다) 종교에 대한 프로이트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종교성의 참된 근원을 적절하게 평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이 사람이 밝힌 종교성의 근원이란 영원의 감각이라 부르길 원하는 느낌이며 마치 대양처럼 무한하고 한정되지 않는 것에 대한 느낌이다. 아마도 이 사람(로맹 롤랑)에 따르면 종교성의 근원이 되는 대양과 같은 느낌은 긍정적 에너지일 수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에게는 그렇지 않다. 이후 여러 면에 걸쳐 이와 같은 종교성의 근원이라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하면서 프로이트의 결론을 잠정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양과 같은 느낌이란 결국 유아시기의 무력한 상태에서 아버지와 같은 절대적 힘을 가진 자를 소망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종교성의 근원 느낌을 발생론적으로 설명한다. 발생론적이란 그것의 생성과정 전체를 처음부터 살펴보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유아기의 자아에서 시작한다. 자기에 대한 느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고 통상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자아의 확실성은 기만적이다. 자아는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자아는 내부적으로는 무의식적 심리적인 실체(프로이트가 이드라고 부르는 것)와 경계선 없이 이어져 있다. 자아는 이드의 외면의 역할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자아는 외부적으로는 뚜렷한 구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병리학 연구를 통해 (물론 신경증의 환자들의 경우이긴 하지만) 자아와 외부세계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게 드러났다.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는 유아기의 자아 감각으로 돌아간다. 유아는 외부세계를 자신과 아직 구분하지 않는다. 점차 다양한 자극에 반응하면서 유아는 이 둘을 구분하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유아가 외부세계의 것으로 점차로 지각하게 되는 것의 예로 엄마의 젖가슴을 든다. 울어야만 등장하는 엄마의 젖가슴을 지각하게 되면서 유아들의 생존을 위한 학습은 진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존을 위한 학습은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고 고통과 불쾌감을 수반하게 된다. 쾌를 지향하고 불쾌와 고통을 피하려는 경향은 생명의 원초적 반응 양태이며 외부 세계와 대면하여 스스로를 지키며 생존해나가는 중요한 삶의 방식이 된다.
유아기부터 자아가 자신을 외부 세계와 분리하는 작업은 진행된다. 프로이트의 다음 언급이 자아와 외부세계의 분리 과정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애초에 자아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가, 이후에 자신에게서 외부 세계를 분리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자아 감각은 훨씬 더 포괄적인-실제로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자아와 그것을 둘러싼 세계 사이의 더욱 긴밀한 유대관계에 근거한 느낌이 깨어져 나간 잔존물이다.”(『문명 속의 불만』, 성해영 역 55쪽 상단 부분)
‘자아’에 대한 이러한 견해에서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발생론적 접근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도르노와 푸코로 대표되는 현대 유럽 철학에서 주체에 대한 반성이 나온 기초가 바로 정신분석학의 자아 분석에 있다는 게 명확해진다.
프로이트는 자아가 근대 철학에서 사고된 것 달리 허약하며 원래의 자아와 그로부터 유래된 자아가 함께 존속한다고 밝힌다. 진화론적으로 동물의 세계에서 공룡은 멸종했지만 그와 유사한 종인 악어는 아직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동물들의 신체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면 마음의 영역에서는 어떠한가? 마음의 영역에서는 원래의 것과 유래된 것의 공존이 더 잘 나타나 있다. 마음의 영역, 즉 정신 영역에서는 어떤 것도 일단 형성되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정신 영역에서는 모든 것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보존되며 이후의 상황에서 다시 드러난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하고 있다.
이 부분이 뜻하는 바를 프로이트는 다시 고대 도시인 로마를 예로 들고 있다. 로마는 고대 역사에서 상당히 많은 발전이 이루어지고 유적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프로이트는 고대 로마의 여러 정착지를 예로 든다. 고대 로마가 겪은 변화는 곳곳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고 어떤 곳은 폐허가 됐다. 그 흔적들은 당시 성벽과 건축의 일부이긴 하지만 당시의 모습을 추적해볼 근거가 된다. 로마의 과거는 이렇게 역사적인 장소에 보존된다. (프로이트는 이 부분에서 로마사와 로마 고대 건축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로마를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마음 안의 공간으로 가정해보기를 권한다. 그렇게 되면 한 인간이 태어나면서 겪은 온갖 변화의 흔적이 그 마음 안의 공간에 남아있다는 추론이 성립된다. 그런데 정신 영역에서 과거의 모든 것들이 보존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기관이 온전하고 손상되지 않아야 한다는 게 단서조항이 된다. 역시 정신 영역과 물리적 공간인 도시를 적절히 비교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프로이트는 이러한 비교가 선험적으로 어렵다고 한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프로이트는 최종적인 형태와 초기 단계들이 함께 보존되는 예를 어른과 아이의 신체를 비교하는 방법으로 시도를 제안하는 듯하다가 초기 단계의 신체 흔적을 물리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고 한다. 역시 마음의 영역을 가시화하는 게 힘든 일이다.
어쨌든 정신 속에서도 오래된 것들이 사라지고 흡수되어서 회복되거나 재생되지 못할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정신적 삶에서 과거가 보존되는 것이 규칙이라는 사실을 고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정신에서 과거가 보존된다는 것을 고수하는 이유는 프로이트가 신경증 환자를 대면하고 치료하면서 환자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일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경우를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이트는 당시에 정통한 의료 방법이 아니었던 최면요법을 사용하여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최면의 방식은 또한 인간의 정신세계가 이성에만 따르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징표라고 프로이트는 생각했던 것이다.
첫 번째 절의 결말에서 프로이트는 종교적 욕구의 근원이 ‘대양적 느낌’이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아의 무력감과 그로 인한 아버지에 대한 갈망에서 종교적 욕구가 파생되었다는 사실은, 특히 그 느낌이 단순히 어린 시절로부터 지속되어 왔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운명이라는 우월한 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영구히 유지되어 왔다는 점에서 나에게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성해영 번역, 61쪽) 결국 프로이트는 종교적 태도의 근원은 유아기의 무력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2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 2절에서 종교에 대해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밝히고 사람들이 인간의 삶의 목적에 대한 물음을 종교가 답변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본다. 하지만 프로이트에게 종교란 망상에 가까운 것이므로 현실적인 정신분석학의 견지에서 인간의 행동을 고찰하면서 인간 삶의 목표와 의도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사람들의 행동의 측면에서 인간의 삶의 목표와 의도는 의심의 여지없이 행복이다. 사실 이러한 삶의 목적이나 인생의 목적으로서 행복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말해왔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영국 공리주의의 영향을 받은 듯한 행복론을 말한다. (하지만 보다 정확히는 그가 많은 환자들을 접하면서 정리한 견해일 것이다.)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쾌를 추구하고 고통과 불행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3절 -인간은 왜 문명 속에서 행복하지 못한가?
프로이트는 앞서서 인간이 행복하기 어려운 것은 고통이 유래하는 세 가지 원천인 자연의 우세한 힘, 우리 육체의 연약함, 그리고 가족, 국가 사회 속의 인간 상호관계를 조정하는 규율의 불완전함에 있다고 말했다. 특히 프로이트는 세 번째 고통의 원천인 사회적 제도에 대해 왜 우리 스스로 만든 제도가 우리 모두를 보호하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초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같이 저술한 『계몽의 변증법』 의 서문에서 던진 '인류는 왜 새로운 종류의 야만으로 퇴보하게 되었는가'의 물음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20세기 초중반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독일의 나치에 의한 유태인 대량학살을 겪은 후 피폐해진 세상을 향해 두 학자는 거의 절규에 가까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