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 양대 명산은 포항 내연산과 봉화 청량산이다. 단풍이 들면 내연산에서 겸재 기념 사생대회가 열린다. 퇴계와 율곡에 의해 이뤄진 '조선성리학'을 바탕으로 민족문화의 긍지와 국토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출한 정선은 청하 현감으로 부임하여 경상도의 '진경'산수를 화폭에 담았다. 그는 갑인(1734)년 가을 내연산에 올라 폭포를 그리고 바위에 이름을 남겼다. 정조 때, 흥해 군수로 부임한 문장가 성대중은 관찰사 이병모를 모시고 내연산(1783)과 청량산(1784)을 오르고 글을 지었다. 청량산에 동행한 단원 김홍도는 그림을 그리고 달밤에 퉁소를 불었다.
내연산의 명소 이름들이 잘못 불리어지고 있어서 안타깝다. '상생폭'은 바른 이름이 '사자쌍폭'이다. 그 아래의 못은 '사자담'이고, 거기의 길모퉁이는 '사자항'이다. ( 삭제 부분: 사자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동물이고, 사자후는 부처님의 설법을 의미한다. 소동파의 오도송처럼 자연물인 폭포는 밤낮으로 사자후를 토하고 있는 것이다.)문수암으로 오르는 길에 이 '사자쌍폭'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지점이 '문수대'이고, 보현암 지나 나타나는 적멸암터 길모퉁이가 '적멸항'이다. 은폭 주변에 삼동석(三動石: 3개의 흔들바위)이 있지만 이제는 잊혀졌다. 연산폭을 바라 볼 때 오른쪽의 '학소대'는 그 위에 '계조암'이 있었기에 이름이 '계조대'다. 왼쪽의 비하대는 본래 '중허대'이다. 석대의 가운데에 감실이 있고 관음폭에 움막 모양의 빈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1688년 5월에 보경사와 암자들을 탐방한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영남 퇴계학의 정맥을 이은 이상정이 연일 현감으로 부임해 여항(閭巷)의 시인으로 이름이 높던 흥해군 향리 최천익 진사와 시승(詩僧)으로 명망있던 보경사 대비암의 오암 선사와 함께 갑술(1754)년 3월에 내연산을 올랐다. 그는 계조암에서 '논어'몇 장을 강의하고 대비암으로 가다가 중허대에 올라 그 이름을 물었다. '기하(妓賀)'라고 하자, 오암 스님을 돌아보며 주자가 친구들과 함께 형산(衡山) 축융봉을 유산(遊山)하고 지은 시의 한 구절을 들려주었다. '낭랑히 시를 읊으며 나는 듯이 축융봉을 내려왔다(朗吟飛下祝融峰)'. 그러면서, '기하'는 이 시구의 '비하'가 와전된 것이라며, 그 자리에서 '비하대'라고 쓰고 바위에 새겼다. 숭유억불의 시대에 있었던 견강부회였다.
보경사의 '보경(삭제 부분-寶鏡: 보배로운 거울)'은 달을 비유한 것이고, (삭제 부분: '월인천강지곡'에서처럼) 달은 부처님 진리의 메타포이다. 고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제자 혜심 선사가 보경사에서 원진국사의 문도들에게 설법을 하고 읊은 시에도 '보경'이 등장한다. 물론, 창건 설화의 8면 보경은 8정도를 뜻한다. 내연산의 다른 이름인 종남산은 의상 대사가 '화엄경'을 지엄 스님 문하에서 배우며 머물던 중국의 산이다. 보경사는 화엄종 사찰이다.
인간은 자연에 이름을 부여하여 그 의미를 형상화하고 되새긴다. 내연산의 명소들이 이제는 바른 이름을 되찾아서, 산을 오르고 절을 찾는 사람들에게 깊고 풍부한 가르침을 길이 선물하여야 한다.
첫댓글 내연산 구석구석에 그렇게 명소가 많은 줄 처음 알았습니다. 작년 가을 박창원교장샘과 가본 명소 곳곳이 떠오릅니다.
아는 것 만큼 보인다죠. 지역민들에게 역사의 등불을 밝혀 주시는군요. 고맙습니다.