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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지李純之 (1357~1423)】「조선만의 독자적 하늘을 완성한 거인」
1406년(태종 6) 경기도 양성현(현 안성시)에서 아버지 이맹상(李孟常)과 어머니 문화 류씨 류자(柳滋)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원시에 입격하고 동궁행수(東宮行首)로 있다가 1427년(세종 9) 친시(親試) 문과에 을과 2등 1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숭정대부(崇政大夫:종1품 문무관의 품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종1품)에 이르렀다.
조선 시대의 천문학자 이순지는 세종의 명을 받아 1442년에 한양(서울) 기준의 천체 운행 계산법인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편찬하여 조선이 독자적인 역법(달력 계산법)을 갖추도록 이끈 위대한 과학자다
이전까지 조선은 명의 역법(曆法)을 받아들여 사용하였으나 오차가 심하고 사용이 불편하였다. 이에 따라 1433년 독자적인 역법을 발명하라는 세종의 지시를 받고 이천을 비롯한 학자들과 함께 제작에 들어가서 1442년 조선의 독자적 역법인 칠정산내편(七政算內編)과 칠정산외편(七政算外編)을 편찬해 냈다. 칠정산 내편은 역대 중국 역법, 칠정산 외편은 아랍 역법을 참조해 만든 것이다. 그를 통해 조선은 천체의 운행을 한반도의 땅과 하늘에 맞춰 계산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정확히 맞추었다고 하니 정말 놀랍습니다. 1543년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보다 100여 년 전 1427년 지동설을 이야기하고 칠정 즉,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달, 해의 운행궤도를 밝히고 조선의 천문 역법 책인 ‘칠정산’을 편찬하였다.
칠정산은 칠정산 내·외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늘에서 일어나는 각종 천문현상과 역법 이론을 연구하여 이순지와 김담 등이 우리 실정에 맞게 편찬한 책이다.
‘칠정산 내편’은 전통적인 한국과 중국에서 쓴 방식의 역법이고 ‘칠정산 외편’은 아라비아 역법을 바탕으로 조선의 천문에 맞게 만들었다. 이 두 역법은 서로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 계산했기 때문에 기본적인 달력 체계가 달랐다. 이순지는 행성들의 운동을 계산하는 방식을 치밀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일식과 월식 등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출처 = ytn 사이언스 '위대한 과학기술인'
그는 “칠정은 태양과 달 그리고 5개의 행성을 말하고 칠정을 관찰하여 한양이 위도 38도에 있음을 발견하였다”라고 칠정산에 밝히어 조선이 독립적인 역법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알렸다. 이 ‘칠정산’이 중요한 이유는 과거 백성들이 가장 중요시 여기던 농업에 필요한 24절기와 일출, 일몰, 일식, 월식의 예보를 알려 농민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주었기 때문이다.
또, 이순지는 행성의 운동을 자세하게 설명하여 일식과 월식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하여 과학사 학자들은 이를 두고 조선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독립적인 역법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하였다.
이순지와 칠정산의 주요 특징
1. 해(일), 달(월), 그리고 5개의 행성(화·수·목·금·토)의 움직임을 뜻하는 일곱 가지 천체를 계산하는 법을 담은 책이다.
2. 칠정산내편: 중국 원나라의 '수시력'을 바탕으로 하여 한양의 위도에 맞게 고쳐 만든 전통 역법서다
3. 칠정산외편: 아랍(서역)의 이슬람 역법인 '회회력'을 연구하여 일식과 월식 등을 더욱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도록
보완한 서양·이슬람계 역법서다.
4. 과학적 의의: 중국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한반도 하늘을 기준으로 천문 현상을 정확히 예측했으며,
세계 수준의 독자적인 계산 능력을 증명했다
백성을 사랑하고 천문에 관심이 많던 세종대왕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우리나라의 천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올린 이순지의 만남은 조선 역사상 과학 르네상스를 열어주었다.
장영실이 개발한 혼천의, 간의, 자격루의 제작에도 참여하였으며 수학에도 능해 토지 측량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세조의 인지의 제작에도 기여하였을 것이다.
이순지가 칠정산을 만들고 있을 때 나라의 중요한 국책 사업인 역법 개발 사업에 인재들이 모여들지 않아 세종이 그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이순지가 답하기를 "진급이 느려서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세종이 "그 일 하는 사람들 진급을 최대로 올려라. 그럼 되느냐?" 그러니까 이순지가 또 안 된다고 하면서 "일은 고되나 봉급은 적습니다" 그러자 세종이 답했다. "그럼 봉급만 올려주면 되느냐?" 이순지 왈 " 기관장의 직책이 낮은 것이 문제이옵니다" 그래서 세종이 얼마나 높으면 되겠냐고 물었더니 이순지는 당시 집현전 대제학을 지내고 있던 정인지를 지목했다. 세종은 허락했고 역법 개발 사업은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이순지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삼년상을 치르러 내려간지 4개월이 채 되지 않았지만 세종은 이순지에게 복직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순지는 "5살 때까지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해서 어머니께서 유모도 없이 저를 키웠습니다. 그런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지금 벼슬이 웬말이십니까?" 라며 복직할 수 없는 이유를 담은 글을 올려 사양했다. 일단 세종은 이순지의 공백을 대체할 대체인력을 확보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이순지의 글을 윤허할 수 없다며 재차 복직명령을 내려 상중에 왕실로 들어와 다시 근무하게 되며, 훗날 이순지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도 기복을 명한다. 천문과 역법을 담당하는 자리에 앉은 능력있는 신하라는 특성상, 그리고 세종이 이 분야에 관심을 크게 갖고 있던 터라 정승급 신하도 아니건만 부모님 상을 당했을 때마다 기복 명령을 받은 특이한 기록.
지구설과 지동설을 주장하고 증명까지 했다는 낭설이 있다. 하지만 이순지가 쓴 천문류초(천상열차분야지도 해설서)를 보면 분명하게 천원지방과 천동설을 명시하고 있다. 이런 낭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순지가 1427년 월식을 예측해서 지동설을 입증했다고 하는데, 일월식 계산 자체는 천동설로도 멀쩡히 할 수 있는 것이고, 이순지는 1427년 갓 과거에 급제했다. 조선 후기에 활동했던 학자인 홍대용의 지구지전설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순지의 딸인 이씨와 가인 사방지간의 스캔들로 인해 가정을 제대로 관리 못한다며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성종은 과거 세종대왕 시절의 이순지같은 학자들이 자기 대에 없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이순지(李純之,1406∼1465)는 세종 때 천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조선 전기 대표 천문학자다. 이순지의 출신배경은 장영실과 다르다. 양반 출신에 문과시험도 급제한 문관 관료다. 이순지는 세종 9년(142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서운관 판사 등을 거쳤고, 문종 때에는 호조참의 그리고 단종 때에는 예조참판, 호조참판을 지냈고, 세조 때에는 한성부윤(현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
많은 사람이 세종 때 과학자 하면 장영실을 떠올리지만, 업적으로 따지면 이순지도 장영실 못지않다. 문관 출신이지만, 한양의 위도를 맞출 정도로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순지가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천문학자가 된 것은 25살인 1430년 무렵에 세종이 선발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후대 《세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465년 (행 상호군 이순지의 졸기) 행 상호군 이순지가 졸(卒)하다. 이순지의 자(子)는 성보(誠甫)며, 정미년(세종 9년, 142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세종은 달력에 의해 천체의 운행을 추정하는 일이 면밀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문신을 가려서 산법(算法)을 익히게 하였는데, 이순지가 근본을 캐어 들어가 연구함으로 세종이 이를 가상히 여기었다. 처음에 이순지가 추산하여 우리나라는 북극에 나온 땅이 38도(度) 남짓이라 하니, 세종이 의심하였다. 마침내 중국에서 온 사람이 역서(曆書)를 바치고는 말하기를, "고려(高麗)는 북극(北極)에 나온 땅이 38도 남짓입니다." 하므로, 세종이 크게 기뻐하시고 마침내 명하여 이순지에게 의상(儀象, 천문 관측기구)을 바로잡아 고치게 하니, 곧 지금의 간의(簡儀)ㆍ규표(圭表)ㆍ태평(太平)ㆍ현주(懸珠)ㆍ앙부일구(仰釜日晷)와 보루각(報漏閣)ㆍ흠경각(欽敬閣)은 모두 이순지가 세종의 명을 받아 이룬 것이다.
정축년(세조3년,1457)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삼으니, 승직(陞職, 직위가 오름)을 사양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따로 경에게 맡길 일이 있으니, 외방에 나가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명하여 고쳐서 제수하였다. 매번 나와서 뵐 때마다 임금이 급히 일컫기를, ‘부왕께서 중하게 여긴 신하다.’라고 하고, 여러 번 상(賞)을 내려 주기를 더하더니, 을유년(세조 11년, 1465)에 판중추원사가 되었다가 이에 이르러 병으로 졸(卒)하였다.
이순지의 성품은 치밀하며, 산학(算學)ㆍ천문ㆍ음양ㆍ풍수의 학문에 능통하였다. 정평(靖平)이라고 시호(諡號)하였다.” (《세조실록》11/6/11,1465 )
당시 세종은 천체의 운행을 추정하는 일이 면밀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문신을 가려서 산법을 익히게 했다. 이순지는 한양의 북극고도(위도)가 38도 남짓이라고 계산했는데 세종은 그의 계산이 틀렸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들여온 천문학 책에서 “고려는 북극에 나온 땅이 38도 남짓이다” 하므로 그 값이 맞는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세종이 이순지를 크게 신임하게 되었다. 세종이 기뻐하시고 마침내 명하여 이순지에게 천문 관측기구를 교정하게 했다.
북극고도 관찰
북극고도란 현재로 치면 북위(北緯)를 뜻하는데 현재의 서울은 38선 남쪽에 있다. 엄밀한 의미로 보면 이순지도 틀린 것처럼 보이지만 세종 때에는 도(度)의 뜻이 지금과는 약간 달랐다는 것을 이해하면 된다. 곧 원의 둘레가 당시에는 지금처럼 360도가 아니라 365.25도였다. 그러니까 당시의 38도는 지금의 37도 40분과 들어맞는 값이라 한다.(참고 : 이종호)
양반 신분으로 문과에 급제했던 이순지가 천문학에 대해 얼마나 조예가 깊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칠정산내편》
이순지는 불과 20대 후반의 나이에 세종의 야심 찬 프로젝트인 천문역법 사업의 책임자로 발탁되었다. 이후 중국과 아라비아 천문역법을 소화하여 편찬한 《칠정산》 내편과 외편은 그의 대표적 업적이다.
▲ 이순지가 쓴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서울대 규장각
이순지는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한 뒤 정인지(鄭麟趾)ㆍ정초(鄭招)ㆍ정흠지(鄭欽之)ㆍ김담(金淡) 등과 같이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썼다. 이 《칠정산내외편》의 완성으로 조선의 역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이순지의 공헌으로 15세기 조선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관측과 계산을 통한 독자적인 역법을 가진 나라가 된 것이다.
그 뒤 역법의 계산은 주로 이순지와 김담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또, 이천(李蕆)ㆍ장영실(蔣英實)과 함께 천문의상(天文儀象)들을 교정, 제작하였으며, 1445년에는 그때까지 조사, 정리된 모든 천문관계 문헌과 이론을 체계화하여 《제가역상집》 4권 3책을 펴내었다.
또, 세조 3년 때(1457년)에는 세종 때 정리되었던 일월식(日月蝕) 계산법을 알기 쉽게 편찬하라는 왕명을 받고 김석제(金石悌)와 함께 그 법칙을 외우기 쉽게 산법가시(算法歌詩)를 짓고 사용법 등을 덧붙여,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 2권 1책을 완성하였다.
이 《교식추보법》은 뒤에 천문분야 관리채용의 1차 시험인 음양과(陰陽科) 초시의 시험교재로 쓰일 만큼 일반화되었다. 산학(算學)ㆍ천문ㆍ음양ㆍ풍수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모친상 1년 만에
세종이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는 세종 18년(1436) 이순지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를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어머니가 죽자 이순지는 당시의 관습대로 3년 동안 관직을 떠났다. 이 동안 이순지를 대신할 사람으로 승정원은 젊고 유능한 천문학자인 김담(金淡,1416∼1464)을 추천했다. 김담은 당시 20여 세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후 천문학자로서 이순지에 버금가는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하지만 세종은 20살의 김담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한 뒤 상중인 이순지를 정4품의 자리로 승진시키면서 1년 만에 억지로 다시 불러들여 근무하게 했다. 3년 상을 치르지 않고 관직에 있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상중인 김담의 해면-관직에서 물러나게 함-을 청했으나 윤허치 아니하다) 사간원에서 상신하기를,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신전(愼詮)은 기한이 차서 옮겨 돌아오지 아니하였는데 개성 경력(開城經歷)으로 옮기고, 또 김담(金淡)은 상복(喪服)을 입은 지 얼마 안 되어서 부모의 상중에 호군(護軍)으로 삼았으니, 실로 모두 옳지 못합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개성도 역시 경관(京官)의 예이며, 김담은 두세 번 사직했으나 상(上)께서 이미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내 그 사이에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 "김담이 집에 있을 적에는 상복을 입고 관청에 있을 때는 담복(淡服, 대상 다름달에 입는 상복)을 입는데, 어찌 탈정기복(부모의 상중에 출사하는 것)의 예인가. 역산(曆算)을 정밀하게 하는 사람이 김담 같은 이가 없기 때문에 쓴 것인데, 무슨 불가함이 있는가.” 하였다. (《세종실록》 31/7/18)
모든 나라에서 국가 경영의 제1순위로 삼는 것은 우수한 인재의 양성이다.
세종대왕의 업적은 15세기 곧 지금부터 거의 600년 전의 사람임에도 신하들의 특성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소기의 성과를 얻도록 이끌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이천은 감독자로서, 장영실은 기술자로서, 이순지는 이론학자로서 각자 자신의 임무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이론적인 뒷받침이 없는 경우 비효율적이고 오류가 많게 된다. 이들 세 분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론적인 뒷받침임은 말할 것도 없다. 세종의 과학기술 프로젝트는 이론학자인 이순지가 없었다면 절대 이룩되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이순지의 공식 공적은 다음과 같다.
'이순지는 전통시기 한국 천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천문학자이다. 20대 후반에 세종에 의해 천문역법 사업의 책임자로 발탁되어 평생을 천문역법 연구에 바쳤다. 중국과 아라비아 천문학을 소화하여 편찬한 《칠정산》 내편과 외편은 그의 대표적 업적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관측과 계산을 통한 독자적인 역법을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뛰어 천문학자였던 이순지는 세조 11년(1465)에 세상을 떠났다.

첫댓글 "본국의 북극고도(한양의 위도)는 38도 남짓(38도 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