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나이 31살..
시골 오지에서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서울이라는 곳은 나와는 상관없는 오로지 꿈속에서만 상상하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살았던 고향은 최고의 직업이 군인이었을정도니까..^^
우리집에 드디여 82년에 TV를 달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단칸방에 누나와 형이랑 같이 온종일 TV의 마력속에서 빠져들어서
그 좋아하던 술래잡기, 딱지치기, 자치기, 얼음땡, 오징어, 강건너 뛰기 같은
재미난 게임까지도 포기했었으니까..^^
외삼촌이 군대에 입대하고 나서 발령을 내가 살고 있는 시골로 왔다..
대전에 살고 있던 삼촌은 오로지 좋아하는 것이 프로야구였다..
쉬는날만 되면 오로지 프로야구 중계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을 정도니까..
그 당시 대전을 연고지로 하던 오비베어스를 좋아하던 삼촌을 따라서
나도 야구에 야자도 몰랐지만 그냥 오비베어스가 좋았다..
이런 나의 모습에 기특했던지..
삼촌은 나의 생일날 야구 글러브와 배트, 야구공과 함께
오비베어스 어린이 회원에 가입을 시켜주었다..
당시의 오비베어스의 모자와 잠바(빨간색에 흰샜)는
시골 내 친구들에게 가장 주목을 받았을 정도였으니까..
오비베어스가 대전 연고에서 서울로 연고지를 옮긴 다음부터는
나는 커서 꼬옥 서울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TV에서만 보이던 그 드넓은 잠실 야구장을 꼬옥 직접 가서 구경하겠다고 맘을 먹었다..
공부를 아주 쬐금은 잘해서
나의 어머님은 날 도시에 가서 공부를 시킬려고
고등학교를 의정부로 유학을 보냈다..
고등학교때부터 하숙을 하면서 그때부터의 나의 독립은 시작되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때 야간 자율학습을 땡땡이 치고..
친구들과 오비베어스와 엘쥐의 준플레이오프를 구경하러
감격의 잠실야구장에 입성을 하였다..
김경원(그당시의 언터처블 마무리투수)의 바깥쪽을 파고드는 필살기 직구를
직접 야구장에서 보는데..공이 보이질 않을 정도였으니까..
솔직히 야구장은 직접 가서 보니까 실제로는 기대보단 커보이질 않았지만
외야에서도 투수의 공이 보이는건 정말 신기했었고..야구장 맨 윗 좌석에 앉은 사람은
과연 야구구경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은 그때에 다 해결되었다^^
서울에 대학을 합격하였다..서울에 입성한 감격보다는
잠실야구장과 가장 가까운 한양대학교를 입학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너무 컸었다..
95년 우승하기 전까지
몇년동안 최하위의 순위에서 허덕이지 못했던 오비베어스때문에
밤잠 설치고..94년 대학입학하고 나서도 별반 신통치 못한 성적때문에
일년에 70일정도는 우울했던것 같음
드뎌 95년 새역사의 장이 밝았다..
김상진..권명철 원투펀치(당시에는 원투펀치라는 개념이 없었음)와
진필중의 대담한 신인활약(지금의 오승환은 그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음)
으로 롯데에 극적인 역전우승을 하였다..
아직도 김인식감독님이 선수들에게 휩싸여서 졸도 직전에 빠질것만 같았던 영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 이후부터는 변함없는 4강후보로서 명문구단으로 입지를 다지고
비록 우승을 못하였지만 가을의 잔치 주인공으로서 뚝심의 곰 활약을 보였다..
1998년 4위 99년 3위 2000년 2위(현대와의 한국시리즈에서 3연패후 3연승할때의 모습..
정수근의 싹쓸이 3루타후 포효하는 모습..조계현의 노장투혼..
당시 현대가 우승했지만 진정한 우승은 두산이었던것 같았음)
드뎌..2001년..삼성과의 한국시리즈..전문가의 절대약세 예상을 뒤엎고서
삼섬을 침몰시켰던 모습..8:2로 지고 있다가 12:8로 역전시키는 믿기지 않는 순간..
김응룡이 고개를 떨구고 덕아웃 뒤로 나가는 모습..
김진웅을 상대로 김동주의 만루홈런이 터진 그 순간..나는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줄 알았다..
진필중이 마해영을 상대로 명품 슬라이더로 삼진을 잡고 우승을 확정짓는 순간..
난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
역사는 순환된다고 했던가..영원히 우승후보일것만 같았던 두산에게도
우즈가 일본으로 건너가고..심정수가 현대로 팔려가고..진필중이 기아로 트레이드 되고
정수근이 롯데로 떠나면서..난 솔직히 앞으로 두산의 우승을 기대하질 못하였다..
역시 2003년엔 줄곧 4위안에 들다가 계속 미끌어지면서 5위로 시즌을 마무리할때에는
이것이 두산의 한계인가보다..앞으로는 우승을 차치하고 제발 가을의 잔치에만이라도
초대되길 기도하고 기도했다..
선동열 짜식의 재수없는 행동으로 인해 김인식 감독님이 자진 사퇴하는 상황까지 발생하면서
내가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데 이젠 야구에 집착을 떨쳐버려야 하는건가 라는 의구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잊을려고 해도 잊을수가 없었다..
첫사랑도 잊었고 담배도 끊었는데 두산베어스는 잊을 수가 없었다..
명품 두산은 다시 제 탄생될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명품 두산은 아자 허슬두라는 슬로건으로
다시금 최고의 자리에 한발짝 다가섰다..
이젠 삼성이 아니라 돈성이다..
치킨스던 주요소던 상관없다..
3:0으로 셧아웃 시키고 돈성과의 한국시리즈만이 남았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객관적으로 향후 몇년 사이에
이보다 더 좋은 우승의 기회는 없다..
어차피 치킨스의 감독은 김영덕이고..주요소는 자신이 쌍방울이라고 최면을 걸어놨기에
어차피 상관없다..
이젠 1982년, 2001년의 어게인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한다..
사랑한다 두산
영원히 사랑한다 두산
내 삶을 관통하는 뜨거운 선혈과도 같은 나의 베어스
도전하고 승리하라
2005년 두산을 꼴찌로 최약체로 평가하는
전문가 같지 않는 모든이들의
어처구니 없는 예상을 갈아업어라..
너희는 할 수 있다..
우리 최강 10번타자는 잠실 야구장을 하얀물결도 덮어 줄테니
너희는 우승이라는 선물로 보답하라..
최선을 다한 2등이 아름다운걸 나는 안다..
하지만 이번만은 안된다..
돈이 모든것을 해결해 주질 않는다는 명제와 진리를
우리 두산이 보여주어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
화이팅..아자~~허슬두
카페 게시글
▶ 곰들의 대화
두산이 최고야^^
삶을 관통하는 뜨거운 선혈과도 같은 나의 베어스
희망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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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01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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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랑 비슷한 삶을 사셨네요..전 서울 살다 시골로 전학가서 공부를 월등히 잘해 의정부에서 유학생활을 했습니다만...지금도 의정부 살구 있구요....ㅋ
저랑 비슷한 삶을 사셨네요..전 파주 살다 서울로 이사해서 의정부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대학은 서울서 나와 지금은 파주시에서 사는듸요 ㅎㅎㅎ... 장문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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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랑 나이와 학번이 같네요 ^^ 저는 그나마 학교가 2호선 상에 있어서 좋았다는 ^^ 그때 집이 2호선 상에 없는게 한이었는데...
'첫사랑도 잊었고 담배도 끊었는데 두산베어스는 잊을 수가 없었다' 이 문구가 참 인상적이네요 흐~~
감동 백배 눈물 찔끔... "우리 최강 10번타자는 잠실 야구장을 하얀물결도 덮어 줄테니 너희는 우승이라는 선물로 보답하라.. " 우리는 다른팀에는 결코 있을수 없는 10번타자가 됩시다..두산V4
와~~진짜...감동이네요...^^ 저두 2000년 2위(현대와의 한국시리즈에서 3연패후 3연승할때의 모습..)때 수원구장에서 담을 넘는 감동의 드라마를 직접연출하면서,,,비록 2위에 그쳤지만..그날 수원구장에 남은건 두산베어스팬들뿐...^^그때 두산베어스란 이름을 가슴속에 새겼지요~~^^
진짜 00년은 쥐돌이랑 플옵두 그랬구.. 유목민이랑 시리즈도 그랬구 정말 너무 너무 재밋고 멋졌던 우리 선수들이었어요~ 이번 시즌도 꼭 명승부로 우승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