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키자카 야스하루, 일본에선 완전히 잊혀진 이순신의 숙적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라 하면 임진왜란 관련 사극에서 한번쯤은 꼭 봤을 일본 장수다. 주로 이순신장군의 숙적으로 일본 수군의 대표 장수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내에서는 너무나 인지도가 낮아 오히려 한국 사극을 보고 저런 장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일본인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와키자카는 원래 일본 우미(近江)국 지방출신으로 본래 아자이 나가마사의 가신이었는데, 1573년 아자이가가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멸망하자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아케치 미츠히데의 부장이 되어 단바 공략전에서 공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후 미츠히데를 떠나 스스로 하시바 히데요시를 찾아가 그 밑에서 활약했으며 히데요시의 통일전쟁에서도 활약하여 영지를 하사받았다. 원래 그의 활약을 보면 육전에서의 활약이 많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해전에 능한 장수로 흔히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히데요시에게 해적 집단이 있던 영지를 받으면서 1590년에 수군 지휘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순신의 숙적이라고 하기엔 그다지 수군에 능숙한 장수는 아니었다는 의미다.
임진왜란에서도 육전에서 오히려 두각을 드러냈다. 조선의 전라도 병력 4만이 한양으로 북상 중 이를 기습한 용인 전투에서 1600명의 소수병력으로 4만이 넘는 조선군을 패주시켰다. 이때 조선군은 아침밥을 지어먹다가 갑자기 기습을 당해 군기가 일시적으로 흐트러지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전사자는 약 1000명 정도가 발생했다.
육군에서는 이처럼 용장이지만 이순신장군과 맞붙어서는 좋은 전투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특히 한산도 대첩에서 대패를 했는데 이후 이순신장군의 숙적이라면 와키자카를 쉽게 떠올리게 됐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본래 서군이었으나 전투가 일어나기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미리 동군으로 갈 의사를 밝혔고 세키가하라 도중에 배신, 오오타니 요시츠구를 패퇴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 인지도가 워낙 낮았고 영지도 3만석 정도로 소영주였어서 일본 내에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도 처신에는 매우 능하여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내전에서 잘 살아남았고 후손들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일본으로 돌아가 동군에 가담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의 승리로 천수를 누렸다고 알려져있다. 이 과정에서 서군인 이시다 미츠나리한테 붙었다가 다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붙은 박쥐행위를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때 야스하루의 행동을 박쥐행위라고 하기 애매하다고 한다. 원래 처음부터 야스하루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질 당시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 진영에 가담하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야스하루가 오사카성에 체류 중일 때, 미츠나리가 서군을 일으켜 거병하는 바람에 미처 동군 쪽으로 붙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서군 진영에 가담했었다고 한다. 어쨌든 처음부터 도쿠가와 편이었고 당연히 제대로 전투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기회가 오자 바로 잡아 동군에 가담했고 훌륭한 줄타기로 노후를 보장받게 된다.
이후 꽤 조용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유력 다이묘가 되어 도쿠가와 가문에게 숙청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세력 확장까지도 안했다고 한다. 이런 훌륭한 처세술로 인해 와키자카 가문은 에도 막부까지 무사히 존속하였으며, 에도 시대 중기에는 후다이 다이묘로 격이 높아지는 등, 메이지 유신 때까지 가문이 온전히 보전됐고 지금도 그 가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