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 줄줄이 사탕 봉지를 열다-슐리펜 계획<下>

1.슐리펜 계획과 낫질작전
- 흔히 슐리펜 계획은 나치 독일이 2차 대전의 대 프랑스 침공 과정에서 선보인 낫질작전(Sichelschnitt)과 비견되는 경우가 많다.
- 하지만 1차 대전 개전 시 독일이 구사한 슐리펜 계획은 히틀러가 순식간에 프랑스를 들어 먹어버린 낫질작전과는 그 개념에서는 공통점이 많지만 전략적 구사나 실행과정에서 수많은 오류가 드러나며 참호전과 소모전, 그리고 양면전선이라는 최악의 구렁텅이를 만들며 독일을 그 진창 속으로 떨어뜨렸다.


꽤나 비슷한 슐리펜 계획과 낫질작전..
- 양자의 차이를 일단 실행부분은 접어두고 계획상으로만 비교해 보면,
- 첫째, 가장 기본적인 작전의 실행 배경부터 오류가 생기는데 슐리펜이 이 계획을 완성했을 때 가장 전제조건이 바로 양면전쟁의 회피였고 이를 적용시키려면 먼저, 러시아와의 개전을 최대한 연기시키든지 최소한 동시 개전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당시 독일은 러시아에 먼저 선전포고를 하는 뻘짓을 저질렀다.
- 당시 독일은 1914년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포고하고 8월 2일 룩셈부르크를 침공했으며, 8월 3일에는 프랑스에 선전포고, 8월 4일에는 벨기에가 자국의 영토를 통해 프랑스를 침공하려는 것에 대해 거부하자 벨기에에도 선전포고하는 줄줄이 선전포고 삽질을 해댔다.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발표하는 독일 수상과 이를 보도한 당시 신문..
- 이런 삽질로 이미 러시아는 전쟁준비에 돌입한 상태였고, 러시아가 전쟁준비를 완벽히 하기전인 41일 이내에 프랑스를 굴복시킨다는, 슐리펜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간 싸움”에서부터 독일은 말아먹고 들어간 것이다(당연히 히틀러는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으로 뒤를 막아놓고 프랑스를 쳤다..물론 히틀러는 금세 까먹고 영국을 뒤에 두고 소련으로 기어들어가 신세를 조지지만..)
- 물론, 사라예보 사건으로 러시아와의 개전이 불가피하게 되어버려 일이 틀어져 버렸다면 최소한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놓고 먼저 제안한 협상에 응할 듯 하며 페이크라도 쓰며 시간을 벌던지 아니면 슐리펜 계획을 대신할 플랜B나 플랜C가 있던지 해야 하는데 당시 독일 제국은 그딴 거 없었다(게다가 러시아가 예상을 깨고 신속하게 나오면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에 대한 대비책도 없었다는..)

독소 불가침 조약..이런 걸 먼저 해야 될꺼 아냐! 아님 플랜B라도 있던지..
- 둘째, 슐리펜 계획은 순수한 군사 전략이었지 이 계획의 실현에 전제되어야 할 국제적 여파나 정치적 배경 따윈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작성되었고, 이를 계획한 슐리펜마저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았으며 벨기에를 침입했을 때 관련국에(프랑스의 동맹국..여기서는 영국과 똘마니들..)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혹은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따윈 모르쇠 계획이었다(그냥 전쟁나면 무조건 벨기에 거쳐서 프랑스 조지고 다음 러시아 조진다 라는 계획만 있다능..)
- 즉, 이 계획의 치명적인 약점은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전쟁 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다양한 측면들의 고려, 즉 여러 가지 고려요소들을 무시한 경직성에 있었고 이로 인해 전쟁은 무조건 프랑스와 러시아와 동시에 싸워야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만들었으며 만약 발칸반도에서의 국지전마저도 자동적으로 국제전으로 만드는 희안한 군사전략이었다.

사방팔방으로 전쟁을 벌인다..당시 독일의 선전 삽화..잘도 이기겠네..
- 따라서 이를 실행할 주체가 이를 잘 검토하여 그 실행여부를 결정하던지 아니면 국제정세나 현실상황을 고려하여 융통성 있게 수정하여 구사하여야 하는데 이런 것들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그저 곧이 곧 대로 작전을 실행되었다(게다가 당시 독일군 사령관이던 小 몰트케는 그럴 인물도 못됐다는..삼촌의 빽이 크게 작용한 낙하산..게다가 이 계획이 수립될 당시에는 영국의 전쟁 불참이 전제되어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 물론, 히틀러가 낫질 작전을 벌일 당시엔 이미 영국의 참전이 결정되어있는 상황이었고 영국의 대륙 원정군이 프랑스에 대거 주둔한 상황이었으므로 독일은 벨기에를 침공하는 페이크 작전으로 영-불 연합군을 끌어들여 포위 섬멸하는 작전을 구사한다(덩케르크에서 다 놔주긴 했지만..하지만 빌헬름 2세와 몰트케는 그런 건 생각도 못했고 당시 영국은 그때까지 정확하게 참전의사를 밝히지도 않았다..)


비교되는 독일의 두 장군..낫질작전의 창안자 만슈타인과 그냥 낙하산 소 몰트케
- 셋째, 슐리펜 계획은 기본적으로 기동전이었지만, 작전 교리가 작성될 당시, 슐리펜은 과학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발전할 줄 몰랐으며 기본적으로 나폴레옹 시대의 전술교리로 작전을 수립하였고 이후 시대가 바뀌면 그에 따른 작전의 수정이 가해져야 하지만, 후임인 소 몰트케와 참모장교들은 이 전술을 갈고 닦을 줄만 알았지 융통성 있는 수정은 생각지도 못했다.
- 즉, 속도가 생명인 기동전에서 철도로 대표되는 프랑스 교통망의 활용은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상대가 퇴각할 때 철도망을 파괴한다는 것쯤은 기초적인 후퇴전술이어서 이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하는데 독일군에게는 이러한 철도를 보수할 전문 공병부대나 병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이용할 생각만 했지 파괴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랐다는..)


열차로 전선으로 투입되는 독일군과 파괴된 철로망..
- 일이 이렇게 되자 개전이후 프랑스군이 후퇴하면서 파괴한 철도망을 보수할 인원들을 부랴부랴 꾸려서 투입했지만 당연히 철도망의 수리 속도보다 진군속도가 더 빨랐고 당장 보급문제가 발생, 앞서 나간 독일군 병력들은 나폴레옹 시대처럼 현지 약탈로 배를 채웠고 결국 국제적 인식과 이미지만 나락으로 떨어졌다.
- 거기다 보급 지원에 대한 계획마저 부실하기 그지없어서 당시만 해도 전쟁의 필수 자원인 말이 먹을 식량에 대한 수송계획 자체가 없어서 현지약탈로도 이를 보충하지 못해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은 다 굶어죽고 사람만 남은 기병대가 수두룩했으며, 얼마 안 남은 말들도 더 이상 전투용으로는 쓰지 못하게 되어 수송 용도로나 겨우 활용하는 삽질을 벌였다(전차와 트럭으로 대표되는 나치 독일의 낫질작전에서는 이런 보급상의 난맥을 걱정할 필요가 별로 없었다..)


도보로 전진하는 독일군 보병과 기마 수송대..
- 작전계획에서만도 이런 부실한 점들이 수두룩한 슐리펜 계획은 이후 그 실천과정에서도 삽질들이 난무했고 독일군 수뇌부들마저 갈팡질팡을 반복하며 완전히 진흙탕으로 빠지게 된다.
2. 낙장불입
- 한편, 빌헬름 2세는 지가 벌여놓고도 왠지 일이 점점 커지는 듯하자 갑자기 불안감을 느꼈으며 승리가 불확실한 슐리펜 계획 대신 프랑스의 중립을 영국이 보증하는 약속을 받아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늦게나마 하게 되었고(그리되면 양면전 대신 러시아만 패면 되니까..아니면 그냥 적당히 협상하던가..)
- 또한, 당시 영국도 느닷없는 발칸의 분쟁이 전 유럽을 휩쓰는 전쟁으로 커지려 하자 직접적 참전은 일단 유보하고 관망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특히 영국 내각이나 사회 지도층 대부분은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사실 독일이 영국이 보증한 벨기에를 침범하지 않는다면 영국의 직접적인 참전은 이뤄지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적극적 참전에 부정적이었던 영국 수상 데이빗 로이드 조지.. 옆에 처칠 말고..
- 이에 따라 빌헬름 2세는 일단 서부전역을 유보하고 러시아를 치자라고 몰트케에게 전했으나, 이미 병력이 이동 중이고 여기서 우왕좌왕하면 도로 프랑스에게 뒤통수를 맞는다고 적극 반대함에 따라 대 프랑스 개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 벨기에 침공 직전에는 영국의 참전 가능성이 높으므로 벨기에를 우회해서 프랑스를 치자라고도 해봤으나 벨기에 안 넘어가면 계획이 다 무너지고 다른 계획도 없으며 이미 일부 병력이 벨기에 국경을 넘었다고 펄쩍 뛰어서 어쩔 수 없이 입 다물고 찌그러졌다(아, 폐하가 전쟁하자고 큰소리 쳤쟈나! 이제 와서 무르는 건 안됨! 낙장불입! 뭐 그랬다는..)

전진하는 독일군.
3. 슐리펜 계획의 실행
- 결국 독일은 8월 3일에는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고 이에 8월 4일에는 프랑스가 의회 만장일치로 독일과의 전쟁을 결의했다.
- 이렇게 이미 높은 수준으로 산업화되어버린 당시 열강들은 이미 군주들이 일일이 통제하기는 어려운 수준으로 복잡해졌으며, 민족주의의 열풍은 군주들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해 있었고
- 오히려 군주들의 어설프고 띨띨한 조치와 겉멋 든 허풍은 소위 평화주의자들은 겁쟁이, 매국노로까지 몰릴 정도로 민족주의의 광풍에 휩싸여있던 이 시기,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에 불을 당겼다.

평화를 외치다 전쟁 직전 암살 당한 프랑스 정치가 쟝 조레스(Jean Léon Jaurès)
- 거기에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대륙에선 전면전이 거의 백 년간 없었던 탓에, 당시 유럽인들의 사고에서 전쟁이란 기껏해야 멀리 떨어진 지구촌 어느 구석에서 창 들고 활 든 토착민들을 압도적으로 우월한 근대식 무기로 학살하는 것에 불과했고 군데군데 벌어진 국지전들도 대략 몇 개월이면 끝이 났기에 이 전쟁도 한 몇 개월 정도 형식적으로 치고 받다가 끝날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 거기다 민족주의와 군국주의 열풍으로 많은 유럽의 젊은이들은 전쟁과 모험에 흥분하고 있었고(히틀러 포함..) 독일이 1914년 8월 3일,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자 안 그래도 알사스-로렌 문제로 복수심에 가득 찬 프랑스 국민들은 난리가 났고 파리 시청에 알사스-로렌의 깃발을 올리는 등 전쟁을 대환영하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전쟁 터졌다고 난리 난 프랑스 파리..1년 뒤엔...
- 이윽고 1914년 8월 4일, 이젠 빼도 박도 못하는 슐리펜 계획에 의해 독일군은 벨기에 국경을 넘었고 8월 5일, 벨기에의 리에쥬 요새에서 제 1 차 세계대전의 그 첫 번째 교전이 벌어지게 된다.



출처 : http://blog.daum.net/mybrokenwing/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