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제2외국어인(이솔:ESOL: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이민을 온 학생들을 위해서 군청에서 관장하는 Lincoln Center라고 무료로 연필과 공책을 주는 영어학원인데 Joe Cole이라는 넥타이를 매신 분은 교수법이 좋다고 소문이 나니 외국에서 연수받으러 오는 국회의원들을 가르치려고 워싱턴디씨로 영전[榮轉]하셨다.
중간급[intermediate class]교육생들 중에는 압둘이라는 이롼의 대령, 식품점주인, 양복점 주인. 의사의 아내, 포덕사 주지, 은행원 등이 되는데 세계 각국의 요리 시식날 내가 추리팟[삼각대]을 사용하여 샐프 타이머로 찍었다.(가장 오른쪽이 필자)
키가 작은 학생-6
내 나이 11살 때 우리 집으로 서울서 고려대학을 다니다가 피난 온 아저씨가 있었는데 하루는 나에게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는 이웃동내의 처녀에게 연애편지를 전하고 오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일이 꼬이느라고 찾아가보니 들일을 나갔는지 빈집이어서 돌아서려는데 옆집에서는 저녁을 먹느라고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와 가보니 온 식구가 대청마루 위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 때라 머리도 단순, 눈치도 없고 미거하니 나는 마침 잘되었구나 하고 옆집 처녀이름(成H姬)을 대면서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돌아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아저씨가 야단을 치니 내말이
“그 사람들은 편지를 전해주지 않을 정도로 나쁜 사람들은 아닌데…….”하며 뒤통수를 긁적거린 기억이 있다.
나의 뒤통수가 평평하여 머리가 둔하다는 나쁜 점도 있지만, 좋은 점은 이발사들의 이야기로 이발을 하기에는 최적이라는데 뒤통수가 평면인 것은 아마도 아기 쩍에 순하여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하여 누워 있기만 한데서 왔을 것이고 학적부에는 ‘성격 온순’으로 되어 있으니 자화자찬 이지만 어머니께서는 내가
‘있는지 없는지’
로 되어서 나를 키우기가 쉬웠으리라는 생각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하루는 학예회를 했는데 공연하기 전에 봉(鳳)이 김선달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하라고 하여 가슴 두근거리며 꼼짝없이 맡은 적이 있는데 선생님은
‘다른 애들도 많은데 왜 필이면 소심공포증이 있는 내 이름을 부르나?’ 하고 불평을 했는데 이것만은 내게 초이스는 없었다.
연극이 시작이 되기 전에 ‘봉이 긴선달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있었는데
말 실수를 하면 아니되니 달달 외웠다.
가요합창은 단체로 부르니 괜찮았는데 ‘희망의 나라로’ 등을 코러스 2중창으로 불렀다.
내용은 쉰 죽을 팔고 염병을 빙자한 봉이 김선달에 대한 이야기 인데 시나뤼오의 대사를 대충 내가 먼저 설명을 하고 다른 학생들은 풍신을 요란 하게 꾸민 배우가 되어 성공적으로 끝냈다.
앞서 본 3학년 교실과 4학년 교실 지붕은 가벼운 함석지붕이니 교실 2칸의 칸막이를 제거하고 터놓은 넓은 공간에 꽉 찬 관람객들의 시선이 내 눈에 집중되니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천정을 쳐다보고 일사천리(一瀉千里; 강물이 빨리 흘러 천 리를 간다)로 끝냈다.
연극내용은 망건 을 쓰고 장죽을 물고 비스 틈이 누운 선달이 일어나 앉으며
“여보 마누라! 모래가 동지(해가 가장 짧은 날이니 새해로 여겨 팟죽의 새알 수제비를 먹으면 한 살 더 먹는 걸로 인정)날인데….”
로 시작된다.
팥죽을 너무 많이 끓여서 못다 먹고 쉰 것을 길거리에 놓고 팔게 되는데 시골 손님이 얼굴을 찡그리니
“초친 팥죽을 먹어 본적이 없는 촌사람들이군! 웃돈을 받아야 하는데!”하며 야유조의 흉을 보는 바람에 촌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두 과객은 얼굴을 우거지상으로 찌푸리며 억지로 먹었다.
그리고 과거시험장에서 여름에 솜바지저고리를 입고 나타나니 시험관이 이유를 뭇자 염병(장티푸스)에 걸렸다고 하는 바람에 멀리 떨어져서 시를 읊어라 했으며 시험관이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중얼중얼 입속으로 아무 말이나 뇌까리는 바람에 김선달이 급제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연극 속에 있는 내용으로 청중에게 묻는 말로
“눈이 눈에 들어갔으니 눈(眼)물입니까? 눈(雪)물입니까?”
“창으로 창을 찌르니 창(窓)구멍 입니까? 창(矛)구멍 입니까?”
등도 있었다.
중얼거리는 말끝에 생각나는 것은 내가 어릴 적 우리 동네에 사시던 어른이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 왔으나 쌀은 없지만 객지생활 끝에 배운 말 펀치 하나는 좋으니 다른 면의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안택(安宅; 무당을 불러 가신을 위로 하는 굿)이를 해주는데 우리면 사람들만 알고 있는
“...... 모든 잡귀잡신들은 부송골로 돌아서, 도롱골로 돌아서 안태골을 거쳐서 감천냇가로 쏴악 빠져 나가라!”
했지만 그 동내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수긍을 했단다.
장 티푸스(typhoid 영어로 타이포이드인데 한글 발음이 조금은 어긋난다)는 장질부사(腸膣扶斯)라고도 하는데 이 돌림병에 걸리면 죽기도 하지만 만약 살아남으면 면역이 생겨 그 후부터는 평생 다른 병이 침범을 하지 못하며 나의 부모님과 할머님까지 모두가 이병에 걸린 적이 있지만 나의 세대인 7남매는 모두 생존한다.
아이들이 전염병으로 많이 죽는데 장사지내는 방법으로 화장, 풍장(중국에서는 鳥葬이라함), 매장이 있는데 내가 어릴 적을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적용되는 풍장(風葬)이 끝나고 매장으로 바뀌게 되었지만 아이들이 죽으면 시체를 안태골의 큰 소나무위에 까치집마냥 얹어 놓아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곳이고 매장을 할 때는 얕게 묻으면 여우가 파기 때문에 보호용으로 물동이 속에 넣고 엎어서 묻었다.
아이들의 반이 죽을 때이니 만약 그 당시 돌림병이 없었더라면 진작 인구폭발이 있었으리라.
그 당시의 초등학교는 시험지래야 콜타르 냄새가 나는 줄판으로 긁은 등사판이었는데 중학교에 들어가는 국가시험은 활자화된 인쇄물이었으며 5백점이 만점이었고 성적 순위에 의하여 학교가 정해지기 때문에 과외수업이 없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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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바로옆집의 부인은 한국에서 논이 바로 옆옆[side by side]이었는데 집이 옆옆, 우리집으로부터 옆집으로 이주를 한 함박꽃[작약]들[사슴이 먹지를 않는다].
첫댓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정말 사진에서만 보는 그림같은 집이네요.
집터가 똑같은 3,672평이 된답니다.
남편은 같은면에살던 친구, 주에 화목토 3일 골퍼썸, 오늘같이 롸운딩을 했습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