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 보특가라의 실재성을 인정할 수 없는 또 다른 근거로서 세친은 그것이 어떤 식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한다. 독자부는 보특가라가 6식으로 인식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안식 등 전오식이 오경을 인식하거나 의식이 법경을 인식할 때, 그로 인하여 보특가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만일 어느 때에 안식이 색을 인식하면 그로 인해 보특가라가 있는 것을 알게 되니, 이를 (보특가라는)안식으로 인식하는 바라고 하는 것이고, 색과 더불어 하나라고도 다르다고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아가 어느 때에 의식이 법을 인식하면 그로 인해 보특가라가 있는 것을 알게 되니, 이를 의식으로 인식하는 바라고 하는 것이고, 법과 더불어 하나라고도 다르다고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구사론 파아집품]
그러나 세친의 관점에서 보면 6식에 의해 직접적으로 인식되는 것, 즉 현량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각 식의 대상인 6경과 의근이며, 또 6식을 가능하게 하는 인연으로 추론되는 것, 즉 비량으로 알 수 있는 것은 5근이다. 13) 그런데 보특가라는 현량 대상의 6경이나 의근도 아니고 비량 대상의 5근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3) 5근이 비량의 대상이라는 것을 세친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논증한다. "다섯의 색근을 비량으로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세간에서 현재적으로 보는 데에 있어, 비록 중연이 있어도 다른 연이 빠짐으로 인해 결과가 있지 않게 되고, 그 연이 빠지지 않으면 결과가 있게 되는 경우와 같다. 마치 종자에서 싹이 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록 현재적 경과 作意 등의 연(6경과 의근)이 다 있어도 눈 멀고 귀멈과 눈멀고 귀멀지 않음에 따라 식이 이렁나지 않기도 하고 식이 일어나기도 하므로, 이로부터 반드시 특별한 연이 빠지거나 빠지지 않은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특별한 연은 눈 등의 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색근을 비량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일 그(독자부)가 마침내 "보특가라는 식에 의한 대상(식소연)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마땅히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있다고 설립할 수 있는가? 만약 있다고 설립하지 않는다면, 곧 자체의 종지가 무너지게 된다.: 구사론 파아집품]
보특가라가 비즉비리온아로서의위상도 확립 불가능하고 그 자체 인식도 불가능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부가 그것을 '자아'로 규정하면서 실재로 간주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세친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자아란 오직 "가설적으로 시설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보특가라란 응당(색에 입각해 시설된) 것 따위와 같이 오직 가로서 시설된 것이다: 구사론 파아집품]
말하자면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다 나가 아닌 것인데, 마치 그 안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대개 "눈이 보특가라를 본다"고 여기지만, 마땅히 알아야 한다. 눈 등의 근이 (색 등 경으로)있는 것을 봄에 있어서, '나'가 아닌 것을 보면서 '나'를 본다고 여기기 때문에 잘못된 견해의 깊은 구덩이에 미끄러져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구사론 파아집품]
세친의 관점에서 보면 독자부의 보특가라는 실유 아니라 가유일 뿐이다. 그런 가유를 실유로 생각하여, 그것을 오온의 제반 활동의 작자인 자아로 간주하는 것이 잘못인 것이다.
[승의공경에서 말하기를 "업이 있고 이숙이 있으나, 작자는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이 오온을 버리는 것과 다른 온을 취하는 것이 오직 법의 假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석가는 (보특가라는) 이미 부정하였다. : 구사론 파아집품]
석가가 그처럼 오온과 구분되는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기에, 그런 자아를 이미 상정하고 묻는 물음에 대해 무기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고 강조한다.
[(문) 만약 보특가라가 곧 온이라면, 석가는 왜 '목숨이 바로 몸이다"라고 하지 않는가? (답) 묻는 사람의 뜻을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묻는 사람이 이미 "내적으로 작용하는 사람의 본체는 실하고 허망한 것이 아니므로 목숨이라고 이름한다"고 집착하면서, 그 목숨에 대해 석가에게 "몸과 하나인가, 다른가?"라고 묻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예 없는 것이므로, 하나인가 다른가의 물음이 성립되지 않는다. 어떻게 몸과 더불어 하나인가, 다른가를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마치 '거북이의 털은 거센가, 연한가?"를 말할 수 없음과 마찬가지이다: 구사론 파아집품]
오온 안에서 작용하는 진실되고 허망하지 않은 자아 자체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것을 목숨이라고 부르면서, 그 목숨이 오온과 하나인가 하나가 아닌가를 물을 때, 우리가 그렇다 아니다라고 대답하기에 앞서 그 물음의 전제 자체를 검토해봐야 하는 것이다. 불교는 그런 현상 너머의 자기 동일적 자아를 설정하지 않는다. 보특가라 역시 그렇게 설정된 자기 동일적 자아의 일종이므로, 세친은 적극적으로 그것의 실재성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단호하게 업보와 구분되는 작자, 오온 너머의 자아, 보특가라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석가는 "자아가 있는가, 없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왜 침묵하였는가? 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잘라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상견)이나 없다는 것(단견_이나 모두 다 잘못된 것으로 간주한 것일까? 잡아함경에서 이미 제기되었던 이 문제를 구사론은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벌차라는 성을 가진 한 출가 외도가 내게 와서 질문하여 말하기를 '나는 세상에 있는 것입니까.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였는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그랬는가? 만일 있다고 말하면, 법의 진리에 어긋날 것이기 때문이니, 일체 법은 모두 무아이기 때문이다. 또 만일 없다고 말하면, 그의 어리석은 의혹이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니, 그가 곧 "나는 전에 있다가 지금 없게 되었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있다고 집착하는 어리석음보다 (없다고 여기는) 이 어리석음이 더 심한 것이다. 아가 있다고 집착하면 상견에 떨어지며, 아가 없다고 집착하면 곧 단견에 떨어진다: 구사론 파아집품]
여기에서도 역시 자아가 있다고 보는 상견과 자아가 없다고 보는 단견을 다 비판하고 있다. 불교가 무아를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없다"는 주장을 망설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한다.
[진아眞我가 있다고 고집하면
소견所見의 이빨에 상할 것이며,
속아俗娥가 없다고 부정하면
선업善業의 종자를 무너뜨리네:구사론 파아집품]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자아가 없다고 해서 현상적인 자아, 세속의 자아가 없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속의 자아는 곧 오온으로서의 자아이다. 다만 오온으로서의 자아와 구분하여 참된 자아, 상일주재의 자아 또는 보특가라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가아로서의 오온과 구분하여 실유로서 상정되는 진아의 존재는 부정하며, 가로서의 자아인 오온의 자아는 현상적 자아로서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오온의 자아를 세속의 나로서 인정한다는 말은 곧 기억이나 생각이나 윤회 등 일체 세속적인 자아의 현상들은 자기 동일적 자아를 상정함이 없이도 오온의 연속성으로서 설명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설명되는 것인가?
첫댓글 맨 마지막...[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자아가 없다고 해서 현상적인 자아, 세속의 자아가 없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속의 자아는 곧 오온으로서의 자아이다.]라는 표현은 좀 맘에 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은 .. 오온을 '나'로 취하기에 '자아'라는 상을 취하는 것일 뿐... 그 오온이 '자아'인 것은 아닌데요. ..
[오온으로서의 자아와 구분하여 참된 자아, 상일주재의 자아 또는 보특가라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상일주재의 자아, 참된 자아는 없지만 오온으로서의 자아는 있다는 뜻이 됩니다.
불교에서 ...드러난 것은 오온의 가합이기에 무아죠. 그런데 그 무아를 자아라고 하네요
오온의 가합이기에 무아라는 것을 몰라서 저렇게 표현한 것이야 당연히 아니겠지만... 저 설명은 맘에 안듭니다.
[[진아眞我가 있다고 고집하면
소견所見의 이빨에 상할 것이며,
속아俗娥가 없다고 부정하면
선업善業의 종자를 무너뜨리네:구사론 파아집품]
위 게송을 해석함에...[속아가 없다고 부정하면 선업의 종자를 무너뜨리네]라는 부분에서 [속아가 없다고 부정하면]을 다시 부정하여..곧바로 [속아는 있는 것]으로 해석하기에 오온을 자아라고 긍정하는 것 같습니다.
오온을 자아로 취하기에 '자아가 있다'는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지 ...속제라고 하여 '자아가 있다'는 판단이 긍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게시판이 너무 조용하기도 하고..
예전에 숲에서님이 [상락아정에서의 '아'는 어떤 것을 말합니까?] 등의 질문을 하셨던데... 거기에 홍련님과 방문객님이 답변으로 푸드갈라를 설명하신 것이 있길래 다시 음미해보다 본 글을 옮겨왔습니다.
본문글을 포함한, 푸드갈라에 대한 설명들이... 꽤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