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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一圓)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대소 유무(大小有無)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 명상(言語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로서 공적 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十方三界)가 장중(掌中)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無始曠劫)에 은현 자재(隱顯自在)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 |
반갑습니다. 오늘은 ‘일원상의 진리’ 두 번째 시간입니다. ‘일원상의 진리’는 원불교에서 흔히 제일 어려워하는 부분이지요.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여기를 알면 깨침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다’라는 한 자리를 아직 못 본 사람들은 오늘 저의 말을 집중해서 따라오세요. 그러면 오늘 깨칠 수도 있어요.
<일원의 주소>
일원(一圓)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
일원상의 진리 중 “일원은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며” 부분은 ‘일원의 주소’입니다. 지난 시간에 다루었는데, 간단히 다시 복습하겠습니다.
일원(하나자리·참 나)의 주소 (고향 · 본래면목 · 내역)
본원 = 심인 = 본성 --> 무촌(無寸) |
[일원의 주소 ① 우주만유의 본원]
* 宇:천지사방우(天地四方). 宙:고금주(往古來今). 萬:많을만. 有:있을유 우주만유 : 우주안에 있는 온갖 사물, 우주 만물·삼라만상·유정·무정, 동물·식물·광물 등 일체 우주만유 = 법신불 일원상= 천지만물 허공법계 = 사은 = 처처불상 = 견성(見性) 이 몸 = 사은의 공물(公物) * 본원(本源): 근본본. 근원원. 근원, 시초(始初), 고향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 현상, 이치의 근원이며 실재·전체. (同氣連契) => 진리와 우리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위력과 인과에 대한 信仰의 필요) |
일원상의 진리를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데, 먼저 일원은 ‘우주만유의 본원’이라 표현하셨습니다.
‘우주만유’는 둘로 나누면 ‘천지만물/허공법계’라 할 수도 있고, 넷으로 나누면 ‘천지/부모/동포/법률의 사은’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본원’은 ‘근원’이면서 ‘실재’입니다. 근원과 실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진공 따로 있고, 묘유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일원의 주소 ② 제불제성의 심인]
* 제불(諸佛):모든제. 깨달을불. =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 제성(諸聖):모든제. 성인성 = 시방삼세의 모든 성인 제불제성 = 정화신불(正化身佛) * 심인(心印):마음심, 불심. 찍을인,인가 또는 인증. 모든 부처님과 성자들이 마음으로 전하는 공통된 깨달음의 경지. 깨달은 자리. 비고(空) ·밝고(圓), 조화로운(正) 마음. (同源道理, UR) => 스승의 서원과 신심 수행, 구도심 등 심법과 언행 대한 믿음과 불공 필요 |
일원은 ‘제불제성의 심인’이라 하셨습니다.
어느 종교든, 깨친 사람의 마음은 심인 자리로서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의 이름이 다르고, 지역이 다르고, 언어와 제도가 다르지만, 심인 자리에서는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고, 실재하는 것이고, 무형이 근간인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일원의 주소 ③ 일체중생의 본성]
* 체(切): 모두체. 중(衆): 무리중 일체중생 : 모든 인간 · 생명, 깨치지 못한 범부중생.=편화신불(偏化身佛) * 본성(本性)근본본. 성품성 : 본디의 성질, 타고난 성질, 천성, 본래 마음. 성품, 자성, 진성, 불성 등으로도 표현함. * 서로 평등하며, 본자구족(本自具足), 본래고향, 본래면목, 본래청정-오욕에 도둑맞음 참 나를 믿고(신분의성), 본래 성품을 깨쳐서 회복단련하서 잘 쓰면 누구나 부처. |
일원은 ‘일체 중생의 본성’이라는 말에서, ‘본성’은 ‘본래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일체중생의 본성’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성품/정신/마음/뜻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 성품(회복, 오득, 단련, 직관),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자리, 아는 이것 자체(근본) 선(禪)= 원래에 분별 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인 바 원래에 분별 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性稟)- 무시선법, 수행품 59장 마음바탕 = 심전(心田)(계발, 농사, 공부 성품은 단련하면 광명이 나오고 은(恩)이 비치므로 금강불성(金剛佛性)이라고 한다.(대산) * 정신(기운, 수양, 적적성성-고요하고 두렷한)- 잠재의식, 무의식 정화, 단전주선 * 마음(공부, 대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보줄도 들을줄도 아는 이것 희ㆍ노ㆍ애ㆍ낙ㆍ애ㆍ오ㆍ욕(喜怒哀樂愛惡欲)의 七情이 동하기도 한다. 분별성, 주착심(ego), 의식, * 뜻(원력-서원, 욕심) |
‘성품’에서 ‘성’의 한자를 풀어보면 마음(心=忄)이 생기는 자리(生)가 성(性)인 것입니다. 마음이 지금 생긴 바로 그 자리입니다. 성품은 분별주착이 없는 자리입니다. 성품은 오득하고 단련하는 것입니다. 성품은 깨달아 얻는 것이고, 단련하는 것입니다. 성품은 정신의 뿌리가 됩니다.
‘정신’은 수양하는 것입니다. 정신은 기운입니다. 적적성성, 성성적적이라 표현합니다. ‘적적’은 ‘고요할 적’입니다. 아무런 때가 끼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나 의식이 끼지 않았지요. ‘성성’은 초롱초롱한 것을 의미합니다. ‘적적성성’ 또는 ‘성성적적’을 ‘고요하고 두렷하다’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여러분이 저를 보고 ‘아 교무님이구나’ 아는 것이 정신입니다.
‘마음’은 대조하는 것, 공부하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분별성(분별하는 성질)과 주착심(주착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성품과 정신에서 그대로 발현된 마음은 좋은 마음이지요. 그러나 성품과 정신에서 오는 사이에서 희로애락애오욕 7정이 동해서 꺾어진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볼 때, ‘아 교무님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에서 그대로 온 마음입니다. 그런데 ‘어라, 얼굴이 너무 크다’라고 생각한다면 분별성의 마음이지요. 분별성이 계속 되어서, 저를 볼 때마다 ‘교무님은 얼굴이 크다’라고 반복해서 생각하면 주착심이 됩니다.
‘뜻’은 내가 안이비설신의로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구분을 하자니 성품/정신/마음/뜻으로 구분하는 것이지요. 실제 작용에서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에 주의하셔야합니다. 성품에서 정신으로, 정신에서 마음으로 나오는 데 1시간 쯤 걸린답니까? 순식간에 성품에서 마음이 나오고 뜻이 생겨 행합니다. 그 행한 것이 업이 되어 성품으로 순식간에 저장됩니다. 순식간에 성품→정신→마음→뜻으로 나오고, 나오는 동시에 뜻→마음→정신→성품으로 들어가서 저장됩니다. 그렇게, 기억으로 저장되고 주착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일원상의 진리’에서 일원은 ‘일체중생의 본성’이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본성’이라는 말은 ‘본래의 성품’이라는 뜻입니다. 즉, 성품/정신/마음/뜻 중 성품을 의미합니다. 성품은 ‘참 나’라는 말과 같습니다. 성품은 영생의 동반자이고, 지금 여기서도 여러분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성품은 몸이 달라져도 여여부동이고, 불생불멸입니다.
그런데, 일원의 주소를 말씀하실 때, 일체중생에 대해서는 ‘본성’이라 표현하고, 제불제성에 대해서는 ‘심인’이라 표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일체중생의 마음은 분별성과 주착심의 마음이지만, 제불제성은 분별성과 제불제성의 이전 자리 즉, 본래 성품 그대로 마음을 쓰기 때문입니다.
[마음공부에서 ‘마음’의 의미]
한편, 원불교에서 ‘마음공부’하자고 할 때 ‘마음’은 성품/정신/마음/뜻 중 하나의 의미로서 ‘좁은 의미의 마음’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셔야합니다. 마음공부가 그런 좁은 의미라면, 분별이 분별을 대체하는 마음공부일 뿐이지요. 원불교의 ‘마음공부’에서 ‘마음’은 성품/정신/마음/뜻을 합친 의미로서 ‘넓은 의미의 마음’을 공부하는 뜻입니다. 즉, 성품을 오득하고 단련해서, 정신을 수양하여 맑은 기운을 지니고, 선악을 초월한 마음을 내자는 공부입니다.
마음공부 중 성품에 대한 공부가 정말 중요합니다. 성품을 깨닫고 단련하는 공부지요. 대개 사람들은 분별이 분별을 대체하면서, 중생심으로 살곤 하지요. 그런 사람들은 열심히 선을 한다 할 때에도 에고(ego, 자아)의 마음으로 선을 향해서 달려갈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오매일여’ 즉, 동정간 오롯한 마음이 곧 ‘무시선’인 것으로 착각해요. 그러면 계속 선만 해야 할 뿐, 생활을 못하거든요. 수행을 하는 것은 ‘성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성품’은 마음이 생기는 자리라 말씀드렸지요[성품 성(性) = 마음 심(忄)+ 날 생(生)]. 성품은 마음이 생생약동하는 곳입니다. 불교에서는 ‘연기’라 하여,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이 성품이라 표현했습니다.
<일원의 속성 – 대/소/유무>
일원(一圓)은 … | ||
대소 유무(大小有無)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 대 | 진공 |
공적 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 소 | 묘유 |
진공 묘유의 조화는 | 유무 | 조화 |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 |
‘일원상의 진리’에서 ‘일원의 주소’ 다음 부분은 ‘일원의 속성’입니다. 일원의 속성은 대/소/유무 세 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①“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로서” 부분은 대 자리이고 진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②“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명상이 완연하여 시방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부분은 소 자리이고 묘유라 할 수 있습니다.
③“진공묘유의 조화는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자재하는 것” 부분은 유무 자리이고 조화라 할 수 있습니다.
[진공=묘유=조화]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진공/묘유/조화’가 하나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양/연구/취사도 설명하려다보니 나누는 것이지요. 성품/정신/마음/뜻도 설명하려다보니 나누는 것일 뿐, 진공/묘유/조화도 설명하려다보니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뿐이지, 실상은 1개라는 점을 꼭 강조하고 싶습니다.
진공이 곧 묘유이고, 묘유가 곧 조화입니다. 묘유를 따로 놓고 진공을 찾으려 하면 잘못입니다. 예를 들면 ‘무아와 윤회의 관계가 어떨까?’라는 질문한다면, 잘못된 질문입니다. 무아가 진공이고, 윤회는 조화인데, 그러다보니 무아와 윤회가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면 잘못인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묘유’ 부분은 이해가 잘 돼요. ‘대소유무의 분별이 나타나서’라는 내용을 보면 이해가 되지요.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난다’고 하면 쉽게 이해해요. 그러나 중생의 문제는, 진공은 모르고 묘유만 아는 것입니다. 묘유는 보여지는 것입니다. 묘유는 현상계라 할 수 있습니다. 진공은 실재계, 진리계라 하고요. 보여지는 묘유를 중심으로 놓고, 진공과 조화를 보려하면 안돼요. 체는 진공이거든요. 묘유와 조화는 진공과 떨어져있지 않고요.
묘유는 현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진공은 보는 것 자체입니다. 묘유는 상대의 세계입니다. 진공은 절대의 세계인데, 상대의 세계와 구별된 절대의 세계라는 의미가 아니라 진공/묘유/조화 전체가 통으로 하나인 절대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상대적 시각에서 절대를 보면 안돼요. 하나 자체가 절대인 것이고, 그 절대 안에 상대가 있는 것입니다. 절대와 상대가 분리된 개념이 아닙니다. 절대 안에 포함된 것이 상대입니다.
[보고 아는 이것]
여러분이 안경을 본다 칩시다. 안경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안경을 보는 것 자체, 안경을 보고 안경이라고 아는 것 자체도 있어요. 그것이 진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이 하는 착각이, 보이는 것을 보고 아는 것에서 ‘이것’이라는 게 있어서 보고 아는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방이 밝은 것은 전구가 있기 때문이지만, 진공/묘유/조화가 밝은 것은 전구 없이도 그냥 밝은 거거든요. ‘이것’이 들어서 안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크기가 있을 것이고 형태가 있을 것이고 생멸의 시점이 있어야 할텐데요, ‘보고 아는 이것’은 그렇지 않잖아요.
제가 컵을 들고 있다가 단상 밑에 컵을 숨겼어요. 이 장면을 본 사람은 단상 아래에 컵이 있는 줄 알아요. 그러나 지금 막 방에 들어온 사람에게 “단상 아래에 무엇이 있을까요?” 물었으면, 그 사람이 뭐라 말해야 틀리지 않을까요? ‘모른다’고 대답하면 틀리지 않은 대답이지요. ‘컵이 있다’고 대답하면 정답이고요. 사람들이 자기가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하는데, 모르면서도 없다고 해요. 여러분이 ‘지금 저를 보고 아는 그것’이 있나요, 없나요? 있는지 없는지 모르시겠으면, 모른다고 대답할 수는 있을지언정, 없다고 말하면 잘못이겠지요.
‘사람이 깊이 잠들어 꿈도 없는 때에는 그 아는 영지가 어느 곳에 있는가 (의두요목 제10조)’ㅡ 깨어 있을 때는 ‘보고 훤히 아는 이것’이 있지요. 그런데 꿈도 없이 잠들었을 때는, 그것이 어디 있을까요?
제가 꿈도 없이 잠들었다 칩시다. 알람 소리가 울려요. “따르릉” 너무 깊이 잠들었다보니 첫 소리는 제가 못 들었어요. “따르릉” 두 번째 소리는 얼핏 들었어요. 따르릉“ 세 번째 소리에서 제가 일어났어요.
깨어있을 때 ‘훤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꿈도 없이 잠들었다가 첫 번째 알람이 울릴 때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그때 ‘아는 그것’은 어디에 있나요? 두 번째 소리가 들릴 때 소리를 듣고 얼핏 ‘아는 그것’은 어디서 나왔나요?
[체/용]
묘유는 상(相)이에요. 사람들이 왜 번뇌의 바다 속에 사냐하면, 상이 자기인줄 알기 때문이지요. 대표적인 상이 몸입니다. 몸이 자기인줄 아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는 것이 상대의 세계에 삽니다.
일원상의 진리가 알려주는 내용은 진공과 묘유가 떨어지면서도 하나라는 것입니다. 진공이 체이고, 묘유는 상(相)이라 합니다, 조화를 용이라 하는데요. 상황 따라서는 진공을 체, 묘유와 조화를 묶어서 용이라 하기도 하고요. 진공묘유를 체라 하고, 조화를 용이라 하기도 합니다. 대종사께서 진공을 ‘대’, 묘유를 ‘소’, 조화를 ‘유무’라 표현하셨습니다.
대 | 소 | 유무 |
진공 | 묘유 | 조화 |
체 | 상 | 용 |
체 | 용 | |
체 | 용 |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
‘보는 것 자체’, ‘아는 것 자체’를 ‘참 마음’이라 합니다. 이것은 대소유무의 분별이 없는 자리입니다.
‘대소에 분별이 없다’는 말은,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도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안경을 보고 안경이라고 ‘아는 그 마음’은 크기가 큽니까, 작습니까? 크다고 하자니 대포무외ㅡ밖이 없을 정도로 크고, 작다고 하자니 세입무내ㅡ안이 없을 정도로 작습니다.
‘유무에 분별이 없다’는 말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훤히 아는 것’이 ‘있다’고 말하자니 실체가 없거든요.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이거든요. 사람들이 상대심에 사는 이유는 내가 있고, 네가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너와 내가 없는 가운데 너와 내가 있다고 알아야 하는데 너와 내가 따로 있다고만 상대심으로 착각하며 삽니다. 그렇다고 해서, ‘훤히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하자니 신기하게도 작용을 하고 있는데, 실체 없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는 크다고 하자니 크다고 말할 수 없고, 작다고 하자니 작다고 말할 수 없고, 있다고 하자니 없고, 없다고 하자니 훤히 있는 자리입니다. 뭐라 말할 수 없기에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입니다.
[일념미생전 소식 = 부모출생전 소식 = 천지미분전 소식]
법신은 무정물을 통해 작용합니다. 무정물은 눈, 귀, 몸 등이고, 법신은 마음입니다. 지금 저를 보세요. 안경이 보이죠? 안경이라는 대상이 있고, ‘안경이구나’ 아는 것 자체가 있습니다. 마음이 눈을 통해 아는 것이지요. 육신이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을 하는 것이, 육신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입을 통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법신입니다.
그 마음은 텅빈 것인데, 텅 빈 채로 무정물을 통해 작용합니다. 그저 텅 빈 것이어서, 크기가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법신은 있는 것인가요? 있다면, 어디에 있고,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법신이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를 묻는 의두가 ‘일념미생전 소식, 부모출생전 소식, 천지미분전 소식’입니다. ①한 생각 이전 자리는 무엇일까요? ②여러분이 보고 듣고 훤히 아는 이 자리는 언제 생겨났을까요? 태중에 있을 때 어느 순간 생겨났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자리는 부모로부터 몸 받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여러분이 부모로부터 몸을 받기는 했지만, 마음을 받은 것은 아니거든요. ③보고 아는 이것은 지구가 생기기 전, 천지가 생기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일념미생전, 부모출생전, 천지미분전 자리가 모두 같은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꿈도 없이 잠잘 때 여여자연하게 있는데, 형상이 있는 것은 아니고 허공과 같이 텅 비었습니다. 텅 빈 채로 그냥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법신이라는 체는 없는데, 작용은 있습니다. 그래서 진공이고 묘유입니다. ‘진공’은 ‘공’ 앞에 ‘진’이 붙어있지요. ‘공’이라고 하면 보통 없는 걸 뜻하는데, ‘진공’은 없는 것 같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묘유’는 ‘유’ 앞에 ‘묘’가 붙지요. 있는 것 같은데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진공과 묘유는 같습니다. 진공과 묘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법신은 테두리가 없어서 ‘언제부터’라는 게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텅 빈 법신이 무정물이나 대상을 통해 그저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는 게 있어서 아는 게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데 신령스럽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적영지’입니다.
법신은 툭 터진 채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그저 퍼져있습니다. 이것이 참 나입니다. 이 자리를 ‘무아’라고 합니다. ‘나’라는 것이 있느냐 하면 없습니다.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와 짝하는 것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의두요목에서 ‘만법으로 더불어 짝하지 않는 것이 그 무엇인가’ 물었습니다(의두요목 제6조).
의두요목에서 ‘만법이 하나에 돌아갔다 하니 하나 그것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물었습니다(의두요목 제5조). 만법은 법신이라는 그 하나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만법귀일입니다.
‘세존이 탄생하사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 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의두요목 제2조)ㅡ 제가 출가해서 이 의두요목을 깨치는데 2년 걸렸습니다. 여기에서 터지니까, 모든 의두요목이 터지더라고요. 천상천하유아독존에서 ‘독’은 하나 자리를 의미합니다. 수심결에는 ‘역력고명’이라 하였습니다. 역력하게 홀로 밝게 비추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그 자리가 하나 자리이고 독존입니다.
[일체가 마음이 짓는 바]
그동안 의두요목을 연마하신 분은 오늘 툭 터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의두요목 연마 안 하셨던 분은 오늘 하나 잡아가지고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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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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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가 다 마음이 짓는 바라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의두요목 제11조)’라 하셨습니다. 만물이 있는데, 만물은 상대이고 인연입니다. 만물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의식과 생각에 있습니다. 참 마음은 ‘일념미생전’입니다. 생각과 의식의 이전 자리는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만물 따로 마음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주만물이 마음 안에서 장중안의 구슬처럼 있습니다. 제가 컵을 들어 보입니다. 이 컵이 마음입니다.
[한 법도 설한 바 없노라]
‘세존이 열반에 드실 때에 내가 녹야원으로부터 발제하에 이르기까지 이 중간에 일찌기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노라 하셨다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의두요목 제4조)’라 하셨습니다. 녹야원은 석가세존이 최초로 법문을 설하신 곳입니다. 발제하는 세존이 돌아가신 곳입니다. 서가모니 부처님께서 ‘이것’이라는 게 들어서 설하셨다면 사기꾼입니다. 서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내가 49년간 설했지만 ‘이것이다’하는 게 들어서 설한 바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서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돌아가실 때에도 답을 주고 가신 것입니다.
[불사선 불사악]
중국에 육조대사가 오조대사로부터 법통을 받고 도망치던 중 자신을 쫓아오던 혜명상좌에게 던진 화두가 ‘불사선 불사악’입니다.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는 본래 그 자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차별, 현상의 상대적 세계에 있는 것이 선/악입니다. 상대적 세계의 선/악이 아니라, 그 이전 자리인 법신으로 들어가라는 화두가 ‘불사선 불사악’입니다.
[법신을 깨달아야]
과학의 세계에서 우리는 밖으로 ‘보이는 것’에 단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도의 세계라는 것은 ‘보는 그 자체’의 의식을 거꾸로 안으로 돌려서 들어가보는 것입니다. 분별을 통해 무분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차별, 현상의 분별을 통해, 법신이라는 무분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작용을 통해서 법신의 빈자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현상의 세계는 이분법의 세계입니다. 너/나, 선/악, 빈/부, 귀/천, 남/녀, 노/소 온갖 차별과 상대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잠깐 있어지는 세계입니다. 환영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잠깐 있어지는 것이 자기인 줄 알아요. 현상의 세계는 법신이 잠깐 나타나는 것이거든요. 참 나는 법신이에요.
법신 자리를 깨닫는 공부가 중요합니다. 차별 자리를 통해서 법신 자리를 깨달아야 해요. 차별 자리는 색의 세계이고, 법신 자리는 공의 세계입니다. 공의 세계를 바로 알기는 어렵다보니, 색을 통해서 공을 알아야하긴 합니다. 공이 색이고, 공이 색이며, 공의 작용이 색인 줄 아는 것이지요. 이때 색의 세계에서 공의 세계로 ‘가려는’ 공부가 아니라, 색을 통해 공과 색이 둘이 아님을 아는 공부가 필요한 것이지요.
[법신의 그림자]
법신을 청정법신불이라 부르는데, ‘청정’이라는 말은 깨끗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법신이 요란하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은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경계를 따라 요란함과 어리석음과 그름이 신기하고 묘하게 있어지거든요. 법신은 무정물을 통해 작용하는데 온갖 작용을 다합니다.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욕하기도 하고, 사람을 때리기도 합니다.
차별과 형상의 세계는 법신의 그림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법신은 무시무종하지만, 경계를 대하면 유시유종하게 됩니다.
[수처작주]
‘수처작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처’는 환경, 현상, 경계를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주’는 주인이 되라는 말입니다. ‘수처작주’는 ‘경계를 대했을 때 주인이 되라’는 말이지요.
중생들은 경계를 대할 때 주인이 아니라 종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백화점에 예쁜 가방을 보고 마음을 뺐기는 것이, 마음의 주인이 되지 않고 종이 된 것입니다. 중생들은 그때그때 경계에서 참을 잃어버리고 꿈속에서 살아요.
금강경에서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이라 하였습니다. ‘현상 있는 것들은 잠시 있어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대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사는 게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야하지요. 경계를 통해 법신을 알아야 합니다.
중생들은 유위의 세계에서 삽니다. 저에게 상담오는 분들은 “제가 …”라면서 말을 시작합니다. ‘나’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지요. 그때의 ‘나’는 ‘참 나’가 아니라 에고(ego)의 나, 욕심의 나, 습관의 나입니다. 그러면 저는 대답할 때, “법신은 …”, “참 나는 …”이라 대답하지요.
본래의 법신 자리를 확인하고 합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면 묘하게 다 풀리게 됩니다. 현상의 차별과 구별의 세계에 속지 말고 일체 평등, 진여 평등의 불성 자리에 바탕해서 차별을 응용하고 활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이 주인의 삶입니다.
[일원의 대 자리 속성 - 본문]
이제 본문을 보겠습니다.
* 大: 큰대(小之對), 길대(長也). 小 : 작을소(微也) 좁을소(狹隘) 有 : 있을유(無之對), 만물유(萬體萬有), 취할유(取也), 얻을유(得也) 無 : 없을무(有之對), 빌무(空虛), 아닐무(不也) 말무(勿也) => 여기에서의 대소유무는 ≠ 일과 이치에서 ‘이치의 대소유무’와는 다름
* 分 : 나눌분, 나누어질분, 구별할분(區別), 다를분, 명백하게할분(明白) 別 : 나눌별, 다를별, 차별별, 구별할별(區別), 분별 : 추량하고 사유하는 것(思量) 또는 구분하고 분석하는 것. =>역력히 아는 이것은 대다 소다(테두리), 유다 무다(없이 있다, 진공묘유) 규정지어 말할 수 없다. |
일원은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입니다. ‘아는 이것’, 즉 ‘법신’은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고,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고 설명드렸습니다. 크다고 하자니 툭 터져서 가가 없고, 작다고 하자니 작다고 할만한 형체도 없고, 있다고 하자니 언제부터 어디서 있었다 말할 수 없고, 없다고 하자니 작용하고 있습니다.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
* 생(生): 날생, 낳을생, 살생, 기를생, 만들생. * 멸(滅): 꺼질멸, 멸할멸, 없어질멸, 다할멸, 죽을멸, 열반멸.
* 거(去): 갈거, 버릴거, 내몰거, 물리칠거, 덜거, 거두어들일거, 피할거, 죽일거, 과거거. * 래(來): 올래, 돌아올래, 부를래, 위로할래, 이래래, 앞으로래, 미래래.
만물이 나고 없어지고, 가고 오고 하는 것. 만물이 태어났다 죽었다 하는 것. 우주의 성주괴공, 만물의 생주이멸, 인생의 생로병사 등은 다 생멸거래의 현상이다. 색신은 생멸거래가 있어도 법신은 생멸거래가 없는 것이다. 생멸거래에 끌려 다니면 육도윤회요, 생멸거래를 벗어나면 생사해탈이다. |
일원은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입니다. 법신은 무시무종해서 생긴 자리가 없고, 생긴 자리가 없으니 멸할 자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공적영지의 광명에 따라 능히 생멸합니다.
* 업(業) : 업업(직업), 일업, 기업, 공적(功績)업, 선악의 소행업. * 보(報) : 갚을보, 대답할보(答也), 고할보(告也), 합할보(合也), 신문할보(論囚).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의 과보. 선인낙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라는 말. 선한 행위가 원인이 되어 좋은 결과를 낳게 하고, 악한 행위가 원인이 되어 나쁜 결과를 일어나게 하는 것. |
일원은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입니다. 법신의 마음은, 선할 것도 없고 악할 것도 없습니다. 불사선 불사악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지을 것이 없으니 받을 것도 없으므로, 업보가 끊어진 자리입니다.
현상의 세계에서는 짓고 받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본체 자리는 허공과 같이 툭 터져서 여여자연하기 때문에 형상이 없고, 선악업보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본래 선하고 본래 악한 사람은 없거든요. 무선무악입니다. 그런데 경계를 대했을 때 능선능악입니다. 무선무악이고 동시에 능선능악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계속 배신한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은 상(相)으로만 보면, 악한 사람으로 보이지요. 그러나 그 사람의 본성을 보자면, 법신 자리에는 선도 악도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이 항상 착하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본래 선하지도 본래 악하지도 않은데, 경계따라 어떨 때는 선하고 어떨 때는 악한 것이 나의 본래 마음입니다.
* 언(言): 말할언(語也), 말씀언(辭章). * 어(語) : 말씀어(告人) 좁을소(狹隘) 언어(言語) : 음성 또는 문자를 수단으로 하여 사암의 사상· 감정을 표현하여 전달하는 활동 * 명(名) : 이름명(號也聲稱), 공명(名譽), 이름지을 명(命名) * 상(相) : 바탕상(質), 서로상(共也), 볼상(視也. 마음의 형상, 모양), 무형지상(無形之相) |
일원은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입니다.
법신에 대해 말하려다보니, 법신이라 ‘진여’라 ‘일물’이라 말하는 것이지요. 사실은 이것을 무엇이라 말하겠습니까? 또, 무엇으로 이름 짓겠습니까? 있다고 하자니 없고, 없다고 하자니 있고,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이것을 무어라 말하겠습니까? 중생이라 부르겠습니까, 부처라 부르겠습니까? 일원상은 무형지상이라 하셨습니다. 상은 상이되, 무형의 상입니다.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를 일원상 서원문에서 ‘언어도단의 입정처’라 표현했습니다. 언어도단, 즉 말이 끊어진 자리입니다. 그래서 입정처, 즉 입정된 자리입니다.
그런데,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언어명상이 완연해집니다. 없고 없는 돈공한 자리이지만, 그러면서도 훤히 아는 자리가 있지 않습니까?
[진공과 묘유는 하나]
진공과 묘유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진리의 세계에 절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진공과 묘유가 하나임을 아셔야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말해서’라는 표현을 자주 쓰지요. 이때 ‘객관적’이라는 말은 ‘주관적이지 않다’는 의미이지요. 이는 차별의 세계에고 상대의 세계입니다. 육안은 보이는 것만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육안말고도 다른 눈이 있습니다. 상대가 없는 공의 자리를 보는 것이 혜안입니다. 일체의 형상이 가(假)인 것을 보고 일체가 변하는 것을 보는 것이 법안입니다. 혜안과 법안을 같이 보는 것, 상대의 세계를 보면서도 상대를 넘어선 자리까지 보는 것이 불안(佛眼)입니다.
제가 오늘은 진공에 대해 주로 설명했고, 다음 시간에는 묘유와 조화에 대해 주로 설명드릴 예정입니다. 그러면 진공과 묘유를 다른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진공/묘유/조화가 순식간으로서 하나이고 결코 다르지 않는다는 점을 아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의두요목을 여러 개 드렸습니다. 그 중 본인에게 와 닿는 하나를 잡고 1, 2년 연마해보세요. 연마해서 감이 오면, 저에게 가져오시거나, 여러분들 지도인에게 문답감정을 ? 받아보세요. 문답감정을 안 받으면 금새 매해지거든요. 사실, 견성은 수행에서 10% 밖에 안 되고요, 나머지 90%은 양성과 솔성입니다. 마음 자리 보는 거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양성과 솔성으로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1. 사람이 깊이 잠들어 꿈도 없는 때에는 그 아는 영지가 어느 곳에 있는가?(의두요목 10) 2. 부모에게 몸받기 전 몸은 그 어떠한 몸인가?(의두요목 9) (천지미분전, 부모미생전, 일념미생전) 3.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것이 그 무엇인가?(의두요목 6) 불여만법위려자 시심마(不與萬法爲侶者 是甚魔) 4.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 하니 하나 그것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의두요목 5)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오) 5. 세존이 탄생하사 천상천하에 유아 독존(唯我獨尊)이라 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의두요목 2) 6. 세존이 열반에 드실 때에 ‘내가 녹야원으로부터 발제하에 이르기까지 이 중간에 일찍이 한법도 설한 바가 없노라’ 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의두요목 4) 7. 일체가 다 마음의 짓는 바라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의두요목 11) 일체 유심조 (一體唯心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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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초고에 힘써주신 김지원,배성해교도님께 감사드립니다.
밀운 ㅠ 고생해씅 뮤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깔끔한 타이핑 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