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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드르 3세>
- "아들들이라고 있는게 다 골골대니... 이걸 어쩐다... "-
알렉세이 1세는 밀로슬라프스키 가문 여성과의 사이에서 무려 13명의 자식을 보았지만 그 중 그가 죽을 때까지 살아남은 아들은 표드르와 이반 뿐이었다. 하지만 표드르는 굉장히 병약했고, 이반은 눈병을 심하게 앓고 있거니와 몸과 마음 모두 허약해서 둘 다 후계를 본다거나, 제대로 된 차르가 될 것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알렉세이는 이것을 걱정했다.
그러다 그는 마트베예프의 집에서 나탈리야 키릴로브나란 나리쉬킨 가문의 여성을 보고 반하였다. 그는 재빠르게 그녀와 결혼했다. 이로써 나리쉬킨 가문은 급격하게 성장했고, 밀로슬라프스키가문과 대결구도를 이루었다. 그녀는 결혼한 이듬해인 1672년에 건강한 표트르를 낳았고, 나리쉬킨 가문의 힘은 강해졌다. 그러다 1674년 알렉세이가 죽고, 밀로슬라프스키 가문 여성이 낳은 아들 표드르가 차르가 됬다.
당연히 실권은 이제 밀로슬라프스키 가문에게 쥐어졌다. 이들은 마트베예프를 쫓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제 밀로슬라프스키 가문의 천하가 되는 듯 했다.
- "내가 몸이 약하지만 외가에 계속 끌려...끄윽." -
그러나 표드르도 생각보다 만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그는 자포로제 코사크들을 제압하려는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여, 오스만 제국의 시도를 좌절시켰다.(1) 그리고 1681년에는 서열에 따른 순차적 임명체계였던 메스트니체스트보란 러시아의 고유한 인사정책을 폐기했고, 유리 돌고루키등의 충고를 받고 마트베예프를 복권시켰다. 하지만 표드르는 1682년 마트베예프가 모스크바로 돌아오기 전에 병으로 후사 없이 죽고 말았다.
<스트렐치 반란>
하필 당시 러시아의 제위 계승법은 건강한 로마노프 가문 남성이면 누구나 차르가 될 자격이 있다 수준이었다. 그나마 소위 장자계승법 체계는 잡혀있었지만 표드르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럼 누가 차르가 되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 "이 분이 이제 새로운 러시아의 차르이시니라! 표트르 1세 만세!" -
선수를 친 건 나리쉬킨가문 및 그들과 동맹을 맺은 유리 돌고루키였다. 이들은 총대주교 요아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재빠르게 10살의 표트르를 차르로 즉위시켰다. 밀로슬라프스키 가문은 한 방 제대로 먹고 만 셈이었다.
그러나 밀로슬라프스키 가문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이들의 대표자는 알렉세이 1세의 딸이었던 소피아 공주였다. 그녀는 마침 스트렐치들의 총대장이기도 했던 유리 돌고루키의 병환으로 스트렐치들이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자, 스트렐치들을 재빠르게 포섭하여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마트베예프가 모스크바로 돌아온 후에 거사하기로 결정했다.
이윽고 5월 17일. 밀로슬라프스키 가문은 이반이 살해당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흥분한 스트렐치들은 크렘린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크렘린에서 그들이 본 것은 골골대기는 했지만 멀쩡히 살아있는 이반이었다. 스트렐치들은 급속히 전의를 상실했고, 마트베예프가 이를 이용해 뛰어난 언변으로 그들을 달래며 해산을 종용하자, 스트렐치들은 자진해산하려고 했다.
- 마트베예프가 살해되는 장면을 다룬 그림. 비통해하는 사람은 표트르의 모친 나탈리야이다. -
그러나 유리 돌고루키의 아들인 미하일 돌고루키가 자신의 스트렐치 장악 능력을 높일 목적으로 갑자기 그들에게 폭언을 퍼부으며 해산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스트렐치들은 다시 흥분했다. 그들은 미하일을 죽여버렸고, 그를 시작으로 반 밀로슬라프스키 가문 파벌들에 대한 학살극을 시작했다. 마트베예프는 표트르의 바로 눈 앞에서 스트렐치들에게 토막이 나버렸고, 유리 돌고루키는 자신의 집에서 살해되었다. 표트르의 외삼촌 중 한명은 기적적으로 궁정에 숨었지만, 며칠 후에 폭도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스트렐치들에게 넘겨져 고문당하고 살해되었다.
이제 모스크바는 소피아와 밀로슬라프스키 가문의 세상이 되었다. 나탈리야 태후와 요아힘 총대주교 역시 그들에게 굴복했다. 결국 스트렐치들의 청원대로 이반이 상급차르, 표트르가 하급차르가 되는 식으로 공동차르가 되기로 하는 형식으로 공동차르 체제를 성립시키는 것이 결정되었다. 당연히 섭정은 소피아가 맡았다.
- "이 몸이 러시아의 섭정. 더 정확히 말하면 실질적인 차르이니라!" -
그런데 이 상황을 지켜보던 구교도들이 스트렐치들을 선동하여, 자신들의 지위 회복을 꿈꾸는 사단이 벌어졌다. 하필 스트렐치들의 대장인 호반스키가 구교도들에게 호의적이라 구교도들의 시도는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듯 했다. 결국 소피아는 차르들을 데리고 모스크바를 벗어났다가 기습적으로 호반스키와 그 아들을 처형했다. 이에 반발한 스트렐치들이 봉기했지만, 곧 협상을 통해 제압되었고, 이제 러시아는 소피아와 밀로슬라프스키 가문의 천하가 되었다.
<소년 군대>
사실상 러시아가 소피아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자, 나탈리아는 아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표트르를 모스크바 근교의 프레오브라젠스코예 마을로 보냈다. 표트르는 그 마을과 그 근처의 외국인 거류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건강하고 튼튼했던(2) 표트르는 그 곳에서 전쟁놀이에 심취했다. 그는 읽고 쓰는 것을 제외한 것은 별로 배우지 못했지만, 전쟁놀이에는 정말 열심이었다. 그는 근처에 살던 외국인들 및 자기 또래의 귀족 아이들과 함께 전쟁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소피아와 밀로슬라프스키 가문 사람들은 이를 단순한 꼬마들 장난으로 치부하고 이를 방치했다.
- "애가 건강한 건 좋은데 너무 놀기만 해서야 원." -
그러는 동안 표트르는 전쟁놀이도 하고, 외국인들과 사귀었다. 많이 배우지는 못 했지만 그래도 지식욕은 넘쳐났던 그는 1684년부터 수학, 기하학, 축성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배를 만드는 데 푹 빠졌다. 그는 외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나중에는 아예 페레야슬라블에서 배를 건조하고 놀기 시작했다. 모후 나탈리야가 이를 걱정하여, 1689년에 그를 예브로키야란 귀족 여자와 결혼시키고, 그 해 여름에는 모스크바로 소환시켰지만 그의 활달하고 지나치게 외향적이며 개방적인 성격은 딱히 변하지 않았다.
<바실리 골리친>
- "이 몸이 단순히 애인 잘 만난 사람만은 아니라 이 말씀" -
1682년부터 소피아는 샤클로비티,바실리 골로친등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를 섭정으로써 운영하기 시작했다. 일단 소피아 자신도 나름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고, 결정적으로 그녀의 연인이었던 바실리 골로친은 내정이나 외교 분야에서는 꽤 능력이 있는 위인이었다. 상당한 권력을 휘둘렀던 바실리 골로친은 농노제 폐지도 구상하고 서구적으로 생활할만큼 꽤나 개방적인 인물이었고, 실제로 잔혹한 형벌을 완화시키는 등의 개혁 정책을 보였다. 동시에 그는 1686년에 폴란드의 왕 얀 소비에스키와 '영구적 평화조약'을 맺어서, 키예프의 소유권을 영구히 인정받았다. 이는 러시아의 외교적 성공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소피아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바로 외정의 실패였다. 동쪽에서는 청나라 군대가 알바진을 대대적으로 공격했지만, 러시아는 청나라 군대를 막아낼 힘이 없었고, 결국에는 알바진을 사실상 포기하는 것은 물론 최악의 경우 네르친스크까지 청나라에게 넘겨주는 것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했었다. 하지만 시베리아 문제만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영구적 평화조약'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이것이 소피아의 몰락을 자초했다.
- "퇴각! 퇴각하라!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
'영구적 평화조약'의 내용 중에는 러시아가 폴란드를 도와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베네치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연합인 신성동맹이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치루는 중이었는데(3) 러시아도 이에 합류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바실리 골로친은 1687년과 1689년, 2차례에 걸쳐 오스만제국의 속국인 크림 칸국을 공격했다. 하지만 2차례의 원정 모두 참패로 끝났다. 이에 따라 소피아 정권에 대한 지지율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결국 소피아는 2차 크림 칸국 원정을 크림반도까지 진입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을 들어 승리라고 우겨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스크바에 돌아와있던 표트르가 제동을 걸었다. 그는 포상을 꽤 오랜기간 거부하는 등, 대놓고 이 원정은 패배이며, 동시에 소피아의 통제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마침 표트르의 전쟁놀이 상대들이었던 소년 군대도 상당한 규모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며, 표트르를 지원하고 소피아를 위협했다. 결국 소피아는 스트렐치의 대장은 샤클로비티와 함께 표트르를 제거하고 아예 소피아를 제위에 올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소피아의 몰락>
1689년 8월, 뜬금없이 표트르가 소피아를 제거할 거란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친소피아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 표트르와 모후 나탈리야는 측근들만 데리고 서둘로 트로이체 세르기예프 수도원으로 피신했다. 곧 수도원으로 총대주교 요아힘, 표트르와 친했던 스코틀랜드인 고든이 이끄는 외국인 용병 연대, 그리고 이제 어느정도 성장한 표트르의 놀이친구들인 소년 군대의 일원들, 모스크바 시민들이 수도원으로 달려갔다. 심지어는 소수의 스트렐치들도 표트르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대세는 급격히 표트르 쪽으로 기울었다.
- 트로이체 세르기예프 수도원의 현재 모습. 트로이체라는 건 삼위일체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 수도원은 황실 피난처로 자주 애용되어왔었다. -
결국 소피아는 굴복했다. 소피아는 수녀원에 유폐되었고, 샤클로비티 등 소피아의 측근 다수는 처형되었다. 바실리 골로친은 표트르의 측근이었던 사촌 보리스 골로친이 구명운동을 벌인 덕에 유배로 끝났다. 이반은 계속 차르의 자리를 유지했지만 워낙 병약하므로 표트르는 원한다면 자신이 권력을 무한정 행사할 수 있엇다.
하지만 표트르는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는 소피아를 몰아낸 후 다시 놀아제끼기 시작했다. 이제 실권은 요아힘 총대주교와 모후 나탈리야가 차지했다. 총대주교 요아힘이 1690년에 죽자, 나탈리야가 단독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나탈리야는 반외국인 정책을 폈다.
- 프란츠 레포르트. 그는 표트르에게 술과 여자, 서구식 문화에 대해 가르쳐준 인물로 알려져있다. -
그 동안 표트르는 무엇을 했는가... 말 그대로 놀았다. 그는 이 무렵 스코틀랜드인 고든이나 스위스인 레포르트와 친구가 되었다. 특히 그는 레포르트와 친구가 되었는데, 레포르트는 그를 자주 독일인 거주지로 데려갔다. 거기서 표트르는 카톨릭 예배도 구경하고, 독일식 옷을 입으며 독일식 춤을 추기도 했다. 그리고 거기서 독일인 여성인 안나 몬스란 여자와 사귀기도 했다. 그는 외국 문화에 굉장히 친숙해지고 있었다.(4)
이 무렵 그는 종교에도 냉담해져있었다. 그는 이 시기에 '가장 익살맞은 모임'(5)이란 모임을 조직했는데, 이 조직에서 표트르와 그의 측근들은 국가 의식이나 교회 의식을 과장되게 흉내내며 조롱하기를 일삼았다. 몇몇 기록들에 따르면 이들은 성직자 복장을 입고 바쿠스 숭배를 운운하면서 우스꽝스럽게 의식을 하고, 술을 마셔대었다고 한다. 이런 행위들은 거의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를 본 사람들은 외국인이든, 러시아인이든 모두 이를 혐오했지만 차르한테 개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냥 방치했고, 표트르도 사람들의 안 좋은 시선을 알았지마 개의치 않았다.
그러다 1694년 모후인 나탈리야가 죽었다. 아직 이반은 살아있었지만 그는 국사를 관장할 상태가 못 되었다. 이제 표트르는 싫든 좋든 국사를 관장해야 했다. 다행히도 그는 2미터에 달하는 큰 키에 걸맞게 러시아를 이끌어나갈 원대한 포부를 갖춘 상태였다.
(1) 그 유명한 코사크의 편지가 이 당시에 있었던 일이다.
(2) 성인이 되었을 때 그의 키는 2미터가 넘었다고 한다.
(3) 그 유명한 빈 공방전으로 촉발된 전쟁이었다.
(4) 물론 그 와중에도 배를 만드는 문제에는 꾸준히 관심을 가져 아르항겔스크에서 배를 건조하기도 했고, 북극해에서 배를 타고 가다 빠져죽을뻔한 적도 있었다.
(5) 책마다 번역이 다 다르다. 가장 술취한 평의회라고 번역한 곳도 있고, 책마다 다 표기가 다르다.
첫댓글 표트르 키가 엄청 컸네요
아... 드디어 피터~~~~
키 2미터 이야기는 처음듣는데 여역시 불곰국 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