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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나라 태공망 강태공(姜太公) -
운도 지지리 없는 놈이라고 하늘의 무심함을 탓하지 말라!
내가 수십년간
낚시를 벗하며 때를 기다리는 동안 조강지처마저
나를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되고서야 문왕 서백을 만나 은나라
주왕(紂王)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나는 숱한
세월을 낚으며 늙은이가 되었지만 결코
하늘을 원망하거나 포기않았고
그 인내의
결실이었던 단 한번의 기회로도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참고자료>
강태공
강태공 강상(姜尙)은
기원전 1211년(은나라 경정(庚丁) 8년)에 출생하여 기원전
1072년(주강왕 6년)에 까지 나이가 139세에 달했다.
또다른 중국 기록에서
강상은 기원전 1140년 9월 12일(음력 8월 3일(~5) ~ ?)에
태어났다고 한다.
기원전 11세기
중국의 은나라를 멸망시킨 인물로 염제신농
(炎帝神農)의 후손이며, 동해가 고향이다.
동해는 동해상으로도 불린다.
성은 강(姜), 씨는 여(呂), 이름은 상(尙),
자는 자아(子牙)이며,
호는 비웅(飛熊)이다.
주왕이 항시 꿈에서라도 바라던 인물이 비로소 나타났다
하여 흔히들 태공망이라고도 불렸다
강태공의 본관은
천수 강씨(天水姜氏)이며, 염제신농씨의
후손이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공신이며,
전국칠웅인 제(齊)나라의 왕이 되었다.
강태공의 자손들
(강급, 강소백 등)이 대대로 제나라를
이끌어왔으며,
이 시기에 중국의
강(姜), 고(高), 노(盧), 여(呂), 구(丘,邱), 정(丁),
최(崔), 시(柴), 허(許), 사(謝), 하(賀), 경(慶),
장(章), 제(齊), 신(申),
악(岳), 기(紀), 상(尙), 두(钭), 강(强)씨 등 총 102개의
수많은 성씨가 강태공의 자손으로부터 갈라져나갔다.
강태공 사당에는
해마다(매년 9월 12일 중국 산동성/제나라 문화축제) 강태공의
후손과 강씨에서 분파된 성씨가 대거 참례를 온다.
현재 강태공의 후손은
분성 성씨 외에 한국의 진주 강씨와 중국의
천수 강씨가 있다.
한국의 강태공(姜太公)의
후손 8개 성씨로는 진주강씨(姜氏), 노씨(盧氏/교하노씨 등), 구씨(丘氏/평해구씨), 여씨(呂氏/함양여씨 및 성산여씨), 최씨(崔氏/충주최씨 및 전주최씨 대다수), 정씨(丁氏/압해정씨 및 나주정씨), 시씨(柴氏/태인시씨), 장씨(章氏/거창장씨)가 있다.
강상은
염제(炎帝) 신농(神農)의 51세손이요,
백이(伯夷)의 36세손이기도 하다.
주나라 문왕, 무왕, 성왕(成王),
강왕(康王) 4대에 걸쳐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춘추전국 시기의
제(齊)나라의 창시자요, 딸은 주 무왕의 왕후이다.
때는 기원전 1046년 2월 겨울,
상나라 주왕의 흉폭한 정치가 계속되어 천하가
비탄에 젖어 있을 시
홀연히 나타나
주 문무왕의 스승이 되어 4만 5천의 군사로 72만의 상군을 대파하는
기적적인 전쟁을 일구어낸 동이지사(東夷之士)이며 기인(奇人)이다.
이 전쟁을
목야전쟁(牧野戰爭)이라 하며, 목야전쟁이 주는 의의는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섬멸한 기적의 전쟁이요,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정의(正義)는 반드시 필승(必勝)한다는 정법을 확립시킨
정의필승의 전쟁이며,
대륙을
통일한 천하통일전쟁이라
할 것이다.
이후 제나라를 일으켜
제1대 초대 국왕으로 제나라는 32대 근 800여
년을 존속하였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 무왕의 스승이자 장인이며 천하의 스승국의
위치로 군림하여 제나라의 임금(제 태공)이 되었다.
제나라의 2대 군주의
지위를 큰아들 강급(姜及)에게 물려주었고, 강급은
제 정공(齊 丁公)이라고 불렸다.
강태공을
이어 제나라가 가장 흥한 시기는 제 환공
강소백(姜小白) 시기로
강소백은
춘추시대 첫번째 패왕(覇王)이 되어 중국 천하를
호령하며 강태공의 얼을 이었다.
제나라
최전성기에는 사방 5000리를 이룩한 대국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강태공이 남긴
유명한 명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복수불반분”
(한 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이다.
강태공의 전 부인 마씨는
강태공이 주문왕을 만나기 전 생활고에 견디다 못해
강태공 곁을 떠났는데,
이후 강태공이
성공했을 때 다시 돌아와서 아내로 맞아주길
요청했다.
이에 강태공은
하인더러 물을 떠오라고 한 후 그 물을
땅에 엎었다.
그리고 돌아온
아내에게 지금 바닥의 그 물을 다시 항아리에
담는다면 아내로 맞이 해주겠다고 했다.
즉, 한 번 떠난 마음은
두 번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는 유명한 명언을
남긴 것이다.
강태공은
기원전 1072년에 신선계에 들었으며,
그때 연세는 139세였다.
의관을 서주(西周) 호경)
(鎬京)에다 안장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강태공의 덕을
생각하여 제나라에다 강태공 의관총(衣冠塚)을 세웠다.
강태공은
주역(周易)의 확립자이며, 강태공이 저술한 육도삼략
(六韜三略)이 현재에도 전해져 오고 있다.
육도삼략은
중국 고대 병서의 최고봉인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의 둘을 차지한다.
후대인 손무의
손자병법도 강태공의 육도삼략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후일 대륙을 정복한
청나라 황실에서조차 강태공을 무성왕(武成王)으로
칭하여 천하통일을 이룬 군주로 인정하였다.
태공망의 생애
태공망의 이름과 출신
흔히
강태공(姜太公)으로 알려져 있는 강상은
동쪽 바닷가 동해사람이다.
그 선조가 일찍이
사악(四嶽)으로 우(禹, 중국전설상의 하(夏) 왕조 시조)를
도와 물과 땅을 정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순 임금과 하(夏) 때는
여(呂)와 신(申) 땅에 봉해졌으며, 성을
강씨(姜氏)라 했다.
하와 상 때는
신과 여 땅에 방계 자손이 봉해지기도 하고 평민이
되기도 했는데 강상은 그 후손이다.
강상은
여상(呂尚), 태공망(太公望)이라고도 불리는데 여상은
봉지인 여(呂)에서 성을 취하여 부른 것이고,
태공망은
주 문왕과의 일화와 관련이 있다.
주문왕(周文王)과 주무왕(周武王)의 사(師)가 된 여상
여상은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사(師)가 되었는데, 이에 대한 몇 가지 말을
사마천의 《사기》의 제태공세가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주(周)의 서백(西伯)이
사냥을 나서기에 앞서 점을 쳤더니 “얻을 것은
용도 이무기, 호랑이도 곰도 아니다.
패왕을
보좌할 신하를 얻을 것이다.”라는
괘가 나왔다.
그 후 서백은
사냥에 나섰다가 위수(渭水) 북쪽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여상을 만나게 된다.
당시 여상은
곤궁하고 나이가 많았는데, 여상을 본 서백은 몹시 기뻐하며
“우리 선군이신 태공(太公) 때부터
‘성인께서 주에 오시면
주가 흥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당신이 바로
그 분 아니십니까?
우리 태공께서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라고 하며 그를 ‘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렀고, 사(師)로 모셨다.
여상은 보고 들은 것이 많았고,
일찍이 주(紂, 상(商)왕조의 마지막 왕)를 섬겼으나
무도하여 그를 떠났다.
제후에게
유세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내
서쪽 서백에게 귀의하였다.
여상은
처사로 바닷가에 숨어 살고
있었으나,
서백이 유리(羑里)에
갇히자 평소 알고 지내던 산의생(散宜生)과
굉요(閎夭)가 여상을 불렀다.
여상은 미녀와 기이한 물건을 구해
주 임금에게 바쳐 서백의 죄를 면하게 했고, 서백은 풀려난 후
여상은 서백(후에 문왕)의 사(師)가 되었다.
제(齊)나라 건국
서백 창(昌)은
유리에서 벗어나 돌아온 후 여상과 모의하여 상 정권을
무너뜨렸는데,여상의 용병술과 권모, 계책이 많이 쓰였다.
서백이 주 문왕(文王)이 되고
천하의 3분의 2가 주에 귀의했는데 이 역시 여상의
많은 권모와 계책 덕분이었다.
여상은
권모와 계책에 능한 훌륭한 정치가이자
병법가였다.
문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했다.
2년 후
임금은 왕자 비간(比干)을 죽이고
기자(箕子)를 가두었다.
무왕이 주 임금을
정벌하기에 앞서 거북점을 쳤는데 징조가 불길하게
나오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공들이 모두 두려워했으나
오직 여상만이 무왕에게 강하게 정벌을 권하였고, 무왕은 마침내
정벌에 나서 상을 평정하고 천하의 왕이 되었다.
무왕은
사상보(무왕은 여상을 사상보(師尙父)라 했다.)를
제(齊)의 영구(營丘)에 봉했다.
여상은
동쪽의 봉국으로 가서 정치를 고쳐 그곳의
습속에 따라 예를 간소하게 했다.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어업과 소금업의 이점을 잘 살리니 많은 인민들이
제로 와서 제가 큰 나라가 되었다.
또한 주 성왕(成王)이
어릴 때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난을 일으키고
회이(淮夷)가 주를 배반하자
여상에게
다섯 등급의 제후와 아홉 주의 우두머리들에
대한 정벌권을 부여했다.
정벌권을
가진 제는 더 큰 나라가 되었고, 영구를
도읍으로 삼았다.
태공이
약 백 살 넘어 죽고 그 아들의 아들로
제나라는 이어졌다.
현대적 의미
강태공은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다가 서백에게
등용되어 입신출세하였다.
강태공은
많은 세월 위수에서 한가로이 낚시를 했는데, 사실은 고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세월을 낚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에는
이러한 강태공의 고사를 잘 알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저 한가롭게 낚시나 하러 다니는 사람,
혹은 낚시를
무척 좋아하는 낚시광을 일러
강태공이라 부른다.
강태공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때를 기다려 제후 자리에까지 오른 강태공의
생애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관련 작품
서적
《봉신연의(封神演義)》
명(明)대 신마소설(神魔小說) 《봉신연의(封神演義)》 는 100회로 이루어진 장회소설로, 신마소설은 신과 마의 다툼을 소재로 한 소설로 노신(魯迅)의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 에서 처음 쓰인 용어이다. 봉신연의의 자세한 창작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략 융겅(隆慶, 1567~1572)에서 만력(萬曆, 1573~1619) 연간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저자는 육서성(陸西星)이라는 설과 허중림(許仲琳)이라는 설이 있다.
강태공이 주(周) 문왕(文王), 무왕(武王)을 보좌하여 상(商)의 주(纣)를 토벌한 역사적 배경을 그리고 있으며, 많은 고사이야기와 강태공 이야기 이외에 다양한 신선, 요괴 및 闡敎, 截敎의 도교 교파 간의 싸움이 등장한다.
《강태공전》
《강태공전》은 작자와 창작 연대 미상의 조선후기 한글소설이며, 《강태공실기》라고도 한다. 《강태공전》은 역사적 사실로 전승되어오던 ‘무왕벌주(武王伐紂)’ 설화를 강태공의 일대기를중심으로 비현실적이고 신이한 요소를 더하여 소설로 꾸민 작품이다. 필사본 10종, 경판 방각본 3종, 활자본 8종이 현존한다. 강태공전은 봉신연의의 한글 축약 번안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강태공전》은 강태공을 중심으로 《봉신연의》를 재구성했다. 따라서 봉신연의에 비중 있게 등장하던 여타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는 매우 간략하게 다루거나 심지어 생략하고 있다.
《육도삼략(六韜三略)》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주나라 강상(강태공)이
썼다고 전해지는 고대의 병법서이다.
관련 고사성어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한번 저질러진 일은 되풀이하지 못한다.
상(商)나라말기
주왕(紂王)은 연못을 술로 채우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 놓고 즐긴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나라를 도탄(塗炭)에 빠뜨리고
있었다.
이에 주의 무왕이
아버지 문왕의 유지를 받들어 강상(姜尙)등의
도움으로 난을 일으켜
주왕(紂王)을
몰아내고 상(商)나라를 무너뜨린 뒤,
주(周)나라를 세웠다.
본래 강상(姜尙)은
동해의 한 마을에서 가난하게 사는
선비였다.
그가 마씨(馬氏)와 결혼을 했는데
늘 책만 읽고 가정은 돌보지 않아 끼니를 이을 수조차
없을 만큼 가난하였다.
이에 마씨(馬氏)는
집을 나가 버렸고, 강상(姜尙)은 허구헌날 낚시질만
하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서백(西伯)을 만나 입신출세하여 제(齊)나라의
시조가 되었을 때
집을 나간
마씨(馬氏)가 돌아와서 이제는 밥 굶을 일
없으니 다시 살겠다고 했다.
강상(姜尙)이
마씨(馬氏)에게물을 길러오라 시키고, 물을
길러오니 다시 마당에 부으라고 하였다.
마당에 물을 부으니
이제는 그것을 다시 동이 주워 담으라고 하자 마씨(馬氏)가
땅에 엎질러진 물을 어찌 주워 담을 수 있냐고 따졌다.
이에 강상(姜尙)이 말했다.
"한번 엎지른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고,(복수불반분, 覆水不返盆)
한번 나간 아내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유래된 말이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수구초심(首丘初心)|-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근본을 잊지 않는 마음
강태공(姜太公)은
제(齊)나라 영구(營丘)에 봉해져 계속해서 오대(五代)에 이르기까지
살았으나 주(周)나라에 와서 장례(葬禮)를 치렀다.
이를 두고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고지인유언 왈호사정구수인야(古之人有言 曰狐死正丘首仁也;음악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즐기며 예란 그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옛사람의 말이 있어 말하기를
「여우가 죽을 때 언덕에 머리를 바르게 하는 것은
인(仁)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유래된 말이 수구초심(首丘初心)이다.
이는
《예기(禮記)》 단궁상편(檀弓上篇)에
나오는 말이다.
[출처] 주나라 태공망 강태공(姜太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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