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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____이은유
천국에는 무지개가 없다
이은유
차에서 내린 순간 빗방울이 이마와 코끝을 스쳤다. 하늘도 온통 짙은 먹빛이었다. 확률 80%라는 일기예보대로 비가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이런 날의 강수량은 보나마나였다. 빗속에 서는 순간 흠뻑 젖을 정도로 내리는 비에 낙엽이나 쓰레기들은 바닥에 찰싹 들러붙을 것이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길게 내뱉었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아 어둠이 우물처럼 고여있는 건물 사이에서 지퍼를 올리며 나오던 사내가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다 비틀거리며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청소부가 일찍도 나왔네?”
혀가 말린 그 사내에게서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
청소부가 되고 나서부터 비가 내리는 날이면 신경이 예민해졌다. 이런 날에는 두 다리가 물 먹은 나무토막처럼 무거워지고 발바닥이 길바닥에 달라붙는 것 같다. 내 몸이 뼛속까지 젖어서 폐지가 되어버린 느낌이 든다. 거기다 종이나 비닐은 낙엽과 함께 바닥에 붙어서 여간해서는 잘 떨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비가 내린 날 청소는 맑은 날보다 몇 배나 더 힘이 들기 마련이었다.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전에 아침 청소를 마치자면 서둘러야 될 것 같았다. 장갑을 끼자마자 나는 도시의 중심상가로 향했다. 상가들이 밀집한 거리는 사람들이 물결처럼 흘러가던 예전의 명성을 잃긴 했어도 저녁이면 젊은이들이 제법 붐비는 곳이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에서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파마를 하고 옷과 전화기를 사고 은행에서 돈을 찾고 우편물을 부쳤다. 쓰레기는 붐비는 사람들에 비례했다. 새벽에 나와서 보면 밤새 뿌려진 전단지가 사람들의 발길에 닳아있고 담배꽁초와 휴지 따위가 널려 있곤 했다.
배정된 구역의 아침청소는 보통 서너 시간은 족히 걸렸다. 만남의 광장 역할을 하는 우체국 앞에서부터 파출소 앞까지 아무리 서둘러도 세 시간 안에 아침 청소를 끝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종량제봉투를 꺼내들며 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 청소를 마칠 때까지만 쏟아지지 않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시커먼 먹빛의 하늘은 십 분 앞을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거기다가 거리 모퉁이에서는 바람까지 불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널려있던 전단지가 들썩거렸고 전단지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제법 또렷하게 들려왔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고 거리의 쓰레기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많았다. 나는 서둘러 종량제봉투를 펼쳤다.
아침 청소는 가까스로 아홉 시가 넘어서 끝났다. 백 리터짜리 종량제 봉투에 가득 찬 쓰레기를 문의 구역에 있는 수거 장소에 갖다놓는 것으로 하루 중 가장 힘든 시간이 마무리된 셈이었다. 나는 그렇게 아침청소를 마치고 나서야 은행나무 아래서 겨우 숨을 골랐다. 그러자 땀이 식으면서 몸이 선득거렸고 허기와 갈증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하지만 맡은 구역을 돌아보던 문은 미간을 찡그린 채 시커먼 하늘과 바람 부는 거리를 번갈아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늘은 더욱 어두컴컴해졌고 머리 위에서 우수수 떨어지던 은행잎은 도로 위로 마구 휘날렸다. 그런데 바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은행과 투자금융사와 신문사와 병원 건물이 늘어선 거리의 차도와 인도로 노란 낙엽이 세차게 휩쓸려 다녔고 건물 위까지 은행잎이 맹렬하게 날아올랐다. 이 구역을 맡고 있는 문은 거리를 다시 한 번 바라보고는 아예 담배를 꺼내 물어버렸다.
“나, 이민가고 싶다. 가을이 없는 나라로. 혹시 불 있냐?”
불은 좀처럼 붙지 않았다. 문은 두 손으로 감싸고 겨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거기 가서도 청소나 하게? 그리고, 거기도 낙엽은 떨어져. 여기처럼 많지는 않겠지만. 아니면 여기보다 쓰레기가 더 많겠지.”
문은 담배연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가 내뿜으며 웃었다. 나도 문을 따라 웃었다. 문과 내 말은 서로 역할만 바뀌었을 뿐 불과 일 년 전에 나눴던 이야기였다. 문이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빨며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그렇지? 하지만, 경마장 구역은 과거고 난 현실이지 않냐?”
드디어 가을비답지 않게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질 조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먹구름은 지상에 닿을 듯 두터워졌고 넓은 도로 한가운데로 한 무더기 은행잎이 소용돌이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우수수 떨어졌다. 한가하게 잡담이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문은 쫓기듯 바로 앞에 있는 지하상가 입구로 들어갔고 나는 리모델링 공사를 하다만 건물의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비가 내리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동안 문은 지하상가 관리사무실에서 바둑이나 두고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열다섯 대밖에 주차할 수 없는 지하에서 주차를 도와주며 주차장 사장과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실 생각이었다. 주차장 앞에 세워놓은 내 크레도스를 사장이 지하로 옮겨 놓았을 터였다.
이마 위 머리에 흉터가 커다란 오십대의 사장은 외출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사무실 입구에 서 있던 사장은 나를 보자 귀에 갖다대던 전화기를 껐다. 낡은 티브이와 화장지와 두꺼운 책이 놓여있는 책상 앞에서 뭔가 메모를 하고 있던 해연은 고개를 끄떡하고 아는 체를 했고 사장은 자동차 리모컨으로 주차장 입구를 가리켰다.
“보다시피 출구와 입구를 같이 사용하는데다 좁기까지 하지 않나? 어제 저녁에 여자 손님 한 분이 무서워 나갈 수가 없대서 대신 운전해주다가 범퍼를 먹어버렸다네. 한가할 때 정비공장에 다녀오려고. 그동안 주차장 좀 봐달라고 전화하려던 참이었네.”
범퍼가 흠집이 난 차는 은회색 자동차였다. 차종과 흠집이 난 범위로 봐서 수리비가 꽤 나올 것 같았다. 사장의 말을 듣는 순간 밥을 어디서 먹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사장의 지갑부터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리비가 좀 나오겠는데요?”
사장이 담배에 불을 붙이자 책상 앞에 앉아있던 해연이 손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지금 밖에 비 와?”
나는 은회색 자동차를 향해 리모컨을 누르는 사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이 가을에 무슨 바람까지 이렇게 부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아침을 어디서 먹어야 하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까지 났다. 가로로 겨우 세 대씩 주차할 수 있는 기다란 지하주차장 끝의 구석에 세워진 십칠 년 된 크레도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내가 싸준 도시락이 들어있는 크레도스는 드문드문한 형광등 불빛을 희미하게 받고 있었다.
사장은 자동차 문을 열다 말고 문득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뭔가를 수첩에 적고 있는 해연을 불렀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까 아저씨하고 먼저 밥 먹어라. 자네, 우리 해연이랑 밥 먹고 차좀 봐 주게. 쟨 아직 운전이 서툴러.”
“예, 다녀…….”
내 대답은 사장이 자동차 문을 닫는 소리에 잘려버렸다. 은회색 자동차는 좁은 주차장 출입구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해연은 수첩을 덮었다. 나는 찌개를 데우는 해연을 바라보다 군데군데 녹이 슬어있는 크레도스로 향했다. 좁은 주차장 안에 가득 퍼진 매연이 매캐하게 목을 자극했다.
도시락은 김에 싼 맨밥에 배추김치와 어묵 국이 전부였다. 해연과 나는 된장찌개와 어묵 국을 떠먹으며 김에 싼 맨밥에 김치를 얹어먹었다. 아내가 싸준 도시락은 그동안 커피만 나눠마시던 해연과 내가 편안하게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비좁은 주차장 사무실 안의 공기를 누그러뜨려주었다. 해연은 김치가 김밥 맛을 살려주는 것 같다고 했다.
어묵 국물을 떠 넣으며 김밥을 우물거리는 내 눈에 티브이 앞에 놓인 책과 수첩이 들어왔다. 앵무새 죽이기. 어떤 책일까. 내가 아는 사람들은 거의 책을 읽지 않았다. 어쩌다 읽는 것은 스포츠신문 뿐이었고 그나마도 관심있는 기사 몇 줄이 고작이었다. 나 역시도 유아원에 다니는 딸에게 읽어주는 동화책이 전부였다. 나는 해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연은 밥을 먹으면서 티브이에 집중했다. 아무래도 해연이 단순한 취미로 메모를 하고 책을 읽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김치가 맛있다는 해연과 티브이를 보면서 천천히 플라스틱 통을 비워갔을 뿐 수첩이나 책에 대한 생각은 금방 잊어버렸다. 그때까지도 차는 한 대도 들어오지 않았고 티브이에서는 사극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치졸한 임금 인조로 분장한 남자배우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 것으로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야 해연은 나를 바라보았다.
“비 오면 청소하시기 힘들겠어요? 비에 젖어서 길바닥에 착 달라붙은 종이, 그거 쓸 때 느낌 거지같지 않아요?”
드디어 크레도스 앞으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모델링을 한다고 여기저기 뜯어놓은 일층 바닥 어딘가로 빗물이 흘러내리는 모양이었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는 꽤 크게 들렸다. 이 정도면 밖에는 꽤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비에 젖은 종이요? 나뭇잎도 만만치 않죠.”
티브이에서는 보험회사 광고가 반복되고 있었고 내게는 경마장 일대의 은행나무가 떠올랐다. 나는 지난 이 년 동안 경마장 일대의 청소를 담당했다. 경마장 일대의 은행나무들은 문이 담당하고 있는 거리의 은행나무처럼 크지도 무성하지도 않았다. 심은 지 얼마 안 되는 듯 보이는 나무들은 굵지도 않은 데다 잎들은 작았고 또 성글었다. 그런 잎들이 경마장 입장권과 함께 비를 맞고 아스팔트에 들러붙으면 쓸어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김밥 세 개를 남겨놓고 해연은 젓가락을 놓았다.
“우리은행 앞쪽 거리가 담당이신가 봐요? 이 부근에서 나뭇잎을 볼 수 있는 곳은 거기밖에 없잖아요?”
나는 남은 김밥을 집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경마장 쪽에서 일할 때도 힘들었는데 우리은행 앞쪽 거리라니요.”
그 순간 된장찌개 냄비뚜껑을 덮던 해연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해연은 잠깐 동안 그렇게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책상을 정리하며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경마장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느냐. 이 도시의 경마장에서도 과천의 경마장처럼 진짜 말이 달리느냐. 경마장에는 어떤 사람들이 드나드느냐.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느냐. 해연은 대체로 이런 질문들을 했고 나는 해연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경마장에 들어가 본 적은 없다. 이곳의 경마장은 다른 곳의 경마장을 중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경마장에는 늘 다니는 사람들이 다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경마장에 드나드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물음에는 모두 김밥을 먹듯 대답할 수 있었는데 한 남자에 대한 기억이 잠시 말문을 가로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짧은 순간, 두꺼운 책과 수첩, 그리고 해연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어쩌면 해연은 소설을 쓰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뇌리를 스쳐갔다.
우리 같은 거리의 청소부들은 새벽 다섯 시에 하루를 시작한다. 세상이 어둠에서 풀려나는 꿈을 꾸는 시간, 우리는 사람들이 밤새도록 하루를 마감한 흔적들을 치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절반쯤 마시다 패대기쳐버린 주스 컵과 절반으로 꺾여버린 담배에서 읽혀지는 분노와 절망을 아직 어두컴컴한 시간에 수거한다. 또한 구겨진 휴지 조각에 묻은 시시한 농담과 꽁초에 남은 고민도 종량제봉투에 쓸어 담는다. 컴컴한 새벽에는 미처 귀가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버려진 쓰레기처럼 보인다.
그런 남자를 나는 일 년 전에 만났다. 가랑비가 내리는 새벽이었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은행잎이 한 잎씩 떨어지던 가을이었다. 그때 그 남자는 경마장 앞의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두 팔은 멀거니 두 무릎에 걸친 채였는데 사실 나는 처음에 그 남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는데다 자전거가 사람과의 구분을 지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입장권을 줍던 집게를 멈출 수 있었던 건 그 남자의 오른손에 들려있던 담배 덕분이었다. 밤새 내린 비에 젖어 길바닥에 철썩 들러붙은 입장권과 퉁퉁 불어버린 나머지 집게가 닿는 순간 흐물흐물해져버리는 입장권을 느릿느릿 주워나가는데, 자전거 보관대가 가까워지자 진한 담배 냄새가 폐부로 훅- 끼쳐왔다. 그제야 나는 두 대의 자전거 사이에서 한 점 작은 불빛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불빛이 그 남자의 담뱃불이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 남자를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았다. 다만 한 점 붉은 담뱃불과 자전거 뒤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그 남자에게서 베팅 액수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았다는 것을 읽었을 뿐이었다. 경마가 있는 날이면 주변의 편의점에서 입장권을 사는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돈을 딴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경마가 끝나면 거의 대부분의 입장권은 길바닥에 패대기쳐졌다. 그 남자의 입장권도 그렇게 자전거 앞에 버려져 있었고 나는 그 남자를 그렇게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남자는 내가 경마장 옆에 있는 편의점을 지나갈 때까지도 쭈그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다시 담뱃불도 붙이지 않는 남자는 마치 그림자처럼 보였다. 가랑비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내리고 있는 탓에 어쩌면 실루엣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날 새벽에 본 그 남자의 모습은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편의점을 지나서도 쉬지 않고 쓰레기들을 주워나갔고 그 남자를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아침 청소를 마치고 다시 경마장 앞으로 돌아왔을 때 그 남자는 없었다. 그 남자가 쭈그려 앉았던 자리에는 절반으로 부러진 담배만 널려 있을 뿐이었다.
며칠 동안 맑은 날이 계속되었다. 언제 그렇게 비가 내렸나 싶게 지상은 빠르게 건조해졌고 경마가 있는 날이면 사람들은 여전히 경마장으로 몰렸다. 입장권 또한 무수히 버려지고 더 많은 은행나무 잎이 떨어졌지만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힘든 것은 새벽 다섯 시가 점점 추워진다는 것뿐이었다.
내가 그 남자를 다시 만난 날은 서리가 하얗게 내린 새벽이었다. 그때 그 남자는 자전거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으로는 자전거 핸들을 잡고 나머지 손으로는 입에 물린 담배를 잡은 채였다. 나는 그 남자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옷차림이 두터워지긴 했지만 반듯한 생김새와 곱슬곱슬한 머리 모양이 비 내리던 새벽의 그 남자였다.
자전거 보관대 앞으로 다가가면서 나는 새삼 그 남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조금 멀긴 했지만 그 남자의 눈빛에서는 체념에 가까운 그늘이 느껴졌다. 또 얼굴은 푸석하고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 남자가 문득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담배연기는 매웠고 또 향기로웠다. 그 순간, 언젠가 담배 제조창에서 일하게 된 친구가 담배에 이백열여섯 가지인가의 재료가 첨가된다고 이야기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담배 냄새가 향기롭다고 느낀 것은 초콜릿 향 때문이었다.
담배를 다 피운 그 남자는 내 앞에 꽁초를 버렸다. 내 시선이 담배꽁초를 따라갔다가 곧장 그 남자의 얼굴로 향했다. 그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마주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물음이 얼굴에 가득했다. 나는 그 남자가 버린 담배꽁초를 집게로 집어 올렸다.
“방금 전에 주운 꽁초와 입장권도 댁이 버리신 것 같은데요. 내가 좀더 기다릴 걸 그랬죠?”
그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전거에 올라타며 비틀어 올린 입에 냉랭한 미소를 흘렸다.
“어차피 집게로 한꺼번에 집을 수도 없을 텐데……. 또 그게 직업이잖아.”
나를 지나쳐 달려가는 그 남자에게서는 담배 냄새와 함께 구릿한 체취가 훅- 끼쳐왔다. 그 남자는 내가 지나왔던 도로를 달려갔다. 작은 슈퍼와 추어탕을 파는 식당과 철물점 앞을 달려가는 그 남자는 멀어지는 거리에 비례해서 점점 작아져갔다. 점차 밀려드는 빛과 밀려나는 어둠이 희붐하게 섞여가는 거리에서 그 남자의 질량은 너무도 가벼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 남자를 언짢은 기분으로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들고 있던 집게로 한 대 후려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 다음에는 그 남자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져버렸다. 이 자식이 정말……. 그 순간 밤을 새운 자 특유의 체취와 텁텁하게 뒤섞인 담배 냄새에 비위가 상했다. 이 남자는 얼마나 오랫동안 경마장에 있었던 것일까. 그때 경마장 출입문으로 들어가는 사람과 나오는 사람이 서너 명쯤 보였다. 경마가 끝난 지는 오래된 것 같은데 새벽에 무엇을 하러 경마장을 드나드는 것인지, 그 남자는 또 경마장 앞에서 무슨 담배를 그 시간까지 피우고 있었던 것인지. 나는 그 남자의 뒷모습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자전거를 타고 멀어지는 그 남자의 등에는 허탈하고 쓸쓸한 그림자가 헐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경마장과 그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집게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어둑한 새벽에 아무리 기를 쓰고 멀어져도 그 남자의 초췌함과 초조함은 바다 위의 부표처럼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그 남자는 새벽 거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네 거리가 나오자 그 남자는 왼쪽으로 자전거를 꺾었고 부표는 삼 층짜리 회색 건물 옆으로 들어 가버렸다.
나는 그 남자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그 남자가 버린 경마장 입장권을 들여다보았다. 살 때부터 버릴 때까지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입장권은 종량제 봉투에 들어있는 다른 입장권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유난히 자전거를 타고 멀어지던 그 남자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호하기만 했다.
그 남자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그 남자를 오래 생각했다. 그 남자를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장소도, 무엇 때문에 그 남자를 흐릿하게나마 기억하게 되었는지도, 떠오르는 것은 전혀 없었다.
내가 그 남자를 기억해낸 것은 자판기 커피를 마실 때였다. 새벽 한기에 몸이 떨려서 설탕커피를 뽑아들자 술을 마시고 나면 가끔 인스턴트커피를 타주던 술집이 떠올랐고 그곳에서 한 여자와 술을 마시던 그 남자가 생각났다.
그 남자를 처음 만난 술집은 후미진 동네의 좁은 골목 안 퇴락한 원룸 앞에 있었다. 골목 어귀에 풍선 간판이 없다면 술집이 있는지도 모를 그런 골목이었는데 안주가 괜찮은 술집이 그 술집이었다. 지붕이 낮은 집들의 담장 안에 호박넝쿨이나 해바라기가 무성해서 시선 둘 데가 많은 술집은 문이 알려주었다. 늦여름이었고 구청에서 마주치곤 하던 문이 나와 제법 친해졌을 무렵이었다.
“혹시 ‘깡’이라는 곳을 알아? 자네 집에서 한 블록쯤 올라오면 임대아파트 단지 건너편에 작은 마트가 있는데, ‘깡’은 그 마트 옆 골목으로 빠져서 오른쪽으로 오십여 미터 가다가 다시 왼쪽으로 가면 있어. 거기서 이따 한 잔, 어때?”
그렇지 않아도 한 잔 생각이 간절하던 참이었는데 술집 이름이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 아래 도서관 옆에 사는 문이 어떻게 이런 술집을 다 꿰고 있을까 싶기도 했다. ‘깡’이라는 술집 이름은 좀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남자를 만난 것은 ‘깡’에 다니게 된 지 얼마쯤 지나서였다. 한 달쯤 지나서였을까 두 달이 다 되어서였을까, 아무튼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오후가 되자 비가 내렸고 가을비를 보자 괜히 허전해져서 그날은 내가 먼저 문을 ‘깡’으로 불렀는데 조각 같은 한 남자가 구석에서 한 여자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깡’이 자리한 동네의 거주민은 대부분이 노인들이었다. 집들도 거의 지붕이 낮았고 또 낡았다. 도심이 비어가면서 한적해진 골목으로는 냉랭한 기운이 흘렀다. 이런 동네의 골목에서도 샛길에 있는 ‘깡’에는 드나드는 사람만 드나들었다. 가끔 낯선 얼굴이 ‘깡’을 찾기도 하지만 저녁마다 ‘깡’에는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다. 처음 ‘깡’을 찾은 날 문이 그렇게 말했다.
그런 ‘깡’에서 서른 이짝저짝의 남자를 보게 되자 눈앞의 안개가 말끔하게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칼로 갉아서 다듬은 것처럼 반듯하게 생긴 남자라니, 나는 그 남자를 보는 순간 한낮의 공작을 상상했다. 새들은 수컷이 암컷보다 화려하다. 여자가 남자보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화장과 옷과 보석 때문이다. 중장년 사내들이 대부분인 술집의 구석에 있는 남녀는 이 문장에 딱 들어맞는 사례처럼 보였다. 문과 나는 이 남녀에게서 잠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 남자는 나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주인의 말로는 ‘깡’에 다닌 지 두어 달 된다고 했다. 문과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나 주문했던 소머리고기와 소주가 나오자 문과 나는 우리의 탁자에 집중했다. 서로의 잔에 술을 채웠고 안주를 입안에 우겨넣기 바빴다. 비 때문에 허겁지겁 일과를 마무리한 문과 나는 몹시 허기진 상태였다. 맞은편 아직 불을 때지 않는 연탄난로 뒤의 남자와 여자도 술을 마셨고 붉게 구워진 닭발을 먹고 있었다. 두 남녀의 머리 위에 있는 티브이에서는 뉴스가 보도 중이었다.
문과 나는 여느 날처럼 일과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동료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가렸다. 문과 나는 이야기 속에서 어떤 동료가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재차 확인했고 그들의 비밀을 공유했다. 동료들을 대하는 방식은 술자리에서 정정되었다.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화제가 막히면 티브이가 화제를 제공했고 빈 술병은 점점 늘어났다.
그 사이 두 남녀는 술을 마시다 다투고 있었다. 다투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여덟 개의 탁자 가운데 빈 곳은 하나도 없었고 술이 목청들을 높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여러 목소리에 섞이지 않는 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래, 해줄게. 내가 다 해준다니까. 기다리라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 남자였다. 소주를 단숨에 털어넣는 남자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답답함이 정확하게 반반씩 섞여있었다. 나는 새로 시킨 황석어 튀김을 입에 넣고 우적거렸다. 그리고 무엇을 다 해준다는 것인지, 황석어 가시를 발라내면서 그 남자의 입을 주시했다.
그때 여자가 무언가를 말했고 이어서 발음이 또렷하고 정확한 그 남자의 목소리가 또 탁자 한 개의 거리를 건너왔다.
“알아. 거긴 2금융권도 아니고 3금융권이라는 거,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근데 너, 나를 못 믿는 거냐?”
여자는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남자에게 또 무슨 말인가를 대꾸했다. 여자의 가냘픈 등에는 도도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여자는 입을 빠르게 움직였고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의 입술이 멈추기 무섭게 남자는 또 소주를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근데 그보다 더 무서운 건 네가 날 떠나는 거다. 아직도 모르겠냐? 그러니까 넌, 지금 이 모습 이대로 내 곁에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주름살 하나 없이, 맑고 곱게. 넌 절대 져서는 안 되는 꽃이야. 빚도 갚아주었겠다 먹고 싶은 건 모두 사 주겠다 화장품도 최고급으로 대령해주겠다, 네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하는 네 아름다움을 위해 난 뭐든지 하잖아. 다 해주겠다잖아.”
그 남자는 애써 목소리를 낮춘다고 낮췄지만 온 신경이 모여 있는 귀에는 남자의 말이 고스란히 들려왔다. 여자도 남자의 목소리가 크다고 생각했는지 문득 주위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투명하게 맑고 아름다웠다. 특별하게 예쁜 곳은 없었으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자신이 돋보이는지 아는 여자 같았다. 여자는 남자에게 다시 고개를 돌리며 머리카락으로 옆얼굴을 가렸다.
“누가 어디 간대? 제발 조용히 좀 해.”
그때 누군가가 나와 문을 아는 체 했다. ‘깡’에서 몇 번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는 수줍음을 타는 사내였다. 처음 만났을 때 사내는 마트 뒷골목에서 옷 수선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사내의 등장으로 나는 두 남녀의 대화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문과 나는 수줍음을 타는 사내와 어울려 술을 한 잔 더 하기로 했다. 그리고 두 남녀는 소주 한 병을 더 시키는 사이 ‘깡’에서 나갔다.
문과 나의 술자리는 두 남녀가 ‘깡’에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수줍음을 타는 사내가 한사코 문과 나를 붙잡았으나 그 사내와는 대화를 나눌 공통된 화제가 많지 않았다. 목소리가 작은 그 사내는 옷을 수선하는 일 이외에 아는 것이 없었다. 그는 작은 마트와 내과병원과 작은 카페의 뒷골목밖에 몰랐다. 티브이 화면에는 베네수엘라의 엔젤 폭포에 드리워진 무지개가 가득했지만 그 사내는 바라볼 줄 몰랐다. 문과 나의 대화는 그 사내 때문에 자주 엇갈렸다. 문이 엔젤 폭포에 뜬 무지개를 보고 말했다.
“한동안 보지 못하던 무지개를 여기서 보네. 근데, 저게 엔젤 폭포라면 저긴 천국인가? 무지개가 떠 있는 저곳은 축복받은 땅인가?”
수줍음을 타는 사내는 귀를 기울여야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 동네도 알고 보면 살만 한 곳이야. 사람들도 다정하고…….”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창밖을 돌아보았다. 골목은 어두컴컴했다. 안전등 불빛 속에서도 남루한 동네의 집들은 지붕과 담장이 하나 같이 허름해 보였고 석류나무와 장미는 저 혼자 꽃을 피우고 진 흔적이 역력했다.
“나는 어른이 되고 나서 무지개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
그때 문은 티브이에서 고개를 돌려 술잔을 들여다보았다.
“근데 그거 알아? 정작 무지개가 뜬 곳으로 가보면 그곳에 무지개는 없다는 거.”
이렇게 하나마나한 이야기들을 나눈 우리는 두 남녀가 ‘깡’을 나갈 때 시킨 소주가 떨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깡’을 나설 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우산을 든 문은 도서관 쪽으로 올라갔고 수줍음을 타는 사내는 손을 흔들고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교차로 로터리에 있는 빵 가게로 향했다. 아내와 아이가 그때까지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깡’을 나선지 십 분도 되지 않아 그 남자를 또 보게 되었다. 커다란 아파트 단지로 통하는 도로에서는 음주운전 단속 중이었고 이차선으로 차를 빼놓은 남자는 경찰에게 면허증을 내밀고 있었다. 밤이라 해도 이십여 미터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다. 나는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면서 그 남자와 차에 앉아있는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저들은 어디를 돌아 다시 여기로 온 것일까. 그 날 밤, 나는 음주단속 때문에 길게 늘어선 차량 행렬처럼 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답답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남자를 기억해낸 순간 종이컵은 바닥났다. 그러나 나는 바닥에 남은 한 방울까지 홀짝이며 한동안 그 남자가 자전거로 달려간 도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음주단속에 걸린 밤과 이 새벽에 뭔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좀처럼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그 남자가 사라진 지 꽤 되었는데도 거리에는 알 수 없는 여운이 길게 남아 있었다. 불안하게 보이던 질량의 가벼움. 그것은 아무리 해도 감이 잡히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하루 종일 빗자루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낙엽을 쓸어도 비질 뒤에 한 줌은 될 것 같은 은행잎이 남아있곤 했다. 유난히 쓰레기가 많은 날이기도 했다. 입장권이나 추파춥스 껍질, 담배꽁초를 줍고 돌아서보면 여기저기 비슷한 쓰레기들이 널려있었다. 나는 퇴근 시간까지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언제 어느 때 나오게 될지 모르는 점검 때문에 내가 맡은 구역을 돌고 또 돌아야 했다. 하지만 익명의 흔적들은 끝내 말끔하게 수거되지 않았고 나는 지쳤다. 이상한 날이었다.
이날은 ‘깡’에 가지 않았다. 문은 벌써 수줍음을 타는 사내와 함께 하고 있다고 전화를 했지만 나는 쉬고 싶었다. 마침 아내도 휴무일이었고 아이가 동화책을 들고 와 보채기도 했다. 나는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준 뒤 저녁을 먹고 빨래를 개는 아내 옆에서 사과를 먹으며 건성으로 티브이를 보았다. 그런 어느 순간 나는 포크를 사과에 꽂은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화면에는 경마장과 검은 색의 낡은 승용차와 그 내부가 번갈아 비치고 있었다. 카메라는 또 타고 남은 세 개의 번개탄을 확대해서 보여주었다. 기사는 단음절로 귓바퀴에 머물렀다. 음주단속. 면허 취소. 벌금. 사표. 몇 천만 원의 빚. 자살추정. 화면은 마지막으로 경마장 앞에 있는 자전거 보관대에서 잠깐 정지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더 이상 기자의 말은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기자가 전하는 기사들은 귓속에서 벌레들의 울음소리처럼 들끓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이야기를 끝내고 해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로소 매일 오전마다 마시던 커피를 그때까지 마시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두꺼운 책으로 눈을 돌리며 해연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커피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겠죠?”
그제야 해연은 수첩으로 티브이 앞에 놓인 책을 가렸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꺼낸 물을 코펠에 붓고 물을 끓였다. 수도가 없는 지하였으므로 코펠은 몇 달째 물만 부어가며 계속 버너에 올리어졌고 커피는 설탕과 프림이 함께 들어있는 인스턴트였다. 해연은 약간 서글퍼 보이는 얼굴로 종이컵에 커피를 타서 건넸다.
“난, 경마장도 엔젤 폭포도 가본 적이 없어요. 근데, 두 곳의 느낌이 왜 비슷한지 모르겠어요.”
언제 마셔도 인스턴트커피는 달고 고소했다. 나는 뜨거운 커피를 목으로 넘기며 ‘깡’의 티브이에서 보았던 엔젤 폭포의 무지개를 떠올렸다. 엔젤 폭포는 나 역시도 가본 적이 없지만 해연이 경마장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이해되고도 남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주차장 사장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석에서는 여전히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차 역시 한 대도 없었다. 주차장 사무실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고 나는 주차장 출입구를 골똘하게 바라보았다. 좁은 출입구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희미하게 불어왔다. 나는 주차장 출입구에 시선을 둔 채 해연에게 말했다.
“베네수엘라도, 낙엽이 없겠죠? 거긴 적도에서 가까우니까…….”
그리고 나는 남은 커피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자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뭔가 자꾸 간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것을 해연이 알아보았으면 싶었다. 해연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고 해연이야말로 진짜 청소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연에게 잠시 주차장을 맡기고 지상으로 나왔을 때 비는 주춤한 상태였다. 한적한 거리로 하나 둘 사람들이 돋아나고 있었고 여전히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쓰레기는 없었다. 내 구역은 경마장 주변도 아니고 문의 구역처럼 낙엽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천천히 돌아보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주차장 입구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거리를 바라보았다.
주차장과 마주한 은행 앞의 컨테이너박스에서는 구두를 수선하는 오십대 남자가 모처럼 티브이 채널을 바꾸고 있었고 편의점에서는 보험회사원으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담배를 사가지고 나왔다. 남자들은 담뱃갑의 비닐을 뜯어서 편의점 앞에 버렸다. 비닐은 곧장 축축한 도로에 찰싹 들러붙었고 남자들은 은행잎이 수북한 문의 구역 쪽으로 가고 있었다. 문은 보이지 않았다. 변하던 하늘은 다시 짙은 먹구름으로 뒤덮였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그리고 또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나온 어린 연인들이 우산을 펼치고 문의 구역으로 멀어져갔다. 문의 구역에서는 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은유 / 2005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청소년평전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현대물리학의 별 이휘소』가 있다. 광주일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