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러왔던 대만영화 '청설'을 봤다.
요즘들어 본 영화 중 제일 맘에 들었다.
허구가 주는 현실감의 무게로 맘이 답답해졌던 '시'처럼 암담하지 않아서 좋았고
허구가 주는 황당무게한 근자감으로 헛웃음만 나왔던 '페르시아의 왕자'처럼 이기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영화적인 완성도를 따지는건 영화 감독과 평론가들 뿐 아닐까..
현실의 눈으로 보자면 한없이 어설플 수도 있지만..
어짜피 젊은 날의 사랑이라는게 그 어설픔의 연장선 상에 있고
그래서 더 풋풋하고 싱그러운 영화.
한 여름의 소나기 처럼..
태풍이 지나간 후의 바닷물처럼..
어릴 적 꿈꾸던 노란색 비옷처럼 고운 색으로 가득했던 영화..
오랜만에 고민없이 행복한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이 여주인공. 진의함 양때문이다.
꽃미남에게는 시도때도 없이 잘도 반해주면서 여배우에겐 유독 까칠한 1인.. ( 동성이니 당연한걸까.. )
하지만 이 진의함 양은 드라마를 한 편 보고는 폭 빠져버렸다.
딱 내가 좋아하는 타입.
이쁜 척 안하지만 귀염성 있고 싹싹하고..
밝고 명랑하지만 소란스럽게 나대지 않고..
여기 저기 민폐끼치지 않고 늘 열심인..
하하.. 어짜피 캐릭터이겠지만..
한때 내가 찍었었던 꽃미남..팽우안.
이 영화 속의 그는 딱 스무살 그 무렵의 건강한 남자아이 느낌.
남자라기 보다는 남자아이를 벗어나고 있는.. 아직은 중성적인 느낌이 살짝 도는 풋풋한 젊음
세상 그 무엇에도 솔직할 수 있는 스무살 남짓만의 패기
이 영화 최대의 미덕은 영화적인 완성도를 떠나..
어떤 기술로도 조작할 수 없는 풋내나는 인생의 한 순간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
그 어떤 지점에서부턴가 해피엔딩을 위한 어느 정도의 무리수가 있긴 했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 모두 기꺼운 맘으로 눈감아주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는 영화
영화는 화려하고 예쁜 셋트대신 작고 초라하지만 깨끗한 대만의 뒷골목의 일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번쩍거리는 할리 데이비슨이 아니라 작고 낡았지만 정겨운 스쿠터랄까..
다친 여주인공을 병원에 데려가는 장면 장면에서 비추어지는 사람사는 냄새로 가득한 대만의 골목..
누군가는 빨래를 널고. 누군가는 시장을 보고.. 각자 나름의 인생을 충실히 살아가는 모습들.
처음 대만에 갔을 때.. 마치 일본의 소도시에 온 느낌이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굉장히 꺠끗하고 깔끔한데.. 전체적으로 낡고 추레한 느낌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아열대성 기후인 대만은 더운 날씨와 잦은 강우로 인해
아무리 페인트 칠을 해도 쉽게 벗어지며
아무리 타일이나 석면 공사를 해도 외장재가 버티질 못한다고 했다.
군데 군데 떨어지고 벗겨진 건물 외장이 어찌나 낯설던지..
하지만 더럽다고 하기엔 모든 곳이 정돈 되고 손질이 되어 있었다.
작고 추레하지만 깔끔한 ... 곱게 늙어가는 촌로같다고 느껴졌던 타이뻬이.
그 곳의 뒷골목길을 다니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영화 곳곳에 녹아있다.
도시락 장사를 하는 남자 주인공의 직업으로 대만에서 먹었던 식당들이 떠올랐다.
하얀 밥에 오이볶음과 나물 몇가지를 위앤탕에 곁들여 먹던 여느 저녁..
식사를 마치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돌아오던 타이뻬이 기차역 앞의 학원가 길.
대만 학생들 틈에 섞여 줄을 서서 버블티를 한 잔 사서
바쁜 학원가의 여기 저기를 한가하게 구경하곤 했는데..
아아..
대만에 가고 싶다.
사실.. 대만이란 곳은 대만 연예인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특별한 장소가 될 수 있는 걸지도..
나만 하더라도.. 대만 가수들을 좋아하기 전과 후의 느낌이 너무 다르니..
영화가 끝나고 대만에서 먹었던 버블티가 먹고 싶어 명동까지 갔다.
명동에 있는 딘다이펑 옆에는 quickly라는 버블티 매장이 있는데
대만 청년이 재료와 컵까지 모두 대만에서 공수해 팔고 있다.
사실 요즘엔 타피오카 티는 어디서나 먹을 수 있지만..
이게 재료의 질에 따라 호불호가 정확히 나뉜다.
싸구려 타피오카는 씹을 수록 종잇장같은 맛이 나지만..
이 곳의 버블티는 씹으면 작은 조각으로 깨어져 살살 녹는 느낌을 맛볼 수 있다.
쫄깃 거리다가 녹아내리는 타피오카..
어쨌든 내겐 2시간 동안 '진의함'양을 볼 수 있어 너무 좋았다.
하지만.. 일요일 11시 타임의 CGV에 관객 5명이라니.. ㅠ.ㅠ
조만간 내려갈 듯.. ㅠ.ㅠ
마지막으로....개인적으로 너무 맘에 드는 컷.
다시 태어나도 내 언니가 되어 줄래..?
첫댓글 글을 참 맛깔나게 쓰십니다. 스토리텔링 하셔도 되실듯,,,^ ^ 아니면 이미 이 쪽 관련 일을 하고 계신건 아닌지,,,,
하하.. 왠 과찬의 말씀을.. ^.^
감사합니다. 스토리텔링 쪽의 일이 뭘까요??? 작가???
하하.. 어릴적 꿈이 동화작가이긴 했지만.. 세상 때 묻은 사람이 동화를 쓴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더군요. ㅠ.ㅠ
작가 맞습니다. 티브이에 방영되는 다큐등의 내용을 만드는 사람들이지요 ^^
우와~ 영화 보시고 이렇게 심층분석 하시다니.... 저는 그냥 웃기는 영화만 좋아하는데.... 유치한걸로^^
공자님. 그럼 주성치 좋아하시겠네요? 요즘 주성치 월광보합 2탄이 개봉을 했는데.. 워낙 소수 매니아층 영화라 개봉관과 개봉 시간이 너무 드물어요.. ㅠ.ㅠ 보고 싶어도 못보는 1인..
주성치 별로 안좋아하고요 한국식 코믹영화가 좋습니다. 특히 시트콤이 더 재미있구요^^ 평상이 받은 스트레스를 코믹영화 보면 많이 풀리거든요^^ 좋은 하는거는 옛날거 연인들, 세친구, 프란체스카, 롤러코스터 등등....
역시....쪈주나이차 파는 곳이 있었어요...어딘지 궁금했는데 감사해요 ^^
얼른 보고싶어질 만큼 글이 감미롭네요.. 제가 좋아하는 스탈의 영화.. 언제 볼수 있을지 기다려집니다.
지두 이 영화 봤습니다. 잔잔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