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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야우문령(夜雨聞鈴)-2
온마의 발언은 회의실을 정적에 빠지게 했다. 나지막한 숨소리조차 우뢰처럼 들릴 정도로 회의실은 고요했다.
크르르...
“이건!”
철벽이 내려와 창과 문을 비롯한 모든 출입구를 봉쇄했다. 남해방주를 회의실에서 처리하겠다는 온마의 의지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회의실에 이런 기관장치가 있었다니...”
“혹시 모를 공격을 방어할 목적으로 설치해 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목적으로 사용하게 될 줄이야.”
온마는 음산한 눈빛으로 팔마당의 수뇌부 한 사람 한 사람을 혀로 핥아 내리는 듯 세밀하게 훑어보았다.
“으음...”
온마의 시선이 지나갈 때마다 하나같이 신음소리를 흘렸다. 먹이를 노리는 뱀의 눈, 온마의 시선을 받은 자들은 그렇게 느꼈다. 온마가 회의실에 있는 전원을 모두 훑어보고는 눈을 감아버리자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나 정적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불과했다.
회의실에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노려보며 수많은 의문을 자신의 마음속에 토로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시선은 두 사람에게 모이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무심한 표정의 심마와 졸고 있는 수마를...
“나를 의심하고 있군.”
심마가 한마디 했다. 팔대호법들은 심마의 투명한 눈빛을 견딜 수 없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취마와 구청림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심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에는 한 올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대형. 팔매가 보낸 서신에 내 이름이 적혀 있습니까?”
심마는 취마와 구청림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온마에게 시선을 돌리고 질문했다.
“네 이름은 없다. 하지만...”
그 순간 수마가 앉아 있던 자세에서 벼락처럼 일어나더니 심마의 이마를 향해 중지로 뻗었다.
퍽.
심마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너무도 어이없게 단 일격에 즉사했다. 수마의 수혼지(睡魂指)는 상대의 이마에 푸른색 지흔(指痕)을 남길 뿐 다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죽음으로 몰고 간다. 지력이 이마를 투과해 대뇌를 으스러트려 버리기에 당한 자는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세상을 뜨게 만드는 것이다.
“네가 남해방주 조덕창이었구나.”
심마의 죽음을 목도(目睹)하고 격분한 취마는 고함을 지르며 수마를 향해 몸을 날렸다. 단 일격에 수마를 죽이겠다는 의지가 취마의 두 손바닥에서 이글거렸다. 수마는 공격해 오는 취마를 향해 중지를 뻗었다.
콰쾅.
두개의 경력이 허공에서 충돌하자 강력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충격파는 탁자를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었고 취마와 수마는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때 온마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뜨더니 열손가락을 웅크리더니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우웅~.
온마가 사용한 것은 뜻밖에도 음시조였다. 음시조의 궤적을 따라 회색빛 경기가 쏟아졌다.
쾅.
회색빛 경기가 노린 상대는 뜻밖에도 취마였다. 취마는 등 뒤에서 온마가 공격할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이 가볍게 방어했다.
“음시조... 강호칠대금지무학의 하나인 음시조를 익히고 있었다니 정말 놀랍구려. 대형.”
“내가 익힌 무공 중에 취기수예(醉氣修藝)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음시조 밖에 없으니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남해방주.”
“흥! 여자도 남자도 아닌 귀물(鬼物)이 내 정체를 정확하게 알아냈군. 덕환 그 녀석은 죽었는데도 문제를 만들었군.”
취마가 남해방주 조덕창이었다. 조덕창은 요마가 자신의 정체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망한 동생 조덕환을 애도하지 않고 화를 냈다. 한편 구청림과 팔대호법들은 급변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안절부절 했다.
“취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취한 마음으로 예를 수련해 취중에 천하를 굽어본다는 취기수예는 강호십대공력의 첫째에 해당하는 무상의 내공이지. 하지만 음시조도 그에 못하지 않아.”
“흥. 음시조를 5단계에 도달했다면 모를까 4단계로는 어렵소.”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너는 혼자지만 우리는 열 한 명이야. 게다가 내 손에 수라도(修羅刀)가 있는 이상 너는 죽음을 피할 수 없어.”
온마는 여섯 자루의 칼을 꺼내들었다. 칼의 길이는 한자 반이었고 도면(刀面)에 아수라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조덕창은 수라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제 기억이 나는군. 수라도는 칠십년 전만 해도 소림사에서 보관하고 있었지. 한 파계승이 훔쳐 달아날 때까지 말이야.”
“그분이 내 스승인 사면불(死面佛)이다. 귀면도 동문보와 함께 악마의 두 얼굴로 불리며 강호를 공포로 떨게 했지.”
“흥! 그건 50년도 넘은 아득한 과거의 일이지.”
“과거는 현재를 낳고, 현재는 미래를 만드는 법. 그래서 전통의 힘이 무서운 것이 아닌가.”
온마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음습하면서 파괴적인 기세가 흘러나왔다. 음시조의 공력이 외부로 돌출된 것이다.
“사면불은 소림사에서 수라도만 가지고 나온 게 아니었군. 음시조와 부동심결, 만심진광까지 훔쳤구나.”
“무슨 소리인가?”
“음시조를 4단계에 도달했으면서도 미쳐 날뛰지 않는 경우는 단 세 가지의 경우에 해당하지. 첫째 칠리산당 혁씨 일족일 경우. 둘째 칠대금지무공의 제어무공인 칠살기를 연성한 경우. 마지막은 불문의 4대강자들이 칠대금지무공을 연구해 만든 부동심결과 만심진광을 수련한 경우. 그대가 해당하는 경우는 세 번째 밖에 없으니...”
온마의 얼굴이 굳어졌다. 소림사는 강호칠대금지무공 중에 네 종류를 보관하고 있었다. 만심진광과 부동심결은 네 종류의 무공을 연구해 완성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비밀 중에 비밀로 소림사 내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조덕창은 그 비밀을 뿐 아니라 온마도 처음 들어보는 칠리산당과 칠살기까지 알고 있었다. 수많은 비사와 비밀들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정보들을 취합해 숨겨진 다른 비밀을 추론해 내는 조덕창의 두뇌에 온마는 두려움을 느꼈다.
“놀랍군, 놀라워... 과연 남해방주의 이름이 아깝지 않아.”
“고맙소. 그러나 당신이 음시조를 처음 사용했을 때에는 순간적으로 그대를 집법원 적씨 가문의 일원으로 착각했지.”
“크크크, 남해방의 주구노릇을 한 것도 수치거늘 집법원이라...”
“그건 내가 사과하지. 그보다 수마. 어째서 심마를 공격했는가?”
조덕창은 시선을 수마에게 돌렸다.
“심마는 네 심복이 아니 더냐. 남해방주인척 거짓정보를 흘려 혼선을 주고, 너를 대신해 본 당을 제어하는 게 네 심복인 심마가 한 일이지. 그래도 나는 형제지의를 생각해 편안한 죽음을 내렸다.”
짝짝짝.
“훌륭하군. 정말 훌륭해. 역시 수마답군.”
조덕창은 박수치며 말했다.
“나 역시 형제지의를 생각해 편안한 죽음을 내리마.”
숨이 막힐 것 같은 강렬한 살기가 조덕창의 눈에서 쏟아졌다.
“쳐라!”
조덕창의 살기가 극에 달하자 온마는 팔대호법에게 명령했다. 팔대호법은 각자의 병기를 들고 조덕창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아악!”
“으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뜻밖에도 팔대호법의 네 명이 조덕창을 향해 달려가던 다른 네 명을 급습했다.
“크억... 네, 네놈들이... 이 배신자들!”
세 명은 예상치도 못한 기습에 즉사했지만 팔대호법의 수좌는 뛰어난 감각 덕분에 죽음을 면했다. 하지만 치명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복부를 관통한 쇠꼬챙이를 따라 끊임없이 선혈이 흐르고 있었고 내장의 손상도 심각했다.
“배신자는 너희들이다. 너희들이 먼저 배신을 한 것이다.”
“크윽... 파, 팔마당이 꼬리나 흔들면서... 뼈다귀나 받아먹는 곳인지... 아느냐... 흑도의... 성전이란 말... 이다...”
팔대호법의 수좌는 얼마나 분했는지 눈도 감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동료를 죽인 네 명은 수좌호법의 죽음을 비웃었다.
“이제 상황이 바뀌었군. 우리는 다섯이고 너희들은 셋이야.”
조덕창은 어느새 팔대호법의 네 명을 포섭해 두었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네 호법의 변절에 온마의 안색이 변해버렸다. 현재 인원으로는 조덕창 한 사람을 상대하기에도 벅찬 상태였고 네 명의 호법까지 합친다면 필패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죽일 놈들. 배반의 대가를 받아라.”
대치상황을 깬 것은 구청림이었다. 네 명의 호법들이 동료들을 무참히 죽이는 것도 부족해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으며 비웃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구청림은 거대한 도끼를 들고 네 호법을 향해 달려들었다.
“너도 일찍 죽고 싶은가 보구나.”
네 명의 호법들은 구청림의 돌격을 비웃었다. 이성을 잃고 덤벼들어서 상대할 만큼 사대호법의 무공과 역량은 약하지 않았다. 팔대호법의 두 사람이 합치면 팔마의 한 사람과 동등했다. 성급하게 덤벼든 구청림이 오히려 위험했다.
쿠오오~.
“허억!”
“아, 아니...”
검은 도끼가 허공을 가르자 사방이 어둠 속에 파묻혀버렸다. 공격은 고사하고 방어조차 할 수 없었다. 네 호법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크아악!”
“으악~.”
어둠 속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서히 어둠이 가시자 허리 부근이 양단된 네 구의 시체가 나타났다. 시체 주위엔 쏟아져 나온 내장과 선혈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다. 팔마와 비슷한 수준의 역량을 가진 구청림의 일격에 네 호법이 반항조차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앙천묵월(仰天墨鉞)!”
조덕창은 구청림이 들고 있는 대부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소. 앙천묵월이오.”
“음... 수라도에 이어 앙천묵월이라... 아무리 나라 해도 모순팔병(矛盾八兵)의 두 개를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
“모순팔병?”
온마와 구청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들고 있는 병기를 바라보았다.
“존재 자체가 모순이라는 여덟 개의 병기로 주인을 천하무적으로 만든다고 알려져 있지.. 그러나 나는 조덕창이다. 대송제국의 정통 후계자란 말이다. 병기의 이점 따위로 나를 이길 수 없다.”
코를 찌르는 강렬한 주향(酒香)이 조덕창의 몸에서 흘러 나왔다.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취할 정도로 독했다. 조덕창이 취기수예의 공력을 극한까지 운용했다는 증거였다.
지금까지 본신의 역량을 절반도 드러내지 않았던 조덕창이 전력을 다하는 것은 수라도와 앙천묵월의 위력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그만큼 모순팔병의 이름은 조덕창의 가슴을 무겁게 내리 눌렀다.
“타!”
조덕창이 온마와 구청림을 향해 쌍 장을 내밀었다. 겉으로 드러난 형태는 무당 면장의 일종인 연쌍비(燕雙飛)였지만 강렬한 주향을 담은 취기가 담긴 장력은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우웅~.
구청림이 앙천묵월을 휘두르자 회의실 내부는 다시 한번 어둠에 휩싸였다. 조덕창의 장력은 어둠에 묻혀 사라져버렸다. 수마가 그 틈을 이용해 수혼지를 조덕창에게 퍼부었다.
파바박~.
열 손가락에서 쏟아져 나간 지력이 조덕창의 몸을 꿰뚫었다.
“이형환위!”
수마는 수혼지가 꿰뚫은 조덕창이 허상이란 것을 느꼈다. 조덕창은 어느새 그림자만 남기고 온마를 향해 쇄도했다.
우웅~.
온마는 어둠 속에서 날아온 조덕창을 향해 음시조를 펼쳤다.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독향을 담은 회색빛 경기가 어둠을 갈랐다.
콰쾅.
조덕창이 휘두른 일장과 음시조의 경력이 충돌했다. 비릿한 독향은 진한 주향에 밀려 사라졌고, 온마는 뒤로 십여 걸음이나 밀려나버렸다. 강호십대고수의 하나인 온마가 전력을 다했는데 조덕창의 일장을 막아내지 못했다.
“크윽...”
손바닥을 통해 침투한 취기수예의 내력이 온마의 내부를 뒤흔들었다. 취기수예의 공력이 음시조의 내력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이렇게 강할 줄이야. 수라도를 사용해야 하는데...’
살기를 타고 움직이는 수라도는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다. 게다가 목표물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일단 사용만 하면 피를 보기 전에 멈추지 않는 마물로 마치 영혼을 가진 악마의 병기와 같았다.
그러나 상대는 조덕창이었다. 조덕창은 온마가 수라도를 사용할 수 있는 시점을 주지 않았다. 온마가 일장에 밀려 뒤로 밀렸는데도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구청림에게 방향을 전환해 수라도를 사용할 순간을 막아버렸다.
파박.
따당.
근신공방(僅身攻防).
조덕창이 선택한 수단은 구청림을 난경에 빠트렸다. 장병기를 주로 하는 구청림에게 근접거리의 전투는 약했다. 휘두르면 세상을 어둠 속에 빠트린다는 앙천묵월도 근접거리에서는 오히려 방해만 됐다.
상대와 다리를 포개고 권법과 금나, 슬격, 고를 사용하는 조덕창의 움직임은 흐르는 물처럼 유연했다. 그리고 일격, 일격에 취기수예의 내력이 담겨져 있어 그 위력은 만근암석조차 가루로 만들 정도였기에 구청림은 방어하는 조차 힘겨웠다.
“죽어라!”
수마가 조덕창의 배후를 급습했다. 조덕창은 수혼지의 지력을 잉어가 거센 물결을 박차고 오르는 것처럼 움직이며 피해버렸다. 구청림은 조덕창이 떨어지자 곧바로 앙천묵월을 휘둘렀다.
사방이 어둠에 묻혀버리고 바람을 가르는 경기가 비산(飛散)했다. 그러나 조덕창은 벌써 앙천묵월의 공격권에서 벗어나 수마에게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과히 바람 같은 움직임이었다.
“죽일 놈!”
구청림은 이를 갈면서 수마를 공격하는 조덕창을 향해 달려갔다. 2대 1의 결전이 벌어졌다. 조덕창은 두 사람을 상대하면서도 여유롭게 보였다. 물론 앙천묵월의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철저할 정도로 근접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온마는 몸속에 침투한 취기수예의 내력을 억지로 배출했다. 배출하는 과정에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움직여야 할 시기였기 때문이다. 온마는 수라도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수마와 구청림이 표적인 조덕창과 근접전을 벌이고 있어 수라도를 발출할 수가 없었다. 수라도는 목표한 지점 안에 있는 생명체는 피아를 가리지 않는 따라가 죽이는 마물이었다.
조덕창은 앙천묵월의 특징을 알고 근접전을 선택한 만큼 수라도의 특징도 알고 있었다. 근접전 하나로 모순팔병의 두 가지 병기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온마는 조덕창의 입가에 떠오른 비웃음으로 그 사실을 눈치 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저놈이... 수라도에 대해 잘 알고 있구나.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강남의 강호인들을 공포로 몰아 놓은 악마가 의제와 부하 한 사람 때문에 공격을 주저하고 있었다. 온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적에게는 한 치의 자비도 없지만 자기 사람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따뜻한 사람, 그게 온마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조덕창은 온마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수마와 구청림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 몇 번이나 있었는데도 넘어갔던 것이다. 조덕창은 한꺼번에 세 사람을 죽일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마는 구청림과 달랐다. 구청림은 아직 경험이 부족해 조덕창의 생각을 파악하지 못한 채 놀아나고 있었지만 수마의 머리는 차갑게 움직이고 있었다. 조덕창의 이상한 행동과 온마의 표정을 읽고 있었다. 수마는 기회를 엿보다가 갑자기 구청림에게 일장을 가했다. 구청림은 뒤로 날아갔고 수마도 반탄력을 사용해 후퇴했다.
“대형!”
수마는 온마에게 외쳤다.
“죽어라!”
온마는 조덕창을 향해 수라도를 날렸다.
위잉~.
여섯 자루의 수라도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조덕창은 날아오는 수라도는 보지 않고 수마를 노려봤다. 수마가 이런 잔꾀를 부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끝났다.’
수라도가 조덕창의 면전까지 도달했을 때 온마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조덕창은 그리 쉽게 죽을 운명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조덕창은 한 치의 미동도 없었지만 땅바닥이 움직이는 것처럼 미끄러지는 듯 수마를 향했다.
“대나이신법!”
온마는 조덕창이 펼친 대나이신법을 보고 경악했다. 서역밀종의 전설적인 신법을 익혔을 줄은 예상치 못했고, 확신했던 조덕창의 죽음이 물 건너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라도는 피를 부르는 마물처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조덕창이 이동하면서 발생한 경풍을 따라 수라도가 허공에서 급회전했다. 마치 제비가 허공에서 방향을 선회하듯 자연스러웠고 빠른 속도였다. 수라도는 바람을 가르며 조덕창을 향해 날아갔다.
“과연 수라도! 피는 쫓는 마물답구나.”
조덕창은 방향을 선회했는데도 더욱 빠르게 쫓아오는 수라도를 힐끗 쳐다보고는 감탄했다. 표적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빨라지는 수라도의 능력과 추적능력은 이기어검술과 별 차이가 없었다.
“타!”
수마는 표적물 근처에 있는 자까지 수라도가 공격한다는 성질을 모르고 있었기에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조덕창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라도가 공기의 미세한 파동을 감지해 움직인다는 것을 몰랐기에 조덕창을 향해 수혼지를 사용했다.
“안 돼!”
온마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다. 강렬한 경기의 파동을 느낀 수라도 두 자루가 급속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물살을 가르는 날치처럼 수혼지의 경기를 가르며 번개처럼 날아갔다.
“크아악~.”
수마의 중지와 검지 사이를 수라도가 가르며 박혀버렸다. 수라도가 두 팔을 장작을 가르는 듯 파고들자 수마는 비명을 질렀다. 팔꿈치의 연골까지 수라도가 박혀버린 수마는 고통에 몸부림쳤고 조덕창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갑자기 빠른 속도로 수마를 향해 돌진해 가다가 머리를 뛰어 넘어 수마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경풍이 일자 두 자루의 수라도는 먹이를 본 뱀처럼 조덕창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수라도가 조덕창이 움직인 동선을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조덕창은 수라도가 방향을 선회해 허공을 향하는 순간 수마를 등으로 밀어버렸다. 수라도는 수마의 복부를 가르고 어깨까지 칼날을 드러냈다.
“허억! 컥.”
늑골을 가르고 어깨뼈를 절단한 두 자루의 수라도 중에 하나는 수마의 심장을 터트렸다. 수마는 심장이 갈라지는 충격에 피를 토하고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쓰러지는 수마를 조덕창이 양 옆구리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수마를 밀 때 발생한 경력을 감지한 마지막 두 자루 수라도를 막을 방패로 삼기 위해서였다. 수라도가 양옆으로 곡선을 그리며 회선하더니 수마의 뒤에 숨어 있는 조덕창을 향해 쇄도했다.
퍽. 퍼벅.
수라도는 수마의 허리를 뚫고 들어가 척추 뼈마저 갈라버렸다. 조덕창은 이형환위를 사용해 수마의 시체와 위치를 바꿔버린 것이다.
“이 죽일 놈아!”
수마의 죽음에 넋을 잃은 온마가 주저앉아 버린 것에 비해 구청림은 타오르는 분노와 증오를 담아 앙천묵월을 휘둘렀다.
쿠쿠쿵.
앙천묵월의 진정한 힘이 쏟아져 나왔다. 어둠에 휩싸인 회의실 내부가 진공상태로 변한 것처럼 가공할 압력이 발생했다.
“이런!”
조덕창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버렸다. 수라도를 피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바람에 구청림과 앙천묵월을 잠깐 잊어버린 결과는 참혹했다. 피하려고 해도 강대한 압력에 짓눌려 움직일 수가 없어 앙천묵월을 맞상대해야 했다.
“타아!”
조덕창은 취기수예의 내력을 극한까지 뽑아 오른팔에 전달했다. 강렬한 주향이 조덕창의 오른팔에서 뿜어져 나왔다.
파박.
취기수예의 내공으로 강철보다 강해진 조덕창의 오른팔이 앙천묵월에서 쏟아진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더니 분해 된 살점이 그 뒤를 따랐다.
“크윽...”
앙천묵월의 압력이 취기수예의 방어력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조덕창을 분해하려는 순간.
콰쾅.
회의실의 창과 문을 봉쇄한 철판과 천장이 앙천묵월에서 쏟아져 나온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박살나버렸다. 사방이 막혀 압축된 기세가 창과 문, 천장이 열리면서 사라지자 조덕창은 움직일 수가 있었다. 조덕창은 구멍이 난 천장을 통해 밖으로 도주했다.
“멈춰라!”
구청림은 도망가는 조덕창을 향해 외쳤을 뿐 추적하지 않았다. 겨우 단 한 번 앙천묵월을 제대로 사용했는데 내공을 거의 소모했기 때문에 움직일 여력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온마는 넋나간 표정을 지은 채 수마의 시체를 않고 있을 뿐 조덕창에 관해 신경도 쓰고 있었다. 그 덕분에 조덕창은 구멍 난 천장을 통해 지붕으로 빠져 나왔다. 지붕은 앙천묵월의 파괴적인 압력으로 인해 기와는 산산이 흩어져 있었고 보의 기능을 하는 두공은 부러지기 직전이었다. 기둥마저 중심을 잃고 흔들리고 있어 회의실 건물은 해체 일보직전이었다.
“크윽... 내 팔이...”
조덕창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오른팔을 보며 노기를 터트렸다.
“구청림. 이 원한을 내 꼭 갚아주마.”
조덕창은 이를 갈았다. 가슴 속에서 복수의 원념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조덕창이 처한 상황은 일단 도주해 살아남는 게 먼저였다. 조덕창은 오른팔이 도주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왼손을 펴 수도(手刀)로 만든 뒤 내리쳤다.
팍.
“크윽...”
뚝.. 뚝..
뼈만 남은 오른팔이 떨어지는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조덕창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잘려진 오른쪽 팔에서 선혈이 쏟아지고 있었다. 조덕창은 허리에 차고 있던 호리병을 꺼내 들더니 박살난 팔 주변에 독주를 쏟아 부었다.
“크윽...”
생살이 찢겨져 나가는 고통이 느껴지자 조덕창은 신음성을 흘렸다. 그러나 아무리 고통스러워 도 의식을 잃어버리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회의실 건물에 문제가 생기자 팔마당 무사들이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 주저앉으면 죽음뿐이었다.
평소라면 하루살이나 다름없는 팔마당의 무사들이었지만 심한 중상과 과다한 출혈로 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조덕창에겐 위협적인 존재들이었다. 조덕창은 도주로를 찾기 위해 주위를 훑어보았다.
하지만 어느새 팔마당 무사들이 회의실 건물을 포위해 도주로는 없었다. 조덕창의 안색이 점점 굳어져 갈 때 갑자기 포성이 울렸다.
콰쾅.
쾅.
팔마당의 비밀거점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화포! 이곳까지 군부가 알아냈단 말인가. 구류방의 정보력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남해방 총단도 위험해.”
사방이 포성에 흔들리고 불바다로 변하자 회의실 건물에 발생한 이변 때문에 모인 팔마당 무사들이 우왕좌왕했다. 조덕창은 그 틈을 타서 지붕에서 내려온 뒤 조명용으로 사용하는 화로에서 횃불을 꺼내 들었다. 횃불로 상처를 지져버렸다.
“크아악~.”
조덕창의 비명은 포성 속에 묻혀 버렸다. 살을 지져 출혈을 막기 위해서였지만 그 고통은 독주로 소독하던 수준이 아니었다. 조덕창은 다시 한번 구청림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앙천묵월... 모순팔병을 상대하려면 모순팔병이 있어야겠지. 내 이 원한을 배로 갚아주마. 구청림.”
조덕창은 원한을 불태우며 불바다로 변해가는 팔마당의 비밀거점에서 도주했다. 복수만을 가슴에 가득 채우고 사라져 가는 조덕창의 그림자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인해 진하게 드리워졌다.
제갈사는 악무수의 방문을 받았다. 악무수는 나이가 들어 어느새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있었고 그만큼 노회해졌지만 아직도 노가주에 대한 충성은 순수했고 변함이 없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총당주.”
악무수는 산동악가의 총당을 맡고 있었다. 실질적인 2인자의 자리를 악무수가 맡은 것은 본신의 실력과 악가에 대한 충성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무수가 노가주를 대행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갈 노사.”
“그렇구려. 정말 오랜만이구려. 그런데 하릴없이 시간만 때우는 늙은이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오?”
제갈사의 말 속에 불만이 담겨져 있었다. 한적한 건물을 하나 내주고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은 악가에 대한 섭섭함이 여실히 드러냈다. 그러나 악무수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가주님께서 찾으십시다.”
“호오~ 악 가주께서 폐관을 마치셨소.”
“그렇습니다. 지금 취의청에서 노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음... 알겠소.”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악무수는 제갈사에게 포권을 하고 물러났다. 제갈사는 악무수의 등을 바라보며 음산한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때가 왔군.”
하북팽가의 몰락은 산동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산동을 삼분한 한 축이 어이없게 무너져 버렸으니 당연했다. 산동 북부를 점거하고 있던 하북팽가의 세력들이 급히 철수해 힘의 진공상태가 벌어지자 그동안 옴짝달싹 못하고 산동 중부 지역에만 만족해야 했던 육가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동악가 역시 하북팽가와 육가문, 남궁세가의 세 세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제갈사는 이런 변화를 모두 읽고 있었다. 노가주가 움직이려는 것도 계산속에 다 들어 있었다. 제갈사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취의청을 향해 느릿하게 걸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취의청에 들어선 제갈사를 향해 악비영과 육능풍이 인사했다. 제갈사는 악비영과 육능풍까지 취의청에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얼굴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너희들도 그동안 잘 있었느냐?”
“염려하신 덕인지 항상 평안무사 합니다.”
“다행이구나. 이 나이가 되면 자기 목숨보다 후손이나 제자들이 더 염려스러운 법이다.”
제갈사는 자비로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제갈 노사를 초청했소이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소이다. 악 가주.”
제갈사는 산동악가의 가주인 악군청을 바라보며 모르는 척 가증스런 연기를 했다.
“본 가는 옛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오.”
“그럼 육가문과 전쟁을 벌이겠다는 것이오?”
“하북팽가의 몰락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기회올시다. 게다가 남궁세가도 그 세력이 꺾였다고 하니 육가문만 이기면 다시 산동을 탈환할 수가 있게 됐소이다.”
“허~. 달이 차면 기운다고 했지만 육가문은 18년을 넘지 못하는구려. 하지만 육가문과 전쟁을 벌인다면 많은 아이들이 다치거나 죽어나갈 것인데...”
제갈사는 육가문과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 태을궁에서 키운 제자들이 해를 입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진다는 듯이 아픔을 드러냈다. 암영이 가득한 얼굴과 떨리는 입술은 누구라도 속아 넘어갈 정도로 완벽했다.
“그래서 제갈 노사께 부탁을 드리고자 하외다.”
“무슨 부탁이오?”
“육가문과 전쟁을 치를 본 가의 주전세력은 백영대이오. 고로 백영대의 대주인 비영이가 전선의 지휘를 맡을 것이고, 암중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귀영조가 책임질 것이외다.”
악군청은 육능풍을 슬쩍 바라보았다. 육능풍이 귀영조를 지휘하기 때문이다. 악군청이 시선을 육능풍에게 돌린 순간 제갈사는 비웃음을 지었다. 악비영이 전선의 지휘를 맡는다는 악군청의 생각이 가소로웠던 것이다. 제갈사는 표정을 곧바로 고쳤지만 육능풍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
“두 아이는 무공도 뛰어나고 심기도 만만치 않소이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해 쉽게 얻을 승리를 어렵게 쟁취할 수도 있고, 피할 수 있는 피해를 안을 수도 있소이다.”
악군청은 말을 끊고 제갈사를 바라보았다. 투명한 악군청의 눈동자에 제갈사는 잠시 등골이 서늘했다. 그러나 제갈사는 어째서 등골이 서늘할 만큼 긴장한 일을 가볍게 치부해버렸다.
“군사가 되어 두 아이를 지도해 주시오.”
“음... 그렇게 하겠소이다. 내 비록 늙었지만 제자들을 죽일 수는 없소.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고맙소. 정말 고맙소. 제갈 군사.”
악군청은 제갈사의 두 손을 잡고 고마워했다. 제갈사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악군청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악비영의 눈동자에는 깊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육능풍의 눈동자는 달랐다. 깊고 깊어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그윽한 눈동자에 차가운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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