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중 교수 ‘다산 정약용 부국강병과 국방전략, 강병을 중심으로’ 고찰...현대전에도 전술.전략이 필요하다
정조는 왜 병학통(兵學通)을 하사 했을까
미완성된 아방비어고(我邦備禦考)의 행방
민보의(民堡議)
전선책(戰船策)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본 다산 안보관
"다산 정약용은 위대한 세계적인 위인이다"
‘다산의 부국강병(富國强兵)과 국방전략(國防戰略)-강병을 중심으로’ 란 제목으로 이를 새로 조명해보는 ‘제19차 다산 콜로키움’ 이 ‘다산 정양용 문화교육원(이사장 장기환)’ 이 주최하고 ‘송강 미술관(안동), 무안 컨트리클럽(남화산업), 문화유산 국민신탁, 행복한 치과(덕손), 초록들, 여주 자원환경, 쉬즈 힐 의원’ 후원으로 지난 9월 24일(수) 오후 3시에 서울특별시 송파구 ‘여성문화회관’ 지하 1층 강당에서 서울 시민과 회원 50여명을 대상으로 제19차 다산 클로키움, ‘다산의 부국강병과 국방전략(강병을 중심으로)’ 에 관해 발표를 했다.
이날 장기환 이사장 축사와 기조사, 전 육군 준장인 김호중 본원 부이사장의 발제와 전 한미연합사 정경분석관이자 국방대학교 교수인 이태윤 정치학 박사의 지정 토론자로 한 방청석 질의와 답변으로 진행됐다.
제19차 다산 클로키움의 주제는 최근 한반도를 중심으로 국제정세에 심각한 상황에 대한 진단과 대안을 모색해 보는 자리였다. 국제정세가 미.중 전략경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데 북.중.러 대결 구도가 더욱 심화하는 신냉전 시대로 진입하여 이로 인한 한반도 정세의 앞길이 짙은 안개 속에 쌓여있는 점을 고려할 때 이번 발제에 큰 의미를 뒀다.
기조사로 나선 장기환 이사장은 “오늘 클로키움은 다산 정약용이 쓴 국방 관련에서 쓴 병학통에 대한 발문, 아방비어고, 민보의, 목민심서 등의 저술을 통해 군사전략가로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부국강병의 기본 철학과 국방을 위한 전법, 전술, 전략 등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시간이 될 것” 이라며 “오늘 발제를 맡아주신 기호중 교수님은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신 후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경기 과학기술대학교 교수, KBS 스포츠 과학연구원 경제인 CEOrhkwjd 초빙교수 등을 역임하시며 국방 전술.전략에 많은 연구와 자문을 해오신 분으로 오늘 우리에게 다산 정약용 선생이 구상한 부국강병과 국방전략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줄 것” 이라고 했다.
ㅡ
다산 정약용 선생이 생전 국방에 관한 책을 여러 권을 싸 남겼는데, 그는 회갑인 1822년에 ‘지찬 묘지명 광중본’ 총 500여 권의 책을 집필했다. 그 중 무력을 갖춰 방비하는 일에 관한 책을 썼다.
새로운 구원자 풍문 잦았던 난세 왕조 수호자 간절했던 임금 뜻, 유배지에서도 전략사(戰略史) 써내 보은의 이런 임금, 이런 신하로서 우선 정조대왕이 승하하자 다산 선생이 성균관 유생시절에 정조가 성균관 시절부터 아끼던 다산에 “자네가 잠재를 아우르고 있음을 아신 까닦에 특별히 이 책을 하사한다고 하셨네, 훗날 김동철 같은 역적이 일어나면 자네가 일어나 나가 싸울 수 있을 거라고 말이지” 했던 말을 듣고 집에 돌아와 보니 임금께서 하사하신 책은 바로 ‘병학통(兵學通)’ 이었다. 다산은 하사한 정조 왜병 방어법 ‘병학통이라는 책을 어루만지며 통곡하면서 쓴 ‘적 병학통’ 이라는 제하의 적문이 전해지고 있다.
병학통은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왜병을 방어하면서 진을 치고 군사훈련 시키던 방법을 정조가 손수 정리하여 여러 군영에 하사한 책이다. 이런 책을 정조는 문과 급제를 위해 정진 중이던 다산에게 뜬금없이 장재(將才)를 언급한 것이다.
이번 논제는 성균관 유생 시절부터 다산은 정조의 특별한 관리를 받았던 다산은 반시(泮試)에서 연거푸 우수한 성적을 받으면서 총애가 한 몸에 모였던, 임금의 큰 사랑으로 충성을 다한 다산 정약용 선생이 병학통을 어루만지며 통곡했을까 라는 데, 의문과 그 궁금증을 풀어보는 ‘도도체 왜!’ 라는 퀘스천 부호를 붙이면서 의문과 그 궁금증을 풀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유배지 강진에서 쓴 ‘아방비어고(我邦備禦考)’ 와 ‘민보의(民堡議)’ 라는 두 권의 책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번 클로키엄에서 다산 선생이 국방 관련해 쓴 병학통에 대한 발굴, 아방비어고, 민보의, 목민심서의 저술을 통해 군사 전략가로서 정약용 선생 부국강병의 기번 철학과 국방을 위한 전법, 전술, 전략 등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면서 그가 쓴 이 책의 내용에 관한 현대의 안보정책과 함께 비교 또는 동질성, 그리고 대책과 방안에 대한 것들을 발제자(김호중)와 함께 논했다.
김호중 교수는 전남 영암 출신으로 육군준장으로 예편 후 국방부 정책 자문위원, 경기 과학기술대학교 교수, KBS 스포과학연구원 경제인 CEO 과정 초빙교수 등을 역임하고, 국방 전술, 전략에 많은 연구와 자문을 해온 분이다. 김 교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구상한 부국강병과 국방전략에 관해 상세히 설명해줬다.
발제로 나선 김호중 교수는 PPT(프레젠테이션) 보고서를 통해 ‘다산 정약용 선생의 부국강병과 국방전략(강병을 중심으로)’ 주제로 발표했다.
김 교수는 “이번 발제를 위한 준비과정에서 피피티 보고서 작성이 쉽지 않았다” 며 “나이가 먹어 모두 잊어버리고 새롭게 정리하는 것도 또 머릿속에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직접 작업을 하려니까 정말 어려웠다” 고 애로사항을 밝히면서 “나이 먹어도 노화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한다” 는 생각을 행사장을 찾은 분들에게 두뇌건강, 기억장치 원활의 ‘노력’ 을 강조했다.
김호중 교수는 서술에서 다산 정약용(丁若鏞. 1722~1836)은 억울한 누명으로 18년간 귀양살이를 했음에도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위국헌신의 마음으로 500여권의 저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인문학, 정치, 경제, 공학, 의학, 예술, 국방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저서를 통해 개혁사상가이자 최고의 실학자로 평가받고 있다고 다산 정약용 한 인물에 대해 높이 샀다.
우리는 다산에 대해 대체로 화자로만 생각하고 무관(武官)의 기질을 가졌으나 정조로부터 이 분야에 인정받았던 점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고 본다고 했다. 이런 내용은 정조가 사망했을 때 다산이 임금을 그리워하며 자신에게 하사한 병학통을 어루만지며 통곡하는 장면, 그리고 병학통의 첫 면 여백에 남긴 글, 이를테면 옛날 내가 벼슬하기 전 중화당에서 임금을 뵈었을 때 술을 내려주시고 또 이 책을 주시며 “네가 장재가 있음을 안다” 고 했다. 그러면서 이후 “김동철과 같은 무리가 나타나거든 네가 가서 징벌하라. 너는 돌아가서 이 책을 읽으라 하셨다” 다산은 “아 나는 실로 제목감이 아니다. 설령 그런 뜻이 있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한들, 이제 와서 어찌 그럴 수 있으랴” 는 내용 등에서 알 수 있다고 서술했다.
정조가 사망 후 다산은 왜 임금이 자신에게 안보와 관련된 지식을 쌓도록 했는지를 깨닫은 상태에서 병학통 여백에 글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자신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임금의 지침을 따르려는 마음에서 ‘아방비어고, 민조의, 목민심서’ 등 안보와 국방에 관한 책들을 저술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봤다.
김 교수는 “다산에 관계한 국방 분야에서 단편적인 내용만 전해지고 있다” 며 “체계적인 분석이 미흡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잘 논의하지 않았던 국방 관련 저서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다산이 꿈꾸어왔던 부국강병 중에서 ‘강병(强兵)’ 에 대한 철학과 육성 방안에 대해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현대적 안보 관점에서 어떻게 연계하고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찰해 봤다.
1. 정조는 왜 병학통(兵學通)을 하사 했을까?
2.미완성된 아방비어고(我邦備禦考)의 행방
3. 민보의(民堡議)
4. 전선책(戰船策)
5.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본 다산 안보관
이 문제를 두고 발제로서 진단을 해보았으며 이 말에 대해 청취자들과 의견을 나누었다.
먼저 정조는 왜 병학통을 하사했을까?
1787년(정조 11) 다산의 나이 26세 되는 3월 14일 영화당에서 실시한 반제(半製) 수석으로 합격하여 국조보감과 백면지 100장을 하사 받았다.
8월 중희당(重熙堂)에서 수석으로 합격하여 정조가 상을 주려고 그동안 받은 상이 무엇이냐? 라고 물었고, 다산은 필자백신, 대동통편, 국조보감 등을 받았다고 답하자 정조는 다산 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다고 하면서 계당주를 단번에 마시게 한 뒤 술기운이 오른 다산이 휘청거리자 임금은 내감에게 그를 부축해 물러가게 했다. 잠시 후 그저 가지 말고 빈창에서 기혼 날 꼬마 신랑에게 경박한 소년이란 말을 들었던 다산의 육촌 처남이다. 그가 책을 주면서 임금의 하교를 전했다.
“자네가 장재(將才)를 아우르고 있음을 아신 까닭에 특별히 이 책을 하사사신다고 하셨네,” “훗날 김동철과 같은 역적이 나타나가든 자네가 나가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지” 『균암면필』에 나오는 대목이다. 집에 돌아와 보니 임금께서 하사하신 책은 마로 병학통이었다.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왜병을 방어하면서 진을 치고 군사훈련을 시키면 방법을 정조가 손수 정리하여 군영에 내린 책이었다. 정조는 문과 급제를 위해 정진 중인 다산에게 왜 뜬금없이 장제를 언급했을까?
김 교수는 그럼 정조가 이때 언급한 김동철의 일이 궁금해진다며 두 달 전인 1787년 6월 제천 사람 김동철, 김동익 등이 정진성, 신승, 명찰 등과 작당하여 바다 가운데 있다는 무석국(無石國)에 근거를 두고 역모를 획책하였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당했는데, 이들은 8도에 내용을 심어둔 채 거사 일사를 적은 암호로 된 시와 거사 계획을 돌리다가 적발되었고, 나라를 원망하고 세상을 미혹시켜 국운과 회복을 운운하면서 흉언을 담은 내용이 이들 사이에 오갔으며, 그들 조직이 팔도에 퍼져있다는 말에 조정이 아연 긴장했다고 서술했다.
“어허! 이런 일이 다 있다니, 이 놈들을 용서할 수 없도다.”
놀라하며 긴장한 조정은 거사(擧事) 계획을 꾸민 그자들을 알아내고 바로 그자들을 잡아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그들이 처형당함으로 인하여 조정은 임금의 위기를 면하고 나라가 안정을 찾았다.
역모를 꾸민 자들의 그 속에는 이들 사이에 오갔고, 남쪽에서 오는데 왜인(倭人)과 같지만, 왜인은 아니다. ‘산도 이롭지 않으며, 물도 이롭지 않으며, 궁궁(弓弓)이 이롭다’ 라는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런 내용에 조정은 발칵 뒤집어졌다.
“궁궁이 뭐시란 말인가?”
“궁궁이라고 했는데, 도도 체 알 수가 없구나!”
“궁궁이라! 궁궁...”
조정은 고심이 깊어졌고, 알 듯 말 듯 한 용어에 조정은 생각할수록 답답해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감만 커져갔다.
그때 “아! 그래 궁궁은 바로 피신하기 좋은 산골짜기 깊은 곳에 피어난 풀 꽂인 천궁이 아닌가” 하며 무릎을 치며 ‘피란처’ 란 의미의 암호명임을 알아냈다. 천궁(川芎)의 궁이 활 궁(弓)자가 들어간 것이라는 데 알아챘다. 궁궁은 화살을 의미했던 것이다.
궁궁이에 더 살펴보면 병자(丙子)에는 북쪽 오랑캐가 나라에 가득 찰 것이다. 산도 물도 이롭지 못하고 이로운 것은 오직 ‘궁궁’ 이다. 여기서 말한 것은 ‘피란처(避亂處)’ 다. 궁궁은 병자호란 시절을 감안하면 난리를 피하는 최적의 장소이다. 궁궁이는 바로 이런 산골짜기 계곡물이 흐르는 사람들 눈에 쉽게 띠지 않는 후미진 곳에 자란다. 다른 이름으로 ‘천궁(川芎)’ 이라고도 하는데, 방향성 정유를 다량 함유하고 있어서 향이 매우 좋다.
혼돈의 시대, 난리가 있을 때마다 골짜기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피란처 같은 땅에 궁궁이는 자란다. 궁궁이는 ‘피신처’ 의 암호였다.
조정은 궁궁이란 말을 알아내고 바로 임금에 이 사실을 알렸다.
정조대왕은 신하들에게
“여봐라! 거사를 꾸민 이자들을 당장 체포하고 바로 처형을 하라!”
신하들은 임금의 지시를 받고 호위무사를 불러 “청건적들을 모조리 잡아 죽여라” 라고 명령했다. 호위무사들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그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 잠행 끝에 그들을 모조리 단칼에 목을 베어버렸다. 청건적으로 인한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던 궁궐이 어수선하게 됐던 것이 이로 인해 조정은 안정을 찾았고, 정조 임금은 이런 문제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방안과 대책에 몰두했다.
관련자 신문 내용에는 이들의 복색이 청색이고, 모두 푸른 관을 썼다는 자백도 있었다. 황건적이 아니라 후한 말에 장각을 중심으로 결성된 종교집단 태평도가 봉기하고 이루어진 군사조직인 ‘청건적(靑巾賊)’ 을 표방한 셈이다. 항상 머리에 노란 두건을 쓰고 다니면서 중국 각지를 털어버려 ‘황건적(黃巾賊)’ 이라 불렸다고 하며, 중국사 역사상 최초로 종교 집단이 일으킨 민중봉기이자 역성혁명인 황건적의 난의 주인공들이다. 이 난으로 인해 후한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머리에 파란 두건을 착용한 도둑의 ‘청건적’ 이 출현해 조정은 긴장을 아니 할 수 없었다. 황건적 영향을 받아 여러 지방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나 천하가 소란해질까봐 조선 조정을 갈피를 잡지 못했다.
글 가운데 궁궁 운운하는 대목은 60년 전 1728년(영조 4) 무신년에 발생한 이인좌의 난 진압과정에서 이미 한차례 등장하는 구절이었고, 또 1748년(영조 4) 5월 24일 호서역모 때 천국에서도 똑같이 등장했던 비기(秘記)의 비밀 기록이었다.
이는 모두 당시 조선사회를 흔들었던 장감록(鄭鑑錄)의 진인(眞人. 도교를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 관한 소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해도(海島. 바다 가운데 있는 섬)에서 정령이라는 진인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조선을 점령해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아득한 풍문이었다.
일종의 메시나이즘, 즉 구원신앙의 변이 형태였다. 이처럼 숙종 때부터 시작된 정도령의 풍문은 근 100년 동안이나 조선사회를 소요하게 했다. 그만큼 조선사회가 병들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하다.
김동철 사건은 이들을 사형에 처함으로써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 않았지만, 정조는 다산에게 이 같은 일이 훗날 다시 생길 때 네가 앞장서 정벌하라는 당부였던 셈이다. 이 문제는 당시 남인 세력의 향배와 천주교 문제와도 미묘한 접점을 둔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었다. 넉 달 뒤인 1787년 12월에 다산은 다시 반시에 응했다.
이번에는 등수가 형편없이 낮았다. 임금의 진언은 이랬다. 여러 번 시험을 보아 번번이 일등을 했지만, 화(華)만 있고 실(實)이 없다. 특별히 그를 위해 화를 거두려 한다. 일부러 등수를 낮추어서 정신을 차리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사암연보는 이 가사에 알쏭달쏭한 다음 한마디를 덧붙였다. “꿈은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은거하여 경전 공부에 힘 쏟을 뜻이 있었다. 짐작하건데 임금께서 무과로 진출시켜 쓰려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덧붙였다.
다산의 임금이 자신의 등수를 일부러 낮춘 것을 문과가 아닌 무과로 이끌어 등용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받아들였다.
다산은 무엇보다 병학통을 하사하며 하신 말씀이 목에 걸렸고, 그 뒤로도 그 같은 낌새가 다른 경로로 전해졌던 것 같다. 정조는 하루라도 빨리 다산을 곁에 두고 싶었지만, 그의 대과 급제는 자꾸 늦어지고 있었다. 임금이 보기에 다산은 장재가 있었다. 그의 장인 홍화보 또한 무과로 급제하여 승지까지 지냈으니 장인의 뒤를 따른다면 누가 보더라도 구색이 잘 맞았다. 병학통은 무과 응시자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필독서였다.
이 같은 임금의 의중을 알아차린 다산은 그해 4월에 장인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양수리 인근의 문암에 집과 전지를 구입해 두고 있었던 터였다. 사암연보는 또 위 기사에 이어 매문엄향장(買門埯鄕庄), 즉 문암의 시골집을 매입했다고 적어 두 일 사이에 관련성을 높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가족을 이끌고 서울을 떠날 기세였다.
이 소동은 결국 임금이 다산을 무과로 올리려는 뜻을 접으면서 가라앉았던 듯하다. 다산은 1년 뒤인 1789년 정월에 문과에 당당히 급제해 이 소동은 애초에 없었던 해프닝으로 끝났다. 훗날 1800년 11월 6일 정조의 장례가 끝나 건릉에 묻히자 다산은 세상을 떠난 임금이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통곡하면서 그때 정조가 하사했던 병학통을 꺼내 어루만지다가 첫면 여백에 짤막한 메모 글을 남겼다.
“옛날 내가 벼슬하기 전 중화당에에서 임금을 보았을 때 술을 내려주시고 또 이 책을 주시며, 네가 장재가 있음을 안다. 이후 김동철과 같은 자가 일어나거든 네가 설령 그럴 뜻이 있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한들, 이제 와서 어찌 그리할 수 있으랴” 라고 통곡하면서 메모 글을 남겼다.
정조가 다산에게 하사한 병학통의 내용을 살펴보면 정조 이전까지 각 군영 별로 각각 다른 훈련방식을 채택하고 있어서 통일 된 훈련 방식이 필요했다. 이에 정조는 즉위 때(1776년. 영조 52)인 이때부터 각 군영별 훈련 방법을 통일해야 된다는 인식하에 행조판서 김지훈, 원사 장지향 등에게 지시하여 1785영(정조 9)에 병학통을 편찬하기에 이른다. 내용은 2권으로 되어있다.
군사 훈련을 위한 책은 이미 조선전기에 병장설(兵將設), 병장도설(兵將圖設) 등이 있었다. 그러나 오위체제가 무너진 상황에서는 그 책의 내용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영조의 명령으로 속병장도설(續兵將圖設)이 편찬되었고, 척계광의 기효신서(記效新書)를 모방한 병학지남(兵學指南)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각 군영이나 도에 따라 규정이 달라 군사훈련에 질서가 없자 통일을 기하기 위해 만든 책이다. 병학통은 병학지남, 속병장도설 등과 함께 조선 후기 병법의 기본과 실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책이다. 특히 1776년 9월에는 각 군영의 진(陳)을 치는 훈련, 남한산성의 훈련, 통영수군의 훈련에 이를 준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 책은 간행된 직후부터 군사훈련의 규범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이 책과 뱡학지남 등의 여러 벙서들은 1790년에 다시 집대성되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로 편찬되었다. 이 책들은 규장각 도서에 다수 있다.
이런 부국강병으로 아주 필요한 필독서로 다산은 정조가 하산 책에 의미를 두었고, 다산에게 병학통을 하사한 정조는 훗날 다산이 이 병학통을 필독하고 읽혀 군사훈련에나 방어에 써 먹기를 바랐다는 김호중 교수의 발제였다.
미완성된 아방비어고(我邦備禦考)의 행방에 대해서는 다산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바닷가 강진 땅에 귀양을 왔다. 그래서 혼자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배움에 뜻을 두었지만, 수무 해 동안 세상길에 잠겨 선왕의 큰 도리를 알지 못했더니 이제야 여가를 얻었구나, 그리고 마침내 혼연히 스스로 기뻐하였다. 그리고 육경과 사서를 가져다가 골똘히 연구하였다. 무릇 한위 아래로 명. 청에 이르기까지 유가의 학설 중에서 경전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을 널리 수집하여 꼼꼼히 살펴 잘 못된 것을 취하고 버릴 것을 드러내어 일가의 말을 써서 갖추었다” 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유배기간 동안 지은 책들을 열거하면서 아래와 같이 미완성된 아방비어고의 흔적을 남겼다.
선대왕이신 정조 임금께서 비평하신 모시강의 12권을 시작으로 이와는 별도로 강의보 3권과 악서고존 12권, 주역심전 24권, 역학서원 12권, 춘추고징 12권, 논어고금주 40권, 맹자요의 9권, 주용자잠 3권, 중요강의보 6권, 대학공의 3권, 희정당대학강록 1권, 소학보전 1권, 심경밀협 1권 등을 지었으니 경전에 관한 책이 모두 232권이다.
경계하고 공경하여 부지런히 노력하는 동안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도 알지 못했다. 또 잡찬은 문목이 다르다, 경세유표 48권은 아직 마치지 못했다. 목민심서 48권, 흠흠심서 30권, 아방비어고 30권은 미완성이며, 아방비어고 10권, 전례고 2권, 소학주천 3권, 아언각비 3권, 마괴화통 12권, 이령 1권은 저술하였다. 모두 함에 말하면 문집만 260여 권이다 라고 강진 유배기간에 지은 책들은 해배 후 고향 마재에서 환성하여 세상에 나왔지만, ‘아방비어고’ 라는 책은 미완성 단계로 아직도 어떤 내용이었는지가 식별이 안 되고 있다.
김 교수는 미완성 아방비어고의 흔적을 찾아본바, “책자 제목에 나타나있는 것처럼 분명 조선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전란에 대비하는 대비책을 분석해 놓은 책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고 확신했다. 그리고 “경세유포에 다산은 비어고(備禦考)는 내가 쓴 책이다. 동방의 전쟁을 모아서 한 책으로 만들고 관방(關防. 국경을 지킴)과 기용(器用. 기구를 쓴 방법)에 관한 여러 주장을 살폈으며, 군사제도의 연혁을 밝혔다” 라고 적었다.
그리고 “비어고의 내용 중 송풍암(松風菴)에서 편집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송풍암은 다산 동암의 별칭이고, 다산은 실제로 이 별호를 여러 차례 썼다. 이런 흔적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어고를 다산이 쓴 것이 확실해 보인다” 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아방지어고는 왜 완성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게 된다. 이에 정민 교수의 주장은 아방비어고는 국방 및 외교에 관련된 예민한 정보를 취급한 것이어서 유배 죄인의 처지에 함부로 점근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특별히 아방비어고 같은 국방 관련 저작은 많은 군사기밀을 포함하고 있어 자칫 문제를 심기로 하면 엮기에 떠라 곤란한 처지에 놓일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 아방비어고는 유배 당시 강진에 병마우후(兵馬虞候)로 내려와 가깝게 지냈던 이중협과 해배(解配. 귀양을 풀어줌) 후 다산에게 수학한 정주응의 이름을 빌려 비어고와 미산총서(眉山叢書) 등의 이름으로 흩어졌다. 이중협이 엮은 것으로 되어있는 규장각본 비어고 10책과 정주응의 저술로 국립중앙도서관과 국민대학교 성곡도서관에 나뉘어 소장된 미산총서 각 6책 8책은 모두 다산이 직접 진두지휘하여 엮은 아방비어고의 미완성 상태를 보여준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호중 교수도 “특별히 아방비어고는 본격적인 국방 관련 저작으로 이전에 누구에게서도 나온 적이 없던 놀라운 규모와 세밀함을 갖춘 국방전략 종합 보고서인 점을 고려 시 다산의 저술이라는 주장이 합리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고 했다.
비어고(備禦考) 의 탄생
김 교수는 비어고는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필사본이 소장되어있다. 저로는 이중협이라고 되어있으나 기록에 나타난 이중협은 문신 출신으로 출생은 1681년(숙종 7)에 태어나 사망 일자는 미상으로 나와 있으며, 1713년(숙종 39년) 중광 문관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722년(경종 2) 이후 사간원 사간, 훙문관 수찬, 숭문원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828년(영조 4) 승자를 거쳐 1736년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1745년 대사간, 공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며 정약용의 태어난 날인 1762년을 고려 시 정약용과는 무려 81세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이 기록에 남아있는 이중협은 시기적으로 정약용과는 연관성이 없고, 이중협이라는 동명 2인이거나 또 다른 이중협이라는 인물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정민 교수는 다산과 이중협과 정주응의 관계에 대해서 다산의 비어고의 행방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중협은 다산과 동갑내기 벗이었고, 정주응은 해배 이후 다산에게 배운 제자였다. 먼저 이중협은 무관 출신으로 강진 병영성에 병마우후로 3년간 머물면서 다산과 가깝게 왕래하였다. 1811년경 군사훈련 차 강진만에 나왔던 그는 귤동 초당으로 불쑥 다산을 찾아와 이후 거의 매달 한 차례씩 훈련이 있을 때마다 촏앙에 들러 왁자한 자리를 만들곤 했다.1813년 6월 그가 3년 임기를 마치고 강진을 떠나게 되었을 때 다산은 6월 12일과 6월 15일에 여성화시첩(與聖華詩帖)과 송이성화장귀서(送李聖華將歸序)를 써주었고, 이와 별도로 다시 여성화초천시사첩(與聖華岧川詩詞帖)을 따로 써서 작별 선물로 주었다. 뿐만 아니라 다산문집 권 12에 실린 증별이중협처후첩서(贈別李重協處候時帖序)와 이중협후절동명(李重協處候蕝茼銘)도 지어주었다. 이런 글만 보더라도 다산이 그를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했는지를 일기에 충분하다. 성화(聖華)는 이중협의 호이다.
이중협 이름으로 된 비어고(備禦考. 갖추어 막을 것을 곰곰이 생각함), 비어고는 조선시대 병법, 전쟁사, 군사지리, 외국 정보 등을 다룬 주요 저서와 자료를 총 10권의 총서 향태로 편집한 책이다라고 김 교수는 논문에 기술했다. 이 책에는 서예 류성룡(1542~1607)이 전수기의(戰守機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일본고(日本考) 등 조선시대 유명 인물들이 군사, 안보 문제와 관련해 쓴 글이 주제별로 실려 있다고 논문을 통해 밝혔다.
김호중 교수는 자신이 쓴 논문에서 버어고에는 1권에 비어촬용(備禦撮要)가 실려 있다. 저자를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정약용이 한때 머물렀던 거처의 이름인 송풍암(松風庵)이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봐 정약용이 지은 병법책의 일종으로 보인다고 했다.
비어촬요에는 ‘행군 방법, 위험지역 통과 방법, 야전에서 식량 수급 문제, 경계와 신호 방법’ 등이 적혀있어 정약용이 군사 문제에 매우 구체적인 관심과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소 1마리는 사람 50인의 하루 식량이라거나 험로를 통과할 때의 구체적인 진형 등도 제시할 정도라고 썼다.
비어고는 고려말기부터 조선시대까지 위화도 회군과 야인정벌,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주요 전쟁이나 전쟁에 버금가는 중요한 사건들을 정리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 적었다.
또 9권 비어전고에는 임진왜란 당신 판서(장관급)로 활약했던 이덕형(1561~1613)이나 도승지(국왕 비서실장)로 활약했던 이형복(1556~1618)과 이순신(1545~1598) 장군 등이 국왕에게 보고한 문서를 주로 모아 놓았다. 10권에는 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했던 신유한의 기행문인 해유로(海遊錄)과 청나라 만주족에게 포로로 끌려갔던 이문환의 행적을 기록한 건주문견록(建州聞見錄)이 실려 있다. 이 역시 우리나라 안보에 영향의 사정을 담은 책이라는 점에서 넓은 의미에서 안보 관련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봤다.
김 교수는 비어고는 전체적으로 완성된 수준의 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외교, 안보, 군사 문제 관련 저서들 모두 모아 집대성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하지만 규장각에 소장된 비어고의 저자나 편찬 시기가 언제인지는 아직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제목이 같지만 다른 사람이 쓴 책도 다수 남아있어 혼란을 더한다. 특히 내용 중 상당수가 정약용이 지은 책이라는 점에서 규장각의 비어고는 정약용의 미완성 원고를 후대에 정리한 책일 가증성도 있다. 정약용은 문신 출신이지만, 하루라도 대비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는 등 군사 문제에 깊은 식견을 가졌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동아시아 안보 정세가 심상치 않은 요즘이야말로 정약용이 군사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를 한번쯤 되새겨볼 시점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김 교수는 논문을 통해 강조했다.
민보의(民堡議)
김호중 교수는 민보의는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국토방위 책략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서술한 군사언어다. 정약용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1812년에 썼다. 내용은 왜침에 대비하여 항전할 수 있도록 요충지마다 산성을 쌓고 병란이 일어나면 식량을 가지고 그 산성에 집결하여 저항전을 전개하는 것이다.
정약용은 농민들이 자위적 항전의 거점으로 이용될 산성을 민보(民堡)라고 불렀다. 민보의는 민보라는 농민자위 조직에 의한 국방체제를 주장한 최초의 논문이다.
정약용 당대 조선의 농촌 사회는 군사적으로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 임진왜란 후부터 지방의 말단 행정구역마다 양반 및 양인들로 충원되는 이른바 ‘속오군(束伍軍)’ 을 육성하고자 하였다고 논문으로 발표했다.
다산 정약용은 왜구의 침입으로 농민들이 불안해하자 민보라는 책을 펴내 농민들의 불안을 잠재우고 이럴수록 단결하여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을 갖도록 다산은 ‘민보의’ 라는 책을 편찬해 이 책을 배포해 민심을 달래며 굳건한 태세를 갖추게 했다는 김 교수가 말한 민보의이다.
다산은 농민들이 불안해하자 이를 해결할 방법을 고심했다.
“이걸 어쩐단 말인가?”
“농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됨이야!”
“농민들이 불안해하고 민심이 이반되고 나라가 요동을 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텐데 이걸 어찌하오!”
군사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다산은 자신 만의 전략을 찾아내는 데 골똘했다.
“그래! 고을에 작은 성을 쌓아, 그 성으로 적을 막고 농민들은 그 성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국방력을 키워야 돼!” 하며 다산은 백성 민(民), 작은 성 보(堡), 의논할 의(議) 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김 교수는 이 논문을 통해 밝혔다.
김 교수는 지방군인 속오군(束伍軍)은 이미 1880년대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는 병력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과세 정부상의 허구적 숫자로서만이 존속할 뿐이었다. 관리들과 지주들은 일반 농민들을 경제적으로 착취하였으나 그들을 군사적으로 보호하지는 못하였다. 특히 여러 세대에 걸쳐 자행된 관들의 농민 수탈과 협잡은 매우 불행한 사회 심리적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백성들은 관에 대한 전면적인 반감과 불신 의식을 가지게 된 반면, 병란에 대해서는 극도로 두려워하고 패배주의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실제로 1811년 평안도의 홍경래의 난의 소문과 조만간 왜구의 침입이 있으리라는 유언비어가 1812년 남해안 지방에 퍼졌을 때 수많은 지역 주민들이 도망가 흩어져 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이러한 사태를 직접 목격하고서 백성을 보호할 작은 성을 논한 ‘민보의(民堡議)’ 를 저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어떻게 하면 농민들이 병란, 특히 왜침을 당하더라도 뿔뿔이 도망하지 않고 스스로 단결해 자신들을 보위하고 적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민보의 속에서 정약용이 답하고자한 중심 논제였다고 했다.
김 교수는 다산은 민보의라는 책자에서 요충지마다 산성들을 쌓고 그곳을 전시 대피소 ㅁ빛 유격전의 거점으로 이용하는 산성 중심의 농민자위체제를 구상, 제안하였다. 즉, 병란이 일어나면 요충지 주변의 모든 주민들은 식량과 가산 일체를 가지고 요충지 산성으로 집결하여 식량 조달이 불가능한 적에 대해 장기 저항전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고 민보의를 펴낸 정약용의 나라사랑, 국민사랑이 얼마나 깊었고 안보에 얼마나 지식이 풍부했는지를 그가 쓴 민보의는 국방전략에 크나 큰 기여를 했다고 기술했다.
민보 내용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실제적인 사항들, 예컨대 요충지 선정 시 고려 사항, 민보의 축성 방식, 민보 방위체제 하에서의 민병의 조직과 생활 규율, 민보 수비를 위한 무기와 장비들에 대해서는 조선의 지리적 형편과 임진왜란의 경험에 비추어 독자적으로 재구성하였다고 김 교수는 발제자로 나서며 민보의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김 교수는 민보의는 민보라는 농민 자위 조직에 의한 국토방위를 주장한 최초의 논문이었다. 이 논문에서 정약용이 가상한 침략군은 일본이었다. 관료조직 전체가 고질적인 재정 궁핍과 행정적 부패 속에서 허덕이고 있고, 백성들 또한 관을 불신, 기피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였던 당시의 여건으로 보아 정약용의 민보 방위 론은 실천 가능하고 적절한 구상이었다고 논문을 통해 재차 정약용의 국가안보와 국태민안에 신경을 썼음을 알렸다.
김 교수는 갈수록 왜구의 침략과 노략질은 잦아지고 있는데다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서양 선박들이 빈번한 출현, 서학(천주교)의 유포, 북경의 함락, 그리고 내침한 서양 선박들의 교전 사건으로 인해 전국의 민심이 동요하자 연해변의 많은 식자들은 ‘민보의’를 모범으로 한 비번 책의 강구를 조심스럽게 주장하였다고 했다.
병안양요 사건 이듬해인 1867년 훈련대장 신현의 건의로 조정에서도 뒤늦게나마 민보 방위체제의 시행을 결정하였으나 결국은 지상 계획으로 끝나고 말았던 민보였지만, 이러한 민보의 개념의 전략은 현대전에서도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현재 전방 지역의 ‘GOP 작전, 거점전투’ 개념이 바로 민보의 개념이다.
GOP 작전 시 평소에 진지 일정 기간 작전이 가능한 탄약 및 식량을 비축하고 있다가 적이 공격 시 진지 내에서 저항전을 실시하다가 후방 역습부대와 연결 작전을 실시하는 개념이다. 후방지역에도 주요 거점별로 거점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가 적이 공격하여 그 지역이 피탈되더라도 주용 거점은 장기 저항전을 수행하면서 후방부대들이 역습을 실시할 때 연결 작전을 실시하는 개념이다.
역사적으로도 고구려 때 안시성 전투에서 당 태종이 평양을 계속 공격하지 못하고 안시성 함락을 끝까지 고집했던 이유다 라고 민간인 보호를 위해 설치했던 것에서 벗어나 나라 전체를 위한 민보 전략은 예나 지금이나 통하는 진지(陣地)로서의 군사방어 및 공격시설이라고 육군 준장을 역임한 장수답게 김 교수는 주장하며 다산 장약용이 쓴 ‘민보의’ 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전선책(戰船策)
다산이 1789년(정조 13) 초계문선일 때 과거시험관으로 임명 시 작성한 시험문제집이다. 전선책(戰船策)이란 바다에서 전선을 활용하여 전투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술이 필요하고 이러한 해전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전투함이 필요한지를 이순신의 해전의 사례를 들어가면서 설명하고 있다.
김 교수는 그 내용을 살펴보기를 묻는다. 수잔(水戰)은 배를 가지고 한다. 전선은 바다로 오는 도둑 떼를 막고 변방을 튼튼히 할 수 있는 것이니 뜻밖의 변란을 대비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삼묘를 정벌하는 전쟁에서 삼묘의 왼쪽에 동정호가 있고, 오른쪽에 평려호, 지금의 파양호가 있었으니 어찌 수전이 없었겠는가?
배의 크기, 배의 모양, 배의 이용 등 여러 가지 전선책을 기록해둔 책으로서 대비책으로 전선의 운영 실상을 알고 있는지를 질문하고 대비책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다. 또한 중국의 수군제도, 전투방법, 전선, 무기 등에 대해 질문하고 대비책을 물었다. 또한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왜적을 막으면서 포진할 때에는 어떤 진법을 썼고, 신류가 흑룡강에서 청나라를 도와 싸울 때 적을 무찌른 전술은 어떤 것이었는가를 물었다. 또 거북선의 제도는 어떤 법을 본뜬 것이고, 골선을 만들자고 주청한 사람은 누구인가? 전선과 병선은 어찌하여 명칭이 다르고 방선과 협선은 어찌하여 달리 부르는가를 물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의 진법과 신유가 나선 정법에서 쓴 전법에 대해 묻고 거북선의 유래, 전선, 병선, 방선, 협선의 명칭이 다른 이유 등을 질문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다산은 해전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전술, 전선의 관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다산이 해군에 대한 다양한 전술과 전선의 관리에 관심을 두고 대비책을 가져야된다고 판단하게 된 이유는 당연히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거차면서 전쟁 교훈을 얻은 부분도 있지만, 성호 이익(1681~1763)이 성호사설에서 주장했던 해군 강화 내용과 일치한 것을 알 수가 있다고 김 교수는 깊이 있는 언어들로 의미 있는 판단으로 전술책에 관한 자세한 내용들을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설명했다.
김 교수는 다산은 성호 이익을 스승으로 생각하고 실학사상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익의 수군 문제에 대한 대비책을 그대로 계승하여 전선책이라는 책문을 통해 과거시험 지원자들에게 질문하고 답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전선책의 질문 내용을 보듯이 다산은 해군에 대한 중요성과 해전에서의 중국의 전술과 조선의 전선의 운용, 관리 등 해군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이미 습득하고 있었기에 과거시험 문제를 출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전에서 해군의 더욱 중요성은 강조되고 있다. 인류 역사상 돌이켜 보면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앞서 해군의 군비경쟁이 있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는 격언처럼 국가가 강대국으로 도약하려면 자원의 복이자 핵심 교통로인 바다를 차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제국부터 오늘날 미국까지 장기간 번영한 패권국의 힘의 원천도 바다였다고 김 교수는 논문을 통해 강조했다.
김 교수는 “한 시간 또는 30분 작전할 수 있는 지역을 과연 우리의 영토” 라고 주장하며 “지킬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점이 들 수밖에 없다. 미래 해양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해군력의 증강이 필요한 시점이다” 라고 강조했다.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본 다산 안보관
김 교수는 목민심서에 제시한 병전 6조(병전육조)는 한마디로 목민관이 지켜야 될 병제와 안보를 튼튼히 하는 일을 기록한 부분이다. 한마디로 병제의 모순점과 지방 수령들의 불찰로 인하여 생긴,S 아전, 군관들의 부정행위를 소상히 거론한 역대 제헌들이 시행한 실례를 들어 후세 목민관들에게 귀감을 보이면서 그 시정 방안을 곁들여 말한 부분이다. 다산은 병전 6조에서 첨정(簽丁), 연졸(練卒), 수병(修兵), 권무(勸武), 응변(應辯), 어구(禦寇) 등 6개 조항을 제시하면서 강조하였다. 이는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병무(兵務)와 안보(安保)에 관한 내용이다 라고 설명했다.
참정은 장정 선발과 병적을 관리하는 일, 연졸은 구사를 훈련시키는 일, 수병은 병기를 관리하고 수리하는 일, 권무는 무에를 권장하고 무사를 선발하는 일, 응변은 변란에 대비하는 일, 어구는 외침에 대비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기갑부대 등 여러 군사 지휘관으로서 국방의무에 전념하고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김호중 교수는 다산 정약용에 관련한 이런 제목이 붙어 지금까지 정조가 다산에게 병학통을 하사하면서 무관이 되기를 기대했고 노력한지와 다산의 저서를 통해 다산이 어떤 안보관과 국방전략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아보았다.
김호중 교수는 정조가 쓴 책을 요약해보면...
첫째.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양성해야 된다.
정조가 다산에게 병학통을 하사하면서 문무를 겸비한 선비가 되라고 강조하였듯이 다산도 민보의, 전선책, 목민심서 등을 통해서 끊임없이 목민관이라도 무애 관한 지식과 이에 대한 대비책을 묻고 있다.
둘째.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므로 해군력을 강화해야 된다.
이는 임진왜란 교훈도 있었기에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시험관으로 전선책에서 질문하였듯이 해군의 전술뿐만 아니라 각종 전투 선박들의 형태와 임무, 그리고 그 선박들의 관리, 유지, 보수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질문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해군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삼면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하는 많은 고민을 했었을 것이다.
셋째. 농민자의체제를 유지하여 외침에 대비해야 된다.
농민자위체제는 주여 요충지마다 산성을 쌓고 전시 대피소를 만들어 적이 침범 시 우격전 거점으로 활용하여 전쟁이 일어나면 주민들이 식량과 가산을 가지고 산성으로 집결하여 장기 저항전을 전게하는 것이다.
넷째. 지방의 속오군을 예비군 개념으로 운용, 지역 방위체제 유지
민보의에서 다산은 병자호란 이후 230년간 외침이 없다보니 안보 의식이 해이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비가 미흡하다고 판단하였다.
김호중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 국방과제 중 가장 신각한 부분이 저 출산으로 인하 인구감소에 따라 상비군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 이라며 “2030년에는 상비군 20만도 유지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예비군의 전력을 극대화해야 되는 정책이 고려되지 않고는 해결방법이 없는 실정” 이라며 “전 세계적으로 예비군제도가 가장 잘 발달되어있는 나라는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예비군들의 집에 소총과 군장을 가지고 생활한다” 고 밝혔다.
김 교수는 “이런 탄탄한 예비군을 둔 이스라엘은 예비군 소집 명령이 내리면 5시간 안에 사단이 편성되고, 그리고 예비군 훈련도 년 30시간 이상을 실시하고 20년간 예비군 복무를 한다” 며 “이스라엘 인구 780명과 정규군 17만으로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국가를 지킬 수 있는 것은 효과적인 예비군의 전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 이라고 봤다.
김 교수는 “특히 북한과 대치하고 있고,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정수준의 정규군이 유지되어야하나 인구 절벽으로 유지가 불가능하다면, 예비군을 정예화하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다” 며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겠지만, 예비군의 근무 연령을 늘리고, 훈련 시간을 늘려서 예비군을 정예화해야 된다” 고 강조했다.
김호중 교수는 “이런 필요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권에서는 선거를 의식하여 예비군의 연령을 낮추고 시간도 줄이는 정책만을 주장하고 있으니 심히 우려되는 바가 크다” 고 정치권을 꼬집었다.
위와 같은 내용의 ' 다산의 부국강병(富國强兵)과 국방전략(國防戰略)-강병을 중심으로' 에 관한 고찰을 PPT를 통해 고찰해봤다.
수원화성 축조 정약용
한편 다산 정약용은 김호중 교수가 다룬 '아방비어고, 민보의, 전선책, 목민심서' 등을 저술한 것을 볼 때 그가 축조에 일조했던 수원화성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꺼하는 느낌이 든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 저술가, 시인, 철학자, 과학자. 기술자, 발명가, 건축가, 전술가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서양에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해부학자, 지리학자, 마법사의 레오나르도다빈치가 있다면 동양에는 정약용이 있다.
다산은 과학기술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기여를 했었다. 다산의 기술적 성과는 ‘거중기(擧重機)’ 제작이다. 그는 서양의 과학 기술 서적을 통해 ‘도르래’ 의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활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쉽게 들어 올릴 수 있는 기계인 거중기를 제작했다.
거중기는 수원화성 축조에 기여할 정도로 이러한 기술은 당시 축조 중이었던 수원화성의 건설에 큰 도움을 주었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한 다산은 기술 발전이 인간문명 발전의 핵심 동력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기술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글을 남겼다. 이는 다산 정약용의 업적 중 하나로 그의 사상이 오늘날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 정조는 비운의 죽음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며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수원에 성을 쌓겠다하였다. 그래서 정약용을 불러 성을 쌓으라했으나 정약용은 백성들의 고생과 희생을 걱정했다. 그래서 정조는 중국에서 가져온 서양의 기술서 기기도설을 주며 기술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정약용은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여 서양의 기술,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쉽게 옮길 수 있는 장치들을 고안할 수 있었다.
큰 성을 지으려 면은 많은 인력과 많은 예산과 많은 사고를 유발할 수 있어 정약용은 이점을 염두하고 기중기를 만들어 성 축조에 임했다.
정약용이 수원화성 축조도 하나의 전략적 측면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부친이 묻힌 그 지역에 제2의 한양을 조성했다고 치부하지만, 사실은 다산 정약용의 깊은 생각이 있었다. 사도세자 묘를 보호하고 기리고 빛내기 위한 것이지만, 다른 면으로는 묘지를 성역화하면서 지역과 백성을 보호한 성, 즉 민보(民堡)의 측면에서도 축조했다.
다산 정약용은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푸는데, 하나의 답은 절대 내놓지를 안했다. 그는 하나의 답에서 또 다른 답의 수학으로, 과학으로, 기술로, 철학으로, 문학으로, 예술로, 군사로 여러 분야로 답을 내려했다.
수원화성 축조, 기중기를 이용한 편리한 건축기법이면서 군사전략, 국가안보 등 국태민안에도 염두하며 성을 축조했다. 다산의 부국강병의 꿈을 담은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가 현행법을 전제로 인민의 휴양 방안을 제시한 것이라고 한다며, 경세유표는 현행법의 개혁을 전제로 국가체제의 궁극적 혁신방안을 제시한 책이다.
김호중 교수는 “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 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이다. 실학자로서 그의 사상을 한마다로 요약하면,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장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그가 한국 최대의 실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개혁 방안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 이라며, 다산 정약용은 오늘날에도 그의 사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김호중 교수는 마무리 발언에서 "다산 정약용의 호인 '다산(茶山)' 은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 자락에 차가 많이 자라는 곳에 기거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가 강진에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 다산으로 불리어 다산이라는 호를 얻게 됐다. 정약용이 차를 즐겨 마신 자신의 취향을 나타낸 것이지만, 다산이라는 호에는 큰 뜻을 펼치지 못한 정약용의 '간난신고(艱難辛苦. 몹시 힘들고 쓰리고 어려우며 고생스러움)' 와 애환이 깃들어 있다. 그는 일평생 쉼 없이 노력하고 수천 가지의 위험과 간난신고를 무릅쓰면서 지칠 줄 모르고 애쓰는 정약용이었다. 그런 그이였기에 그는 수많은 책을 편찬했었다. 다산은 속세와의 단절감을 지향하고 한양을 떠나 있어도 조정을 그리워하고 나라와 국민를 걱정한 정약용이었다."
"다산은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발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개인은 국가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며,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본 정약용이다. 따라서 그가 쓴 책들은 다 국가 발전을 위해, 평화를 위해, 자유를 위해, 부강을 위해 개인의 헌신과 노력을 강조하였다."
"아방비어고, 민보의, 전선책, 목민심서 등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이런 책들은 모두다 외세 참략과 내부 분란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대, 그의 작품에는 '우국충정(憂國衷情)' 의 메시지를 넣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고 하면서 "다산 정약용은 세계적인 인물로서의 기릴 필요가 있고, 우리는 그의 사상 철학과 국가관과 안보관과 사명감, 그리고 나라사랑, 국민사랑을 본받아야 한다" 고 강조하며 추앙한다면서 경의를 표했다.
김 교수는 " 다산은 아방비어고, 민보의. 전술책, 목민심서 등의 저술은 외부의 위협이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고 지키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호국정신(護國精神)' , 즉 호국전신은 호국정신으로 하나가 되는 대한민국을 소망한, 이 시대의 국가안보 상황에 대비하여 국민이 나라를 지키려는 정신이며, 안보의식이 군사위협 대비에 중점을 둔 정신이라면, 호국정신은 이념갈등 대비에 중점을 둔 정신으로써 다신의 정신은 우리 민족에게 왜침으로 큰 상처를 남긴 속에서도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위인으로서 애국심과 애민심을 갖고 아방비어고, 민보의, 전술책, 목민심서를 편찬한 다산 정약용에 대해 다시 한 번 그 정신과 사상을 가슴 깊이 새겨본다" 고 했다.
김 교수는" 다산의 정신은 '애국심(愛國心)과 애민심(愛民心), 사명감(使命感)' 을 갖고 이바지하는 등 애국심과 애민심으로 뭉치게 했고, 자신을 붙태워 헌신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등의 오로지 '우국충정(憂國衷情)과 호국정신(護國精神)' 으로 나라와 국민을 섬겼다" 고 했다.
김호중 교수는 "다산의 정신은 오로지 국가와 국민에게 있었다. 정약용이 펴낸 아방비어고, 민보의, 전선책, 목민심서 등 이런 군사 관련 책들은 오늘날에도 군사훈련과 국방전략, 안보 등에 있어서 참고서로 할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쓴 내용들마다 시사한바가 크다" 며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책은 매우 뛰어난 가치가 있고 훌륭한 국가자산이다" 라고 봤다.
부국강병
부강의 나라에서 평화는 피어난다
국방의 민족에서 자유는 누려진다
강병의 충정에서 나라는 지켜진다
병학의 연구에서 안보는 유지된다
부국은 강병의 길이다.
국방전략
국가를 튼튼하게 국민을 안전하게
방위를 탄탄하게 나라를 평화롭게
전수를 굳건하게 정신을 올바르게
략군을 건실하게 국방을 단단하게
국방은 전략의 기술이다.
김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