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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8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21주)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우러러
출33:12~23; 살전1:1~10; 마22:15~22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포함하는 출애굽기33장은 복잡한 자료상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도 갖는 본문입니다. 자료상의 문제는 서로 상충되는 말과 표현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 수 있는데, 이 문제는 오늘 드리는 말씀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아마 출애굽기33장을 자세히 읽은 분들은 서로 상충되는 말과 의미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적 문제는 한마디로 말하면,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현존(혹은 임재)에 관한 문제인데, “하나님의 현존”은 어떻게 나타나며, 사람들은 그분의 현존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라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모세가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급증을 견디지 못해 금송아지 상을 만들었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소위 이 “금송아지 사건”을 이스라엘이 저지른 범죄 중에 가장 악한 범죄로 늘 거론합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는 동안 함께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이제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출33:3)
오늘 구약본문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함께 가 달라고 여러 번 간청하는 이야기입니다. 한번 본문을 좀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잘 아시며(<야다> 매우 친밀하다는 의미),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음 강조합니다. 우리 성경에 “저에게 큰 은총을 베푸신다고 말씀하셨다”라고 하지요. 이 표현은 직역하면 “나의 눈에 든다”라는 표현인데,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렸던 소리, “너는 내 사랑하는 자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개역: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와 꼭 같은 표현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주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주님의 눈에 들 수 있도록), 주님의 계획(“당신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이 민족이 “당신의 백성”(<암므카>)임을 알아달라고 청합니다. (여기서 “당신의 백성”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하셨던 말씀, “너는 나의 특별한 보물, ‘나의 백성’<암미>”이라는 말을 상기시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 그리하여 네가 안전하게 하겠다.” (직역하면, “내 얼굴이 가겠다. 그래서 너로 쉬게 하겠다.”) 많은 영어성경은 “나의 얼굴이 가겠다”는 말을 “나의 현존(My Presence)이 너와 함께 가겠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때 모세는 다시 한번 하나님께 함께 동행해 달라고 청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려면(당신의 얼굴이 가지 않는다면), 우리를 이곳에서 떠나 올려 보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면, 주님께서(당신께서) 주님의 백성(당신의 백성)이나 저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저 자신과 주님의 백성(당신의 백성)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백성과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까?”
여기서 모세는 매우 친밀한 언어(2인칭, “당신”)로 주님께 간청합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백성은 당신이 함께 하실 때에야 비로소 당신의 백성이 되고, 이 땅의 사람들과 구별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모세의 말을 받아서 응답하십니다. “내가 너를(너의 이름을) 잘 알고(<야다>), 너는 나의 은총을 받았다(너는 나의 눈에 들었다). 네가 말한 모든 것을 다 들어주겠다.”
그러자 모세는 세 번째로 주님께 요청합니다. “부디 저에게 주님의(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시오.” 하나님의 현존을 보여 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또 한번 모세의 요청에 응하십니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나의 모든 선함/아름다움을 <콜-투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야훼의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나는 은혜(은총)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나는 은총을 베풀 자에게 은총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 자에게 자비를 베푼다.”) 이 구절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유로움을 드러내는, 혹은 하나님이 자신의 속성을 직접 드러내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은 바로 이 속성, 즉 은혜와 자비 가운데 있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은총을 베푼다”는 말, <카난>은 “예뻐하고 좋게(호의적으로) 보아 준다”는 뜻이고, “자비를 베푼다”는 말, <롸캄>은, “가엽게 여기다(compassion), 사랑하고 품어준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라어에서 “자궁”, “모태”라는 말, <뢰켐>은 바로 <롸캄>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태는 “자비와 연민의 마음으로 품어주는 자리”가 되지요.
이러한 은총과 자비를 보여 주시면서도, 하나님은 그 다음, 또 다른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직역하면, “너는 나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나를 보고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내 곁 한 곳, 곧 바위 위에 서 있으라”고 하시며,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 내가 너를 바위틈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가지 너를 손바닥으로 가려주겠다”고 하십니다. 다 지나간 다음 손바닥을 거둘텐데, 네가 나의 등은 보더라도 내 얼굴은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간다는 말은 하나님의 현존의 강력한 형태를 말합니다. “나의 이름”(즉 “야훼의 이름”)을 선포한다는 말도 하나님의 특별한 현존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 영광이 지나가고 이름이 선포될 때, 하나님의 속성인 “은총과 자비”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존은 모세에게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이 지나가는 동안 모세를 바위틈에 집어넣고 손바닥으로 가려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당신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좀 딱딱한 풀이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에 이어, 오늘 본문의 신학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현존은 어떻게 나타나며, 사람들은 그분의 현존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라는 문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여러 말들이 등장합니다. “나의 얼굴”, “나의 영광”, “나의 이름” 등입니다. “나의 영광”이나 “나의 이름”은 다른 곳에서도 자주 나오는 표현이지만, “나의 얼굴”이라는 표현은 여기에만 나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의 얼굴이 함께 가겠다”고 하시는데, 이는 친밀한 현존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얼굴은 그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얼굴은 사람이 볼 수 없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모세를 바위틈에 집어넣고 손바닥으로 가려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그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현존은 매우 가까이 있고 친밀하면서도, 동시에 사람이 볼 수 없다는, 이중적이고 어쩌면 모순되는 듯 한 말을 듣게 됩니다. 신학적으로는, 이것은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은 내재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한없이 가까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한없이 초월해 계시다! 오늘 구약의 표현으로 하면, 얼굴이 함께 가지만, 그 얼굴은 볼 수 없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을 많이 봅니다. 하나님을 사람처럼 빗대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가령, 나의 얼굴, 나의 손바닥, 나의 등, 같은 표현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은 삐지기도 하고 후회도 하시는 감정적인 분으로 나옵니다. 이런 표현은 구약에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보게 하기도 하지만, 사실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방해를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마치 어떤 대상처럼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난 주일에 보았던 금송아지 형상으로 하나님을 상징하려고 한다든지, 오늘 말씀처럼,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는 표현으로 볼 때, 구약성경이 하나님을 어떤 대상으로 국한시키는 것에 대한 극도의 경계가 있음도 사실입니다. (구약에는 나오지 않지만, 후기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은 “쉐키나”인데, “머무는 자리”라는 뜻으로, 성막이나 성전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쨌든 구약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가져가려고 애를 씁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현존 혹은 임재는 분명합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나타나시며 사람들은 그분을 어떻게 경험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자기들과 같은 유대 땅에서 같은 유대인으로 태어나시고, 자기들과 함께 사셨고, 또 수난 중에 돌아가신 그분이, 하나님을 보여주는 아주 분명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이 하나님을 보여주는 아주 분명한 표징이었습니다. 팔레스틴의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선언입니다. 신약의 복음서와 서신들이 말하려는 것이 그것이지요. 그래서 신약에서는 예수가 그리스도다 라고 고백하며, 초대교회에서는 가장 어려운 길인,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라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고수했습니다.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하신 것은, “하나님 얼굴”의 이 놀라운 현현은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은총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하신 일을 통해서, 그분의 자비와 연민(스플랑크논)을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그분은 친히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와 함께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 그분의 자비(불쌍히 여김), 그분의 하신 일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분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성만찬을 통해 그분을 취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탕이신 하나님”, “근저이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대상이 아니시고, 바탕이며 근저인데, 어떻게 그분과 우리가 관계할 수 있을까요?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어 놓은 것, 즉 대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 구약성경은 큰 악행임을 말했습니다. 그런 자리에 “하나님의 현현”(하나님의 얼굴)은 있을 수 없다고 천명합니다. 그것은 우상이며, 하나님을 사람 마음대로 조종하고 회유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인간의 착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바탕이고 근저시라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과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대상과 맺는 관계만 익숙하기 때문에, 바탕이시고 근저이신 분과 관계 맺는 것에 어색하고 힘이 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바탕과 근저 그 자체는 “텅 빔”으로 경험되거나 깊은 침묵으로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광활한 우주 공간과도 같고, 우리가 느끼는 텅 빈 공간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 광활하고 텅 빈 공간 때문에 그 수많은 별들이 존재할 수 있고, 우리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공간에 도시를 만들고 집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빈 방에 뭔가를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텅 빈 공간은 우리에게는 “무”로 경험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비유입니다) 이 광활한 텅 빔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누미노제, 즉 “두렵고 떨리면서도 매혹적인 신비”일지 모릅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우리의 바탕이고 근저인 것은 사실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그분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당신”(Thou)이라고 부르고, 그분과 가까워지고 친밀해지려고 노력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깝고 친밀하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주 “당신”이라는 2인칭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일찍이 마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두 가지의 관계 맺는 방법을 말합니다. “나와 너”의 관계와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마틴 부버는 “나-너”와 “나-그것”을 두 개의 근원어라고 불렀지요. “나”는 “나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너”의 “나”든지, “나-그것”의 “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와 혹은 무엇과 관계 맺는 “나”는 “나-그것”의 “나”가 아니라, “나-너”의 “나”이어야 합니다. 이 “나-너”의 “나”는 인격적이며 친밀하고 수용적이며 친절한 본질적 나입니다. 그렇다면, “나-그것”의 “나”는 타자를 조종하려 하거나 통제하려는 “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물론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겠지요. 우리가 “나-너”의 관계를 맺는지, “나-그것”의 관계를 맺는지. 그에 따라서 “나”는 “나-너”의 “나”가 될 수도 있고, “나-그것”의 “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너”의 “나”는 나 본디의 “나”일 것이고, “나-그것”의 “나”는 피상적이고 역할이 있으며 기능적인 “나”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선하심/아름다움”(<콜-투비>)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함과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안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주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을 우러르십시오. 그것을 사모하고 기대하십시오. 말씀 속에서, 기도 속에서, 자연 속에서, 사람 속에서, 주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을 우러를 때, 우리는 “나-너”의 “내”가 되어갈 것이고, 우리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