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발견에서는 지리적 거리 때문에 중앙 정부 힘이 약했고 개인적 주도에 의하고 물질적 부를 얻고자 하는 개인들이 따라가는 약탈의 성격까지 띄었다. 신 제국 건설의 동기는 정복자 개인의 이해 관계였다. 정부는 개인의 행동에 맞기고 신대륙을 왕국에 통합시키는 것이 편리한 방식임을 이해했고 정부가 나서서 정복을 조직하거나 지시하는 일은 극히 드문일이었다.
개인의 행동은 정부와 계약관계(Capitulacion)의 형태로 실행되었고, 스페인의 경우 영토 점령은 정복과 원주민 노동력 약탈로 이어졌다. 정부는 계약관계를 통해 특권 이양하고 의무를 요구했다. 이에 정복자들에 대한 보상의 형태로 제도화된 것이 엔코미엔다(encomienda)이다. 1503년 이사벨 여왕이 인디오 배분 허가한 것이 엔코미엔다(encomienda) 기원이 되었다.
엔코미엔다(encomienda)라는 단어는 군 지휘관에게 배분된 정복된 토지와 이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스페인에서 사용된 것이다. encomendar 단어에서 유래. 스페인 국왕이 정복된 지역을 기독교화 할 책임과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면서 원주민을 정복자에게 맡기고 위임한 것이다. 위탁받은 자(엔코멘데로; encomendero)는 중세 영주의 권한과 비교되는 공법의 기능을 담당했다. 영주와 마찬가지로 지역 치안의 책임을 맡았다. 원주민 정복이 원활이 진행된 지역에서는 이 책임이 형식적이었지만 원주민 저항이 심한 칠레 같은 곳에서는 치안유지에 어려움도 따랐다.
치안과 경제적 문제로 원주민을 한곳에 모으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원주민을 공동체 형태로 지배하고 필요에 따라 강제이주를 통해 원주민 인구를 군집시켰다. 여기서 고대문명 잉카문명의 ayullu와 아즈텍 문명의 calpulli 제도의 요소와 스페인에서 이식된 요소가 혼합되었다. 원주민 수에 따라 세금을 스페인 국왕에게 바쳐야 했으므로 국왕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는 제도가 설립되었다. 잉여 노동력의 이윤은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서만 가능했으므로 노동력을 모으는 군집 정책이 시행된 것이다. 이 때 고대 원주민 사회의 전통적 지배구조를 보존했다. 페루에서는 mita제도에서처럼, 남성인구의 7분의 1이 광산노동에 나서는 강제노역 제도를 사용했다. 그러나, 또한 공동체가 문화코드 보존에도 도움이 되고 그리고 인구 증가율 하락 도 막는 효과가 있었다.
Encomienda에 기반한 사회조직은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고 물질적 발달 기반이 있었고 사회계층이 분화된 지역에서 더 효율적이었다. 고대 문명 발달 지역이 encomienda 체제 도입에 유리한 것이다. 따라서 지휘관은 기존의 공동체 수장을 통해 잉여 생산물을 더 늘리고 그것을 새 지휘관에게 대부분 이양하는 식으로 통치했다. 반대로 원주민 문명의 물질발달 수준이 낮은 지역에서는 중개자(수장)를 통한 이윤 착취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직접 통치 형태 취하게 된다. 중노동에 원주민이 혹사되고 인구가 격감되었다. Encomienda가 조직 틀로서 작용하는데 어려움이 있어서 노예 상태로 강제 노동을 행한 소수의 원주민 공동체는 파괴되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처음 도착한 에스파뇰라 섬과 안티야스 제도 등에서 금 수색가들의 단순 원주민 배포 방식은 공동체 생활 양식 보존 조치 없어 결과는 인구 급감으로 나타났다.
중세 유럽의 봉건 영주들은 장원의 잉여를 지역내에서 사용하고 부를 축적했던데 반해 정복자와 encomendero들의 주 목적은 유럽에 이송 가능한 부의 착취였다. 유럽으로부터의 수입을 통해서만 만족될 수 있는 소비 형태를 갖고 있었고, 또한 스페인에서 부와 사회적 지위의 차지가 정복자들의 궁극적 목적이어서 지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부는 관심이 없었다. 목적은 귀금속의 발견, 생산, 운송이었다. 귀금속 외에는 식민 첫 세기에 유럽에서 사용가능한 부가 없었다. 동인도 에서는 향료나 직물 같은 고급 상업 제품 생산되었지만 발견당시 중남미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귀금속 발견 못하자 정복에서 식민화로 정책 바꾸었다. 열대 작물, 사탕수수 생산에 정책 초점을 맞추었고 이는 15세기 대서양 섬들에서 정복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중노동에 부적합한 체형의 원주민 인구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흑인들 수입과 대량 투자가 필요했고 대량 자금 활용이 가능한 개인에게 정복과 식민화가 제한되었다.
스페인 식민지에서는 엔코미엔다 틀 안에서 노동력 착취를 통해서 귀금속 채굴했고 잉여 생산의 형태(광산 채굴에 사용 가능한 노동력, 농업 생산물 등)가 사회 구조에서 위탁 정복자 (encomendero)의 지위를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