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굉장히 우울한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바로 전날, 집안이 비어있는 틈을 타 도둑이 들었고 우리 결혼 예물과 주로 귀금속 위주로 해서 매우 프로로 보이는 도둑의 손을 탔습니다. 아내는 그 사건 이후로 보름간은 정말 패닉에 질려 있었고, 안방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날 추수감사절 정찬은 진행돼야 했었습니다. 늘 그랬듯 뷰리엔에 있는 한스 델리라는, 독일 이민 1세대가 운영하는 수제 소시지 집에 칠면조를 맡겨 훈제를 부탁해 놓았었고, 잘 훈제된 햄과 소시지도 함께 사 놓은 터였습니다. 다행히 도둑(들)은 파티용 음식까지 훔쳐가진 않았더군요. 술도 하나도 건들지 않았고. 암튼 넋이 반쯤 나간 채, 그렇게 부모님 모시고, 아들놈 여자친구까지 불러 놓고 추수감사절 정찬을 했고, 아마 이 거대한 칠면조 다리는 그때 먹지 못했던 것이 그대로 냉동고로 들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내가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저도 뒤늦게 집 이곳저곳에 방범 카메라며 알람이며를 설치하고 매주 쉬는 날마다 이상한 가젯들이 하나둘씩 집에 늘어갔고, 아무튼 우리도 조금은 다시 그 전의 생활패턴을 찾고 있던 중, 아내는 그때 먹고 남은 칠면조가 들어있는 프리저백을 냉동고에서 꺼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숨을 한번 푹 쉬고는(갑자기 살아오는 나쁜 기억의 전조...), "야채 수프 끓이자." 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이 커다란 다리를 커다란 냄비에 넣어 끓이기 시작했고, 저는 그 옆에서 감자를 열 개 까고, 양파를 두 개 깠고, 당근 큰 걸 네 개쯤 껍질을 벗겨 넘겼습니다.
"생강도 좀 넣어."
"좋은 생각이네."
셀러리 같은,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온갖 야채들이 다 들어가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걸 야채 수프라고 부르긴 하겠습니다만, 아무튼 훈제된 칠면조 다리가 들어가 끓고 있는 냄비 안엔 이런저런 야채들이 투척되어 들어가기 시작했고, 파스타를 좀 삶아 넣을까 하다가 일단은 그냥 수프만 먹어보기로 했습니다.
"허니, 피노 그리지오 사 왔던데? 방에서 굴러다니더라고?" 동의를 구하듯, 저는 아내에게 물어봤습니다. 정말 거짓말처럼, 지금 마루에서 말 그대로 '굴러다니는' 와인이 두어 병 되고, 기숙사로 떠난 지호 방에도 대여섯병의 와인이 그냥 굴러다닙니다. 감기에 걸리고 나서는 와인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와인쟁이에게 있어서 호흡기 질환은 삶의 즐거움을 빼앗아가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물론 그 덕에 평소에 그렇게 적극적으로는 안 마시던 빨간뚜껑 소주와 보드카, 조니워커 레드 같은 것들이 감기약이라는 핑계로 목숨을 잃긴 했지만.
내가 감기에 걸린 덕에 목숨이 붙어 돌아다니던 와인 한 병을 집어 왔습니다. 응? 빌라 포찌 Villa Pozzi ? 간만에 이태리 와인이군. 병을 들어보니 피노 그리지오, 그리고 시실리. 대표적인 시실리산 와인이라면 네로 다볼라가 있지요. 이태리란 나라도 원체 남북으로 긴 나라다 보니 피노 그리지오도 북쪽의 것은 거의 레몬즙에 가까울 정도의 산도와 생각만해도 침이 입에 고이는 비슷한 맛이 있는데, 남쪽의 것은 처음 마셔 보는터라 별 기대 없이 뚜껑을 열었습니다. 스텔빈캡, 멋대가리 없어. 따다닥, 마개를 돌려 따고 한 잔을 따라 마시는데... 어, 재밌다?
역시 마피아의 천국 시실리답게 산도는 숨어 있습니다. 뭔가 부드러운, 싱그러운 남쪽 섬의 느낌. 그렇게 고급진 맛이 아니더라도, 눈 감으면 느껴질만한 햇살의 힘. 이것이 두드러지진 않습니다. 아내가 끓여 준 야채 수프와는 완전히 잘 어울린다는 느낌. 그녀도 간만에 잔을 잡았습니다. "좋아! 너무 좋아!" 피노 그리지오에서 당도가 조금 느껴진다는 말이겠지요. 그것은 따뜻한 지역에서 나오는 피노 그리지오에서 흔히 느껴지는 기분일겁니다. 예를 들어 이태리 피노 그리지오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 접경 지역인 프리울리에서 나오는 같은 품종의 포도주는 산미와 청량감이라고 한다면, 시실리나 혹은 캘리포니아, 오리건 쪽에서 생산되는 것은 달콤한 느낌을 띱니다. 산도가 적은 대신 풍부함이 조금 더 느껴진달까. 그리고 편안함 같은 게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 와인을 생선에 맞춘다면 산도는 튀어나올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이 와인은 세일 안 하는 곳에서는 병당 $8.99, 세일 하는 곳에서는 병당 $6.99 정도의 부담없는 와인입니다 (그러니까 방구석에서 굴러다니고 있겠지). 아내가 만들어준 야채 수프 - 더 정확히 말하면 훈제 터키 뒷다리 수프? - 와 매우 잘 갑니다. 어쩐지 아내가 사 온 모스카토는 샐러드와 치즈 같은 것에 잘 어울릴 것 같고, 아직 뜯어보진 않았지만 꽃향기 물씬 날 것 같습니다.
빌라 포찌는 4대째 내려오는 와이너리라고, 이 회사의 홈페이지에 적혀 있긴 합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와인이 여기 미국까지 와서 팔릴 정도의 양이 되려면 아마 기본적으로 작지는 않은 와이너리겠지요. 시실리 지역의 전통방식에 구애되지 않고 만들었다는 뜻으로 IGT 라는 표시가 붙어 있습니다. 사실 시실리에서 원래 피노 그리지오가 특별히 자라거나 하진 않았지요. 아까도 말했지만 전통 방식으로, 그 지역에서 잘 자라는 특정 품종으로 만들었음을 인증하는 DOC 가 붙을 정도의 와인이라면, 시실리의 경우 대부분 네로 다볼라 품종, 화이트 와인이라면 지삐뽀라고 불리우는 품종으로 만들었을 겁니다. 아, 괜찮은 시실리 와인중에 '프리미티보' 품종이 있지요. 캘리포니아에서 널리 생산되는 '진판델'의 할아버지입니다. 같은 품종이죠.
후추를 잔뜩 쳤습니다. 훈제된 칠면조가 끓으며 나는 거품은 아내가 다 걷어 냈고, 생강이 잔뜩 들어갔지만 역시 후추는 꼭 들어가야 합니다. 통후추를 갈아 꽤 뿌렸습니다. 국물도 좋고, 씹히는 고기나 간혹 씹히는 생강까지 맛있습니다. 왜 오래 전 후추의 교역로를 놓고 열강들이 전쟁을 벌였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그 때 먹던 고기는 절반쯤은 상했다고 봐도 될 터, 여기에 뿌리는 후추는 고기의 풍미를 완전히 다르게 만들었겠지요. 이 신비한 동방의 향신료에 매료된 왕과 귀족과 자본가들은 이 후추의 독점을 원했을 것이고, 욕심은 피를 부르게 마련, 전쟁의 좋은 소재가 됐겠지요.
암튼 오랜만에 이렇게 와인을 즐깁니다. 감기가 어느정도 나았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지금 와인을 즐기는 것으로서 그 한 달 가까이 지속된 지긋지긋함이 사라졌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보면 와인은 정말 여러가지를 따지게 만드는 술입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여유로워야 하고, 정치적 상황도 불편하지 않아야 하고 - 열 받으면 맥주 들이키는게 - 감기에도 걸리지 말아야 합니다. 술 마시기 위해서 건강을 챙겨야 하다니. 그러나 그렇게 조건을 만들어 마시게 되는 와인도 누구와 마시느냐에 따라 또 그 맛과 느낌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아내와 마시는 와인은 늘 편안한 모양입니다.
시애틀에서...


첫댓글 저런..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