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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의 전조-사라예보 사건
1. 1차 대전의 개요
- 1차 세계대전은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의 전쟁으로 촉발되어, 1918년 11월 11일까지 전 세계에 걸쳐 전개된 전쟁으로 전쟁에 관련된 국가들의 숫자만도 35개국에 이르며 부상자를 제외하고(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은 아예 껴주지도 않는다..) 순수 전사자만 약 900만 명에 이르러 대규모 참전국은 한 세대(Generation)가 아예 증발했다고 할 만큼 참혹했던 대규모 국제분쟁이었다(그래서 Great War는 제1차 세계대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
한 세대(Generation)가 아예 증발해버린 인류사의 잔혹극 1차 세계 대전..
- 제 1차 세계 대전은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이 풍선부풀 듯 끝없이 부풀어 올라 결국엔 터진 상황이라 볼 수 있는데, 산업혁명과 이에 따라 급속도로 발전한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유럽의 생산력이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급성장함에 따라 원료 공급지와 판매처가 필요했고 이를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 즉, 식민지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 일찌감치 산업혁명을 발판으로 산업력이 급성장하였고 기본적으로 국내 정치가 안정되어 있던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기반으로 세계 각지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뒷차였지만 프랑스도 재빨리 여기에 가세했다.
전 세계에 걸친 식민지 상황과 아프리카를 종단해 식민지를 건설한 영국
- 하지만 국내에서 조각들로 찢어져 나누어진 중소규모 국가들을 하나로 봉합 수술하는 통일전쟁을 치르면서 영국, 프랑스에 비해 산업과 공업 발달 과정이 늦어진 독일 제국이 이제 와서 식민지 좀 먹어보겠다고 숟가락을 들고 보니, 이미 맛난 반찬들은 영국, 프랑스가 다 퍼먹었고
- 결국 독일이 식민지를 획득할 방법은 남이 먹기 전에 재빨리 주워 먹든지,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를 뺏어먹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으며(이 짓은 후속작 2차 대전까지 이어진다...힘없으면 서럽다..반찬신세..) 당연히 이러한 굴러온 돌이 박힌 돌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기존 박힌 돌인 영국, 프랑스와 대립이 심각해졌고 특히, 독일 해군이 영국 해군에 맞서 해군력을 증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양국 간의 치열한 건함 경쟁은 영국의 경각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이래서 이 전쟁을 제국전쟁(Imperial War)이라고도 한다..)
독일의 통일 과정과 뒤늦은 숟가락 얹기..낄 자리가 없다.
- 1차 대전의 발발과 전개과정은 워낙 방대하니 다음에 기회 되면 한번 다뤄보기로 하고(언제가 될 진 몰겄음..-_-;;) 그 초기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부터 유럽 각국이 개떼처럼 차례차례 줄줄이 비엔나로 참전하는 발발 과정이 워낙 막장스럽고 골 때리기로 유명해서 그 부분만 살짝 맛보기로 다뤄보겠다.
2. 황태자 부부의 암살
-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황태자 부부가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하여 오전 9시 20분, 보스니아의 사라예보(Sarajevo) 역에 도착했다.
- 당시, 보스니아 지역은 1878년, 오스만 제국과의 베를린 협약으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방이 분리되며 세르비아는 독립한 반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된 상황이었는데, 독립한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운동이 보스니아 지역으로 확산되며 이곳엔 한창 세르비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재합병과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당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상황..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각각 자체적으로 군대도 있었다..
- 이런 일촉즉발의 시기에 하필이면 보스니아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는 안성맞춤인 암살대상이었고, 거기다 방문한 날짜인 6월 28일은 1389년, 세르비아가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패배하여 정복당한 날이자
-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에서는 같은 날에 세르비아 군대가 오스만 제국에게 승리하며 과거의 패배를 갚아준 날이기도 했기 때문에 세르비아인들에게는 상당히 의미가 깊은 날이었다(성 비투스의 날이라 하여 세르비아 애국주의의 상징이 되는 날..우리로 치면 3.1절에 히로히토가 식민지 한양에 온 거지..경비도 허술하게 하고..아주 죽으려고..더 아이러니한 건 이 날은 또 하필이면 황태자 부부의 14주년 결혼기념일..)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에 패배한 코소보 전투와 1차 대전의 전조..발칸전쟁..
- 이에 따라 세르비아의 장교들이 1901년에 만든 반 오스트리아 비밀결사단체 “검은 손”의 후원을 등에 업은 보스니아 현지의 세르비아 합병을 주장하는 비밀단체 “젊은 보스니아”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고 미리 역에 대기하고 있던 6명의 단원 중 한명이 엉성한 경계를 뚫고 황태자 일행을 향해 냅다 수류탄을 투척했다.
- 하지만 이 첫 번째 암살 시도에서는 수행했던 수행원 2명과 시민 10명이 수류탄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는 것에 그치며 황태자 부부는 무사히 역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 이후 사라예보 시청에서의 공식 환영행사를 마친 황태자 부부는 암살시도에 놀라 군사훈련지역으로 빨리 가야한다는 보스니아 총독 오스카르 포티오레크(Oskar Potiorek) 장군의 주장을 물리치고, 자기들 때문에 부상을 입은 수행원인 에리크 폰 메리치 중령의 문병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이 무한한 자비심을 보라..이 쓸데없는 고집이 결정타..)
공식 행사를 마치고 사라예보 시청을 나서는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
- 황태자의 고집에 어쩔 수없이 병원으로 방향을 잡은 일행이 탄 차량이 출발했고, 이때 포티오레크 장군은 또 다른 암살시도를 우려해 운전기사에게 지름길로 가자고 했는데 기사가 알아듣지 못하며 지름길을 지나치자, 이를 본 장군이 기사에게 소리를 질렀고 급정거한 차량이 지름길로 가기위해 후진했다.
- 한편, 남슬라브 민족주의 운동에 심취해있던 18세의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는 “젊은 보스니아” 단원이었지만 사라예보 역에서 있었던 1차 암살시도에 아무런 참여도 못하고 사라예보 시내의 모리츠 실러(Moritz Schiller)라는 카페 안을 그냥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앞에 황태자 부부를 태운 자동차가 나타나서 멈추는 걸 보았다(이런 걸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하나..아니면 불운의 연속?)
암살 장소인 모리츠 카페의 위치..지도 우측..사진의 X지점..
- 게다가 이 차량은 오픈카 형식이어서 프린치프는 이 차량에 탄 인물들이 황태자 일행임을 바로 알아보았고, 이 기막힌 기회를 노려 자기도 암살에 한 몫 할 속셈으로 준비하고 있었던 벨기에 제 FN M1900 자동권총(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을 암살한 것과 동일형..암살전용?)을 품에서 꺼내 차 앞으로 뛰어들며 황태자 부부를 향하여 발사했다.
- 첫 번째 총알은 황태자를, 두 번째 총알은 황태자비를 명중시켰고 정확하게 급소에 맞은 두 발의 총탄은 두 사람을 그자리에서 절명시킨다(사실 프린치프는 황태자비가 아니라 동승했던 보스니아 총독 포티오레크 장군을 향해 쏘았는데 목표를 벗어난 총탄에 황태자비가 맞아 사망하자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프린치프는 유감을 표명..)
암살에 사용된 FN M1900 권총과 당시 상황을 묘사한 기록화
- 거기다 더 어이없는 것은 당시에 이미 방탄복이 개발되어 있어서 당연히 높으신 분이었던페르디난트 황태자 역시 암살에 대비해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단 사실.
- 그가 입은 방탄조끼는 폴란드인이었던 카지미에시 제글렌(Kazimierz Żegleń)이 만든 것으로 제글렌과 방탄복을 공동 개발한 얀 슈체파니크(Jan Szczepanik)가 만든 방탄조끼는 이미 1913년에 스페인의 알폰소 13세(Alfonso XIII)의 목숨을 살린 바 있었고 암살범 프린치프의 FN M1900 자동권총은 380 ACP 탄을 쓰는 것이어서 방탄조끼가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총탄은 방탄조끼가 아니라 황태자의 목에 명중, 경동맥이 끊어지며 절명케 하였다.
카지미에시 제글렌이 제작한 방탄복의 실험 장면..저건 뭔 짓이여?
3.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 이날 암살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전쟁을 벌이면 둘 다 망한다고 주장하며 러시아에 대한 적대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등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분명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고
- 불평등한 국가 구조의 혁신에 대한 정치적 신념, 오스트리아 해군과 군의 보급제도에 대한 현대적인 개선, 귀천상혼 같은 개념은 내버리고 사랑을 찾아서 평민 출신 아내와 결혼하는 등 여러 모로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진보적 성향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황태자 부부의 마지막 모습
-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인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06년에는 각각 분리된 자치적 지방정부가 하나의 국가를 구성하는 미국식 연방국가인 오스트리아 합중국 방안을 제창, 민족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을 추구하기도 하였던 인물이었다.
- 물론 그의 주장대로 되면 기존 체제의 기득권 계층인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들이 불리했기에 기득권자들, 특히 헝가리 정계와의 갈등이 극심했으며 헝가리 총리는 대놓고 황태자가 제위를 이은 뒤 개혁을 밀어붙이려고 한다면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 또한 그의 개혁 성향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도 자극했는데 황태자의 개혁이 성공하면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제국 내의 남 슬라브인들도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곧 제국에서 탈피하여 독립 국가를 건설하자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추종할 이유가 퇴색되게 되므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황태자를 제거하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암살 사건이후 사라예보 시내에서 벌어진 세르비아계 주민에 대한 폭력행위
4. 암살범 가브릴로 프린치프
- 한편, 암살범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전 유럽에 걸쳐 수백만 명이 죽어나가는 헬게이트가 열린 상황에서도 나름 교도소에서 안전하게 지냈고(딱 징집연령이어서 전쟁터로 나갔어야 되는 나이..) 만 20세에 27일이 모자라 미성년자인 관계로 사형을 선고할 수 없었던 그에게는 징역 20년형이 선고되었다.
가브릴로 프린치프와 사라예보 법정에서의 재판
- 아무튼, 그렇다고 그가 교도소 안에서 영웅대접 받으며 편히 지낸 것은 결코 아니어서, 심지어 같은 민족인 세르비아 출신 재소자들도 그를 경멸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로, 그가 죽인 황태자가 나쁜 사람도 아닌데다가 나중에 세르비아의 자치라든지 오히려 제국을 구성하는 개별 민족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적극 추진하려 했던 것이 드러났고
- 결정적으로 그의 암살로 촉발된 1차 대전으로 인해 같은 민족인 세르비아인들마저 무수히 죽어나갔기 때문이었다(물론 일이 그렇게 커질 줄은 몰랐겠지...어쨌든 암살범 프린치프는 감옥 안에서 엄청 줘 터졌다고..)
-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행위로부터 비롯된 이 엄청난 인류사의 비극에 대해서 크게 괴로워하지 않았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혼자서 움직일 수 없다. 내가 아니었다고 해도 결국 전쟁은 일어났을 것이며, 나는 단지 그 방아쇠를 당겼을 뿐이다." 라고 말했다고(뭐 그럴지도...-_-;; 아무튼 그는 신념형 범죄자로 분류된다..)
- 그래도 민족주의자였던 그가 동족을 위하여 행한 일이 되려, 수많은 동족을 죽어나가게 하는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기에, 제법 마음고생을 한 것은 사실인 듯하며, 원래 폐결핵이 있었던 그는 수감 4년째인 1918년, 결핵이 악화되었으나, 정상적인 치료를 받지 못하고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차 대전에 참전한 세르비아군과 미국에서 제작된 선전 포스터
- 한편, 역사에는 여러 가지 가정이 난무하지만 만약, 애초부터 황태자가 어지러운 상황의 보스니아를 방문하지 않았다면? 부터 시작해서, 첫 번째 암살위기를 넘긴 황태자가 바로 돌아갔다면? 문병 간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운전기사가 처음부터 지름길로 갔다면? 후진하지 않았다면? 프린치프가 카페 안에 없었다면? 만약 총알이 방탄조끼에 맞았다면? 등등 수없이 많은 우연이 겹쳐지며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사건은 만들어졌고
- 이런 기막힌 불운이 겹쳐져 만들어진 이 사건도 이후 벌어지는 상황전개를 보면 굳이 전쟁으로까지 확대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수많은 기회들이 있었으나 또 다시 모순과 뻘짓, 불합리한 상황판단, 그리고 불운한 타이밍들과 맞물려 들어가며 인류사의 대재앙인 제 1차 세계대전의 헬게이트가 열리게 된다.
출처 : http://blog.daum.net/mybrokenwing/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