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海瓚 총리: 한나라당은 지하실에서 차떼기 하고, 수백억 들여온 정당 아닙니까.
安澤秀 의원(한나라당): 흠없는 정당, 정부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李海瓚: 차떼기 하지 않았습니까.
安澤秀: 작은 부분을 가지고 평가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李海瓚: 한나라당은 다수의 위력으로 다른 의원들의 투표를 방해하면서 대통령을 탄핵하지 않았습니까.
安澤秀: 답답하고 편협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李海瓚: 의원님 생각은 자유입니다.
安澤秀: 망언에 대해 총리는 어떤 책임을 지겠습니까.
李海瓚: 책임질 사안은 없습니다>
#장면 2: 1998년 4월22일 국회 교육委 회의장
<金貞淑 의원(한나라당): 요즘 정부기관에 임명되고 있는 人事, 특히 국영기업체의 人事를 볼 때 이런 지적(호남편중 인사)이 많기 때문에 교육부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거고, 계속 이런 人事를 하실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중략).
李海瓚 교육부 장관: (중략) 이 자리에서 全羅道다, 이런 얘기를 하신다는 것은 대단히 불쾌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시기 바랍니다.
金貞淑: 바깥 여론이 정말 심상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李장관께서 사과하라는 그 내용은 사과를 할 수 없습니다.
李海瓚: 교육부가 언제 호남편중 인사를 했습니까. 제가 들어와 가지고 人事한 사람이 차관하고 재단 이사장하고, 그 다음에 두 사람은 따로 제가 청와대에 신청했는데, 두 사람은 경상도고 두 사람은 호남입니다.
金貞淑: 조사를 해봤는데 (그분들이) 전문성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50%는 전문성이 있고, 50%는 도덕성과 기타 등등 이야기를 하시는데 50%의 전문성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주장도 인정을 하셔야 될 것 아닙니까, 무슨 사과입니까.
李海瓚: 호남이기 때문에 人事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金顯煜(김현욱) 교육위원장: 장관, 조금 진정하시고…>
국회 본회의장에서 야당 의원을 향해 『한나라당이 차떼기 정당 맞지 않느냐』고 날카롭게 맞섰던 李海瓚 총리 때문에 국회가 13일간 공전됐다. 하지만 이게 처음은 아니다. 그는 교육부 장관 시절 한나라당 의원에게 「호남편중 인사」 발언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다가, 국회 교육위원회를 22일간 공전시킨 前歷(전력)이 있다.
그는 지난 11월9일 등 떼밀리듯 사과를 했다. 「謝意」라는 단어를 사과의 뜻으로 써 가면서.
李海瓚 총리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나라당을 강하게 비판한 것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다.
政局돌파용이라는 게 첫 번째 해석이다. 盧武鉉 대통령이 『정권의 운명을 걸고 추진하겠다』는 遷都(천도)가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판결이 나오자, 코너에 몰린 정권을 구하기 위해 총대를 멨다는 것이다.


『독선적인 성격에서 나온 자연스런 발언』이라는 게 두 번째 해석이다. 李총리의 운동권 선배이자, 오랫동안 의정활동을 한 정치인은 이렇게 얘기했다.
『李海瓚 총리의 성격을 안다면 「李海瓚 총리가 총대를 멨다」는 식의 얘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위아래」가 없다. 심하게 말하면 안하무인이다. 국회의원이 깐깐하게 따지는데, 쉽게 물러설 성격이 아니다. 그가 총리로 있는 동안 국회의원에게 머리 숙이는 일은 보기 어려울 것이다』
李海瓚 총리의 취임과 동시에 그를 분석한 책이 출간됐다. 10년 이상 정치권을 취재해 온 한겨레신문 박창식 기자는 수 차례의 인터뷰와 주변인물 취재를 토대로 「쿨하게 출세하기」라는 李海瓚 비평書를 냈다.
朴기자는 李총리가 대중적 인기가 낮으면서도 5選 국회의원·장관·총리를 했다는 점에 착안해 「이해찬式 출세비법」을 추적했다. 그는 李총리의 성공원리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그는 자신의 주제를 일찌감치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한 우물을 팠다. 그는 재야운동을 할 때도 자신의 출신 성분을 살려 지식인 정치운동에 충실했다. 13代 초선의원 시절 야당통합 운동에 팔을 걷어붙였다가 쓴맛을 본 뒤로는 조직운동과 같은 「외도」는 하지 않았다. 李海瓚이 기획가로 성공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먼저 그는 문제의 핵심을 빨리 파악하는 知的 능력을 발휘해 왔다. 그는 계획성 있게 일을 꾸려가는 데도 강했다. 그는 일하는 방식이 필요할 때 딱 잘라 매듭짓는다는 특징도 있다>
李총리의 보좌관·지구당 사무국장 출신으로 12년간 그를 옆에서 지켜봤던 김석철(44)씨도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李총리는 원칙적이고 私心이 없으며 기획력이 뛰어나다. 정치적 상황 판단력도 뛰어나다. 여러 정보들을 판단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탁월해 예상했던 대로 맞아떨어진 경우가 많다. 수리력과 기억력, 추진력도 뛰어나다. 그는 「公人은 자신에게도 엄격하고 남에게도 엄격해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다』
朴기자는 李총리의 정치적 실패 사례도 분석했다.
<그의 실패 사례는 13代 국회의원 시절 야당통합 운동을 벌이다 탈당한 후 무릎 꿇고 다시 복당한 일, 원내총무 경선이나 최고위원 선출에 도전했다가 물먹은 일, 교육부 장관 시절 교원단체들한테 원성을 사다가 끝내 장관 퇴진운동까지 벌어진 일 등이 그것이다. 그는 기획가와 정책가로서의 재능 이상을 요구하는, 대중적 동의를 끌어내는 조직가와 협상가적 재능을 요구하는 일들에서 실패했다>
「쿨하게 출세하기」에 나타난 李海瓚 총리의 평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李총리는 公과 私를 확실히 구분한다. 즉 정치인, 公人으로서 公的 서비스에 만전을 다한다. 公的 서비스로 평가하고, 사사로운 서비스로 평가하지 마라. 私的인 요구를 해봤자 국물도 제공할 생각이 없다>


李총리 보좌관 출신 김석철씨는 李총리의 公私구분 원칙을 실천한 사례를 들려줬다.
『李총리가 교육부 장관 때였다. 하루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동네 사람이 그의 집을 찾아왔다. 그 아저씨의 아들은 부부교사였다. 이 부부교사는 근무지가 달라 서로 떨어져 살았다. 그래서 李장관에게 「아들 부부가 같이 살 수 있도록 근무지를 변경해 달라」고 부탁했다. 李장관은 가능한지 여부를 알아봤다. 그런데 아들 부부가 근무 연한이 미달돼 전근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李海瓚 총리는 나름대로 성공했다.
파벌이 중시되던 3金시대에도 그는 특정 그룹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 주요 당직과 부처 장관을 경험했다. 「성격이 좋지 않다」는 평가가 계속 이어졌지만, 그는 5選 의원이 됐다. 젊은 시절 「민청학련 사건」(1974)과 「金大中 내란음모사건」(1980)에 연루돼 3년 5개월 동안 복역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순탄했다.
일부 야당의원과 재야운동가들이 5·6共 때 수시로 감옥을 넘나들던 것과는 달리 그는 1982년 출옥 이후 투옥된 적이 없다.
李총리는 2002년 大選 당시 민주당 선대기획본부장을 맡아 盧대통령의 당선에 核心역할을 했다. 盧정권 출범 당시 국정원장 자리를 거절했던 그는 현재 행정부의 총괄책임자이다.
「쿨하게 출세하기」는 李총리의 성격에 대해 「인간성이 모나거나 심하게 말하면 나쁜 쪽」이라고 규정했다. 그런 평판은 숱한 사건이 점철되면서 쌓인 것으로 보인다. 취재하는 과정에서 만난 이들 가운데 李총리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李총리가 서울市 정무부시장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당시 서울市 송파구청 재무국장이던 鄭泰福(정태복·70)씨는 1995년 12월18일 「李海瓚 정무부시장실」에서 발생한 그날의 사건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국장인 나를 포함해 담당과장·계장·직원이 李부시장실로 불려갔습니다. 李부시장의 형이 대기업에 다니다가 퇴직금으로 송파구 가락동 근처에 7억8000만원짜리 건물을 구입했지요. 그런데 부동산 등기과정에서 행정적 착오가 있었어요. 그게 문제가 됐습니다』
―무슨 문제였습니까.
『건물價額(가액)과 토지價額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관한 것이었지요. 금액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따라 세금이 달랐습니다. 우리 직원과 李부시장의 형 측과 견해가 달랐어요』
―형이 부동산을 구입했는데 왜 李부시장이 나섭니까.
『정무부시장실에서 근무하던 한 비서관이 우리 구청 담당 계장에게 전화를 했어요. 「건물을 구입한 사람이 李부시장의 형이니까 잘 처리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지요. 형이 아마도 동생에게 얘기를 했겠죠. 전화를 받은 계장은 신경을 썼지만 담당직원의 실수를 발견하지 못했던 거예요』
―무슨 실수였습니까.
『법원 등기소에서 등기를 하는 과정에서 서류가 반려됐어요. 알고 보니 토지가액과 건물가액을 합한 액수가 서로 달랐던 거지요. 계산上의 착오였습니다. 담당과장 전결 사항이었는데 더하기를 잘못 했던 겁니다. 바로 수정조치를 해서 등기가 완료되기는 했습니다』
―큰 실수였나요.
『담당직원이 잘못한 건 맞지요. 그러나 단순한 실수였습니다』
―그런데 李부시장실에 왜 갔습니까.
『저는 그날 오전에 區의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담당과장이 「빨리 부시장실로 가자」며 저를 찾아왔어요.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상황을 설명하더군요. 「서류를 가져오라」고 한 후 직접 확인해 봤어요. 담당직원의 실수가 한눈에 들어왔고, 납득이 가는 단순한 실수였습니다.
그래서 「나까지 갈 필요가 있느냐」고 했더니 「(李부시장이) 국장까지 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李부시장에게 서류를 보여주며 설명을 하면 충분히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고 곧장 달려갔습니다』


―李海瓚 정무부시장과 송파구청 소속 鄭선생과는 어떤 관계라고 봐야 할까요.
『업무상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요. 저와 상하관계가 아닙니다. 법적으로는 서울시가 우리 구청에 대해 감사권을 가지고는 있지요』
―李부시장실에 간 게 몇 시였습니까.
『오후 1시쯤이었어요. 李부시장이 부재 중이라 부속실에서 한 30분쯤 기다렸더니 그가 들어오더군요. 담당직원을 제외하고 저와 과장, 계장이 부시장실로 들어갔습니다』
―차분히 설명하니까 李부시장이 이해를 하던가요.
『가져간 서류를 펴 놓고 설명을 하려던 순간 李부시장이 갑자기 반말로 제게 「네가 뭔데, 얼마 받아먹으려고 그렇게 지시했어」라며 고함을 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순간적으로 돌변하기에 「이 사람 왜 이러나」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더니 「(서울시) 감사관 오라고 그래」 한 후 「담당직원 어디 갔어」라고 했습니다』
―부속실에서 대기 중이던 담당직원은 그때 들어왔습니까.
『네. 그 직원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는지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고는 「잘못했습니다」라고 했어요. 李부시장은 제 부하 직원에게 몇 마디 폭언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서울시 감사관이 들어왔습니다』
―그러고 끝났습니까.
『의자에 앉아 있던 李부시장이 무릎 꿇은 직원을 향해 책인지 서류인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뭔가를 집어던졌어요. 그러고는 그에게 다가가 한 차례의 손찌검을 하는 겁니다. 그 순간 감사관이 달려들어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며 말렸어요. 그런 후 李부시장은 「이자들 재산등록 서류 가져와」 하더군요. 그런 후 감사관에게 「내일 당장 송파구 특별감사 해」라고 했습니다.
감사관은 「국장만 해당되고 나머지 직원은 직급이 낮아 재산등록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요. 저는 그 순간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李海瓚 부시장이 「당장 가져오라」고 해서, 곧장 송파구청에 있던 제 재산등록 서류를 서울市의 다른 직원이 가서 가져왔습니다』(손찌검과 관련해 당시 현장에 있었던 또 다른 당사자는 『한 차례가 아니라 여러 차례 손찌검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뇌물을 받기 위해 일부러 서류를 조작한 것은 아닙니까.
『저는 그 이듬해에 30년이 넘는 공무원 생활을 마감하는 퇴직을 앞두고 있었어요.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무슨 뇌물입니까. 감독 책임이 있는 제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李부시장은 저를 도둑놈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속이 아주 상했어요. 당시 그의 나이 40代 중반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무리 부시장이라고 하지만 젊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제 인생이 처량해지더군요』
―당시 재산은 얼마나 됐습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현재 살고 있는 집 하나뿐이었습니다. 李부시장은 제 재산등록 서류를 檢事처럼 꼼꼼히 보더니 「숨긴 것 없어. 이게 다야?」라고 하더군요』
―李부시장실에서 언제 나왔습니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오후 5시가 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송파구청으로 바로 돌아왔습니까.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후 감사관실에서 경위서를 작성하고 추가로 조사를 받았어요. 그렇게 끝난 시각이 밤 10시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9년 전의 일을 어떻게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 제 일기에 그날 일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어요. 그게 아니더라도 평생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그런 일은 처음이었으니 기억을 못 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요』
―특별감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감사거리가 안 됐는데 무슨 감사가 있었겠습니까. 그 자리에 있었던 감사관도 「단순한 실수를 가지고 부시장이 난리다」고 했어요. 누가 봐도 단순한 실수를 고의로 몰아 넣은 데 대해 너무 화가 났어요』
―부하 직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고의가 아니고 단순한 실수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묻습니까. 부하 직원이 제게 미안해하며 「사표를 쓰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작은 실수를 가지고 사표 내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만류했지요』
―그 일이 있은 후 李부시장이 「미안하다」는 뜻을 전달해 오던가요.
『사과는 무슨 사과…』
―이후 李부시장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제가 왜 그 사람 얼굴을 봅니까. 그 일이 있은 후 선거기획단장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黨으로 가버렸어요』
―李부시장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했어요. 1998년 그가 교육부 장관이 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교육부, 참 잘도 되겠네」라고 혼자 중얼거렸지요. 총리가 된다고 했을 때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총리하나. 나라가 좀 시끄럽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형 문제로 난리 친 사람이 어떻게 국정을 논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


鄭泰福씨는 20代 공무원 초년병 시절 겪었던 일을 하나 들려줬다.
『강원도 지방과 행정계에 있을 때였어요. 1958년 제 나이 스물여섯 살이었지요. 강원도 지방공무원 교도원(지금의 공무원연수원) 업무를 맡고 있었어요. 연수가 끝난 공무원들에게 강원도지사 명의의 수료증을 주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료증 수여식이 있던 당일 내무국장의 결재가 안 났던 거지요. 저는 결재를 미리 올렸는데 국장이 멀리 출장을 가는 바람에 처리가 미뤄졌던 겁니다.
저는 당연히 결재가 난 줄 알고 도지사 직인을 찍어 수료증을 전달했습니다. 결재 없이 도지사 직인을 찍었으니 당연히 징계감이었지요. 그런데 그 국장이 돌아와서 보고를 받은 후 「괜찮다」며 그냥 넘어갔습니다. 실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국장은 나중에 서울市로 발령이 났어요. 이후 그는 稅制(세제)개혁을 통해 서울시의 財政상황을 크게 호선시켰습니다. 당시 서울市에서 그를 신화적 존재로 인정했다고 들었습니다』
李총리 보좌관 출신 김석철씨는 『(李총리가) 성격이 급한 면이 있고 어떤 측면에서는 고집이 센 점도 있지만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인간적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수 있지요. 그는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아요. 한 가지 예를 들죠. 14代 때 한의학 파동 당시 李총리는 보건복지委에 소속돼 있었어요.
당시 후원회가 있었는데 행사가 끝난 후 저는 후원금을 되돌려 주는 데 며칠을 보냈지요. 후원회 내규를 만들어 10만원 이상을 받지 않기로 했거든요. 그때는 지금과 달리 익명기부도 무제한 허용되었고, 돈 받을 생각이었다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어요. 그는 私的인 이득을 취하지 않는 깨끗한 인물입니다』
李海瓚 총리가 나름대로 원칙을 중시하는 인물임을 보여 주는 사례가 하나 있다.
1997년 5월13일 일이다. 당시 李海瓚 의원이 탄 승용차가 서울 마포구 아현동 로터리에서 불법 유턴을 하다가 교통의경에게 적발됐다. 의경은 국회의원이 탄 사실을 알고 『액수가 적은 스티커를 발부하거나 그냥 없는 일로 할 수 있다』며 시간을 끌었다고 한다. 그러자 李의원은 『왜 규정대로 스티커를 발부하지 않느냐』며 의경을 마포경찰서에 인계했다. 해당 의경은 10일간 영창을 살았다.
이 일에 대해 李의원은 한겨레신문 박창식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법 유턴이야 (내 차가) 잘못했지요. 그런데 의경이 스티커는 끊지 않고 자꾸 시간을 끄는 겁니다. 돈을 뜯으려고 흥정을 하는 거지, 바빠 죽겠는데. 「스티커를 빨리 끊으라」고 하니까 「7000원짜리를 끊을까요. 얼마짜리를 끊을까요」라며 또 시간을 끌어. 그래서 국회의원 신분증을 보여 줬지.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냥 가시라」는 거야. 그래서 화가 났어요. 「너 안 되겠다. 차에 타라」 이렇게 된 거예요. 우리 사회가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원칙을 지켜야 해요. 그런 점에서 저는 타협을 잘 안 하는 편이죠』

김석철 前 보좌관은 당시 일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그 당시 일을 운전기사한테 들어 압니다. 의원이 탄 차가 교통경찰관(교통의경을 말함)에게 잡혔어요. 운전기사가 「의원이 타고 있다」고 하니까 경찰관이 「어디 보자」고 했다는 겁니다. 국회의원인 것을 알고 「안 끊을 수도 있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李의원이 「왜 안 끊느냐. 걸렸으면 끊어야지」라고 한 후 그를 차에 태워 경찰서로 데려가 서장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 일로 운전기사가 많이 혼났어요. 그냥 끊으면 되지 「의원이 타고 있다는 말을 왜 하느냐」고 말입니다』
李총리와 보좌관의 해명대로, 교통의경이 대낮에 외부 시선이 많은 아현동 로터리에서 국회의원을 상대로 과연 「돈을 뜯으려고 흥정하려 했을까」하는 의문도 든다. 李총리는 그 이후 도로교통법을 위반했을 때 본인 명의로 스티커를 발부받았다고 한다. 2001년 6월부터 지난 5월까지 李총리 차는 아홉 차례의 속도위반과 한 차례의 고속도로 갓길통행 위반으로 과태료를 납부했다.
李海瓚 총리는 화를 낼 상황이 발생하면 「욕」도 간혹 한다고 한다.
「쿨하게 출세하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1995년 서울市 정무부시장 때이다. 그의 보좌관 출신인 李康珍(이강진·現 총리실 공보수석) 市의원이 李海瓚의 딸이 다니던 학교의 문제를 市의회에서 질의하려 했다. 딸의 학급에서 性희롱이 있었으니 문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보를 입수한 서울시 교육청 장학관이 李海瓚에게 달려왔다. 李海瓚은 설명을 듣고 화를 냈다. 그는 늙수그레한 장학관에게 호통을 쳐서 돌려보냈다. 한 목격자는 이때 「李海瓚이 따귀를 올려붙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李海瓚도 전후 사실관계는 대체로 시인한다. 다만 「따귀를 때렸다」는 대목은 강하게 부인한다. 「따귀를 때린 것이 아니고요, 어떻게 사람을 때립니까. 장학관에게 쓸데 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욕은 했지. 결국 그 市의원은 발언을 했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부교육감이 항의하러 왔어요. 그래서 「이 자식이 어디다 대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싶어 쫓아냈지요>


<13代 국회 노동위원으로 활동할 때 일화도 있다. 한 업체의 고위간부가 의원회관 사무실로 찾아와 「노동쟁의 문제를 상임委에서 다루지 말아 달라」고 청탁하면서 돈봉투를 꺼냈다. 그러자 李海瓚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야, 뭣들 해, 이 새끼 당장 끌어내지 않고」
바깥방에 있던 보좌진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쫓아 들어왔다>
李海瓚 총리는 상대방이 나이가 많든 적든, 지위가 높든 낮든 별로 상관하지 않고 따질 때는 따지는 성격이다.
李海瓚 총리는 1988년 13代 총선에서 金大中 前 대통령이 이끌던 평민당 후보로 서울 관악구乙에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다. 盧武鉉 대통령은 당시 金泳三 前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민주당 후보로 부산에서 출마해 국회에 입성했다.
1990년 1월 민정당·민주당·공화당의 3黨 합당으로 정치권의 大지각변동이 있자, 李총리는 고립된 평민당의 존립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재야를 포함한 야권 大통합을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소신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1991년 5월 광역의원 공천과 관련해 DJ의 私黨化를 비판하며 신민당(평민당은 일부 재야세력을 흡수한 후 黨名을 바꿈)을 탈당했다.
<金총재(DJ)의 가장 큰 단점은 자신에게 불리한 얘기나 좋지 않은 얘기를 듣기 싫어한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면 유심히 경청해 듣고는 즉석에서 자기 논리로 반박하여 말한 사람을 매우 무안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누가 총재와 논쟁을 벌일 수 있겠는가>(신동아 1991년 7월호 李海瓚 의원 기고문)
李총리는 私的인 선후배 관계를 중시하지 않는다. 친하게 지내는 동료의원도 많지 않다. 權魯甲(권노갑) 前 고문과 골프멤버였지만, 인간적으로 친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대학선배인 현직 정치인 A씨에게 고개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A씨의 말이다.
『제가 장관 시절 그는 해당 상임委 의원이었습니다. 업무와 관련해 질의하고 추궁하는 것은 좋아요. 그런데 나이로 보나 학번으로 보나 기본적으로 지킬 것은 지켜야지요. 상임委 같은 公席에서는 의원이니까 반말투로 질의하는 걸 참을 수 있어요. 그런데 公務관계 밖에서는 선후배 관계로 대할 수 있잖아요. 저는 그 사람을 「위아래가 없는 사람」으로 봅니다.
최근 국회 파문을 가져왔던 그의 발언은 그의 人格(인격)에서 나온 거라고 봐요. 李총리는 서울시 정무부시장·교육부 장관을 거치면서 행정가로서 나아지고 있지만 품성 면에서는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
李총리는 서울 관악구청장을 지낸 인사에게 물컵을 던진 사례가 있다고 한다. 관악구에서 10년 넘게 근무했던 한 현직 공무원의 증언이다.
『李총리의 지역구가 관악구청 관할이 아닙니까. 현재 청와대·총리실에 근무하는 李총리 보좌진들과 소주도 한잔할 정도로 비교적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李총리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달라요. 구청장을 지낸 한 분이 있습니다. DJ 정부 때 비교적 잘 나갔지요. 업무와 관련해 李의원과 충돌이 있었어요. 자세한 내용을 밝히긴 어렵지만 당시 李의원이 그 구청장을 향해 물컵을 던졌어요. 당사자의 기분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겠지요. 반대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를 「非인간적」이라고 평해요. 반면 李총리의 보좌진들의 평가는 일관됩니다. 철학이 확실하고, 개인적 감정이 들어가지 않으며, 업무처리가 철저하다고 말합니다』

서울 관악구청장을 지낸 P씨는 李총리와의 관계에 대해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10년이 지난 일입니다. 제 나이도 벌써 육십이 넘었네요. 세상에 뭐가 무섭겠습니까. 하지만 기억도,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제 입에서 좋은 이야기가 나올 리 없습니다. 그 당시 기도하며 모든 것을 잊으려고 했지요. 한마디만 말씀드리면 지난 번 총리 인사 청문회 때 그분에 대해 「인간적으로 기본이 안 된 사람」이라는 말이 나온 걸로 아는데 그 말이 딱 맞아요. 모든 것이 함축돼 있지요. 저는 盧武鉉 대통령을 찍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盧대통령이 어찌 그런 사람을 총리로 쓰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요』
李海瓚 총리는 언론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모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호의적인 기사를 썼든, 나쁜 기사를 썼든 그는 원칙대로 처리한다. 지난해에는 모 신문사를 상대로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부분 승소했다.
그래서인지 가끔 기자들과 충돌이 있었다.
<李海瓚 교육부 장관의 막무가내 언행이 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李장관은 지난 3월11일 밤 서울 관악구 자신의 집을 찾아온 기자에게 「기자면 다냐. 대한민국 장관이 그렇게 우습게 보이느냐」는 등의 폭언을 퍼부었다. 당시 이 기자는 李장관의 부인 허락을 받고 거실에서 두 시간 넘게 기다렸는데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李장관은 「한번 해보자는 거냐」며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기자에게 달려들려고 해, 그의 부인이 가까스로 말렸다고 한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의 한 관계자는 「자신만 언제나 똑똑하고 옳다는 생각을 하는 게 李장관의 병」이라고 꼬집었다> (한겨레21. 1998년 3월26일)


한 시사주간지의 J기자는 1996년 총선을 앞두고 李海瓚 당시 국민회의 총선기획단장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황당한 경험을 했다』고 밝혔다.
『선거를 앞둔 시점에 인터뷰를 했지요. 저와 모 방송국 기자 그리고 李海瓚 단장 세 명이 그의 방에 앉아 질문과 답을 했지요. 기자가 번갈아 가며 질문을 하고 李단장이 답변을 했습니다. 제가 당시 趙淳 서울시장에 대해 물었을 때였어요. 「趙淳 시장이 서울시내에 별도로 사무실을 냈다」는 소문이 있어 사실관계를 물었던 거지요. 답변이 나올 줄 알고 취재수첩을 보며 적을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 사이 아마 몇 초가 흘렀을 거예요.
李단장이 갑자기 버럭 화를 내더군요. 순간 「이분이 왜 이러지」하는 생각을 하며 옆에 있던 방송사 기자에게 화를 내는 줄 알았지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는데 벌건 얼굴을 한 李단장이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랑 눈이 마주치자 「너 같은 게 기자야」 이러는 거예요. 「제가 무슨 큰 실수라도 했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고함을 질렀습니다. 인터뷰는 엉망이 됐죠. 고함 소리가 문 밖으로 흘러나갔는지 밖에 있던 비서진이 들어와 말렸어요. 비서가 저보고 「인터뷰가 힘들 것 같으니까 나가라」고 해서 나왔습니다.
그날 저녁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제가 실수를 했다면 사과를 하겠다. 그런데 무슨 큰 잘못을 했는지 잘 모르겠으니까 화를 낸 이유라도 들어보고 싶다」는 메모를 남겼지요. 답변을 기다렸는데 연락이 오지 않았어요. 그 후 「별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며 잊으려고 노력했지요. 순간적으로 변해 버리는 그의 모습을 그때 처음 봤어요. 솔직히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아요』
지난 6월 李海瓚 총리에 대한 인사청문회 당시 沈在哲(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은 「민통련 간부로 재직하던 재야 시절 잘못된 기사를 보도했다는 이유로 모 중앙지 취재기자의 뺨을 때린 적이 있느냐」는 서면질의를 했다. 李총리는 서면답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1987년경으로 기억합니다만, 당시 민주화운동과 兩金 단일화를 위해 노력하시던 文益煥 목사님에 대해 모 언론에서 『文목사가 대통령에 출마하려 한다』는 취지의 보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재야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잘못된 보도에 대해 항의하고 언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李총리는 비슷한 질문을 한 鄭斗彦(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의 서면답변에서 「폭행 사건에 연루된 사실은 없다. 다만 오랜 기간 공직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원칙을 중요시하여 일처리를 하다 보니까 사안에 따라 관계자 등에게 질책하는 일이 일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라고 했다.
李海瓚 총리는 자신의 뜻을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편이다. 지난 10월18일 베를린 발언(『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역사의 퇴보다. 朝鮮·東亞는 내 손아귀에 있다. 까불지 말라』)과 지난 10월28일 국회 발언이 대표적이다.
교원단체회장 출신인 李君賢(이군현) 한나라당 의원은 『교육부 장관 시절인 1998년 5월9일 李총리는 직원체육대회 인사말에서 「나는 교육부의 덕을 입고 이만큼 성장한 사람이 아니다. 나를 키워 준 곳은 서대문 형무소이다」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李의원은 또 『李총리는 1998년 6월23일 「함께 하는 교육개혁」이라는 주제로 외부인사를 초청한 회의에서 자신의 의사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현직 교장(당시 65세)을 회의 도중 「나가시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李총리는 인사청문회 당시 『형무소에서 읽은 책이 더 많다는 경험을 농담삼아 한 것』, 『회의가 진행이 안 돼(그 교장에게) 「나가시오. 진정하고 들어오시오」라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
「쿨하게 출세하기」에 따르면, 李총리는 『능력은 있는데 仁德이 없다』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런 걸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그런 평판에 신경 쓰기보다는 내가 하는 일을 할 뿐입니다. 싫어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지, 다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있을 수 있나요. 내 스스로 나의 도덕률에 따라 움직여 나가는 것이지, 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왜 남의 도덕률에 따릅니까. 정치라는 것은 贊反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싫어하는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죠. 仁德이 많다는 것은 일을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

자신의 도덕률에 따라 말하고 행동한다는, 李海瓚 총리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말을 쉽게 바꾸었다.
李海瓚 총리는 지난 7월2일 자신이 「차떼기黨」이라고 했던 한나라당에 찾아가 朴槿惠(박근혜) 대표를 만났다. 신임총리로서 「차떼기당」 대표에게 인사하러 간 것이다.
李총리는 「차떼기당」의 대표에게 『인준동의안을 처리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다음은 朴槿惠-李海瓚 두 사람이 주고 받은 대화의 일부이다.
<李海瓚: 어제 국정현안조정회의를 했는데, 야당에게도 설명을 잘해 공감을 얻으라고 했고, 국가안보 정보도 공유하도록 했습니다.
朴槿惠: 외교나 안보는 與野가 따로 있을 수 없거든요(중략).
李海瓚: 지금 지나고 나서 보니 말을 함부로 못 하게 됩니다. (중략) 先親 말씀드려 죄송한데, 제가 민주화 투쟁할 때 朴대통령을 한쪽 측면만 격렬하게 비판했습니다. 朴대통령이 이룬 경제적 성과 없인 여기까지 못 왔을 겁니다. 지금은 思考의 균형이 생긴 편입니다.
朴槿惠: 말씀 들으니 든든합니다.
李海瓚: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임채청 동아일보 부국장은 지난 11월10일 「그답지 않다」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李총리는 필요할 경우 몸을 굽히곤 했다. 단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데 인색했을 뿐이다. 이번 성명(11월9일자 謝意 성명서)도 정치적 필요에 따른 임기응변식 굴신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통령이 내세우고 있는 책임총리와 거리가 멀다. 독일과 국회에서 얼굴을 붉히던 李총리답지도 않다>
李海瓚 총리는 한나라당 의원에 맞서 자신의 소신을 주장하며 충돌을 피하지 않지만, 총리로서 한나라당 대표를 만났을 때는 균형 있는 말을 했다. 한 대학의 심리학 교수는 李海瓚의 이중성을 이렇게 해석했다.
『李海瓚 총리가 나이 36세에 국회의원이 된 이후 현재 5選 의원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李총리처럼 신념이 강한 사람은 公的인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私的인 감정을 배제해 왔다는 이유로, 「내 생각이 객관적이고 옳다」는 생각을 갖는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나만이 옳다는 독선에 쉽게 빠진다. 자신의 신념을 시험하는 공격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맞선다. 「인간 李海瓚」에게 도전한다는 생각이 들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싸운다. 「총리 李海瓚」에 대한 공격이라고 받아들이면, 「개인 李海瓚」의 신념을 쉽게 접어들인다』

지난 4월 總選 당시 李海瓚 의원 지구당 사무실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李의원은 자신의 선거사무실에 나온 선거관리위원회 소속 공명선거 감시요원에게 험한 소리를 했다. 당시 상황을 취재했던 중앙 일간지 기자의 얘기다.
『사무실로 제보전화가 한 통 왔어요. 지난 4월 總選이 한창일 때였어요. 선관委 소속 감시요원이 李의원 사무실을 찾았답니다. 남자 한 분과 여자 한 분이었어요. 감시요원은 선거 관련 자료를 의원 보좌관, 지구당 사무국장에게 달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李의원 측이 「직접 찾아서 보라」며 非협조적으로 대했나 봐요. 그러다가 실랑이가 벌어졌답니다.
사무실이 소란해지자 옆 방에 있던 李海瓚 의원이 문을 열고 나오더니 고성을 지르며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소란이냐. 높은 사람 데려와」라며 감시요원을 혼냈다는 겁니다. 여성 감시요원은 「좋은 일을 하려다가 이런 황당한 일을 당해 놀라 뛰쳐나가 펑펑 울었다」고 했어요. 그 여성은 「李의원을 평소 훌륭한 분으로 생각했는데 公務로 나온 사람에게 그렇게 험한 말을 하는 사람인지 미처 몰랐다」고 했지요』
李海瓚 총리는 청소년 시절 남에게 부탁하거나,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필요가 없는 집안에서 자랐다. 1952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그는 5남2녀 중 다섯째이다. 위로 형이 둘, 누나 둘이 있었다. 그의 집안에는 정치인이 한 명 있다.
할머니의 동생인 이상철씨는 朝鮮日報 기자 출신으로, 2·5·6代 국회의원을 지냈다.
<李海瓚 총리의 4대 祖父는 진사였다고 한다. 진사급제로 100석의 전답을 나라로부터 받아 청양에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청양에서 제법 큰 식당을 했고, 일제 때 일본 중앙大 유학을 했던 아버지는 초대 면장, 이어 민선 면장을 지냈다. 집에서 양계도 했다. 李海瓚의 어머니는 충주의 부잣집 출신이었다>(「쿨하게 출세하기」 中)
학창 시절 李海瓚 총리는 공부를 잘했다. 그는 모범생이었다. 1971년 서울大 섬유공학과에 진학한 후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듬해 서울大 사회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金大中 내란음모사건으로 투옥된 후 1982년 출옥한 청년운동가 李海瓚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1983년 결성)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정세분석과 운동기조 수립 등 이론활동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 조건에 맞는 입장을 선택하고 거기에 충실했다고 한다. 그는 제도권 정당인 평민당에 일찍 몸을 담아 개량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13代 국회에서 광주사건 청문회 스타로 부상했다.
李총리는 1991년 탈당했던 4개월 반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큰 우여곡절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나는 100% 싸움은 절대로 안 한다』며 『감옥에 들어가면 그만큼 활동을 못 하게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투쟁의 여지를 남겨 놓고 현실을 생각하는 것이다.

기자는 李총리를 취재하면서 들은 여러 사건들에 대해 李총리의 입장을 듣고자 총리실 李康珍 공보수석에게 전화를 여러 차례 했다. 李수석은 『李총리에 대한 私的 질문에 대해 답변할 가치가 없다』며 『나는 대한민국 총리의 공보수석이지 私的 질문에 답변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첫댓글 조돌쇠님 오랜만여요. 봄이 오기전에 소주 한 잔 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사자님도 오래간만이래여 저는 막걸리를 할겁니다 돌쇠님 알앗지래여~~
한마디로 위아래도 모르고 인간성 나쁜놈을 저 기자가 대단히 미화시켰군요...정말 나쁜인간입니다....
돌쇠님 간만이네요~~~새해 복 만땅 받으시고 , 새해에는 국수(?) 꼭 먹으러 갑시다.....
와우!~~~ 가을바람님!!! 일요일날! ^^* 쏘주에 막걸리..?? 박 대통령각하는 막걸리에 맥주를.....ㅋㅋㅋ 암튼 한잔 기울여 봅시다. 건강하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